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소감】
추억을 되새김한다는 것, ‘노년의 활력소’다
― ‘우스갯소리 달인’ 임종식 전 대전mbc 국장과 ‘페북 대화’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의 말
이른 아침, 습관처럼 페이스북을 열었다.
임종식 전 대전mbc 국장님
오래된 ‘추억의 사진’ 한 장이 떴다.
인물 사진이 아니었다.
세월의 무게가 살짝 얹어진
원형이 약간 변색 된 상패
--발랄한 재치와 유모어로 放送개그의 質的 向上에
이바지하였기에 賞牌를 드립니다.--
<국한문 혼용> 상패 문구가 인상적인 데다가
<질적향상>이란 대목이 과감하게 느껴진다.
나는 어느 표창장이든, 감사장이든, 상패이든 깊이 음미하면서 세밀하게 살핀다.
군대생활할 때는 부대본부에서 표창장을 직접 붓으로 쓰는 모필사 일을 했고,
공직 생활할 때는 기획부서에서 일하면서 기관장이 공식 수여하는 각종 문안을
직접 작성한 습성과 체질이 여전히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런 나의 안목으로 살피건대,
임종식 국장이 방송국으로부터 받은 상패는 가히 명문이라 할만하다.
반가웠다.
마치 내가 받은 유년의 상장처럼
수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임종식 국장의 추억 되새김이
나의 활력소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시대,
인연 맺고 살았던 따뜻한 우정이
노년의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
아침 양치질이나
세수하러 갈 계제가 아니었다.
댓바람에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소감은 즉흥적으로 써야 생생한 기억을
놓치지 않고 재생할 수 있으니까.
2023. 2. 19. 아침
윤승원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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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식 / 페이스북 2023.2.18.
10대 때 나의 꿈은 연기자였다.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저항이었으리라.
연극을 한답시고 극단에서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고 사무실 청소도 내 담당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양방송에서 개그맨 선발대회가 있다길래 촌놈 겁 없이 도전했다.
방송 사상 처음 있는 대회였다. 언뜻 그때 대사도 기억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경상도 말로 종아! 니 와우노 전라도 말로는 니 으찌 울었쌌노』
그때 전설의 서세원과 함께 장려상을 받았다. 생활 속의 유머는 방송사 PD & DJ로 40여 년 사는데 큰 자양분이었다.
결론 차암~ 세월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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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식 페이스북 / 윤승원 댓글 2023.2.19.
■ 임종식 선생님 유머 역사 論 / 윤승원
임종식 선생님은 본래 남을 ‘즐겁게 웃기는 일’로 출발한 분이다.
<우스갯소리의 달인>이다.
1970년대 개그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다.
풋풋한 청년 시절, 개그로 성공하여 방송국 명진행자로도 활약했다.
대전mbc FM <가요산책>과 <젊음이 있는 곳에> DJ를 맡았으며,
특히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들었던 인기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을 맡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기를 누렸으니,
지금도 중장년, 아니 노년층까지 망라하여 이 분을 기억하는 청취자가 많다.
필자와도 ‘남모르는 인연’을 맺고 살아온 자랑스러운 방송계의 스타
임종식 선생님.
※ 유머 추억 여행 :
임종식 선생님과의 인연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간한국》의 폭소 대 잔치인 ‘낙서유머 시대’에서 ‘개그의 개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한민국 유머와 재담꾼들에 의해 책자로도 발간됐다.
나는 우연히 대전의 대형 서점가에서
『낙서 유머집』(보성출판사)을 발견했는데,
이 책에는 나의 우스개 낙서와 함께
임종식 선생님의 유머도 21편이나 실려 있었다.
당시 지면에서 임종식 선생님 필명은 <나원참>, 나의 필명은 <윤초시>였다.
◆ 덧붙임 :
임종식 선생님 고향인 보령지방에는
소설가, 개그맨 등 내로라하는
우스갯소리의 달인들이 많았다.
내 고향 청양 어르신들도 그랬다.
동네 사람들이 여럿 모여 힘든 작업을 할 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막걸리와 우스갯소리다.
우스갯소리 잘하는 동네 어르신들 덕분에 힘든 가래질이며,
심지어 바윗덩어리를 옮기는 일까지도 어려운 줄 모르고 거뜬히 해냈다.
힘들고 고달픈 일이나
일선 경찰관처럼 긴장감 높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우스갯소리 단수(段數)가 높다.
현실의 고달픔을 ‘우스개’로 승화했다.
탈춤이나 판소리처럼 마당극 형태로 풍자하거나 승화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예술이었다면
임종식 선생님처럼 방송과 지면을 통해 젊은이들과 농담 형식으로
즐기는 일상의 애환도 해학과 골계(滑稽) 미학의 요소가 다분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 달인들의 뼈있는 농담과 여유 있는 웃음을 통해
큰 위안을 받았다.
※ 임종식 국장님은 총각 시절,
서대전예식장에서 열린 <나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봤다.
《주간한국》 지면으로 맺은 인연이 50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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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글 / 임종식 2023.2.19.
윤승원 작가님 반갑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임종식의 역사를 다큐화 하셨네요.
요즘 트롯트가 재조명받듯이 씨익 웃게 되는 풍자글 유머 낙서가 트렌드인듯합니다.
듣는 사람은 짧은 것만 기억 한다. 짧은 글이 무기가 된다.
요즘 영상도 숏폼에서 숏펀으로 모든 것은 재미가 양념일 때 행복의 도파민이 됩니다.
윤 작가님의 격려가 힘이자 용기를 줍니다 아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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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50여 년을 이어온 우정, 방송과 지면을 통해
의미 있는 사연을 차곡차곡 쌓아가니
보는 이의 마음도 따뜻해집니다.
추억은 모두에게 아름다움이고
경로당이나 시골 사랑방뿐만 아니라
인터넷 공간의 어르신에게
활력소가 틀림없습니다.
70년대 소통 방식은 우편엽서나 손 편지였지요.
핸드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었지요.
50년 인연을 이어온 것은 방송과 누리소통망[SNS]덕분입니다.
서점의 유머 코너 서가에는 옛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인연의 흔적이 꽂혀 있습니다.
임종식 국장님은 성공한 방송인입니다.
제게는 자랑스러운 인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