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할 적절한 기회
사도행전 3:11-21
베드로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있지만 우선적으로 할 말은 베드로는 크리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진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냥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기 아까울 정도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모두를 크리스천으로 만들까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진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증거 한 것뿐만이 아니고 베드로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타난다는 데를 찾아다닙니다. 은혜롭다고 하는 교회를 찾아다니고 은혜롭다하는 집회를 찾아다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고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마는 베드로의 경우에는 베드로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있는 곳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을 멀리서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주님을 찾고 조금 더 경건하면 얼마든지 이미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것이 유일한 단서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 그 배라 함은 그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이상한 데에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의 속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spirituality-영성이라는 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뉴에이지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나를 믿는 자는 그 속에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성령을 은사의 차원에서라든가 능력의 차원에서라든가 아니면 위로의 차원에서 경험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마는 성령은 그 모든 것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성령을 한 가지, 두 가지로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을 은사로 국한시킬 수 없고 성령을 어떤 능력이나 체험으로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에요. 성삼위 하나님.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모든 경험이나 깨달음이나 이런 것보다 더 크신 분이에요. 그러한 성령이 믿는 자의 속에서 생수의 강처럼 넘쳐난다는 것은 위대한 약속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신앙 속에 경험하며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십 사 시간 의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고 하나님 앞에 민망할 때도 있고 아무런 영적인 감동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또 신앙이라는 것이 귀찮다고 생각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된 그리스도인은 그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당시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또 의지하고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를 시작하든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든 믿음으로 봉사하든 어떤 일을 믿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나도 경험하고 남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훈련된 사람입니다.
흑인 영가 중에 Everytime I fill the Spirit이라는 오래된 곡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내가 성령의 감동을 느낄 때마다 내 마음에 감동이 있어 기도한다.’라는 곡입니다. 참 아름다운 가사지요. 그러나 제가 목회를 하면서, 또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것은 내 마음에 그 감동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어요. 그런 감동이 없지만 설교해야 되고, 그런 감동이 없지만 기도해야 되고 그런 감동이 오기 전에 섬겨야 할 때가 많습니다. 감동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기다려도 안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감동이 없다고 기도를 안 할 수는 없어요. 마치 베데스다 못가의 삼십 팔년 된 병자와 같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을 동하게 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삼십 팔년-그 기간 전체인지 아니면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상당한 기간을 그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이 동하면 자기가 내려갈 기회를 얻을까 기다리는데 그런 기회는 일평생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가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병자가 ‘물이 동할 때 아무도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방법으로 나을 것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동할 것을 기다리면 마르고 닳도록 기다려도 병 나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물의 동함과는 별도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그 사람을 일으키셨어요. 병에서 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피상적으로 또 소극적으로, 내가 병이 낫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어떤 소극적인 그런 것을 기다리는 것 그게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 훈련된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요. 그래서 감동적인 환경이 조성되길 기다려서 나도 거기에 덩달아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황은 어둡고 힘들고 그런 차가워 보이는 상황에서 내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일어서고 믿음으로 행하고 그리하여 은혜로운 환경을 내가 먼저 만들 수 있고 그래서 나도 은혜를 받고 다른 사람도 유익을 입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군대에서 지휘관이 되고 승진을 하고 또 다른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무엇보다도 훈련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지요. 군대 정신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에요. 절도가 있고 명령에 복종할 줄 알고 자기의 두려움을 감추고 그리고 솔선수범하고 그리고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이렇게 군대정신에 훈련이 된 사람이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지휘관이 전투 상황에서 자기 부하들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고 그래서 피해가 적고 그리고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첫째,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둘째, 설교자 중의 설교자입니다. 정말로 설교자입니다. 베드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교를 합니다. 어떤 환경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환경, 저런 환경, 병자가 나으면 그것을 설교의 기회로 삼고 또 공회에 끌려가서 왜 예수님을 전하느냐고 문책을 받으면 그것도 설교의 기회로 삼고 베드로는 모든 기회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베드로가 원고를 가지고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때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적절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설교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공식적인 예배의 자리에 초청을 받아 설교한 게 아니고 길에 가다가 설교하고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설교하고 사람들 집에 찾아가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타고난 사업가는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지요. 돈을 못 버는 분들은 그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돈을 벌 기회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타고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모든 곳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예술가가 그린 그림이든 사진을 보면 지극히 평범한 것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지요. 제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 화장실의 세면대에 놓여있는 화장 용품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 내용이 별거 있겠습니까. 치약이든 헤어스프레이든 이런 것들, 그런데 그게 명작품이에요. 거기에도 아름다움이 있더라고요. 마찬가지로 타고난 설교가는 모든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설교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으신다면 정식으로 어느 교회에 초청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설교하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사람들 모아서 가르치시고 또 아파트의 부녀자들을 모아서 가르치시고 또 사람이 없으면 토끼라도 모아놓고 설교를 하세요. 성 프란시스는 새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설교에 소명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어떤 정식으로 누가 설교해달라고 초청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있는 데에서 설교하고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인데 이 설교를 하게 된 계기는 미문가의 앉은뱅이가 낫는 기적이었습니다. ‘은과 금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바로 제가 중학생 때 배운 곡인데 얼마나 은혜로운지 이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모였을 때 베드로가 그것을 또 한 번의 설교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베드로답지요.
그런데 이 설교에서 베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닌 것부터 살펴보면 첫째는 ‘자, 자, 여러분 중에도 병든 사람이 있으면 줄 서세요. 내가 고쳐 드리리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앉은뱅이가 낫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다면 다른 병도 고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모든 병자들이 베드로를 주목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여러분 중에도 병자가 있으면 내 앞에 줄을 서시오.’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마는 베드로는 그것이 유혹이 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단과 사이비는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 생깁니다.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 비뚤어지게 나갈 수 있는 유혹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큰 기적을 행한 다음에 시험에 들어서 넘어집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12절에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를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주목하지 말라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다’라고 초점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 것은 ‘여러분도 이 병자처럼 믿으면 여러분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식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흐를 수도 있지요. 그 미문가 앉은뱅이의 케이스를 하나의 사례로 만들어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이 사람처럼 믿으시오. 이 사람처럼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도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례로 삼아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점은 그 병자가 아니에요. 초점은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지 ‘나를 주목하라’도 아니고 ‘이 병자를 본받으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 미묘한 포인트입니다만 중요한 것입니다. 병자가 낫지만 베드로는 병 나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병자가 나았지만 병에서 낫는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복신앙과 바른 신앙의 차이점입니다. 기복신앙은 예수님이 주신 선물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것이 병 고침이든 축복이든 은사든 예수님이 주신 은혜,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 너무 좋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구합니다. 그러다가 기복신앙이 돼 버립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은 예수님이 주신 선물도 좋지만 선물을 주신 분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신 분을 바라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물에 정신 팔리지 말고 선물을 주신 그 분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을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그 이름, 예수님의 이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초점은 예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영생도 얻고 축복도 얻고 병 고침도 있고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시고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세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세요. 그렇게 하노라면 여러분의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가까이 하세요.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많아질수록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세요. 예수님 가까이 하는데 힘을 쓰세요. 그러면 여러분 삶의 많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쉽게 해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런 기적에 대해서 성경말씀을 읽을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생각의 오류는 무엇이냐면 ‘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앉은뱅이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왜 나를 통해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것은 베드로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역시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영력이 부족해.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 기적이 베드로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이 없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논리를 따르시겠습니까? 어차피 기적이 일어난 것이 개인에게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기적이 안 일어나도 개인의 이유 때문에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결국은 주님이 행하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려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참 잘하지요. 그러나 흡족한 결과가 안 나타날 때는 ‘이건 내 잘못이야. 내가 부족해서 그래, 나 때문이야.’ 이런 식으로 책망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애초부터 흡족한 결과가 나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라고 믿는다면 흡족한 결과가 안 나타나더라도 그것도 나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고 나 때문에 흡족한 결과가 안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흡족한 결과가 나타날 때도 나 때문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잖아요. 나 때문에 흡족한 결과가 나타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행한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는 한은 그런 것이 안 나타나더라도 나 때문은 아니에요. 우리는 이처럼 실적 위주의 생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의 정황을 살펴보면 단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 하나님은 단 하나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그 당사자 앉은뱅이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흡족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대표성입니다. 왜 우리는 각 사람이 기적을 경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기적을 경험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흡족한 증거가 된 것처럼 우리는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