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국권 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허물고 세우기를 반복하는 모래성처럼
먼 후일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출처 《김소월시전집》 (2007) 첫 발표 <학생계》(1920. 7)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평안북도 구성 출생.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다. 스승 김억과의 인연으로 시작(詩作)에 몰입해 1920년 3월 《창조》에 <낭인의 봄>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배재고보 시기에 왕성히 시작활동을 하였으며, 짧은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친 뒤 《영대》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고향에 돌아와 1925년 《개벽》에 생전 유일의 시론인 <시혼>과 시집 <진달래꽃>을 발표하였다.
| 현재를 뛰어넘는 소월의 시제 설정
서정시는 일반적으로 화자의 마음 상태나 사상, 감정의 과정을 표현한 시라고 정의된다. 서정시를 읽을 때 독자는 화자가 처한 상황이나 태도, 어조 등을 토대로 시의 발화 맥락을 구성하여 의미를 파악한다. 화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였는지가 곧 시의 주제 의식과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여러 논자가 주목해 왔듯 김소월의 시 중 다수가 임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서 임은 대개 떨어져 있거나, 헤어진 상태이거나, 잃어버렸거나, 상실이 예정된 상황과 함께 소환된다. 김소월이 흔히 ‘이별의 정한(情恨)을 노래한 시인’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이에 관해 시인의 관심이 협소했다거나 그가 평생 사랑을 앓았다고 보기보다는, 유종호의 언급처럼 사랑이라는 현상에 관심을 두고 몰두했다고 보는 것(신동욱 편, 1980)이 생산적인 방향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보면 김소월이 주로 이별을 통해 사랑을 다룬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평론가는 김소월의 시에서 현재가 추방된 사람을 향한 과거지향적 감정으로 한(恨)이 형상화되고, 임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화자에게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까닭에, 독특한 시제 설정이 나타난다(오세영,1980)고 보았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조국의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냈던 저항시 계열의 시들과 비교하면 현재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도피적 태도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시인이 다루고자 한 사랑이라는 현상, 더 나아가 인간의 관계 맺음이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랑과 관계에 대한 천착은 지금 여기 임의 존재 여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화자가 이미 이별한 뒤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이 작품뿐만 아니라 이별 전인<진달래꽃>(1922)에서도 시인은 임을 사랑하고 있는 현재를 건너뛰어 미래 시점에서의 이별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김소월의 시에서 이별은 헤어진 임과의 관계를 잠시나마 복구하여 그리움을 해소한다거나 눈앞에 임이 없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현상을 탐구하는 시인에게 이별이란 사랑의 소멸이나 종료로서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과 ‘사랑의 종결’ 사이의 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제 <먼 후일>을 통해 이에 관해 살펴보자.
종결을 예상해 봄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사랑의 관념성
앞에서 언급했듯 화자를 중심에 두고 시의 발화 맥락을 구성하는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발화 상황을 구성해 보면, 화자와 임이 이미 이별해 있는 상황이 전제된다. 설명이나 묘사 없이 화자의 독백만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하며(권정우, 2018), 구체적인 문맥상으로도 ‘지금’이 아닌 ‘먼 훗날’이 되어서야 당신이 나를 찾을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한 현재와는 다른 상황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설정하는 것이 가정의 방식임을 염두에 둔다면, 미래의 어느 날을 가정해 당신이 나를 찾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화자는 현재 임과 이별하여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임과 다시 만나는 미래의 시점을 가정함으로써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미래의 상황에서나마 사랑하는 임을 등장시켜 현재의 이별 상황을 초월하고자 한다. 그런데 1연부터 4연까지 반복. 변주되는 '잊었노라'는 화자 스스로 사랑의 종결을 선언해 이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애써 이별 상황을 초월하고자 미래를 가정한 설정과 배치되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의미상의 긴장에 대해 그간의 논의에서는 ‘잊었노라’가 실제로 임을 ‘잊은 사실의 확인이라기보다는 임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강조라는 의미로 읽어낸 바 있다. 먼 훗날이 되면 잊었다고 말을 하겠다면서도, 오히려 그때까지 무척 그리워했다고 믿기지 않았다고, 그래서 오늘도 어제도 잊지 않았다고 털어놓는 화자의 절실한 고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서 반어법이 거론되는 것도 ‘잊었노라’라는 말에서 그 표면적 의미와는 달리, 끝내 언제일지 모를 먼 후일까지 임을 잊을 수 없다는 화자의 마음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의 작업으로 나타나는 화자의 태도는 사랑의 일반적인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화자는 ‘먼 훗날’, ‘찾으시면’에서 보듯 다가올 ‘그때’를 상정하여 당신을 ‘잊었노라’라고 말하겠다지만, ‘먼 훗날’은 지금 시점에서 특정할 수 없기에 시제상 미래인 ‘그때’가 현재가 되는 시점은 계속해서 미뤄지고 만다. 이러한 정황을 확대하여 시에서 언급한 ‘오늘’과 ‘어제’ 역시 그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먼 훗날’에 해당한다고 보면, ‘그때’는 과거로부터 미루어져 온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끝없이 연기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잊었노라’는 영원성에 비추어 사랑하는 임에 대한 화자의 믿음을 강조(노철, 2016)하는 표현인 동시에, ‘먼 훗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찾을 수도 있다’라는 비현실적이고 불확실한 가정에서 쌓아 올린 것(권정우, 2018)이라는 점에서 화자 스스로 이별을 인정하는 단계를 다시금 유예하는 표현일 수 있다. 이렇듯 닿기 어려운 이상으로서의 영원성이나 불확실한 가정을 바탕에 둔 화자의 발화 내용을 이유로 이 시에서 역설의 효과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 시의 발화가 반어적이든 역설적이든, 가정한 상황은 결국 화자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에 화자는 확실한 이별의 선언을 계속 뒤로 미루며 자신의 관념 속에서 그 사랑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이별을 가정함으로써 화자는 도리어 임을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시공간을 초월한 관념의 차원에서나마 사랑의 확실한 종결을 유예하며 사랑을 이어 가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별’과 ‘잊는’ 행위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모래성 쌓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질문은 화자가 왜 굳이 제 입으로 사랑하는 임에게 잊었다고 선언하는 상황을 가정하는가이다. 특히 현재의 이별 상황을 초월하기 위해 불확실한 가정에 기대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고려가요 <정석가>처럼 이루어질 리 없는 조건들을 나열하고 스스로 이별을 인정하는 수준으로 충분함에도, 시인은 <먼 후일>에서 대화 상황을 상정하고, 임에게 직접 잊었다고 선언하는 행위를 설정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선언의 순간이 쉬이 올 리는 없겠지만, 매 연마다 직접 인용의 형식을 빌어 ‘잊었노라’라는 말을 반복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잊었노라’라는 선언 자체에 있다. 화자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내가 임을 잊었다는 선언으로 인해 도달하게 되는 ‘사랑의 종결’이다. 화자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임이 떠남으로써 이별은 불시에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임을 화자가 정말로 잊음으로써 사랑이 끝나는 건 이별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별과 함께 사랑하는 임의 모든 것을 일순간 잊을 수는 없기에 이 시간을 오롯이 감내하는 것은 화자이며, 떠난 임조차도 화자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종용할 수 없다. 이 시의 1연에서 ‘잊었노라’라는 선언은 물질화된 언어로 스스로 이별을 선언하여 바로 그 인정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켜 봄으로써, 목도한 이별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로의 전환(김재홍, 2007)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를 다시금 살펴보면, 1연에서 4연까지 반복되는 ‘잊었노라’의 의미가 각 연의 맥락에 따라 새롭게 느껴진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 ‘잊었노라’라고 말할 것이라는 1연의 진술은 화자가 미래의 어느 날 하게 될 ‘사랑의 종결’ 선언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화제를 제시하듯 부자연스러운 행위의 설정을 통해 화자는 이윽고 자신을 나무랄지도 모르는 ‘당신’의 존재와 가정의 상황으로나마 대면한다. 2연과 3연의 ‘잊었노라’ 앞 ‘무척 그리다가’와 ‘믿기지 않아서’는 선언을 매개로 이별한 임을 잊음으로써 사랑이 종결되기 전까지 화자가 마주하게 될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기에 4연에서 화자는 ‘오늘도 어제도’ 잊지 못하고 먼 훗날 그때가 되어서야 잊겠다는 인식에 도달하면서 ‘이별’과 ‘사랑의 종결’ 사이의 간극, 즉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한다. 이 같은 해석에 기반을 둘 때 ‘잊었노라’라는 진술은 더 이상 단일한 의미로만 수렴되지만은 않는다. 이별 이후 사랑의 종결을 스스로 선언하기까지 화자는 밀려드는 바닷물에 언제든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쌓듯 자신의 관념 속에서 사랑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이렇게 쌓은 모래성이 이별의 상황 자체를 바꾸어 주지는 못하기에, 화자는 다시 그 성을 허물고 세우기를 반복한다. <먼 후일>은 바로 그렇게 유예되는 사랑의 종결을 다루고 있는 시이다. | 진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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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영민 편 (2007), 《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
권정우(2018), 「김소월 초기 시에 나타나는 <자야가>의 영향」, 『구보학보』 18, 구보학회, 145-173.
김재홍(2007), 「김소월 시 다시 읽기」, 『한국시학연구』 18, 한국시학회, 149-172.
노철(2016), 「화자의 발화맥락을 고려한 김소월 시의 해석」 『국제어문』 69, 국제어문학회, 129-148.
신동욱 편(1980), 『김소월』, 문학과지성사.
오세영(1980), 『한국낭만주의시연구』, 일지사.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4. 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