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1844년),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 스승과 제자의 뜨거운 사랑이야기 * -長毋相忘(우리 오래도록 잊지말아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조선, 1884년, 세로 23㎝, 가로 69.2㎝, 종이 바탕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 올곧은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최고의 문인화 -
수제자 허련이 그린 추사 김정희의 초상
‘세한’은 설 전후의 가장 심한 추위를 이르는 말로 인생의 시련이나 고난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2층 '기증관' 맨 안쪽에 들어가시면 손창근孫昌根(95세) 선생과 부친 고 손세기孫世基(1903~1983) 선생이 지난 2020년 8월에 국가와 국민에게 기증한 '세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국보 제 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올곧은 선비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는 조선 후기 문인화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 유배지에서 위리안치 귀양살이를 하던 김정희가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北京)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 등 새로운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1844년(헌종 10)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입니다.
* 백미(白眉) :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가장 훌륭한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유배형이다.
김정희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발문(跋文)을 자신의 글씨로 그림 끝에 적어두었습니다.
그림 왼편에 있는 발문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이치에 비유하여,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 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여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귀양 오기 전 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귀양 온 뒤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그러나 귀양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일컬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귀양 온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음을 받을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라는 내용의 발문을 끝에 붙여놓았습니다.
* 公子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의 글귀 인용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 松柏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 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화면에는 오른쪽에 ‘歲寒圖(세한도)’라는 화제(畵題)와 ‘藕船是賞(우선시상) 阮堂(완당)’이라는 관지(款識)를 쓰고 ‘正喜(정희)’와 ‘阮堂(완당)’이라는 도인(圖印)을 찍어 놓았습니다.
“長毋相忘(장무상망) : 길이 서로 잊지 말자!”,
“장무상망”이라 새겨진 인장을 찍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며, 제자의 의리에 감사의 표시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추사의 예술혼과 늙은 스승의 거룩한 선물을 받아 든 제자는 벅찬 눈물로 감읍하며...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의리와 존경의 극치가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장면인 '스승과 제자의 뜨거운 사랑이야기'가 세한도에 담겨있습니다.
* 畵題(그림의 제목) : 歲寒圖(세한도) * 藕船是賞(우선시상)阮堂(완당) : '이상적 보시게' / 완당 - 추사 김정희 * 관지(款識) :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 안에 이름, 그린 장소, 제작 연월일 등의 내용을 적은 기록. 낙관(落款), 관서(款署), 관기(款記)라고도 한다.
이듬해,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가서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중국 학자 16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들이 앞다투어 추사와 제자의 ‘후조(後凋)’를 예찬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이 그림은 분명 좌우명이다(尸幅分明座右箴).’ 중국 문인 오순소는 ‘세한도’를 삶의 모토로 삼겠다고 했으며, 또 다른 문인 오찬은 '변하지 않는 절의를 배우고 익혀, 성인을 본받는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장요손은 '중국과 조선에 새로운 우정이 맺어지고, 한 폭의 그림에 영원의 뜻 담겨, 시들지 않는 절의가 온 누리에 빛나네.’라는 촌평을 썼습니다.
추사의 그림 한 폭은 중국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0년 전 국경을 뛰어넘는 양국 문인들의 학문 공동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세한도’는 길이 15m의 두루마리 대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뒷날 이 그림을 소장하였던 김준학(金準學)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도 함께 붙어 있습니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온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그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되어, 1943년 '세한도'를 구입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는 데, 얼마 뒤 손재형이라는 조선의 젊은이가 찾아와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내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그런데 후지쓰카는 그 귀한 작품을 조선인 젊은이에게 아무 조건없이 내주었답니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 돈 한 푼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후지쓰카가 한국에 기증한 것입니다.
'세한도歲寒圖'(1844년), 국보 제180호. 세로 23㎝, 가로 69.2㎝. 종이 바탕에 수묵.
그림은 단색조의 수묵, 그리고 마른 붓질과 필획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고,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그 좌우로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들로 직업화가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 보여집니다.
세한도에 담겨 있는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한 김정희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그를 감동시킨 그 의리와 절개는
조선 지식인의 핏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조선인의 의리이자 절개였습니다. 따라서 김정희는 그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변환시켜 '세한도'에 담아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편집자 추기] 위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대한 내용은 지난 2020.9.3 "한밤의 사진편지 제2816호"로 회원들에게 발송한 바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재개관에 따라 다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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