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강해
야곱의 영광인가 야곱의 교만인가?
(암 6:8-14)
김태훈
1. 들어가는 말
이 부분에서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은 계속된다.1) 비난의 초점은 그들의 “영광”이다. 아모스 시대에는 사람들이 ‘야곱의 영광’(8절)이란 말을 쓴 것 같다. 실로 그 시대는 여로보암 2세의 치세로 경제적, 정치적 번영을 누리던 때였다.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랬다. 활발한 국제무역 활동, 성공적인 영토 확장, 증가하는 세입, 화려한 삶의 질, 넘치는 제물, 번영하는 사마리아, 견고한 도성들,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은 시대였다.
일반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공정한 법칙이 적용되고 있었는가? 그들은 사람 대접을 받았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광”에 대해 무엇이라 평가하시는가? 국가의 부흥은 약자들의 희생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사회 엘리트들은 동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었다. 오직 개인과 가문의 성공에만 관심을 쏟을 뿐 공법과 정의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였다(12-13절). 아모스는 그들의 영광을 교만이라고 찬탈이라고 비난한다(13절).
사마리아의 군사, 정치, 경제, 종교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굳건한 성, 백성들의 수,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한다(8절). 그러나 사람들은 진멸되고(9-10절), 성은 깨어지고(11절), 영토는 사라진다(14절).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며 가장 강한 자보다 강한 분이시다. 그 분은 거룩한 전쟁의 사령관이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다(8, 14절). 그 분은 염병(9절), 지진(11절), 대적으로(8, 14절) 이스라엘을 친다. “야곱의 영광”은 국가의 멸망과 함께 옛 이야기로만 남게 될 것이다.
2. 본문 주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었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8절)
8절은 전체의 주제 절이라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진멸 맹세, 진멸 대상 야곱의 영광과 궁궐, 진멸 방법이 나온다. 본절은 여호와의 맹세로 시작한다(참고. 4:2). 여호와도 맹세를 하신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니 누구를 걸고 맹세할 수 있을까? 여호와는 가장 높은 분이므로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2) 자기를 가리켜는 히브리 단어 브 나프쇼 (וֹ+)의 번역이다. 원형인 네페쉬는 원래 목구멍을 뜻하는 단어로서 숨, 생명, 살아있는 존재, 자기 자신의 뜻을 가진다.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자신, 그 분의 성실하심을 걸고 맹세하신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맹세는 아모스에 모두 세 번 나온다(4:2; 8:7, 8). 불행하게도 어느 경우든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상황을 반영한다. 맹세의 내용은 절대적인 복이 아니라 절대적인 심판이다.
어떤 일 때문에 여호와는 자신을 거시고 맹세까지 하면서 벌을 주려고 하시는가? 구체적으로는 앞 구절들에서 명시되었고 여기서는 몇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야곱의 영광(그온 야아콥, ב ןוֹא)과 궁궐(아르므노트, תוֹנאַ)이다. 히브리 단어 가온(ןוֹא)은 부정적, 긍정적 뜻을 다 가지고 있는 중립적인 단어다. 시 47편 4절은 교만으로 번역할 수는 없는 경우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그온 야아콥)로다.” 나훔 2장 2절도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그온 야아콥)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그온 이스라엘) 같게 하시나니.” 그러나 잠언 16장 18은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된 경우다. “교만(가온)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우리 본문에 나오는 가온(영광 혹은 교만)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 쓰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한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랑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영광이 될 것이요, 같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교만으로 보일 수 있다.4) 어떤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자신의 학위니 성공을 자랑한다면 혹은 표현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그의 영광이지만 다른 이들 중에는 교만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만”을 미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자랑거리”(영광)를 미워한다고 볼 수 있다.5) “야곱의 영광”이라 표현은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의 고백이나 민족적 자긍심일 수 있다. (1) 과거로부터 이스라엘의 자랑거리는 선택된 특별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아모스의 동시대, 같은 나라에서 예언한 호세아는 야곱(이스라엘)의 자긍심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 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호 10:3-4).
실로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이고 하나님이 집인 벧엘이 있는 곳이다. (2)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팔레스틴에서 가장 강한 국가였다. 그들의 성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 14:25). (3) 그들의 영광은 사마리아다. 영광과 궁궐이 평행된다는 점에서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화려하고 견고한 도성이었다. 분명히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4) 궁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지도층의 소유, 직위, 특권 등은 분명히 그들의 영광이었다. 고위직에 오르거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심지어는 이름 난 대학에 들어간 자녀가 부모의 영광이듯. (5)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일반인들과 비교할 때 이스라엘의 영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권력자, 엘리트 상인, 대토지 소유자, 고급장교, 재판관, 정치인들. 위치나 업적으로 보아 영광의 사람들이다.
이러한 영광에 대해 최종적 판결권을 가진 분은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하나님은 그것들을 싫어하며(타아브, באת) 미워하신다(샤나, אנשׂ).6) 그들의 영광스런 과거는 아무리 그것이 이스라엘의 교의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는 한, 옛 기억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의 영광의 뒷면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종, 권력에 의한 정의 왜곡, 하나님 백성의 희생을 담보한 호화로운 삶, 군사적 자기 확신, 결탁에 의한 성공이다. 그들의 권력과 금력과 연대에서 나오는 난공불락성은 확신할 만 한 것이겠으나, 전쟁의 사령관이신 (만군의) 여호와에 의해 공격받는다. 성읍(아마 사마리아)은 깨어지고 쌓아놓은 것은 잃게 된다. 성읍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 집에 열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9절)
멸망의 주제가 생생한 그림으로 주어진다. 한 집에 열 사람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마저 죽게 된다. 왜 열 사람인가? 그리고 집은 어떤 집인가? (1) 만일 일반 가정이라면 한 집에 남자 열 명이면 적은 수가 아니다. (2) 집은 성읍을 말하고 ”열 사람“은 소돔을 상기시키는 표현인가? 한 집에 의인 열 명이 있어도 다 죽는다는 뜻은 이스라엘이 소돔보다 더 악독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 구조에서 볼 때 죽는 사람은 열 사람이기 때문에 취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3) 완전한 파괴라고 하는 전후 상황에서 볼 때, 한 가문에 열 사람이나 한 성읍에 열 사람 혹은 한 나라에 열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7) 열 사람은 최소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호와와의 대화에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창 18:32).
이 경우 십인은 최소한의 수를 나타낸다. 아모스 5장 3절은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그러므로 ”열 사람“은 최소한의 수를 나타내는 것이고 ”한 집“은 대가족이나 가문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열 명마저 다 죽는다는 것이다.8) 아모스 5장 9절에서는 전쟁에서의 전멸, 여기서는 가문의 멸절, 혹은 성에 남은 백성들의 멸절을 선포한다. 안타까운 것은 지도자의 죄악 때문에 전 백성이 같은 운명을 겪게되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죄악이 전 백성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사실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지도자의 부패의 결과를 국민들이 떠맡듯이. 좋은 지도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나 우리에게나 복된 일이다.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9) 집 밖으로 가져 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10절)
10절과 9절의 관계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9절의 구체적인 상황이 10절이라는 것, 즉, 마지막 남은 열 명마저 죽어 산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오직 치울 시체만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10절의 상황이 9절의 연속이라고 볼 필요는 없고 9절이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주듯 10절 역시 이스라엘이 맞을 운명을 또 다른 그림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9절에서는 왜 열 명만 남게되었는지 불분명했다. 10절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가 집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전염병을 암시하는 것 같다.10)
“시체를 불사른다”는 번역에 대해서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가, “불사르다”의 히브리 단어와 소리는 같지만 철자가 다르다는 것이고,11) 시체를 태우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12)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친척”(דוֹ)는 아버지 편의 친척, 므사레프(ף)는 “불사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머니 편의 친척이라고 본다.13) 어느 경우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한 집안 사람들이 다 죽어 친척들이 오고서야 시체를 치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내실”(야르크테 하바이트, ת י)은 집 안쪽(“전 뒤편에서부터”, 왕상 6:16), 근접하기 어려운 곳(“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시 128:3), 숨겨진 곳(“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욘 1:5) 등을 뜻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깊은 곳까지라도 찾아가서 죽임을 당케 하신다는 것이다.
“내실에 있는 자”는 함께 시체를 치우는 사람이며 “너와 함께 한 자”는 죽어서 매장을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어디 누워 있느냐고 물어 볼 수는 없고 친척들이 방마다, 그리고 깊은 곳까지 확인해야 하는데. 죽은 사람이 아직도 있는지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난해구절이다. 밖에 있는 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잠잠하라”(하스, ס: 쉿!)고 한다. 질문한 사람이 왜 갑자기 “쉿!”하는가? 대답의 소리가 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질문했을까? 아니면 더 이상 아무도 없다는 말에 쉿! 하라고 했을까?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하게” 되는가? 아니면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말아야” 하는가? 히브리 문장의 두 가지 모두로 번역될 수 있다. (1) 여호와는 죽일 사람을 찾는다. 그 집안에 있는 최후 한 사람까지.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 아직도 집안에서 산 사람 소리가 난다. 장사지내는 사람들의 소리다. 다음은 소리를 낸 사람의 차례이며 그들마저 생명을 잃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하게 된다는 뜻(한글개역), (2) 다 죽었다면 이제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절차 중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곡하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더 이상 위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의 주이다. 여호와의 임재는 오직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불러 임재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14) (3) 곤란을 당할 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이었고 그 이름은 이스라엘이 기념할 이름이다(“기념칭호,” 야웨 지크로, וֹ הוהי [호 12:6]). 그 분의 이름은 모든 환난 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니 재난을 당한 이 때에 약속을 믿고 그 분을 부르면 그 분이 만나주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 신앙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분을 불러서는 안 된다(로 르하즈키르 브솀 야웨, הוהי ם רי א) 왜냐하면 임재하시되 적으로 임하시기 때문에, (4) 애곡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데 자신들마저 죽어 남들이 그들의 죽음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곡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뜻, (5) 여호와가 심판자로 이미 임재해 계시니 지금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말고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뜻15) 등이다. 어느 경우든 숨소리를 죽이고 살아있다는 표를 내지 말아야 하며, 여호와는 더 이상 위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라 여호와께서 명하시므로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11절)
거룩한 전쟁에서 여호와는 명령자이시나 인간 대리인을 통해 싸우신다(참고. 수 11:2). 여기서는 인간 대리인이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친히 명하시고 권능을 나타낸다. 창조 때처럼 명하시니 그러나 반대로 파괴가 일어난다. 거룩한 전쟁은 이제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쟁이 되었고 그 전쟁에서 여호와는 사령관(명하시는 분: 므차웨, ה)이 된다. 큰 집과 작은 집은 (1) 부자, 권력자의 집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집을 불문하고 즉, 모든 집이거나 (2) 여름 궁과 겨울 궁 (참고 3:15), 혹은 (3) 엘리트 권력과 경제의 중심지인 사마리아의 모든 집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갈라지며”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르시심(םיסיס)은 조각이 된 상태를 말한다. 철저한 분쇄를 뜻한다. 지진으로 인한 파괴(참고 3:15; 9:1) 혹은 적군들에 의해 성이 파괴하고 건물들이 무너져 돌 조각들만 남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죄악으로 세운 영광은 교만이든 자랑거리든, 최정상의 궁궐이든 난공불락의 요새이든 그것이 가문이든 연대를 맺고 있는 것이든 하나님의 심판에 견뎌낼 수 없다. 침을 받아(히카) 분쇄되고(라사스) 벽들은 터져 버린다(바카). 실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죽이시는 분이며 성을 허무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옛 교리가 무엇이든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요 어제나 오늘이나 여호와를 경홀히 여기고 배은망덕하고 교만한 모든 사람들이, 지도층 신자들이, 어쩌면 신앙지도자들이 들어야 하고 가르쳐야 할 말씀이 아닌가? 어찌 여호와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아모스 역시 기이하게 생각한다. 어찌 모든 것이 뒤바뀌어버렸는가? 이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16)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12절)
아모스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짐승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 삶의 왜곡을 지적하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울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 8:7)는 말씀이 있다. 말들은 그 길을 알고 소는 밭갈 곳을 아나 내 백성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파른 바위산이든지, 돌이 많은 산지든지, 어느 경우든 말은 달릴 수 없다. 소로 바다를 갈거나, 돌로 이루어진 비탈을 갈게 하는 사람은 없다. 언덕 경사면은 말이나 소가 아니라 당나귀로 경작한다. 말은 전쟁, 수송, 사냥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농사일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17)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사회 엘리트들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건강한 사회를 쓰디쓴 사회로 만들며 법정과 관청에서 행복이 아니라 삶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재판관에게 뇌물을 주고 증인을 위협하고 권력을 남용하였다. 쓸개로 번역된 로쉬(שׁא)는 맹독이란 뜻이 있고 인진으로 번역된 라아나(ה)는 난쟁이 관목으로 쓴 맛을 가지고 있는 식물이다.18) 독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바로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세워진 지도자들이었다.
허무한 것을 기뻐하여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13절)
타락한 지도자들은 기뻐하고 여호와는 그들을 미워하고 백성들은 매일 독과 쑥을 먹는다.
“허무한 것”은 히브리어 로드바르(not-thing)의 번역이고 “뿔”은 카르나임의 번역인데,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읽어도 의미가 통한다. 로드바르는 장소 이름이다. 그 위치는 얍복 북쪽 오늘날의 텔-엘-함메로서19) 길르앗의 국경도시 중 하나이며 카르나임은 야르묵강 북쪽 지류에 있다. 위치상 다메섹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20) 카르나임은 케렌의 쌍수형, 즉 황소 뿔 두개이며 황소의 힘을 상징한다. 정복자의 군사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업적을 자랑한다. 로드바르와 카르나임을 자신들의 힘으로 취했다는 것이다. 아모스와 동시대인인 호세아는 경제적 성공에 대한 그들의 경제 엘리트들의 자만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호 12:7).
야곱의 자랑거리는 큰 (넓은) 집, 호화스런 궁궐, 견고한 성읍, 많은 인구수(경제 활동이나 군대 동원가능 인구), 영토, 전쟁에서의 성공, 경제력, 국제무역, 개인적 성공 등이다. 그러나 포학과, 사취와, 불의와 정의의 왜곡으로 얻은 것에 대하여, 홀로 그리고 변함 없이 공의롭고 의로우신 재판장 역시 지배 엘리트들과 결탁하실까? 또 다시 여호와는 막강한 군대의 하나님(만군의 하나님, 엘로헤 츠바오트)으로 이스라엘을 대면하신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하맛 어귀(르보 하맛)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며 아라바 시내(나할 아라바)는 남쪽 경계다. 여로보암 2세 치세 시의 영토 확장은 열왕기하 14장 25-27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였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그러나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열왕기서를 쓴 어떤 예언자는 이 역사적 사건을 여호와의 은혜의 역사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사마리아의 군사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공적으로 돌리고 자랑하고 자만한다(13절의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자신들의 힘으로 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걷혀진 그들의 운명은 어떤 강대국에 의해 전 영토를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 나라는 앗시리아이며 티글랏필에셀의 침공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
“학대하다”는 라하츠 (ץ)의 번역인데, “사람을 억압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다(출 3:9; 신 26:7; 삿 2:18, 4:3, 6:9, 10:12 왕상 22:27; 왕하 13:4; 왕하 13:22; 사 19:20; 렘 30:20 등). 원래의 뜻은 “압착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통치 엘리트들은 정의를 왜곡하고 공의를 버리며 힘없는 백성들을 “학대”했었는데 그들은 이제 학대 받는 자가 된다. 국제 무역에 근거를 두고, “올리브 기름”을 넘치도록 생산한 “기름 압착자”들은 그들 자신이 압착된다. 아모스와 동시대의 사람인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 통치 엘리트들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호 12:1-2)
3. 나가는 말
이스라엘은 지도자들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공법과 정의를 버리고 자신들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 성공했다. 지위를 얻고 부를 얻고 질 좋은 삶을 살고 땅을 소유하고 명예를 얻었다. 그래서 자긍심도 얻었다. 야곱의 영광의 시대를 그들은 산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영광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핏물과 눈물이 있었다. 사회 엘리트들은 부정직하고 불의한 사람이었고 서로 연대하여 불의로 가득 찬 난공불락의 성을 쌓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불의의 왕조를 세우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백성의 억울함을 듣고 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셨다. 불의로 얻은 자들은 집도 집안에 있는 모든 것도, 성도, 궁궐도, 영토도, 생명도 다 잃고 말았다. 아모스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교회 안에는 사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이 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일할 수 있도록 교회는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설교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성경공부가 민족의 운명을 고칠 수 있다. 전도하는 방법, 봉사하는 방법, 헌신하는 방법에 더하여 아모스 읽기 반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아모스의 역할이 컸던 것처럼 오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지도자들에게 선포하고, 울안에 있는 분들에게 정직한 교훈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맡은 분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보다 더 중한 것이 있음을 선포하며, 자신들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전주 한일장신대 교수
1) 이번 호에서 6장 8-14절을 다루지만 이 절들이 한 구성단위인지는 불분명하다. 8절부터 새로운 신탁이 시작되어 7절 이전의 절들과는 단절되고 7장 1절도 새 신탁의 시작이므로 8-14절은 독립적인 신탁으로 보인다. 주제 면에서도 8-14절은 일관성을 보인다. 8-10절과 14절은 이스라엘의 진멸을 기술하며, 그 중간 12-13절에 지혜적 질문이 나온다. 이 절들을 관통하여 집이 하나의 주제어가 된다.
2) Wolff, 281b.
3) 네페쉬의 뜻 가운데 자신을 뜻하는 재귀적 용법에 관하여는 볼프가 잘 설명하고 있다. 네페쉬의 용법에 관하여는 한스 발터 볼프, 문희석역, 구약성서의 인간학, 28이하를 보라.
4)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은 단어 자체가 가진 복합적 의미보다는 문맥에서 해석하여 각각 “교만”과 “거만한 태도”로 번역하였다. NIV와 NRS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the pride"로 번역한다.
5) 비슷한 경우로는 갈대아인의 영광(사 13: 19), 모압의 영광(사 16:6; 렘 48:29), 유다의 영광 예루살렘의 영광(렘 13:9) 등이 있다.
6) ‘싫어하다’의 히브리어는 타아브(בעת)인데, 우리의 본문에서는 ‘갈망하다’를 뜻하는, 같은 소리의 다른 타아브(באת)가 사용된다. 필사시 착오가 있었거나 특정한 시대의 철자법이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의 갈망과 여호와의 싫어함이 한 음에서 동시에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표현 기법일 것이다.
7) 집(바이트, תיב)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건물로서의 집, 가정, 가문, 왕조, 나라나 족속이름 등이다. 사무엘 하 7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성전 건축에 관한 나단의 신탁에서는 “집”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왕조)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성전)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왕조)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가문)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였나이다” (삼하 7:11하-19). 앗시리아 문서에 나오는 “비트 오므리”는 처음에는 오므리 왕조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8) 마지막 남은 자의 근절에 대해서는 도처에서 언급된다(1:8; 2:13-16; 4:2; 8:10; 9:1-4).
9) 히브리 단어 에쳄은 원래 “뼈”를 뜻하지만 한 인간이나 죽은 자의 몸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꼭 뼈를 가지고 나간다고 볼 필요는 없다.
10) Mays, 119.
11) 실지 “불사를 자”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므사레프(ף)의 철자가 여기서는 ף로 나온다. 필사자의 에러인지, 고의적인 실수인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2) Mays, 119.
13) Stuart는 이런 의미로 해석하여 그의 번역에 반영한다(그의 주석 359).
14) 참고 Wolff, 283a.
15) 참고.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합 2:20),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슥 2:13),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라”(습 1:7).
16) 번역에 어려움이 있다. Wolff는 사람이 소로 바다를 갈겠는가?로 이해한다. 평행법으로 볼 때 바스라 (rocky terrain)에 대조되는 무슨 말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볼프는 복수 의미 임 (םי)을 나누어 얌으로 보고 ם ר(소로 바다를)으로 읽는다.
17) King, 125.
18) 민간요법에서 치료약으로서 시나이와 네게브 베두인들은 잎을 말려 차로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슬픔이나 인생의 쓴 맛을 뜻한다.
19) Wolff, 288b.
20) Ibid.
21) 본문에 어느 나라인지는 지적되지 않다. 이 본문은 꼭 앗시리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 속에 있는 한 요소로서의 적군들의 침략과 그에 따른 고통을(참고 신 28:33)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