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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등반코스 |
하강 코스 |
피치수 |
비고 |
10월 8일 |
취나드 B |
고독의 길 |
6 |
FREE CLIMBING |
10월 9일 |
크 로 니 |
" |
9 |
FREE CLIMBING FREE CLIMBING |
합 계 |
8개 코스 |
43 |
구 분 |
품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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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 |
등 반 구 |
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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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10mm x 60m |
숙 영 구 |
매트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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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반 구 |
배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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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E 디어드롭형 32리터 |
취 사 구 |
가스 버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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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P. I |
연 료 |
E. P. I 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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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명 구 |
해드랜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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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 츨 |
의 류 |
트레이닝 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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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 용 |
기 록 구 |
카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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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미놀타 소형 |
의 약 품 |
1회용 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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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상 |
기 타 |
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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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
구 분 |
메 뉴 |
8일 |
간 식 |
크랙카 1/2, 건포도, 매치매치바 1 |
9일 |
아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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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 식빵 4쪽. 치즈 1장, 김치, 켄터키 후랑크 소시지 2개 |
*구입 식량 :
크랙카 (다이제스티브 2개, 버터 코코넛 1개)
건포도 대 1봉, 치즈 10장, 복숭아 통조림 1통, 매치매치바 10개, 수프 1봉,
약과 10개, 왕오징어 1개, 종가집 김치 1봉, 커피 10봉, 켄터키 후랑크 대 10개,
식빵(옥수수 1, 건포도 1), 인삼차 10봉
* 식수 : 5.5리터
<등반일지>
1989년 10월 7일(토)
많은 짐과 식량 때문에 택시를 타고 집을 나서 석근 형과 만나기로 한 우이동에 가니 석근이 형 혼자 기다리신다. 운회 형과 후배들을 기다리길 30분. 자정 가까이 되었고 내일 등반에 차질이 올 것 같아 그냥 올라가기도 하였다. 무너미 고개를 넘어 인수봉 대슬랩 밑까지 오르며 여러 생각에 담긴다.
크로니 샘터의 캠프 사이트에 가보니 2동의 텐트가 있어 혹시 하며 불러보니 우리 팀이 아니었고, 샘터 제단에도 텐트가 있어 할 수 없이 비좁은 구석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하고, 석근 형을 부르니 어느 텐트에서 우리를 부른다. 운회 형, 하영이, 미숙이, 순희가 함께 텐트에서 나오며 왜 이제 왔느냐 한다. 내일 연장 등반에 지원조도 없이 등반을 할 생각에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매우 반가웠다. 뒷정리는 알아서 할 테니 무조건 잠을 자라는 운회 형의 명령에 석근 형과 잠자리에 든다. 침낭 속에 들어가 누우니 잠은 오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체력안배, 식수문제, 등반시간 등 한참을 생각하며 한숨을 몇 번인가 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1989년 10월 8일 (일)
언제나 딱깔이인 나는 본능적으로 새벽임을 알고 눈이 떠졌고 텐트 지퍼를 열고 나와 보니 운회 형과 후배들이 벌써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석근 형과 같이 등반 계획서에 맞게 구입한 식량이 든 배낭과 등산장비는 장비대로 카라비너 45개, 퀵드로우 6개, 웨빙 슬링 6개, 코오드 슬링 4개 등... 모두 챙기고 의류와 침구류도 챙긴다. 등반구를 제외한 식량과 장비를 배낭에 넣는 작업은 매우 갈등이 생기는 일이었다. 침낭을 집어넣고 1.5리터 PET병 3개와 1리터 수통을 넣으니 배낭은 벌써 반이 넘게 차 버렸고, 무전기, 취사구, 카메라, 식량을 넣으니 배낭은 맹꽁이처럼 되어 버려 지퍼를 닫을 수 없다. 결국 오버트라우져와 우모복을 빼내고 말았다.
모두의 성원을 받으며 취나드 B 스타트 지점으로 향한다. 08시 1,300m의 거벽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1피치의 크랙과 슬랩은 몸의 상태가 좋은지 약간 언덕진 평지와 같은 느낌이다. 1피치와 2피치의 언더 크랙을 순식간에 끝내고 톱을 교대, 석근 형이 4피치 중간에서 다시 확보, 격시로 5피치를 마저 해 치운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그런대로 좋은 진척이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았으나 간단히 간식을 한다. 상쾌한 기분으로 고독의 길로 하강하여 취나드 A 스타트에 다가선다. 평소와 다르게 3파티 8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코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 이 코스는 비어 있을 것 같아 온 것이라며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5시간은 기다릴 것 같아 첫 파티의 톱을 뒤따르기 시작하여 톱을 추월 한번에 2피치를 등반해 버렸다. 차례를 기다리라는 그 파티 후등자를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귀가 너무 얇아 무안해 미칠 지경이다.
석근 형이 올라오고 3피치 1자 직선 크랙을 보니 긴장감이 감돈다. 작년 이곳을 등반할 때 꽤나 힘든 노동을 했는데 지금은 짐이 많아 행동이 불편한 가운데 얼마나 고전을 하게 될까. 오버행의 첫째, 둘째 볼트를 손으로 잡고 일어서니, 30m의 직선 크랙이 기다리고 있다. 째밍한 발은 깨질 듯 아프고 테이핑한 테이프가 모두 벗겨져 버렸다. 손째밍으로 겨우 밸런스를 잡고 있는데 배낭은 나를 뒤로 잡아당긴다. 10m을 오른 후 어렵게 후랜드 3호를 설치한다. 이럴때는 힘이 빠지기 전에 빨리 오르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순식간에 치고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주르륵 흐른다.
다시 반침니를 올라 확보를 하고 큰소리로 악을 써 본다. "완료" 석근 형이 등반을 시작한다. 자일이 올라오는 속도로 보아 무척 고전하는 모양이다. 한참을 올라가다 "앙카" 재빨리 자일에 제동을 건다. 자일 고정, 다시 등반 시작, 고정, 등반 시작하여 올라온 석근 형의 모습은 마치 권투시합 중 펀치에 몰려 고전 중 공소리가 울려 자기 코너로 돌아 온 권투선수 같다.
4피치는 완만한 슬랩으로 쉽게 올라 정상 감투바위 밑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잠시 본부와 교신하니, 운회 형이 시간을 지키라는 말이 들린다. 무슨 소리인가 하였는데 우리가 너무 오버 페이스를 한다며 체력 안배에 주의하라고 하신다. 정상에서 과일과 빵, 치즈, 소시지, 녹차 등으로 점심을 하고 침낭을 꺼낸다. 주위 사람들의 집중되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안고 계획된 40분의 수면에 들어간다. 침낭 속에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떠보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하강을 하여 거룡 스타트 지점에 다가 갔다. 거룡 1피치는 가장 등반이 힘든 곳으로 밴드상의 페이스다. 석근 형에게 확보를 부탁하고 등반을 시작한다. 작년 등반시 세 번을 추락한 끝에 겨우 등반을 한 지점에 다다랐다. 다시 한번 옛날 기억을 되살려 공식을 계산하고 심호흡 후 초크 칠을 잔뜩 한 다음 순식간에 지나 버렸다. 옛날에는 손톱 끝에 겨우 걸리던 홀드가 첫마디까지 잡히고 겨우 프릭션이나 되었던 스텐스도 발끝을 걸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석근 형이 올라와 격시로 2피치를 마친 후 인수봉 남면 교차로라 할 수 있는 하늘길 2피치에 도착해 보니 연휴라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지만 거룡길은 비어 있어 다행이다. 3피치는 등급이 놓은 슬랩으로 중간 확보용 볼트가 이어진 피치로 짐을 진 채 프리 등반을 시작한다. 4피치는 볼트길과 크랙으로 이어져 있고, 5, 6피치는 슬랩으로 이어져 체력을 아끼며 등반을 하였다. 거룡 코스 등반을 마치니 시간은 오후 4시 30분,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고 바람도 불기 시작한다. 이제 몸도 피로에 젖어 온다. 손의 악력도 떨어졌다. 캠프의 운회 형을 불러 본다. 종선 형님을 모시고 기존 B를 등반중 이라 한다. 식구들이 보고 싶어 잠시 기다리며 간식을 한다. 입맛도 별로 없고 물만 먹힌다. 해가 서쪽으로 닿았다. 다시 B. C를 불러 본다. 만경대에서 이어진 쪽도리봉의 단풍이 눈에 들어오고, 백운대에 개미떼같이 모여 있던 사람들도 줄지어 내려가고 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가락의 구멍난 테이프를 교체한다.
마지막 해가 서쪽으로 사라졌다. 다시 운회 형을 불러보나 대답이 없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하강하여 서면 슬랩에 다가섰다. 석근 형의 표정에는 피로가 역력하다. 볼트길을 무겁게 오른 후 완료하고 다시 2피치와 3피치를 한번에 끊어 버린다.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 때문에 밸런스를 잃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디선가 운회 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앞 능선의 바위틈에 있는 운회 형을 보니 갑자기 힘이 나고 손톱만한 돌기가 주먹만하게 보인다. 3피치를 완료하고 인수봉이 무너질 듯 외친다. "완료" 석근 형의 차례다. 평소와 다르게 매우 고전하신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나 보다. 산밑 속세에 별들이 하나씩 점화되더니 온통 은하수를 이룰 무렵 석근 형이 올라왔다. 하늘과 땅이 온통 은하수 물결이다. 목구멍과 얼굴에는 소금가루와 초크 가루가 엉켜 붙어 까칠까칠하고 손가락도 감각을 잃은지 오래다.
정상 밑의 바위틈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하였다. 식구들이 보고싶어 저녁을 먹으며 B. C와 교신한다. 기활 형, 종선 형, 운회 형, 미숙, 미옥, 하영이, 순희 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B. C에 죽엽청주가 있으니 내려와서 한잔씩하고 가라 놀리신다. 우리도 오가피주를 꺼내서 한 잔씩 마시니 속이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만사가 편안하고 부러운 것이 없는데 석근 형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있는지 자꾸 B. C의 xx를 찾아 교신을 원하나 거절당했다. 나는 아름다운 서울 야경 속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생각해 본다. 곧 찾으러 갈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이름 모를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전한다. 바람이 너무 차가와 배낭을 등에 지었다. 21:00 내일을 위해 잠에 든다.
1989년 10월 9일 (월)
성급한 추위로 기온은 영도를 오르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적중하였는지 매우 추웠다. 잠시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시계를 본다. 2시!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4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가을을 건너 뛸 듯한 추위와 건너편 백운대의 광신자들의 괴성과 울부짖음에 입에서는 욕설만 튀어나온다. 포근하게 잠을 자리라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친 생각이 든다. 석근 형도 한 잠도 못 자고 뒤척인다. 그렇게 2시간을 뒤척이다 방법을 연구, 석근 형과 온 몸을 뒤엉키고 밀착시키어 잠이 들었다. 잠시의 깊은 수면은 온 몸을 개운하고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5시 30분 먼동이 틀 기미가 보인다. 천마산 봉우리 위의 장엄한 일출을 보았다. 아침을 준비하여 먹는데 식수가 부족하여 절약하였지만 겨우 1.5리터 병 하나만을 남겨 놓았다. 하강하여 B. C 바로 옆의 크로니 스타트 지점에 다가 선다. B. C에는 회장님께서 계시고 하영이, 순희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하루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너무너무 반갑다. 그러나 되도록 말도 삼간다. 연장등반의 순수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5, 9급 전체 9피치의 크로니 코스는 밤새 추위에 떤 우리의 몸을 가볍게 풀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새벽의 고요함에서 깨어나 여명의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다시 인수봉 정상에 섰다. 간식을 한다. 산은 어제보다 더욱더 붉다. 배낭의 짐도 많이 줄고 물도 많이 줄어 몸은 한결 가볍다.
하강을 하여 하늘길 스타트 지점에 다다랐다. 하늘길 스타트 지점 밑에 물이 흐른다. 그러나 연장 등반의 순수성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하여 마시지 않기로 하였다. 하늘길 1피치는 85년인가 86년에 암벽 대회의 예선 코스로 만만치 않은 곳이다. 처음 시작되는 지점의 하켄도 빠져 버려 스토퍼를 설치하였으나 불안하여 핵산트릭 하나를 더 설치하니 추락하여도 괜찮을 듯 싶다. 미세한 크랙에 손가락을 걸고 서너 스텝을 올라 오버행을 넘다가 결국 미끄러져 추락하고 만다. 할 수 없이 배낭을 벗고 다시 하강, 션트로 등반하였다. 하늘길 1피치와 2피치는 크랙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곳이다. 석근 형은 이제 크랙은 지겹고 슬랩만 나오면 반갑다고 했다. 3피치를 등반하는데 기존 B 위에서 남녀 날라리들이 장난을 치다가 우박같이 수많은 낙석을 시켜 B. C쪽으로 떨어진다. B. C가 걱정이 되어 교신을 하니 괜찮다 하여 다행이다. 하늘길을 마치고 점심을 하였다. 이제는 물도 바닥이다. 손등도 까지고 손가락도 아려온다. 물을 먹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300cc정도 남아 있는 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갈증이 나 비상식인 복숭아 통조림을 먹었으나 달짝지근하여 갈증이 더 하였다. 간식 중에 수분을 흡수할 것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지막 남은 사과하나도 먹어 치웠다. 이제는 목이 막힌다. 다시 피같은 한 공기의 물을 나누어 마셔 답답함을 푼다.
이제 남은 코스는 궁형 4피치와 의대길 4피치가 남았다. 이제는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곤란을 가중시킬 뿐이다라고 생각되었다. 한 번에 1,2피치를 등반하고 3피치에 도착하였다. 이번 등반의 최대 난관이다. 석근 형에게 살짝 웃는 여유를 보이며 처음으로 "형! 빌레이 좀 잘 부탁합니다."하고 긴장을 풀어 본다. 몸을 스트레칭하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등반 시작 첫째 하켄과 둘째 하켄에 자일을 통과시키고 크럭스 전에 후랜드를 설치하여 매달려 쉰다. 다시 스트레칭하고 힘을 내어 크럭스를 넘는다. 이제 확실한 15m 레이백이다. 팔도 놓고 싶고 다리도 흐느적거린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내 확보점에 다달아 "완료"하고 외친다. 석근 형도 뒤따라 어렵게 오른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피치 나는 이곳 등반의 공식을 알고 있다. 처음 이곳을 등반할 때는 네 번을 추락하여 결국 석근 형에게 톱을 넘긴 비굴의 지점이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크랙에 중간 확보용으로 한 손으로 매 달려 스토퍼를 설치한다. 손가락으로 매달려 발로 벽을 밀며 두세번 손을 교차한 후 오른발을 뻗어 훅킹 후 흑점을 잡으니 완료이다. 석근 형은 더 더욱 가볍게 훅킹한 다음 흑점을 잡는다. 정말 예술이다! 다른 사람은 맨 몸으로도 펑 펑 나가떨어지는데 우리는 지친 몸으로 배낭까지 지었는데 말이다. 어려운 곳을 다 지나왔기 때문인지 갑자기 힘이 솟아난다. 자일 한 동으로 동시 하강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마지막 물로 입안을 적시었다. 이제는 배고픔도 갈증도 없다. 피로도 손가락의 고통도 모른다. 가벼운 마음으로 의대길을 등반한다. 모든 것이 자동이다. 더 큰 홀드에 대한 미련도 스텐스에 대한 불안도 없고 아무거나 잡으면 홀드이고 밟으면 스텐스이다. 3피치도 단숨에 끝내고 4피치 마지막을 석근 형이 선등하여 완료 후 나도 등반을 완료하였다. 정상에서 초크와 상처로 얼룩진 손을 서로 굳게 잡는다. 힘들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큰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통도 남아 있지 않고 아쉽게 등반을 끝나 버렸다.
다섯 번을 하강 B. C에 도착하여 코펠 가득 물을 마신다. 그리고 돼지불고기, 쌀밥, 김치, 소시지 등등 푸짐한 식사는 이빨도 거치지 않고 넘어 간다. 그리운 사람들과의 이틀만의 해후는 더 더욱 즐거운 일이었고 그 동안 아낌없이 지원과 성원을 해준 형님들과 후배들의 고마움을 억지로 누르며 가슴 깊이 새겨 둔다. 밤늦게 배낭을 꾸려 하산하는 피곤한 발걸음이지만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에는 더욱 더 멋진 등반을 하리라 다짐한다.
<반성과 문제점 연구>
* 계획과 실제
이번 등반의 목적은 거벽(Big Wall)에 대한 간접 경험에 두었고, 인위적으로 거벽을 가상하여 실제 상황과 근접하려는 훈련이었다. 요세미테 계곡의 앨캐피턴중 가장 쉬운 코스인 Triple direct 코스를 가정하여 등급은 5급, 최대 피치 등급 5.18a, A2, 전체 43 피치로 결정하고 훈련 장소는 북한산 인수봉 8개 코스 연장 등반으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거벽에서의 체력안배와 등반 시스템 연구를 위해 장비사용 방법 습득과 실습 또한 음식의 적절한 섭취와 짐의 운반에 대하여도 경험해 보기로 하였다.
실제 훈련에서는 거벽이라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거벽과 상면하지 못한 점도 있겠으나, 코스의 모양이나 흠집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미지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체력도 적절히 안배할 수 있어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되었다.
등반시스템 연구 및 적용과 장비 사용면에서는 현대 등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속공과 경량화에 한결 자신감을 얻었고, 체력 안배면에서는 사전에 코스의 충분한 이해와 체력단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와서 급격한 체력의 저하, 신체적 무력함, 수지 손상, 악력의 저하 등이 나타나 등반을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 등반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강인한 정신력과 성취욕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식량면에서는 체력손실과 더불어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행동식의 부적응에서 오는 식욕 감퇴도 현저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등반에 있어서 계획대로 외부의 지원이 없이 모든 식량 및 장비를 처음부터 등반자 스스로 운반함으로서 본래의 목적과 합치된 완벽한 연장 등반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다.
* 장 비
장비는 경량화에 초점을 맞추고 자일은 암장의 특성을 살려 10mm, 60m 1동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짧은 코스는 2피치씩 등반할 수 있는 점, 코스가 붐빌 때 한 피치를 건너뛸 수 있는 점, 60m 1동이면 인수봉 어디에서나 하강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클라이밍 테이프를 사용하였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 손끝만을 겨우 감았는데도 손가락 보호에 도움을 주었고, 마찰력도 증대하였다.
* 식 량
식량 역시 경량화와 조리 시간, 맛, 칼로리, 가격의 순으로 결정하였다. 식수는 4번의 식사와 5번의 간식으로 2명이 1박 2일 동안 5.5리터를 소비하였는데 좀 부족한 것 같았고, 이에 대한 해결책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 결 론
한마디로 귀중한 경험을 하였다. 배낭을 지고 등반 연습을 하라는 선배님들의 말씀을 실감할 수 있었고, 평소 주말 산행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일하고 해이한 정신자세와 구태의연한 등반 양식으로는 거벽으로 가는 길을 좁힐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에 8피치 3개 코스를 등반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고, 등반 양식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성과면에서 그 동안이 체력훈련이 이번 등반에 상당한 도움과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동안 기존 암장에 대한 권태감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더욱 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탐구하여 진취적인 생각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코 등산은 유희가 아니며, 놀이도 아니고 참다운 취미인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순수한 가치에 열정적인 행위가 표출될 때가 아닌가 한다.
끝으로 등반에서 생사를 같이한 석근 형, 큰 위안과 힘이 되어 주신 회장님과 종선 형님 그리고 운회 형과 후배들의 뜨거운 동지애와 아낌없는 지원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