오늘은 송정공원에서 ~ 제덕사거리까지 14.80km를 걷는
남파랑길 6코스 구간 입니다
남파랑길 <6코스 3부> 입니다
영길마을 입구
황포돛대노래비가 설치된 주변엔 동백꽃이 활짝 꽃잎을 열고~
개량종 동백꽃이라 합니다
활짝핀 동백꽃 곁에서
비단길님
황포돛대노래비와 연리목
영락없는 수컷과 암컷의 연리목
황포돛대 노래비
황포돛대 노래 가사
1964년 이미자 가수의 히트곡 <황포돛대>는 진해시 대장동 237번지에서 태어난 작사가 이일윤(필명 : 용일)님께서
1963년 12월 경기도 연천의 육군포병부대에 근무하던 중 세모를 앞둔 12월 어느 눈오는 날 밤, 향수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
어린 시절의 고향 바다인 영길만을 회상하며 흘러가는 배에 슬픈 마음을 담아 <황포돛대>의 노래말을 지었다 한다
그 후 1964년 백영호 작곡, 이미자로 노래로 발포되어 국민애창곡으로 불리어지는 그 유래를 담아
<황포돛대 노래비>를 영길만 도로변에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건립일 : 2003년 9월 01일 진해시>
이미자 가수의 황포돛대 노랫 곡을 듣기 위해
아래 스위치를 발로 쿡 밟아 봅니다
작사 : 이용일
작곡 : 백영호
노래 : 이미자
흰돌메란 무슨 뜻일까, 흰 돌이란 것인가~
흰돌메공원
창원시 진해구 항만 배후 단지 개발 조감도 입니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수도동, 남문동 일원의 1단계 항만 배후 단지 개발이 2006~2020년 기간에 완료된
<웅동 지구 항만 배후 단지> 입니다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웅동 지구 항만 배후단지>의
"바다로~ 미래로~"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웅동 지구 항만 배후 단지> 누리네트웍스(주) 옆의 남산은 해발 184m 입니다
남산은 웅천읍성으로부터 남쪽 1km 지점에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왜군이 장기전에 대비 하기 위하여
산 정상을 깎아 돌로 쌓은 3중의 왜성은 남해안에 축조한 18개 왜성 가운데 하나로, 왜장 고니시가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하였던 남산왜성(웅천왜성)은 안골왜성과 축조한 시기가 같은 1593년이라 합니다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웅동 지구 항만 배후 단지>의
"바다로, 미래로" 그리고 "누리네트웍스(주)"
<항만 배후 단지>의 목적은 부산 신항 인접 지역에 대규모 배후 단지를 조성하여 글로벌 물류 기업 유치 및 항만 부가 가치
창출에 기여하고, 다양한 항만 연관 산업과 지원 시설 조성을 통해 항만 클러스터[Port Cluster]를 구축하여, 글로벌 선도
항만을 구축하고, 미래의 급격한 물류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다양한 수요에 부응하고지 한다
웅포해전 기념비 안내문 아래 간략한 지도와
대조하며 비교하세요
웅포해전 기념비를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창원시 진해구의 항만 배후 단지
남문대교(남해고속도로 제3지선) 아래를 지나갑니다
지나온 남문대교를 뒤돌아 보고~
진행 방향 입니다
뒤돌아 보고~
동천3교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나온 동천3교를 뒤돌아 보고~
세스페데스공원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로 길건너편으로 이동 니다
세스페데스사거리에서 시루봉(곰메바위)을 담아 봅니다
방금 지나온 횡단보도를 뒤돌아 보니 다음(daum)과 네이버(naver) 지도 <세스페데스공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료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천주교 신부. 스페인 출신으로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에 건너가 천주교 전파에 노력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으나 끝까지 고니시의 군영에
머물렀던 관계로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594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남양으로 팔려가는 조선인 중 일부를 대상으로 천주교를 전파해 당시 일본 안에서 조선인 신자의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도2호선은
전남 신안군에서 부산광역시 중구에 이르는 일반 국도 입니다.
국도 제2호선 기점과 국도 제1호선의 기점이 목포시로 같았으나,
국도2호선 기점이 신안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서해안 남부 도서지역인 신안군을 기점으로 전라남도 남해안 지역(목포, 영암, 강진, 장흥, 보성, 순천, 광양)과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하동, 사천, 진주, 창원)을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여 부산광역시 중구까지 뻗어있는 도로 입니다
국도2호선은 남파랑길과 잠시 <조우>를 하고 별리를 고합니다
진행 방향
웅천읍성 동문이 보일듯보일듯 합니다
시루봉(곰메바위)
시루봉은 시루를 얹어 놓은것 같다 하여 시루봉으로 부르고 있다.
장복산의 안민고개에서 주능선에 이르기까지 등산로 좌우의 막힘이 없어 진해시가 한눈에 보이며 좌로는 창원시가 보인다.
진해와 멀리 바다를 함께 볼 수 있어 탁트인 조망이 일품이며 가을에는 잔잔한 억새와 상록수 편백의 군락이 볼 만하다.
시루봉 정상에 우뚝 솟은 거암 시루바위(곰 바위, 곰메라고도 함)는 높이가 10m, 둘레가 50m나 되며,
조선시대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은 후 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백일제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쾌청한 날에는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 이 시루바위에는 조선시대 웅천을 일본에 개항하였을 때 웅천을 내왕하는 통역관을
사랑하게된 기생 아천자가 이 바위에 올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기약없이 떠난 님을
그리워했다는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천자봉
웅천읍성과 항일독림운동가 주기철목사 기념관이 조망됩니다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북부리(北部里)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이다.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신사참베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손양원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남학회(南學會)를 조직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 1935년부터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는데, 주기철은 신사 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 한국의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탄압이 심화되면서 회유와 변절이 일어났다.
⊙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이를 수용하였고,
⊙ 감리교는 1938년 9월에 신사 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 장로교회 또한 회유와 탄압을 받았고,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차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일제의 강압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다.
⊙ 이런 상황에서 주기철은 신사 참배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된다고 보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 1936년 은사 조만식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 부임해줄 것을 요청받음.
●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초빙목사로 부임하고,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설교로 기독교
신앙실천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
● 1938년 4월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다 1차 검속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6월풀려났다
● 1938년 8월 제2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1939년 1월 풀려났다
● 1939년 10월 제3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 1939년 12월 19일 불법 총회로 결의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평양노회로부터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 1940년 2월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최후로 교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전하였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되었다.
● 1940년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됨.
● 1944년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4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 시무 때인 1938년 2월 이후 네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의 강요에 맞서 투쟁하였다.
제1차 구속 1938년 2월 ~ 6월
제2차 구속 1938년 8월 ~ 1939년 2월
제3차 구속 1939년 9월 ~ 1940년 4월
제4차 구속 1940년 8월 ~ 1944년 4월
기간은 모두 5년 4개월에 해당한다.
1944년 4월13일,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졌고, 병고와 심한 고문으로 건강을 잃고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이때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유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막내 주광조에게 생명 보험을 든 200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해 드리고~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대면했을 때
“내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오리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그 이튿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남기고 밤 9시 48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주기철은 장로교 목사였고 목회 활동에 충실했으나,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기여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1919년의 3·1 운동에 참여하고
두 번째 투옥은 유재기(柳載奇)[1905~1949] 목사가 주도하던 농촌 계몽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였다.
유재기 목사는 선구적인 농촌 운동가로 1938년 배민수(裵敏洙), 김성원(金聲遠), 박학전(朴學全) 등과 함께 농우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농민 협동 조합 운동이었다.
일제는 이 농우회를 단순한 농촌 운동으로 보지 않고 반일 애국 운동의 전위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민족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주기철 목사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1963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남파랑길 <5코스 구간 4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