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세종비 소헌왕후
아버지 죽음에도 의연함 지켰던 인욕 보살
태종 셋째아들 충녕과 혼인
1년 만에 왕자비에서 왕비로
소헌왕후 심씨에게 1418년은 끔찍하리만치 다사다난한 해였다.
남편 충녕대군이 갑작스레 왕세자가 됐고, 3개월 만에 조선의 왕이 됐다.
그리고 다시 3개월 만에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전락했으며 그녀 스스로도 폐비의 위기를 감내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극단적인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끔찍한 세월이었으며 왕비가 된 기쁨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드러내지 못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10년전, 열네 살이었던 그녀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궁에 입궐했다.
할아버지 심덕부와 아버지 심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다.
그녀가 왕실과 혼례를 맺게 된 것은 집안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컸다.
아버지는 아직 어린 딸을 궁궐로 보내며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왕자의 부인이니 평탄한 삶을 살 것”이라며 그녀를 배웅했다.
당시 남편 충녕대군은 2살 연하였다.
부부는 어렸지만 성품이 온화해 서로 잘 맞았다.
심씨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교육을 받아왔기에 결혼한 순간부터
남편을 내조할 도리에 대해 잘 숙지하고 있었으며 세종 역시 그런 심씨를 남달리 여겼다.
양 집안에서 티나지 않게 불교를 신앙해 온 불심도 더없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가끔 마음이 동하면 조용히 사찰을 찾아 참배를 하곤 했다.
급변하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도 두 사람은 잔잔한 삶을 살았다.
충녕대군은 왕위계승 가능성이 낮은 셋째 왕자인데다
심씨의 친정도 권력은 있으나 과시하거나 오만하지 않아
정치적 숙적이 없는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은 어리고 온순했던 부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갑작스레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또 영원히 군림할 것이란 예측과는 달리 왕세자 책봉 3달 만에 왕위를 승계했다.
여기에는 왕자의 난으로 손에 피를 묻혔던 본인의 삶에 비추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아들들의 왕위쟁탈을 사전에 막고자하는 속내가 깔려 있었다.
아직 건재할 때 왕위를 이양한다면 상왕으로서의 권력은 유지한 채
아들들 간의 분쟁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맏이가 아닌 셋째에게 왕위를 계승한 만큼 태종의 우려도 적지 않았으리라.
태종 이방원에게는 정비 원경왕후 민씨가 낳은 아들만 넷이었다.
맏이인 세자가 왕이 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세자 양녕대군은 패륜아였다.
세자의 여색과 행실을 비판하는 신하들의 읍소가 빗발쳤다.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세자의 아들, 즉 손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신하들이 어진사람을 택해야 한다는 택현론을 주장했다.
태종은 둘째 효령대군과 셋째 충녕대군 중에서 세자를 선택해야할 상황에 놓였다.
효령대군은 독서를 좋아하고 활을 잘쏘는 장점이 있었다.
성품적으로 뚜렷한 특징은 없었지만 결격사유도 없었다.
충녕대군은 엄청난 독서가였다. “몸을 상하게 하니 독서를 자중하라 일러도
궐내 큰서책들은 모조리 빌려가 탐독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을 정도다.
성품도 온화한 편이었다. 태종은 고민 끝에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선택했다.
충녕대군의 총기와 온화한 성품을 눈여겨본 신하들과
심씨의 아버지 심온의 정치적인 물밑 작업이 빛을 발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충녕대군과 심씨도 이 같은 상황을 전혀 예측 못했던 것은 아니다. 심씨는 조용한 정치가였다.
양녕대군의 행실을 보며 혹시 남편에게 돌아올 지도 모를
왕위계승의 기회를 잡기위한 노력을 남몰래 기울여 왔었다.
요직에 있던 아버지 심온을 은밀히 움직여 폐세자시 효령대군이 아닌
남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물밑작업을 지속했던 것이다.
충녕대군 역시 종종 부왕에게 형님 양녕대군의 방탕한 행실을 털어놓았다.
꼭 왕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는 세자가 되는 계기를 스스로 만든 셈이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지 불과 3개월이 지나자 태종이 왕위를 이양하겠다 선포했다.
“전위를 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세자의 권력욕을 점쳐보려 하신 말씀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버님은 보통분이 아니시니 경솔히 거동해서는 안됩니다.”
심씨는 신중한 처세를 당부했다.
충녕대군은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위의 상징 옥새를 다시 아버지께 바치고 거듭 전위를 사양했다.
그러나 태종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태종은 아들의 손을 잡고 천지신명과 종묘에
다시는 복위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력히 천명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책봉 3개월만인 7월, 왕위에 오른다.
바야흐로 한글의 창제자이자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
그리고 성군의 아내로서 부족함 없는 내조로 칭송받았던 소헌왕후의 탄생이다.
또한 잔잔했던 이들의 운명이 권력의 중심에서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 시점부터 대군의 아내에 불과했던 소헌왕후의 존재가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씨가 대군의 아내에서 세자비로, 또 조선의 국모가 되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여느 사람들이라면 매우 들뜨거나 혹은 두려워할 상황이겠지만
소헌왕후는 남다른 지혜와 성품으로 이를 결코 내비치지 않았다.
또한 기쁨과 책임감으로 어우러진 가운데서도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그녀를 옭아맸다.
소헌왕후는 시아버지를 유심히 살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왕이 됐으며,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의 친정을 몰살시킨 위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태종은 사돈인 심온을 극진히 예우하고 믿는 듯 했다.
임금의 장인이라 칭하며 영의정으로 승진시킴은
물론, 명나라로 가는 사은사는 응당 믿을만한 가족이 해야 한다며 심온에게 맡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소헌왕후만이 이유모를 불안에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명나라로 떠난 지 불과 며칠, 불길했던 그녀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외척 견제로 친정몰락 ‘고통’
슬픔 숨기고 남편 세종 내조
세종즉위년(1481) 11월, 궐 분위기가 수상했다. 병조판서 강상인이 의금부로 끌려왔다.
죄목은 태종이 아닌 세종에게 보고했다는 것.
상왕에게 보고하나 임금에게 보고하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이상하리만치 분노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직접 심문을 지휘하며 갖은 고문을 가했다.
며칠간 쉬지 않고 지속된 고문과 심문은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멈췄다.
심온과 병권에 대한 대화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태종은 이를 병권이 상왕이 아닌 임금에게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했다.
그리고 심온이 상왕과 임금 사이에 갈등을 만든 주모자라 결론지었다.
애초 강상인 옥사 사건의 목적은 심온에게 있었던 셈이다.
왕후의 아버지가 의금부에 수감되고 그 가족들은 천인으로 전락했다.
집안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어떤 이유에선지 태종은 가족들을 천인으로 만든지 3일 만에 이를 취소하고
“국모의 가족이 천인이 됨은 맞지 않으니 양민이 되게하라”고 명했다.
몰수한 가산도 다시 돌려줬다.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희생임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아버지 심온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태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생을 접었다.
딸이 국모가 된 죄로 사돈에게 죽임을 당한 셈이다.
소헌왕후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죄책감과 슬픔에 정신을 잃었고 식음을 전폐했다.
남편 세종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장인을 옹호하는 단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소헌왕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리 만무했다.
자칫 그녀 역시 연좌의 죄를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소헌왕후가 해야할 일은 온몸을 잠식한 슬픔과
시아버지에 대한 분노, 원망을 숨기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소헌왕후 폐비론이 불거졌다.
그러나 태종은 소헌왕후를 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 꾸민 일이었다.
게다가 소헌왕후는 이미 아들 셋과 여러 딸을 낳아 왕실을 안정시켰으며 내조의 공 또한 컸다.
태종은 폐비를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이미 아무 걱정 말고 밥을 먹으라 일렀다”며 “과거 연좌로 폐비한 일이 없고
이미 소헌왕후는 왕실에 공이 높다”고 단호히 알렸다.
그러나 자신을 살렸다고
아버지를 죽인 시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과정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남편에 대한 마음도 오죽했으랴.
그러나 소헌왕후는 일체의 원망도 숨기고 인내했다.
시아버지를 부왕이라 칭하며 출가외인의 도리를 말했으며 세종에게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마음의 고통이 육체의 병으로 드러나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소헌왕후는 크게 앓았다. 세종은 아내를 위해 자식들을 대동하고
사찰을 찾아 스스로 기도함은 물론, 법회를 열고 스님들로 하여금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소헌왕후를 어머니와 만나도록 주선하는 등 다각도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장인의 죽음을 막지 못한 미안함의 발로였지만 무엇보다 세종은 그녀를 깊이 존경했다.
소헌왕후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항상 세종이 친히 일어서 공경의 예를 표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기실 세종이 성군으로 일컬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소헌왕후의 보이지 않는 내조와 정치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인정과 배려로 내불당을 완전히 장악해
불협화음이 일절 나오지 않도록 완벽히 관리했으며
후비와 첩들에도 각별한 보살핌으로 존경받았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에서 나왔다.”
“중궁에 정위한 뒤로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들을 예로 접대하고
아래로는 궁인들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헌왕후를 칭송하는 기록이 수두룩하다.
52세의 나이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세종은 예조판서 정인지에게 그녀를 추모하는 지문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친정 몰락의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던 소헌왕후.
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그녀는
아마도 드러낼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불교에 기대어 의지했으리라.
조선왕실은 공식적으로는 억불 정책의 기조가 강했기에
소헌왕후는 신행조차 당당히 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죽은 후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은 다양한 불사를 통해 그녀의 불심이 후세에 전해지게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불경언해작업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내불당 건립도 소헌왕후를 위하는 세종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소헌왕후는 결국 원망과 미움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고,
가정와 왕실의 평안이라는 한단계 더 높은 서원을 세웠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녀의 인욕과 발심이 남편 세종에게로 전해져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2012. 10. 31
법보 신문
첫댓글
택현론(擇賢論)
장자에게 왕위(王位)를 계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현명한 자식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