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디모데전서 3:14-15
제 목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칠월 한달 직분자 선출을 위해 살피던 디모데 전서 3장을 마지막으로 살피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 교회를 예정대로 빨리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을 우려해서 몇 가지 긴급한 목회적인 지시를 합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게 함이니…"
바울은 가능하면 빨리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 교회를 직접 방문하고져 하는 소원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 성취가 불확실한 전망 때문에 그 대안으로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은 상황을 내어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먼저 세웠던 제1안이 실현 불확실한 상황에서 제2안을 마련한 것이 그동안 우리가 살펴온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생들에게만 허락하신 고귀한 능력입니다.
당시의 바울로서는 문제가 발생한 에베소 교회에 직접 가서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그를 놓아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책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차선책은 오늘 우리에게는 최선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처럼 앞을 내어다보지 못합니다. 바울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결국 차선책을 택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택한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일들이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손을 맺고 앉아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하려고 했던 대로 되지 아니하면은 달리할 수 있는 방안은 무언가라고 차선책이라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여러분의 차선책은 하나님의 최선의 방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로 시도하는 차선책은 한날 하나님의 때에 최선의 대책이 라는 것이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가서 직접 전하는 진리나 지금 써서 보내는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진리를 전하는 방법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어야 합니다. 갈 수도 있고 가서 말로할 수도 있고 말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글로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방문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바울은 2장1절부터 당면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목회적인 지시를 했습니다. 이제 그 여러 가지 지시의 결론으로서 바울은 교회의 본질을 언급하고 경건의 비밀의 핵심으로서 예수님 사건을 말합니다.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성도로서 처신하는데 유익하다고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디모데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믿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성격과 교회가 파수할 진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교회의 존엄성을 밝힙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존절한 처신을 하는데 도움을 줄려고 합니다. 그 방안으로 바울은 교회를 삼중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교회란 '하나님의 집'이라고 본문은 맨 먼저 밝힙니다. 교회는 뜻맞는 사람끼리 조직한 계모임이 아닙니다. 취미나 특기가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야되는 동호인 모임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회원이 될 수 있고 원하면 쉽게 탈퇴도 가능한 자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오늘 오다가 내일 떠나갈 수 있는 그런 조직이 아닙니다. 원하는 물건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물건을 사는 상점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조금 더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건물은 교회가 회집하는 처소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있어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금이 있어야 시작을 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모이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건물도 필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 한국교회가 늘 구별했듯이 교회와 예배당은 지칭하는 바가 다릅니다. 요즈음 뭐든지 시대가 간단하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컴퓨터 때문에 요즘은 더 간단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교회를 세우면 무슨무슨 교회 예배당이라고 최소한 일곱자는 되었습니다. 요즘은 아무아무 교회하고 끝나고 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예배당, 교회당으로 불러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곧 바로 이 종탑 두 개의 건물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처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소유하시고 주인이신 집이요 가정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모임에 임재하시고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야 옳습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왜 부르는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양자되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셨을 뿐만아니라 우리안에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 자신이 이 벽돌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가정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각기 인종도 다르고 의무와 책임도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큰 가정에는 가정을 돌보는 집사가 있어서 각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주인의 뜻을 이루도록 감독을 했습니다. 가정이란 구성원이 서로 의존해있고 상호간의 행동을 용납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으로 주님의 목표를 이루는 교회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등의 직분자들이 각기 자기 사명을 다하므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김으로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거기 속한 자의 안전과 보호를 보장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 교회에 속해 있다면 안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식솔들을, 가솔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족이라면 가장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질 것입니다. 가족을, 가솔들을 이끌어 나가는 책임을 혼자 지기가 정말 힘드는 시기입니다. 또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해서 고개가 숙여지는 시기를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늘의 진리를 이 땅에 밝혀야 되지 이 땅에 있는 것을 보고 성경의 진리를 풀려고 하면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하신 가장이십니다. 우리가 가족이라면 가장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식구이기에 악한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회중"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벙어리 우상 앞에 복을 달라고 절을 하는 바보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생명 없는 우상과 대조적인 표현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생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나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신앙공동체의 생명을 결정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활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는 공동체에게 새로운 활력을 공급하십니다. 주인의 뜻에 순종하기 원하는 성도들에게 활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구역이 활기가 없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속한 교회가 활기가 없다고 느끼십니까? 교회의 주인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회중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교회에 새로운 기운이 감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새로운 활력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회중이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신앙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몇몇 사람들의 의사가 교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공동의회든, 당회든, 제직회든 사람들의 의사가 교회의 방향을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공동의회든, 당회든, 제직회든 그 구성원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지시에 민감할 때 교회가 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의회가 모일때도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당회가 모일때도 제직회가 모일때도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대한 의식이 떠나가 버리면 그런 모임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모임입니다.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일을 하게 될뿐입니다. 모든 문제를 사람이 가지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이 누구든지 무엇하는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계신 주인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져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민주주의가 그 정치에 최고 이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입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주주의를 정치의 이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소수보다는 다수의 의견이 중요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효보다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선되는 교회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밝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오늘 출석한 자들로서 구성되는 모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그 마음속에 '아멘'으로서 받아드리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포되는 진리를 '아멘'이라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이 진리를 파수하고 널리 선포하여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서, 그리고 행동으로 파수하고 옹호하기 위해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되고 진리의 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기둥을 이해하기 위해 - 에베소 신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위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에베소 신전의 웅장함은 엄청 큰 기둥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127개의 기둥들은 엄청나서 여러분이나 저처럼 성지순례를 못해봐도 어딘가 사진에서 한번쯤은 보았을 것입니다. 엄청난 기둥들은 한나라의 왕이 들일 수 있는 선물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는 기능 뿐 아니라 기둥 상단부에는 유명인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합니다. 상당한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조각된 흉상입니다. 만약 그런 배경을 생각한다면 교회는 그 주인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진리의 기둥 뿐 아니라 터라고 합니다. 기둥은 지붕을 받치는 반면 터는 집 전체를 받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진리를 떠나면 교회는 교회될 수 없습니다. 기둥이 무너지고 터가 사라진 곳에 건물이 존재할 수 없듯이 교회는 그 생명이 진리 파수와 진리 선포에 있습니다. 그 진리에 서 있지 않는 교회, 그 진리를 선포하기를 중단한 교회는 교회되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매투 헨리는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 "만약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를 중단하면 우리는 그 교회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고려가 교회에 대한 고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에 속해 있을 의무가 더 이상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서 청교도들은 이런 분명한 좌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갔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진리, 교회가 사활을 걸고 파수하고 선포해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를 16절에서 밝힙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모든 성도가 수긍하며 고백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를 나머지 구절에서 밝힙니다.
이 부분은 모든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대로 초대교회에 불려졌던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초대교회에서 불러졌던 찬송에 한 부분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인용한 것입니다. 여섯 구절로 구성된 찬송 가사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가르친 말씀에 대한 반응을 찬양으로 보이도록 유도합니다. 우리도 설교가 끝나면 그 설교에 대한 화답의 찬송을 부르는 것처럼 바울도 교회의 감독을 세워야하고 교회의 집사를 세워야 하고 직분자 세우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제 찬양으로 그 반응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바울에게 있어서 예배의 기본요소입니다. 찬송은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맺게하신 열매입니다. 선포되는 진리가 믿어질 때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그 크신 이름을 찬양토록 합니다.
이제 바울이 인용한 찬송을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지상 사역을 노래합니다.이 노래는 두 구절씩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음이라" (16절 하반절)
대조를 이루는 한 쌍씩 살펴봅시다. 이 찬양을 통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경건의 비밀을 살펴봅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우리 신앙의 진수를 살펴봅시다. 그것을 기억하게 될 때 성도들은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첫 번째 대조는 경건의 비밀의 내용에 관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과 부활에 대한 고백입니다. 성육하면 오늘 처음오신 분들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회가 고백을 합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은 본래 신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몸을 가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삶을 함께 나누신 것입니다. 그것을 몸을 입으셨다는 말을 간단하게 성육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사에서는 성육과 부활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육신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저주아래 오셨습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의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보내신 방법이 독특해서 "여자에게서 나게하시고"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는 남자와 상관없이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여자에게서 태어나고 저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는 그 여자가 남자와 관계해서 우리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에게서 났다고 한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셔서 율법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전부터 계신분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심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무한한 사랑의 발현입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본래의 영광을 감추신 것은 우리의 눈이 그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행위는 또한 자신을 계시하시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은혜를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세상은 그 영광을 보지못했습니다. 다만, 신앙공동체가 그 영광을 알아보았을 뿐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로 내몰아졌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를 부인하고 내쫓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고 받으셨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처음 두 구절의 대조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사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삶의 두 단계에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아들께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것과 부활하심으로 성령으로 인정되신 두 단계의 삶을 보여줍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와 다시금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평소의 주장을 사건을 인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되신 사건이 부활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죽음에 사로잡힌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십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생을 죽음의 저주로 몰아넣는 선고를 이제는 무효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은 영이 새로워지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죄의 마지막 결과인 죽음을 고한 사건이 부활입니다. 그의 사심으로 말미암아 그만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십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는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사도 바울은 소리칩니다. 사망이 권세를 부리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판명되는 것은 율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이상 죄짓고 사망으로 치닫는 대열에서 우리가 매여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파하시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죄지으면 죽고마는 죄와 사망의 통치아래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통치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 째 대조는 경건의 비밀에 대한 전달방식을 말합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그의 부활에 대해서 천사들도 증인입니다. 복음서 곳곳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천사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노래했습니다. 천사는 또한 광야에서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때 수종드셨습니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의 부활 소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12장에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천사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받은 구속을 철저히 살피려고 합니다(벧전 1:12).
이 모든 것이 이 구절과 무관하지 않지만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줍니다. 부활 후에 아니면 부활과 동시에, 어쩌면 승천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자로서 천사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수많은 하늘 천사들에 의해서 경배를 받으신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은 천사들에 의해서 입증된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은 사도들의 초기 설교에 부각됩니다. 부활은 그가 완전한 인정을 받은 사건입니다.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대위임을 하신 분이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초대교회는 선교의 사명에 불탄 교회입니다. 그 시대에 사람사는 모든 문명 세계에 복음을 전한 무리들입니다. 복음은 결코 한 지역이나 한 민족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만국에서 전파되시고"라는 이 구절은 선교 사명의 완수를 고백합니다.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온 세상이 주님을 믿도록 남은 날 동안 우리의 삶을 드립시다. 세상이 그 주님을 고백하도록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누가 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든지 우리의 이 사명은 분명합니다. 선교하기를 그친 교회는 교회되기를 중단하는 교회입니다. 선교비는 교회 경상비를 먼저 지출하고 남으면 지출하는 항목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이라면 온 세상이 주님을 믿기까지 선교를 향한 우리의 노력은 끝나지 않아야만 합니다. 만약 선교를 중단한다면 교회가 교회되기를 중단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교회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막 대조를 살펴봅시다. "만국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음이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미치는 범위를 보여줍니다. 땅 위 만국 뿐 아니라 하늘에까지 그 영광이 미치고 있습니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8, 11). "해뜨는데부터 해지는데까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구약의 시인의 소원이 이뤄진 고백입니다.
영광 가운데 올리우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천사와 능력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오른 손에 잡으시고 그 세우신 사자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이끌려 나가는 정치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 주인의 장중에 있습니다. 주일마다 세우신 종들을 통해 말씀하셔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은 사회자나 설교자를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주인이신 분, 영광 중에 올리우신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오늘도 간절히 당신을 찾는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십니다. 자기에게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찾는 공동체에게 무한한 능력을 부어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분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바라는 공동체를 향해서 능력 덮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울산교회가 능력 주시기 위해서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 띄기만 하면 울산교회는 과거 40년의 역사를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니" 라고 주께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약속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분의 영광을 응시하므로 그 분의 영광을 나타냅시다. 40일 하나님의 존전에 있던 모세의 얼굴이 영광을 발했듯이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로 주님을 대망하는 여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광 중에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위대함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그 영광 중에 거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그 교회의 백성된 우리의 행동이 성도답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 뿐 아니라 모든 사역자들이,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교회가 위탁받은 진리의 위대함을 깨달음으로써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복된 여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