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5장은 4장의 연속으로 천상보좌의 광경에 대한 환상 계시이다.이는 1절의 시작인‘내가 보매’는“그 다음에 내가 보았다”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골격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앞서 본 것에 이은 또 다른 본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천상보좌에서의 봉인된 두루마리와 이 두루마리를 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들고 그 봉인을 떼실 어린양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5장 전체는 5장 9-10절, 5장 12절에서 발견되는 두 개의 찬송과 5장 13절의 송영, 그리고 5장 14절의 아멘으로 이루어지는 하늘의 예배에 의해 지배되면서,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1)
5장의 내용 구조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인봉된 두루마리와 어린양(1-8절) (2) 하나님과 어린양에 돌려지는 찬송(9-14절)으로 되어 있다. 본 장은 주로 구약의 사상과 사건들을 동원하여서 요한의 환상을 확대 전개시키고 있으며, 그 중심인물은 어린양으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인봉된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개봉할 분으로,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Ⅱ. 요한계시록 5장의 해석적 의미
1.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1-8절)
1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1) 봉인된 두루마리(1-4절)
‘내가 보매’는 요한계시록에서 여러번 보게 되는데, 본 절은 그 첫 번째 이다. 이것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1) 새로운 환상 기사를 도입한다. (2) 계속되는 환상 기사 가운데 중요한 장면을 도입한다. (3) 계속되는 환상 기사 가운데 새롭거나 중요한 인물 또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데 사용된다.
요한이 5장에 들어서서 먼저 본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책 하나가 있는 것이었다. 그 책 안팎에는 글이 씌어 있고 일곱 개의 봉인으로 봉해져 있었다. 이 봉인된 책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태이다.2) 이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가득 쓰여 있지만,3) 그것을 읽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두루마리를 펴 읽지 못하도록 일곱 인으로 봉해 놓았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를 이렇게 봉해 놓은 것은“봉한 책의 말씀과 같은” 이사야의 환상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 책이 봉하여졌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 “이를 읽으라”고 청하여 건네주었을 때 그는“읽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사 29:11). 그런가 하면 한편 에스겔의 환상에는 그 앞에 놓인“안팎으로 글이 있는 책”을 요한이 본 두루마리와는 달리 말려 있지도 않았으며 봉하여 있지도 않아 어떤 내용인지를 알 수 있었는데“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로 가득했다(겔 2:9-10).
요한이 본 봉인된 책이 개봉되었을 때의 내용은 에스겔이 본 환상이 내용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요한이 본 환상의 특징은 일곱 인으로 봉하여 있는 것이 천사가 큰 음성으로“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할 때,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어서“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으므로 요한이 크게 울었으나,4) 6장에 이르러서는 개봉하여 요한에게는 보여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루마리를 읽을 권리를 부여받은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는 그 내용이 비밀이고 접근 할 수 없게 하신 것에 있다.
그런데 두루마리의 봉인은 일곱 인으로 되었다. 여기서 일곱 인은 권한이 없는 자가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봉인된 것에 접근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권한(권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봉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두루마리는 그 내용이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철저한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곱 번 봉인된 것이다. 한편으로 봉인이 일곱인이란‘일곱’의 숫자로 된 것은 6장에 이르러 일곱봉인이 개봉되면서 시작되는 일곱재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봉인된 두루마리는 보좌에 앉으신 분의‘오른손’에 들려져 있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나타내어 자주 사용되는 은유다. 그리고 로마 황제들의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는 분명히 황제의 권능과 권세를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 보건대‘오른손’이란 표현이 ‘권능’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봉인된 일곱 인을 떼실 어린양(5-8절)
요한이 봉인된 일곱 인을 떼고 두루마리로 된 책 안팎에 기록된 글을 읽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쓰여져 있는지를 알려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여 울자, 이십 사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하였다.“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그가 말한 것은 봉인한 두루마리의 인을 뗄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며,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분은 홀로 죄가 없으시고 원수를 이기사 지금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성육하신 아드님이시다. 그러니까 승리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분만이 봉인한 책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다.
이십 사 장로의 한 사람은 그분을‘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가르쳐 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칭호가 사용되었는데‘유다 지파의 사자’는 창 49:9의 인유이고,‘다윗의 뿌리’는 사 11:1, 10의 인용이다.
첫째,‘유다 지파의 사자' 라는 칭호이다. 이 칭호는 인간적인 혈통을 규정한다(참조. 히 7:14). 유다 지파는 왕적 혈통이 계승된 다윗 지파였고, 그 지파에게 영원한 보좌에 앉을 아들이 탄생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삼하 7:13, 16).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아이가 다윗의 보좌에 앉을 것과 그의 나라가 영원 무궁히 서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사 9:6, 7). 그리고 그가 탄생하자 옛적에 하신 모든 약속들도 성취되었다. 그래서 천사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고 확신시켜 주었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하실 때 유다에 대해서는 짐승의 왕자인‘사자 새끼’5)라고 말하면서 움켜 쥔 것을 찢어버린다고 하였는데(창 49:9), 예수 그리스도는‘유다의 사자’로서의 칭호가 암시하는 모든 내용의 구심점이요 절정이다. 절대적인 의미의 사자로서 그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둘째, '다윗의 뿌리' 라는 칭호이다. 이 칭호는 이사야 11장 1절, 10절의‘이새의 뿌리’, 또는‘이새의 줄기’의 인용인데,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라고 하였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와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올 수밖에 없는 근거를 말해 준다. 예수님은 다윗이 있기도 전에 계셨던 분으로 다윗 왕조를 세우신 분이시며, 그리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 곧 '새 가지'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즉 다윗 왕조 출신의 새 왕이 '가지'로 출현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십 사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 하늘 궁정에 어린양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나타낸다.
그런데 어린양의 위치를 보좌와 네 그룹‘중간에', 그리고 이십 사 장로들의 '중간'에로 묘사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우선,“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에서의‘사이에’는 어떤 지역의 한가운데 또는 중간을 언급할 수 있는 것으로‘중간에’,‘한가운데’를 의미할 수 있다(BAGD. 570). 이 경우‘보좌의 중앙에 그리고 네 생물들 사이에’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는 어린양이 7:17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중심에 있음을 나타낼 수도 있다(Bousset). 다음으로는 두 물체 사이의 간격을 언급할 수 있다. 이때는 어린양의 위치가 한편으로는 보좌와 네 그룹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 장로들‘사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거나(Charles), 또는 장로들과 보좌의 중간, 즉 네 그룹들 사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다른 대상들에 의해 점거된 어떤 지역 내의 위치를 언급하며“…중에, …와 함께”를 의미할 수도 있다(Louw-Nida). 아우내(Aune)는 이 견해를 정확한 견해로 말하여 지지하고 있으며, 이 견해에 의하면 어린양은 보좌에 매우 근접하여 서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클레이는 어린양이 출현한 이 장면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며,“첫째는 네 생물이 보좌 주위로 하나의 원을 형성하고 이십 사(24) 장로가 네 생물 주위로 더 큰 원을 형성하고 어린양이 네 생물의 안과 바깥의 24 장로의 원 사이에 서 있는 장면이다. 둘째는 그보다 더 근사한 것으로서 어린양이 전체 장면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 즉 무대의 중심에 있어 모든 눈의 초점이 되어 있는 장면이다. 요한은 둘째의 장면을 말하는 것이리라.”고 하였다. 이필찬은“네 생물들과 24 장로 중에”로 이해하였다. 한글 번역성경인 개역, 개역혼용, 개역한자, 개역한글침례는“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은“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성경은“네 생물과 장로들에게 둘러싸여 보좌 가운데”라고 번역하였으며, 현대어성경은“스물네 장로가 앉아 있고 보좌와 네 생물이 있는 정면에”라고 번역하였다.
어떤 번역이 보다 더 정확한 것이든지, 어린양으로 언급되는 영화롭게 되신 구세주에 대한 이 묘사는 어린양이 둘러 서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린양이‘섰다’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양이‘섰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상술로서“그가 이겼다”고 말하는 5절에서 이미 언급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완곡한 언급일지 모른다.
그런데 요한이 본 어린양에게는 죽임을 당할 때 받으셨던 상처의 흔적이 있었다.“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는 어구는 5:12, 13:8에서도 발견되는데, 어린양이 단순히 죽음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가 지금 살아 있다는 의미로, 죽음과 부활의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결합된다. 요한이 보니 어린양은 죽은 것(도살된 것) 같았다. 이것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속죄와 화해의 장소와 순간이라는 표식을 지닌, 그의 참혹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어린양이 서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18에서 그가 자신에 대하여“나는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증거 한 것과 부합된다. 그는 더 이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더 이상 무덤에 있지 않고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셨다.
요한이 본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 구약 성경에서 뿔은 힘의 상징이다. 여기서 일곱 뿔은 신적인 힘, 다른 말로 말해서 전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의 사도들에게“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어린양에게 있는 일곱 눈은 그가 지닌 신적인 전지를 의미한다. 그는 모든 것을 보며,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야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한계시록 2,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주신 편지에 자주 반복되는 말은“내가 아노니”이다.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 그런데 어린양의 일곱 눈은“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하였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성령이신‘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밝혀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며, 그럼으로써 중생한 마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하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하시다.
이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일곱 영이라고 하였다. 스가랴는 “이 일곱(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였다. 요한이 환상 속에 언급된 일곱 눈은 모든 것을 감찰하는 성령의 관계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성자의 약속의 성취로 임한 오순절 성령의 보편적인 부으심을 언급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성령의 능력으로“땅 끝까지 이르러”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행 1:8). 그러므로 현대어성경은“그분의 눈은 세계 각처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나타낸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어린양과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일곱 영의 두 비유가 함께 등장한 것은 사실 그의 인격과 성육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전달하는 시작에 불과하다.
어린양은 앞으로 나아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아무도 읽을 수 없어서 취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만이 그 책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유대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인 것이, 그리고 어린양으로 구세주가 되셔서 온 세상에 자신을 알리시는 일을 하시게 되신 것이 봉인된 일곱 책의 인을 뗄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이요 또한 자격을 갖추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가 어린양 앞에 엎드렸다. 그들은 각각 손에 거문고6)와 향이 가득 담긴 금향로(금대접)를 들고 있었다. 이러한 장면은 모든 피조물이 어린양 앞에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부복한 것을 보여준다. 한편 요한은 금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성막이나 이후의 성전에서 있은 제의(祭儀)에 의하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성소에 있는 금으로 장식한 향단에서 향이 피어 올랐고, 이것은“여호와 앞에 영원한 향”이 되었다(출 30:1-8).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열납되는 향 같다고 상징화되었다.“나의 기도가 주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게 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간구는 하나님께 열납 되기를 바라는 시편 기자의 간절함으로 표현한다(시 14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있어 분향하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었다. 눅 1:10은“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성소)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순례자로 있으면서 간구하고 드리는 기도가 그들을 사랑하사 돌보시는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 환상에서는 구속함을 입은 자들의 교회가 영광중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기도가 금대접에 가득 찼다. 아우내(Aune)는 이 향의 은유적 해석을 시편 141:2에서 발견되는 해석과 연결시킨 오리겐(Origen)의 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의 제단은 각 의인의 마음이다. 그 곳으로부터 진실하고 명료한 향이 감미로운 향기로 위로 보내지나니, 곧 깨끗한 양심에서 나오는 기도이다. 이것이 요한의 묵시록에서‘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하고 시편 기자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같이 되며’ 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런데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에서 드리는 분향에 의한 기도와 요한계시록에서의 성도들의 기도를 분향되어지고 있는 향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희생제사가 필요했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희생제사 없이도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모든 희생제사를 단번에 드리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더욱이 이십 사 장로가 대접을 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바룩3서 11:3-9에서 미가엘 천사는 사람들의 기도가 담겨져서 하나님의 보좌로 옮겨지는‘매우 큰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십 사 장로들이 참으로 전체로서의 교회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땅에 믿는 자들의 기도가 미가엘이나 천사들과 같은 중보자 없이 지상의 교회에 대응되는 천상적 교회에 의해 직접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과 어린양에 돌려지는 찬송(9-14절)
봉인된 일곱 인을 떼시는 어린양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9-14절은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불러서 하나님과 어린양에 돌리는 세 가지의 찬송을 다룬다. 이 세 가지의 찬송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9-10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11-12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13-14절)
(1) 첫 번째 찬송(9-10절)
이 찬송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 네 가지 있다: (1) 책을 열기에 합당하신 어린양 (2) 구속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다. (3) 9b절에서‘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라는 문구에 따르면, 구속은 우주적이다. (4) 어린양은 그들을 땅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2) 두 번째 찬송(11-12절)
이 찬송에서는 많은 종류의 천상의 존재들이 강조되고 있다(11절). 그리고 찬송은 “…합당하신…”의 공식에 의해 묘사된다(11절). 그것은 이미 책의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찬송을 받으신 어린양이 이번에는 하나님께만 속하는 모든 엄위로운 성품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칭송을 합창을 통하여 받으시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 등 일곱 가지 성품은 어린양의 신성을 지적하는 것이다(참조. 7:12)
(3) 세 번째 찬송(13-14절)
이 찬송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려지는 피조 세계의 찬양을 보여준다. 그것은 새 창조가 하나님과 어린양에 의해 창출되었음을 의미한다(13절).
이 모든 찬송을 마친 후 네 생물은 아멘으로써 화답한다. 그리고 교회를 상징하는 이십 사 장로는 엎드려 경배한다(14절).
이 세 가지의 찬송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하늘의 성전에서의 예배는‘…합당하신…’이라는 공식을 사용함으로써(9, 11절) 어린양과 그의 희생적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종말적 구속이 이미 하늘에서 어린양의 십자가의 희생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셋째로 새 창조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4-5장에 나타난 하늘의 성전은 미래적 종말의 완성의 형태가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하늘은 공간적 초월의 상태로서 시간적 초월의 상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공간을 초월하여 하늘에 존재하여 시간을 초월할 수 있게 됨으로써 미래적 종말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을 통해 보이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이를 독특하게 묵시 문학적인 특징을 통하여 나타내 주고 있다.
3. 요한계시록 5장의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요한계시록 5장은 4장과 함께 하늘 성전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봉인된 두루마리와 이 책의 인을 떼실 어린양을 증거 한다. 예수님이 어린양 되심은 이분만이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이유가 된다.
한편으로는 이 광경은 하늘의 성전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가 존재하며, 종말적 심판의 현상들의 근원이며, 새 창조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목적을 가지고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미래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다. 그런데 이미 그 완성품이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바로 책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21-22장의 새 예루살렘 모티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4-5장에 나타난 예배는 새 예루살렘에서 경험하게 될 예배의 예기(foretaste)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은 하늘의 성전 환상을 통해서 종말적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미리 보고 있는 것이다. (*)
...............................
1) 6장에 이르기까지 인봉된 인은 열리지 않고 있다가 6장부터 일곱 인이 비로소 개봉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2) 아우내(Aune)는 봉인된 두루마리는 원통형 모양일 것이라고 하였다. 두루마리가 원통형 모양인 것은 그 두루마리가 말려져 있기 때문이다.
3) 두루마리의 안팎으로 글이 씌여져 있다는 것은 ‘내문(scripura iferior)과 외문(scriptura exerior)이 있는 이중 기록 문서를 언급할 수 있다(David E. Aune)
4) 요한이 본 환상에서의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기에 합당한 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열 수가 없으며, 이 합당하지 못함은 죄의 악한 결과이다. 성경에 편만한 주제인 인간의 죄성의 보편성은 사도 바울이 롬 3:9 이하에서 웅변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거기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업다”고 주장했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설파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 창조주의 존전에서 죄인으로 우리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보다도 한탄하고 더 비참한 것은 없기 때문에 요한이 크게 울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불경건함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가치가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것은 없을 것이다(Philip E. Hughes)
5) 야곱이 말한 ‘사자 새끼’란 표현은 아주 어린 새끼 사자를 말하기 보다는 힘 있고 강한 ‘젊은 사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잡아 움켜 쥔 것을 찢어버리고, 이런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6) 여기의 거문고는 서양 악기로는 하프에 해당한다. 참조. 시 33:2, 43:4, 150:3.
* 참고문헌
1. 이순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131.
2. 이필찬,『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0.
3. David E. Aune, WBC Vol. 52A : Revelation 1-5, 김철 역,『WBC 주석 요한계시록 1-5장』.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3.
4. M. 윌콕, 이종일역, ‘B.S.T 강해 시리즈 요한계시록 역사의 저편 새하늘과 새땅’, 서울: 기독지혜사, 1988.
5. Philip Edgcumbe Hughes, The Book Of The Revelation, 오광만 역,『요한계시록』. 서울: 여수룬, 1994.
6. William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Vol. Ⅰ, 고영춘 역,『성서주석 시리즈 계시록(상)』. 서울: 기독교문사,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