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 74코스를 역방향으로 트레킹을 마친 누리재 입니다., 백사(104일)일만에
73코스를 걷기 위해 태안군 이원면 관리와 이원면 내리 경계를 이루는 누리재에 왔습니다.
서해랑길 74코스 종점이자, 73코스 시점인 이원면 내리 누리재 마루에서
73코스를 역방향으로 만대항까지 11.7km를 걷습니다.
지난 8월 26일 걸었던 74코스가 숲속으로 살짝보이는군요
이원면 내리1리마을과 사목마을 위치를 알리는 입간판이 자리 이동을 하였군요
입간판에 현 위치가 내리1리마을과 사목마을이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누리재에서 603번 지방도롯길 따라 사목마을 입구 여항비(閭巷碑)가 세워진 곳까지1.8km를 이동 합니다.
603번 지방도는 태안읍 장산리 두야교차로에서 만대항까지 30km 거리랍니다.
서해랑길 73코스는 초기에 누리재에서 사목마을 입구까지 1.8km를 걷고,
말미에 내리2리(목로골)버스정류장부터 만대항까지 1.9km를 걷습니다
73코스 11.7km 거리 중 603번지방도를 트레킹하는게 3.7km나 된답니다.
이원면 내리237-7번지에 위치한
내리2리(목로골)버스정류장 바로 곁의 이정표 기둥에 목로골이라고 되어있군요
뒤돌아본 누리재
내리1리 버스정류장
서산시 팔봉면 고파도리 고파도 입니다
누리재에서 603번지방도 따라 1.8km 트레킹을 하면, 사목마을 입구 여항비(閭巷碑)에 이릅니다
여항비(閭巷碑)를 지나 굴다리를 거처 해안을 걷는 서해랑길 73코스 입니다
오늘은 썰물로 가로림만 갯벌이 수백만평이 훤히 드러난 해안가였습니다
서해랑길 73코스는 해안을 걷고 방조제를 걸어서 만대어촌체험마을로 진행 합니다
누리재에서 603번지방도로 따라 1.8km를 이동한 사목마을 입구 입니다.
팀장님이 73코스를 사전 답사하면서 소(蘇)씨의 자부심을 느껴셨다는
603번지방도로변 사목마을 입구 여항비(閭巷碑) 앞에 곧 도착 합니다
누리재에서 603번지방도 따라 1.8km 이동해온 사목마을 입구에 여항비(閭巷碑)가 세워저 있습니다
여항비, 여항비(閭巷碑)라~
위성 지도로 살퍼본 사목마을 입구와 여항비(閭巷碑) 그리고 73코스 노선~
이곳 저곳 여행을 하면서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서 공덕비(功德碑) 사적비(史跡/史蹟碑) 기념비(紀念碑)
열녀비(烈女碑) 치적비(治績碑) 홀애비비(曠夫碑) 망부석비(望夫石碑) 등등을 누차 보아왔지요
오늘은 새로운 여항비(閭巷碑)를 접하게되네요
태안군 이원면 내리1리 사목 여항비(閭巷碑) 앞에서 소병대 팀장님의 성인 소(蘇)자가 2번이나
기재(記載)되어 있어 소(蘇)씨 가문으로서 가슴이 찡하도록 뿌듯하였다 하면서 해설을 하여 주십니다.
태안군 이원면 내리1리 지명은 마한시대엔 신소도국(臣蘇塗國)이였다 합니다
신소도국(臣蘇塗國)의 신소(臣신하 신, 蘇되살아날/차조기 소)
즉 임금을 섬기며 벼슬을 하였던 소(蘇)씨의 선조가 있었지않았나 유추(類推)하는 팀장님의 해설이였습니다, ㅎ
통일신라 시대에 지명은 소태현(蘇되살아날/차조기 소, 泰클 태, 縣고을 현) 또는 蘇州라 하였습니다
蘇州(蘇되살아날/차조기 소, 州고을/나라 주) 즉
소(蘇)씨가 고을 또는 소국(小國)을 다스린 우두머리와 관련있지 않았나하며 덧붙여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 현(縣고을 현)이란 : 지방(地方) 행정구획(行政區劃)의 하나이지요
이렇게 팀장님이 풍부하게 해설을 해 주셨습니다
태안군 이원면 내리1리 행정구역 지명 변천과정 입니다
마한시대 : 신소도국(臣蘇塗國) (연맹 소국)
태안군 이원면 내리1리 지명이 마한시대(馬韓 時代)에는 신소도국(臣蘇塗國)이라 하였다.
신소도국(臣蘇塗國)은 마한시대(馬韓時代) 나라 이름으로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에 딸려 있던 경기도(京畿道)
일부(一部), 충청남도(忠淸南道), 서산시(瑞山市) 태안읍(泰安邑), 전라북도(全羅北道)
고창군(高敞郡) 흥덕면(興德面) 지역에 걸처
54개 소국(小國)의 부족(部族) 국가(國家)로 이뤄졌던 나라로서, 뒤에 백제(百濟)에 병합(倂合) 됩니다
신소도국(臣蘇塗國)의 소도(蘇塗)는 삼한시대에 종교적인 신성구역을 의미 합니다
소도(蘇塗)란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 시대(時代)에 천신을 제사(祭祀)하던 성지(聖地)로 나라 안 곳곳에
이에 딸린 신읍을 따로 두고, 신관이 있어 영고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군이 봉사의 신사를
주재(主宰)하였으며, 이곳은 특히 숭엄(崇嚴)한 성역(聖域)으로 다루어져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罪人)이 이곳으로 도망(逃亡) 오면 그를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서기 9년에 마한의 영역 대부분이 백제에 합병되면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지요. 그 후로도 한동안 백제가
대외적으로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체제를 계승하여 백제의 지배하에서 소국체제가 유지되다가
백제의 행정체제가 정비되면서 성대혜현(省大兮縣)이 되어 지금의 서산시인 기군(期郡)의 편입 됩니다.
기군(期郡)이란 군(郡) 이름으로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의 백제 때 이름 입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제35대 왕, 재위 742 ~765 성은 김, 이름은 헌영(憲英) 때
기군(期郡)을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칩니다. (三國史記 36, 地理志)
목지국(目支國)은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소국들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부족국가 연명체의 우두머리 국가로
마한을 대표하는 국가이자 동시에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진왕(辰王) 직위를 가졌다
초기에는 삼한 전체의 맹주로서 대중국 외교권을 가질 정도로 강성 했으나
백제가 성장하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백제시대 : 省大兮縣
마한이 패망하여 백제에 편입되면서 신소도국(臣蘇塗國)였던 나라 이름은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 됩니다.
660년 백제가 패망하여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 蘇泰縣(756) 또는 蘇州
신라 경덕왕(757년) 16년 행정체제 개편으로 소태현(蘇泰縣)으로 개명하고 종전대로 예전의 기군인
부성군(富城郡)의 편입 되었다. 이후로 소태라는 이름은 상당히 오랫동안 쓰여졌다.
태안군 이원면 내리1리 지명은 통일신라 시대에는 소태현(蘇泰縣,756년) 또는 소주(蘇州)라 하였다 합니다
소태현(蘇泰縣) 또는 소주(蘇州는 태안군(泰安郡)의 옛 이름이라 합니다
고려시대 : 泰安郡(1298년)
고려시대인 고려 성종(983년) 2년에 전국에 12목이 설치되자 소태현(蘇泰縣)은 공주목(公州目)에 소속되었다가
고려 성종(995년) 14년 충청남도 일대에는 하남도(河南道)가 설치된다.
하남도는 운주(運州)와 공주의 2주로 구성되었고 소태현(蘇泰縣)은 운주에 속하게 된다.
하남도(河南道) : 고려 시대에 둔 십도(十道)의 하나, 공주(公州) 운주(運州) 등의 11주(州) 34현(縣)을 관할하였다
1298년 고려 충렬왕( 제25대 왕) 24년에 소태현(蘇泰縣) 출신인 이대순(李大順)이 원나라의 총애를 받아
소태현(蘇泰縣)을 태안(泰安)으로 개명하고 군(郡)으로 승격되어 태안군(泰安郡)이 되었다.
태안이라는 이름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준말로 이로부터 지금의 이름인 태안으로 쓰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瑞山郡 梨北面 內里 또는 內里1區에 강제 통폐합되었다.
1989년 泰安郡 梨園面 內里1里로 개편된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향곡(戀그리워할 련, 鄕시골 향, 曲노래 곡)
여항비(閭巷碑)는 泰安郡 梨園面 內里1里의 행정구역 변천과 心緖의 표상으로 자비롭고 관대하신 어르신과
자애하시며 온정이 넘치는 할머니들의 이웃들간 서로돕는 따뜻한 정이 어루려진 뜻을
사목마을 입구 비석에 새겨 후손대대로 그 뜻을 전하고자 한답니다.
서해랑길 73코스 2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