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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보배가 담기면 보배그릇이 됩니다.
고후 4:7-10
AG/ 우리(질그릇)
PW/ 예수 그리스도(믿음)
BIW/ 보배를 가지다.
TS/ 질그릇 같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가지다.
PS/
M1(청중의 마음 문 열기/ 설교자 중심)
M1S1/일반적 접근(유머와 축복의 말씀)
인사/
생명의 떡을 먹는 성도/
말씀으로 양육하는 교회
생명의 떡을 먹는/ 삶을 살자.
생명의 떡을 먹고,/ 거듭난 성도가 되자.
생명의 떡을 주는/ 교회가 되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생을 얻게 하는/ 교회가 되자.
유머/
죽어 지옥에 간 흥부 내외와 놀부 내외가 염라대왕 앞에 섰습니다.
염라대왕은 아주단호하게 ‘흥부와 놀부는 들으라. 지금 너희들 앞에 똥통과 꿀통이 있느니라. 각자 어느 통에 들어가겠는고?’ 말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욕심 많은 놀부가 잽싸게 먼저
‘제가 꿀통에 들어가겠습니다.’ 말했습니다.
염라대왕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놀부는 꿀통에, 흥부는 똥통에 들어갔다 나오너라.’
두 사람은 염라대왕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염라대왕이 즉각 명령했습니다.
‘너희 형제는 서로 마주보고 서거라. 그리고 서로 상대의 몸을 깨끗하게 핥아라.’
놀부는 죽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참 후에 다음은 아내들 차례가 됐습니다. 염라대왕은 ‘흥부 아내와 놀부 아내는 각자 어느 통에 들어갔다 나오겠는가?’
놀부 아내는 얼른 놀부를 처다 보았습니다. 놀부는 ‘똥통에 들어가라’는 눈짓을 노골적으로 아내에게 했습니다.
남편의 눈짓을 받은 놀부 아내가 행여 흥부 아내에게 뒤질 새라 급히 말했습니다.
‘염라대왕님, 저는 똥통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하자 염라대왕은 ‘그러냐? 그러면 그리 하든지.’ 짐짓 말한 후에 즉시 명령했습니다.
‘놀부 아내는 똥통에, 그리고 흥부 안내는 꿀통에 들어갔다 나오너라.’
두 여인은 염라대왕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염라대왕은 ‘지금부터 흥부와 놀부는 각자 자기 아내와 마주 서거라. 그리고 각자 자기 아내의 몸을 깨끗이 핥아라.’고 엄히 명령했습니다.
불쌍한 놀부는 기절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적 해석/
이 유머는 욕심에 사로잡혀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린 인간상을 꼬집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놀부 부부는 살아서도 욕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욕심 때문에 죽어서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받으려고 염라대왕 앞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놀부 부부는 살아 그 욕심을 버려 회개하지 못하고, 염라대왕한테 비참한 놀림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똥통이나 꿀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고통을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놀부 부부는 그 마음에 욕심을 담았더니, 지옥에 있는 똥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자기 마음에 존귀하신 예수님을 보배로 모셨더니, 천국에 있는 보배그릇이 되었습니다.
M1S2/ 성경적 접근(본문요약, 의문점 제시)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모신 자신을 질그릇으로, 예수님을 그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잘 부서집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값이 싸고,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잘 부서지기 때문에 개 밥그릇으로도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하는 질그릇에 귀중한 보배를 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위대하시고 존귀한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연약한 질그릇에 담기겠습니까? 예수님이 질그릇에 담길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금 그릇으로 대접해도 부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그릇 같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 생명으로 담긴 보배가 되셨습니다.
M1S3/ 청중적 접근(성경과 청중문제 동일시)
2011년 10월 5일 미국의 초대형 기업인 애플의 창업주이자 IT업계의 큰 별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56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잡스는 애플의 창립자이자, 세계 최초의 PC 개발자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이폰, 아이패드라는 전화기 겸 휴대용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 바로 스티브 잡스입니다.
‘잡스가 남긴 유산은 70억 달러, 우리 돈으로 8조 4천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CNN은 ‘애플이 가진 현금자산이 무려 760억 2천만 불로, 미국 정부보다 더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최고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2006년 기준 미국 최고경영자의 보수 순위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과장일 수 있지만, 혹자는 잡스를 가리켜 에디슨만큼이나 세상을 바꾼 사람으로 평하기도 합니다. 잡스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에게서 자라나 미국 최고의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잡스의 삶을 더 깊이 살펴본다면,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하지만, 그는 진정 귀한 보배는 모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동양철학에 심취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자기를 낳은 지 1주일 만에 입양기관에 보내버린 부모님을 끝까지 용서하지 아니 하고 죽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잡스를 부러워하지 않는, 더 크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잡스보다 더 귀한 보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기 풀어야 할 말이 두 가지 나옵니다.
질그릇과 보배입니다.
질그릇이란 무엇일까요?
흙으로 구워 약하고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성과 삶입니다.
그럼 보배란 무엇일까요?
보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만국의 보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M2(성경의 문제 제기/성경중심, AG 중심)
M2S1/ 본문의 문제 배경
오늘 말씀은 주후 55년 가을 마게도냐 지역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눈물로 쓴 사랑의 편지입니다.
이때의 심정을 바울은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
사도 바울은 주후 55년 봄에 ‘고린도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린도 전서를 써서 디모데 편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점점 더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분파를 만들어 자신을 비방한 고린도교회를 직접 “가슴 아픈 심정으로”(2:1) 방문하였지만, 사도 바울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더 이상 고린도에 있지 못하고, 에베소에 돌아와, 준엄한 어조의 3번의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냈습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의 심정은 매우 착잡하였고, 두려움과 근심에 쌓여 있었습니다.(7:5)
그러다가 마게도냐에서 디도와 재회하게 된 바울은 디도로부터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아들였으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변호하고,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눈물의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일부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M2S2/ 사건의 직접적 발생원인과 그 문제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너무나 부족한 자임’을 먼저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절)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이기 이전에, 보배를 담은 질그릇”임을 간증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창2:7) 인간은 질그릇입니다.
욥은 열 자식 다 죽고,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드디어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난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 빌닷에게 강력하게 항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탄원합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 아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욥10:7, 9)
그리고 변론을 그래도 비교적 정당하게 중재하는 엘리후에게는 간절하게 동의를 구합니다.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욥33:6)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4)
어째든 질그릇은 모양도 없고, 약하여 깨어지기도 쉬울 뿐 아니라, 별로 가치도 없어 귀히 쓰이지도 않는 그릇입니다. 즉 가치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보잘 것 없는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이 보배는 가치 없고, 매우 천박하며, 늘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인생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보배는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사신 삶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이며,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보배이신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시고, 그 아들을 믿는 우리들에게 영생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에 담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참으로 귀중한 보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 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7)
사도 바울이나 우리 성도들의 육체는 비록 연약한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그 육체에 담긴 복음은 영광스러운 보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 비유 가운데, “천국은 일꾼이 남의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이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거기에 투자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 유익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존귀한 보배를 누가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 속에는 사도 바울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우리 성도들도 다 포함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없어 그 복음에 순종치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또 비록 입술로는 복음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 복음에 순종치 않는 자는 다시 한 번 자기가 정말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벧전 1:19)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구원의 생명이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비록 성도이면서도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노예가 아닌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10절에서 참으로 감격스런 선포를 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 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 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 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이란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말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로부터 항상 위협을 받았으며, 때로는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때마다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4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회복자가 되심’을 말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게 하리니”(1-4절)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느니라.”(11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지명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명하여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함께 하셔서 그들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고, 요단가을 건널 때에는 강물이 그들을 침몰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풀무불 가운데에 있을 때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옷소매 한 부분도 타지 못하게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 43장의 의미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결코 망하지 않고, 도리어 담대해 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질그릇 같은 사도 바울에게도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자신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임을 철저하게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질그릇 같은 자기를 지명하여 선택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자기와 함께 하셔서 자기를 지켜주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으로서 참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섬기다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버린바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거꾸러뜨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육신의 고통과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고난이나 괴로움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결코 우겨쌈을 당하지 아니 하며, 낙심하지 아니 하며, 망하지 아니 하며, 버린바 되지 아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예수님의 죽으신 것을 몸에 짊어지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날마다 죽기를 원했고, 또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몸에 나타날 수 있도록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잠시 고난에 못 이겨 세상이나 그 외 어떤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질그릇 같은 자기에게 담긴 보배,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의 연약한 질그릇에 담긴 귀중한 보배를 위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삶으로,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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