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마음 청정[心淸淨]
이 방법으로 수행해서 수행자의 마음이 아직 완전하게 정화되지 않은 초기에는, 대상에 대한 감각욕망 등으로 인하여, 수행대상을 사띠하는 사이로 망상도 간헐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초보 수행자는 때로는 이런 장애가 생긴 것을 알 것이고, 때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다고 하더라도 장애가 나타나는 즉시 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에 알 것이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찰나삼매가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상은 관찰을 계속 방해한다. 그래서 망상을 “방해하는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찰나삼매가 강해지면 사띠가 잘 된다. 즉, 수행자가 주목해야 할 대상인 배의 부풂, 꺼짐, 앉아 있음, 닿아 있음, 구부림, 뻗음, 봄, 들음 등에 주목하고 있을 때, 마치 사띠가 대상들에 떨어지는 것처럼, 마치 그것들을 되풀이해서 직면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면 그의 마음이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거의 가지 않는다. 아주 가끔만 다른 데로 잠깐 가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일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면, 그런 망상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에 사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망상이 실제로 일어난 직후에 사띠할 것이다. 그러면 망상은 알아차려지자마자 수그러들 것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즉시 분명하게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라도 사띠를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의 마음을 “방해받지 않는” 마음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그렇게 방해받지 않는 마음으로 사띠하는 수행을 계속할 때, 사띠하는 마음은 관찰의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서 거기에 고정되어 있으며, 흐트러지지 않고 사띠가 계속될 것이다. 그때 그의 내부에서 방해받지 않고 이어지는 사띠의 대상으로 향하는 “한순간 동안 지속되는 마음의 집중”이*1 일어난다. 이것을 “마음 청정”이라고 한다. 비록 그 집중의 지속시간은 짧지만, 장애에 의해 압도되는 것에 대항하는 힘은 근접삼매의 힘에 해당한다.
*주1: “마음의 집중”은 본삼매 혹은 근접삼매 정도로 강한 정신적 집중(삼매)을 말한다. 두 가지 집중 모두 마음을 깨끗하지 못하게 하고 집중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2 마음이 일시적으로 정화된 것이다.
*주2: 6.2 다섯 가지 장애는 다섯 가지 장애(오개: 五蓋)는 감각욕망, 악의(惡意),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그리고 의심이다. (오원탁 옮김, 『부처의 길, 팔정도』, 아름드리미디어, 2006, 259~263쪽, 참조. 일부 용어 수정)
감각욕망(탐욕. 욕심)이라는 장애는 사물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장애는 수행할 때, 음식이나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탐내는 마음이나 음욕으로 나타난다. 그런 생각들은 수행 시간 대부분을 낭비하게 할 수 있고, 그것들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습관이 될 수도 있다.
악의(성냄, 분노, 원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생긴다. 악의는 끓는 물에 비유된다. 끓고 있는 물에 닿으면 누구나 반드시 화상을 입는다. 또한 냄비의 바닥을 볼 수도 없다. 이처럼 악의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이상으로 자신을 태우며, 내면에서 분노가 끓고 있을 때는 그 적개심의 진정한 원인, 즉 “그 문제의 진짜 밑바닥에 결코 이르지” 못하게 한다. 또한 인식을 왜곡시키고, 기쁨을 달가워하지 않게 한다. 마치 병에 걸려서 맛있는 음식인데도 맛없게 느끼고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악의는 마음이 성냄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의 훌륭한 성품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해태와 혼침: 수행 도중에 사람들은 자주 탐욕과 싸우고, 그다음에는 악의와 싸우곤 한다. 일단 이것들이 극복되면 평화로운 순간이 오지만, 그다음에 마음은 잠에 빠진다. 해태와 혼침은 어리석음이라는 족쇄에서 생긴다. 게으르거나 졸릴 때는, 집중한다거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띠 수행, 즉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해태와 혼침은 감옥에 갇힌 사람에 비유된다. 갇혀 있을 때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태나 혼침에 빠진다면, 수행자는 자기 주변이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들뜸과 후회: 후회는 들뜸의 원인이 되므로, 이 두 가지 마음부수는 함께 생긴다. 이것들은 명료하게 생각하거나, 이해하거나, 아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이 장애는 노예에 비유된다. 노예는 항상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 잔인한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너무나 열심히 일한다. 노예가 불안해하고 들뜨면 들뜰수록, 노예의 후회는 더해 갈 것이다. 노예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의심은 바른 방향을 모르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움이다. 의심은 수행자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다. 의심은 지도도 없고 방향도 잘 모르는 채로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 사막을 가로지를 때는 지형지물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알고 있는 방향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붓다가 가르친 진리에 대해 의심하게 되면,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하게 된다. 수행자가 앉아 있으면서, “사람들이 정말로 깨닫게 될까? 이 수행법이 정말로 도움이 될까? 나는 제대로 하고 있나? 저 사람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 나도 다른 방법을 수행해 본다든가, 다른 스승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심들은 수행자의 기운을 약하게 하고, 혼동을 일으키며, 그 무엇도 명료하게 볼 수 없게 만든다.
『청정도론』의 주석서는, 호흡에 대한 사띠를 설명하는 장(章)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의 순간적 통일’이란 마음의 집중이 한순간 동안만 지속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집중도, 집중 대상에 대하여 방해받지 않고 순일하면서도, 장애에 압도되지 않고 집중이 될 때는, 마치 선정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하기 때문이다.”
“집중 대상에 대하여 방해받지 않고”란 것은 관찰하고 있는 생각이 방해받지 않고 지속됨을 말한다. 즉 하나의 대상을 관찰한 다음, 같은 방법으로, 그 직후에 따라오는 “다른 대상”에 주목한다.* 다시 그 대상을 주시한 다음, 그다음 대상으로 돌아온다.
*주: “다른 대상”은, 예를 들어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배가 부풀고 꺼짐과 같이, 현상의 같은 시리즈가 될 수도 있다.
“순일하면서도”라는 것은, 관찰의 대상들이 스스로 나타날 때, 수가 많고 변화하지만, 마음의 집중하는 힘은 실질적으로 같은 수준으로 방해받지 않고 계속해서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어떤 집중의 강도로 첫 번째 대상을 관찰했다면, 둘째, 셋째,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대상들도 그와 똑같은 강도로 관찰한다는 것이다.
“장애에 압도되지 않고”라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흐름에서의 찰나삼매가 장애에 의해서 압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마치 선정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이란, 찰나삼매의 강도가 완전한 선정 상태에 도달했을 때 집중의 강도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찰나삼매가 완전히 선정 상태의 집중과 비슷한 것이 분명해지려면, 위빳사나 수행이 정상에* 도달했을 때이다.
*주: 위빳사나 지혜는 “실천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이 완성됐을 때 정상(도의 지혜가 생기기 직전)에 도달한다. 『청정도론 3』(대림 스님 옮김, 제21장 1절, 281쪽.)을 보라.
그러나 주석서에서 “마음 청정”이란 용어는 근접삼매와 완전히 집중된 본삼매에만 적용된다고 말했지, 찰나삼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찰나삼매는 근접삼매에 포함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염처경에 대한 주석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12가지 명상주제들은 근접삼매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염처경의 자세와 분명한 앎과 사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명상주제는, 이런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집중은 틀림없이 찰나삼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근접삼매와 같이 장애를 억제할 수 있고, 그것이 고귀한 과를 얻었을 때의 본삼매(선정)에 근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찰나삼매를 “근접(혹은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찰나삼매가 생기게 하는 명상주제를 “근접삼매가 생기게 하는 명상주제”라고 한다. 그런고로 장애를 억제하는 능력이 있는 찰나삼매도 마찬가지로 “근접”이나 “마음 청정”이라는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근접삼매나 본삼매에 들어가지 않고 위빳사나만을 도구로 하는 순수 위빳사나 수행자에게는 마음 청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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