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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4)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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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4화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
유튜브: 댕댕이와 책을..
부동산 전화를 받았다. 어제 집을 보러 온 사람이 높인 가격에도 사겠다고, 당장 계약금을 보내겠다고 했다. 팔고 싶은 마음도 반, 팔고 싶지 않은 마음도 반이었다. 나이 들어 집 한 칸 없이 떠돌 생각을 하면 팔고 싶지 않았고 이제 겨우 세상에 첫발자국을 뗀 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팔고 싶었다,
은행 계좌번호를 보냈더니 바로 계약금이 들어왔다.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홀가분했다. 계약서를 쓰려고 부동산으로 갔다.
“제가 좀 늦었지요?”
미자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했다. 테이블 안쪽에 몇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매수자 일행으로 보였다.
“아닙니다, 딱 맞게 오셨습니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갑게 미자를 맞이했다.
“메카 사장님, 이분이세요. 집주인.”
메카 사장님이라는 말에 놀라 사람들은 살폈다. 안쪽 구석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현수였다. 미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 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이었다. 작은 눈을 크게 뜨면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구겨 쥐며 이현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집을 구하러 동행해달라고 조르더니 하필 미자 집을 살 줄이야. 하긴 4평 남짓한 공간에서 언제까지 살 수는 없을 터였다. 미자가 집을 팔아야 하는 이유보다 이현수가 집을 사야 하는 이유는 더 분명하고 시급한 일이었다.
부동산 사장이 놀란 듯 물었다.
“두 분이 아는 사이세요?”
“조금요.”
미자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현수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둘이 직거래해도 좋았을 뻔했습니다. 하하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죠? 세상 진짜 좁네요.”
“인연은 자연스럽게 찾아오지요. 집을 보러 같이 가자고 두 번이나 부탁했는데 단칼에 베어내시더니. 미자씨 집을 내주시려고 그러셨나 봅니다. 마땅한 집이 급매로 나왔다고 해서 집을 보러 갔는데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헐, 왜 하필 제 집이죠?”
“미자씨 집인 줄 제가 어찌 압니까? 집도 인연이 맞아야 하는데 우린 처음부터 인연인 듯합니다. 투자도 인연이지요.”
투자라는 말에 미자는 비위가 상해버렸다. 투자자에게 집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뒤틀린 마음을 바로잡았다. 집을 제값에 사 준 이현수가 몹시 고마웠다. 잔금날자를 두 달 뒤로 정하고 계약서를 쓰고 나왔다.
“이따, 밤에 오십시오. 우리 축배를 듭시다.”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곧바로 메카로 갔다. 오늘은 주황색 여자에 대해 꼭 물어볼 것이다. 동호회 친구라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지만 꼭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이현수 혼자였다. 이현수가 양주와 아이스와 과일을 가져와 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미자는 멜론을 깎아서 가지런히 놓았다. 샤인머스켓을 한 알 떼어 입에 물며 미자가 물었다.
“무슨 집을 휴게소 호두과자 사듯이 삽니까?”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어떤 후광이 흘러나오더군요. 바로 내 집이다, 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전 모든 걸 느낌으로 선택합니다. 집도, 연인도, 사업도요. 메카도 느낌하나로 선택했는데 얼마나 잘됩니까? 제 느낌은 정확하니까요.”
세상에, 느낌으로 모든 걸 선택하는 남자도 있다니. 미자는 이현수에게 우정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세상에 자신과 같은 허당이 또 있다니. 다시 무엇인가를 선택한다 해도 미자는 느낌이 중요했다. 첫 느낌은 조건을 뛰어넘었다. 이현수가 미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에서 아이스 알갱이 부딪는 소리가 투명하게 들려왔다. 이현수가 미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은밀한 눈길이었다. 미자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미자씨, 늘 제 옆에 있어 주십시오.”
미자는 이현수를 쳐다보았다. 늘
제 옆에 있어 달라, 는 말은 인숙의 휴대폰에 서 보았다. 인숙과 재혼하기로 한 남자가 인숙에게 프러포즈한 문자 내용이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말을 미자에게 재사용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자 몰래 인숙을 만났던 장면과 주황색 여자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머릿속에 교차하여 지나갔다. 미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예수님이라도 되나요? 늘 곁에 있게요.”
“제겐 미자씨가 빛입니다.”
말이 시였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작업을 걸다니. 선수급이었다. 미자가 가장 부러워하는 자유분방함을 이현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흘려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거짓말이라 해도 계속 듣고 싶었다. 미자는 자신이 점점 이현수에게 빠져들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지요. 그리고 폭풍우와 난파선이. 진주는 아주 깊은 곳에 숨어있지요.”
한 모금 마신 술로 취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면 재킷을 벗었을 것이다. 얼음물을 한 잔 마시고 미자가 물었다.
“우리가 60대이니 밀물과 썰물은 지나갔지요. 폭풍우도 만났고요. 둘 다 난파선이되어 만난 거겠죠? 근데 진주는 찾았나요?”
“찾았지요.”
미자는 이현수가 미자를 진주라고 착각한다고 생각했다. 이물질이 조개의 살에 파고든 고통으로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미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진주가 만들어져서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었다. 그건 죽어야만 알 수 있었다. 사리가 나올 것 같은 순간들은 많았다. 내 탓이오, 를 외치며 이해하고 넘어가고 용서하며 살아왔다.
이현수가 미자를 쳐다보았다. 애매함이 뒤섞인 슬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이러니, 기쁨의 그림자 속에 스며드는 슬픔은 감정의 아이러니였다. 지금 이현수는 뭔가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얼굴은 편안해 보였으나 언뜻언뜻 슬픈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서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한다면 그 중압감으로 서로를 구속하게 되겠지요. 이제 구속을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미자는 이현수가 책임을 회피한다고 느꼈다. 미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회피 아닐까요? 어느 정도 구속은 필수 아닐까요? 사랑도 변하나요?”
“사랑은 변하지요. 생명이니까 시시각각 변하지요.”
미자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은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자였다.
“그렇다면 누가 사랑을 할까요? MZ세대라도 그러진 않을 거예요.”
“에이,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변한다?’ 는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이현수는 예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오늘까지 이현수를 솔로로 만든 거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미자가 물었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나오는 ‘화양연화’를 가끔 떠올려요.”
“수많은 사람에게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가 흔하지 않은 전개에 있지요.”
“전 가끔 그런 생각 해요. 지금이 화양연화라고요.”
“혼자로도요?”
“예.”
“그건 생명을 포기한 거와 다름없지요. 노화를 방지하는 안티에이징의 첫걸음이 뭔줄 아십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이현수는 사랑을 섹스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왕조위와 장만옥에게 베드신이 있었다면 그 영화가 이렇게 오래도록 명작으로 손꼽힐 수 있을까요?”
“사랑을 하는데 도덕을 찾다니요? 그런 바보들이 어디 있습니까? 바보들의 행진을 예술로 포장한 걸 명작으로 꼽다니요. 지금이 화양연화라고 말하는 미자씨는 혼자 살면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얼마나 놓치는지 모르십니까?”
미자는 이현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약합니다. 나이 들수록 더하지요. 약하지 않다면 매력도 없습니다.”
미자는 이현수가 얄미웠다. 회피하는 태도와 말투가.
“저 주황색 입은 여자는 누구에요? 동호회 친구라고 했었죠?”
“손님입니다.”
“손님과 친구도 되나요?”
“되지요.”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건 할 수 없지요.”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요?”
“아니죠, 전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습니다. 선을 그어서 서로 민망할 일을 만들면 되겠습니까? 나이가 든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는 거 아닐까요?”
이현수가 미자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늘이라, 저는 우리에게 아직 청춘의 향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황색 여자가 낯이 많이 익어요. 누구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거의 매일 커피 마시러 왔다가 가지요.”
“어디로요?”
“여기서 커피를 두 잔 테이크아웃해서 가지요.”
“어디로요?”
“그건 모르지요. 우리 내일 여행갈까요?”
그 말은 마치 신혼여행을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 미자는 여행, 이라고 입으로 되뇌었다.
“이런 자유로움은 어디서 오죠?”
“더 이상 살아갈 목표를 잃게 되면 자유로워집니다.”
미자는 이현수를 이해했다. 이현수를 보면서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했다. 더 이상 살아갈 목표를 잃었다는 말을 미자도 이현수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누구나 웅덩이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이 있어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아니, 나쁜 일을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식은 뿌리였다.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지탱해 주는 뿌리. 이현수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붙잡아 줄 자식도 없는 것이다. 가엾은 남자.
“인간은 서로 바싹 붙어있어야 합니다. 서로 닿고 섞여야 합니다.”
미자는 섞여야 한다, 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몸을 섞는다, 는 말로 들렸다. 이현수는 밤과 낮이 달랐다. 특히 밤에 만나는 이현수는 재혼해서는 안 될 사람이 분명했다. 연인으로는 재미있는 남자였다.
미자는 자신이 낮과 다르다고 느꼈다. 밤의 정적이 빚어낸 비단 같은 공기와 적당한 알코올, 그리고 마술사 같은 이현수, 때문이다, 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이현수의 눈빛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미자는 이현수가 지친 나비 같다고 생각했다. 미자도 지쳤다.
홀 안에 정적이 흘렀다. 창밖은 어스름 가로등 불빛에 거리가 뿌옇게 보였다. 고단한 행인들이 7월의 밤을 터덜터덜 지나가고 있었다. 움직임 속의 침묵. 가로수 검은 잎들이 흔들렸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파리 하나 없는 나목이었는데,
이현수가 옆에 있었지만 외로웠다. 사랑하게 된다면 외로움은 더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매 순간 허망한 세상에서 영원을 새긴다고 해도 인간은 결국 혼자였다.
“좋아요.”
미자는 인자한 누나처럼 이현수의 얼굴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청춘이 사라진 얼굴은 서로에게 비애만 느끼게 할 뿐이었다. 미자는 덜컥 약속하고 말았다. 연민의 마음이 미자를 종용한 것이다. 지친 회색 나비는 날개를 접고 쉬어야 했다. 계약금을 받았으니 내일 당장 집을 구하러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밀어냈다. 집은 나중에, 라고 미자는 중얼거렸다.
미자는 자신의 배역을 생각해 보았다. 투박하게 살던 방향대로 과장하지 않고 포장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내재 된 것이다. 하지만 실패할 확률도 높았다. 정면 돌파, 는 잘나지 않은 자의 마지막 남은 비법이었다. 그 비법은 바로 정직이었다. 무엇인가 쉴 새 없이 원하는 것을 위해 부단히 꾀를 내는 것은 미자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직은 머리를 쓸 필요도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좋아요, 라는 말에 이현수가 기지개를 쭉 폈다. 만족한 강아지 몸짓 같다, 고 미자는 느꼈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쌌다. 승규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번 주는 엄마 모시러 못가. 바쁜 일이 있어. 대신 너 혼자 면회하고 오렴. 참외 좋아하시니까 참외 사 가지고 가. 카카오페이로 십만 원을 보냈다. 알았다는 문자가 곧 왔다. 단무지 대신에 묵은지를 씻어서 꼭 짜서 준비했다. 시금치와 어묵, 게맛살, 우엉조림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달걀 지단을 부쳤다. 김밥을 말면서 꼬투리를 계속 집어 먹었다. 단무지 대신에 묵은지를 넣은 건 신의 한 수다, 라고 생각했다. 찬합에 김밥을 담고 생수와 돗자리, 수건, 물티슈를 준비했다. 과일은 생략했다. 짐이 많아져서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넘치지 않을 것, 오버하지 않을 것. 물불 가리지 않고 전진하지 않을 것, 뒤로 물러설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발을 담글 것. 60 넘어 터득한 지혜였다. 자신은 자신이 보호해야 했다. 넘어져도 혼자 다시 일어설 수 있을 정도만 마음을 줘야 헤어질 때 쿨하게 손을 흔들 수 있는 것이다. 인숙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재혼할 남자와 열애 중인 연애 고수인 인숙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미자야, 나이 들어서 연애하면 덜 아플 것 같지? 절대 아녀야. 웬 조홧속인지 모르겠지만 황혼 연애가 더 아프고 힘들어야. 특히 헤어질 때.”
완벽하게 과일까지 준비해 가면 이현수는 미자를 더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혹 바람둥이일 수도 있는 이현수에게 정성을 다 쏟아부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만약 바람둥이임이 판명되면 줄행랑쳐야 하는 것이다. 보냉가방에 도시락을 넣고 집을 나와 메카로 가면서 승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우리가 안 찾아오면 엄마가 얼마나 슬프겠어. 일주일 내내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을 텐데. 다음 주에는 꼭 모셔 오자, 누나.”
“알았어. 그런 날도 가끔은 있는 거야. 누나 오늘 바빠.”
전화를 끊고 미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어쩌라구.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메카 주차장에 이현수는 벌써 나와 있었다. 청바지와 청색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이현수는 물 찬 제비 같았다. 미자는 픽, 웃었다. 이현수가 트렁크를 열며 휘파람을 불었다. 조수석에 앉으며 미자는 생각했다.
‘이런 남자를 조심하라고 들은 것 같은데.’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주황색 블라우스를 입었던 여자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초록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항아리처럼 폭 넓은 유럽풍 스타일 원피스였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두 개 들고 있었다. 팔목에 손가방이 달랑거렸다. 양산을 뒤로 젖힌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붉은 루즈를 바른 여자 얼굴이 양산 사이로 보였다. 여자는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자는 미자가 아는 여자 같았다. 옆집 여자가 분명했다.
미자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일 년 전쯤 이사 온 여자였다. 공들여 짙은 화장한 여자는 오전 12시가 되어 집을 나서는 미자와 몇 번 마주치곤 했다. 여자는 팔목에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어떤 날은 앞머리에 헤어 롤을 만 채 바쁘게 걸어가기도 했다. 골목 입구에서 좌회전할 때 옆집 여자는 막 도착한 택시를 타고 가버리곤 했다.
“아는 사람입니까?”
“옆집 여자에요..”
“왜 뚫어지게 쳐다봅니까?”
“어디 가는지 궁금해서요.”
“보나 마나.”
“어디 가는지 아세요?”
“추측할 수 있지요.”
“여자의 심리를 훤히 안다고 하셨지요? 그럼 말해주세요. 저 여자는 어디를 가는 걸까요?”
“보통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지요. 저 여자에 대하여 궁금했다면 미자씨 내면에 어떤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일탈의 욕구?”
“빙고! 사람들은 다 일탈을 꿈꾸지요. 일상은 평범하고 뻔하고 스릴도 없고 지루하니까요.”
“저 여자에 대해 아세요?”
“조금.”
검은색 중형자동차가 여자가 서 있는 곳에 멈췄다. 여자는 허리를 굽혀 엉덩이를 쭉 빼고 자동차 문을 열었다. 우아한 포즈로 자동차에 올라타는 여자가 보였다.
“우리도 어서 출발해요.”
“왜 서두르십니까?”
“우리도 저 자동차를 따라 가요.”
“미행하자는 겁니까? 아서요, 그건 불법입니다.”
자동차는 이미 낮은 구릉을 넘어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신호등에 멈춘 이현수가 미자를 쳐다보고 눈을 찡긋했다. 도로는 한적했다. 이현수는 운전을 물 흐르듯이 했다. 정면을 바라보면서도 운전대를 잡은 이현수의 팔과 손목에 시선이 갔다. 접은 셔츠 소매 밑으로 검은 털들이 누워있었다. 향수 냄새도 솔솔 났다. 남자와 좁은 공간에서 단둘이 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이현수의 숨결이 아주 가까이서 느껴졌다.
통일로를 달리던 검은색 중형차는 원당역에서 우회전했다. 좌우는 숲이었다. 시속 80킬로로 달리다 보니 앞서가던 중형차가 보이지 않았다. 미자의 관심은 이미 옆집 여자를 잊었다. 오직 가까이 있는 이현수의 숨소리만이 뜨겁게 느껴졌다. 갑자기 이현수가 좌회전했다. 메타세콰이어길이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어디로 가지요?”
“발길 닿는 대로 갑시다.”
“좋아요,”
“오늘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뭐, 고가이꺼쯤야. 디어 마이 프랜즈 보셨어요? 노희경 작가가 쓴 드라마에요. 친구, 선후배, 고향 친구 남녀가 차를 타고 길을 떠나요. 황혼의 청춘답게 팔팔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여행 다니다가 길 위에서 죽는 게 그들의 꿈이죠. 그게 가슴이 와 닿았어요. 간암 판정을 받은 고두심, 남편이 죽자,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김혜자, 가부장 끝판왕 남편과 황혼이혼을 선언한 나문희, 늙은 싱글 윤여정, 암 수술 여러 번 한 한물간 배우 박원숙, 김혜자를 사랑하는 로맨티스트 주현. 김혜자가 치매에 걸리자 주현과 밀월여행을 떠나거든요. 강원도로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일몰을 같이 보고 한방에 금 긋고 자죠. 다 늙어서 왜 저러나 싶겠지만 저는 알아요. 김혜자가 왜 금을 긋는지를요. 세상에는 김혜자 같은 여자가 보기 드물게 있어요. 노희경 작가는 사람을 참 많이 이해하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속없는 박원숙은 첫사랑을 만나요.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했던 남자도 병들고 외로운 처지였지만 둘이 만나는 카페에서의 이별이 잊히지 않아요. 나이는 들어도 가슴 속에는 소박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거지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김혜자였어요. 지상의 하나 남은 로맨티스트가 김혜자 옆에 있으니까요.”
“미자씨가 원하는 사랑인가요?”
“빙고! 하지만 전 김혜자처럼 우아한 왕비가 못 돼요. 무술이에 가깝지요. 받는 거에 익숙하지 않아요.”
메타세콰이어길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말하다 보니 이현수는 주현을 많이 닮았다. 주현처럼 뚱뚱보는 아니지만 닮아도 아주 많이 닮았다. 미자는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앞 차창에 러브버그가 서너 쌍이 날아들었다. 이현수가 워시액을 뿜고 윈도우 와이퍼를 작동했다.
“행복한 놈들이군.”
미자는 못 본 척했다.
“복상사를 하다니.”
미자는 못 들은 척했다. 러브버그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섹스를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메타세콰이어길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숲이 나타났다. 브런치 카페였다. 공터에 차를 세운 이현수가 트렁크를 열고 미자가 준비한 도시락과 돗자리를 꺼냈다.
미자는 이현수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 초입에서 연장을 들고 있는 관리인을 만났다. 관리인이 이현수와 미자를 쳐다보았다. 미자는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이쪽으로 올라가도 됩니까?”
이현수가 물었다.
“숲보다는 실내가 시원할 텐데요.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참을 더 들어가면서 이현수가 말했다.
“관리인은 나를 질투하는 거요.”
숲은 고요했다. 아주 가까이서 새가 갑자기 울었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꼬부라진 길을 걸어 올라가다가 공터를 발견했다. 무성한 밤나무 잎새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든 밤꽃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공터에는 융단이 깔린 듯 초록 이끼가 덮여있었다. 이현수가 돗자리를 폈다. 미자는 샌들을 벗었다.
“이 숲은 입장료만 내면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지요. 브런치 먹으러 왔는데 도시락까지 있으니 실컷 오후까지 놀다가 또 다른 데로 갑시다.”
“매장은 어쩌구요?”
“제가 없어야 더 잘 돌아갑니다. 브런치를 사 올 테니 잠깐 기다리십시오.”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이현수가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미자는 타월을 이불 삼아 덮고 돗자리에 누웠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나무 가지 끝에 까치가 앉아 있었다.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서 났다. 미자는 일어나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놀란 까치가 날개 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푸드덕, 까치가 날아올랐다. 미자는 까치가 날아간 쪽을 바라보다가 50미터 갈참나무 아래에 눈이 멎었다.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상반신이 보였다. 하반신은 관목들로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옆집 여자였다.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새소리 같기도 했고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한참 만에 이현수가 샐러드와 커피를 가지고 나타났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미자가 김밥을 이현수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스커피를 마실 때 옆집 여자의 노랫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현수가 고개를 돌려 한참을 살폈다. 미자도 바라보았다. 항아리 같은 원피스 자락에서 뭔가 둥그런 것이 튀어나왔다. 어떤 남자의 머리였다. 머리는 반백이었다. 미자는 상황을 눈치챘다.
“일어나요, 다른 데로 가요.”
“저 여자를 경멸하는 겁니까?”
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요.”
이현수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까 추측한다고 하셨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조금은.”
“저 여자 남편은 택시 운전사예요.”
“알고 있습니다.”
“왜 여기서 저러는 걸까요? 차라리 모텔에 가면 될 텐데요. 저 여자를 이해하세요?”
“이해하고 말고요. 저 여자는 지금 분투하고 있는 겁니다. 살기 위한 발악이죠.”
“살기 위한 발악이라고 하셨어요?”
“예. 지금 저렇게라도 해야.”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알지요. 어느 날 찾아와서 술을 달라고 하더군요. 전 압니다. 더 이상 삶의 목표를 잃은 사람의 눈빛을요. 같이 술을 마셨지요. 뭐라고 했는지 들어보시겠어요? 저는요, 아들을 잃었어요. 더 이상 결핍이 없어져서 이제 살만하다 싶었는데요. 그날 친구를 만나서 점심을 먹으며 제가 말했어요. 난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먹고 사는 문제도 벗어났고 아들은 군대 갔다가 어제 휴가 나왔고 남편은 개인택시를 사서 매일매일 돈을 벌어다 주거든. 정말 그랬거든요. 친구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거의 집 근처로 들어오는 골목에 다다랐을 때 자꾸 심장이 뛰는 거예요. 그래서 이유 없이 마구 달렸지요. 근데요, 집 앞 골목에서 우리 집 4층을 올려다보았는데 이상하게 하얀 커튼이 창밖으로 나와서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집을 나올 때 창문을 닫고 나왔거든요.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어요. 현관문도 닫고 나왔거든요. 현관문은 닫혀있는데 안에서 잠그지 않았더라고요. 집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들이 커튼 자락에 목을 매서 죽어있었어요. 어제 휴가 나온 아들이 죽어버린 거예요. 나중에 알았어요. 즈이 아버지한테는 군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남편은 통 말을 안 해요. 제가 아는 건 그것뿐이에요. 숨 쉬는 게 힘들어요. 어떡하면 생을 마감할 수 있지요? 다행히 동호회에서 남자를 만나 연애하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붙잡고 있지요.”
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매일 남자를 바꿔서라도 하루하루를 지탱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자의 신음 소리는 바람을 타고 새소리처럼 들려왔다. 미자는 더 이상 김밥도, 샐러드도 먹을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신 미자는 살그머니 일어섰다. 이현수도 일어나 돗자리를 접고 짐을 챙겼다. 올라왔던 길을 제쳐두고 위로, 위로 미자가 앞장서서 올라갔다.
“자꾸 올라가면 길을 잃어요. 그 길이 아닙니다.”
라고 이현수가 말했다. 미자는 듣지 않았다. 하산하면서 길을 잃었다.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는 곳이 많아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난데없이 무덤을 만나기도 했다. 비석이 세워진 주변으로 보랏빛 도라지꽃들이 흔들흔들 피어있었다. 주차한 공터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길이 없었다. 네이버 지도를 살펴봐도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군사지역이라 그런 것 같군요. 관리인 말이 결국 맞았어요.”
이현수가 무덤 옆에 돗자리를 폈다. 1시간 넘게 산을 넘었으므로 다리가 무척 아팠다.
“여기서 잠깐 쉬어요.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봅시다.”
미자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현수가 알아서 해결할 것을 믿었다. 하산하는 길을 반대로 고집한 것이 미안했다. 어디선가 경운기 소리가 났다. 미자는 발딱 일어났다. 저 멀리 눈두렁 길에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둘은 짐을 들고 뛰어가 농부에게 길을 물었다. 한참을 살펴보던 농부가 말했다.
“아, 작은 숲을 찾나 봅니다. 거긴 저쪽 산자락 밑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길을 헤매고 여기까지 오는 일이 있습니다. 가까워 보이지만 꽤 먼 곳입니다. 반대 방향으로 하산하셨군요. 저 산을 넘어가야 나옵니다.”
이현수가 농부에게 오만 원을 주었다. 둘은 경운기를 타고 자동차가 있는 공터까지 왔다. 경운기가 떠나자 차에 올랐다. 이현수가 시동을 켰다. 미자가 조수석에 오르자 이현수가 말했다.
“갑시다, 멀리, 멀리 떠납시다.”
“좋아요, 아주 멀리 멀리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시속 80킬로로 운전하면서 이현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조영남의 모란동백이었다. 미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첫댓글
우리
'문예빛단' 문예지가
더욱 더 발전하기를 기도드리오며!
나를 밝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나를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박현환 작가
저도
힘 찬
박수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