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의 디카시, 선자리와 갈길
- 디카시, 무엇이 문제인가
디카시는 '생활체육'과도 같이 일종의 '생활문학'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으며, 누구나 창작할 수 있고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행복한 시운동이 디카시의 꿈이다. 동시에 디카시는 하나의 시대사적 운명이다. 세상이 활자매체 문자문화의 시대에서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로 현저히 이동한 지금, 디카시와 같은 문예장르의 출현은 어쩌면 미리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누구나 '손안의 보물'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여기에 몇 줄의 시를 덧붙이면 형식상의 디카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아주 극적인 광경이나 장면, 아주 뜻있고 보람 있는 영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그에 부응하는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시적 문장을 불러오자는 것이다.
이 짧은 시행이 촌철살인의 기개를 가졌으면 그 묘미 또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연후에 디카시 카페나 디카시인협회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SNS를 통하여 많은 동호인이 실시간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지난날에는 꿈에도 그리기 어려웠던 시의 모형이다. 디카시를 이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가장 새로운 문예 장르라 호명하는 이유다. 그 디카시가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오늘의 디카시를 이끌어가는 중심 세력에서는 이렇게 언표한다. '디카시는 시가 아니다. 디카시는 디카시다. 이 디카시가 우리 남녘의 한 작은 고장 고성에서 시발 되어 삼남을 휘돌고 한국의 국경을 넘어 해외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경남지부 제주지부, 대전·충청지부, 중국동포지부, 경북지부 등이 돛을 올렸고 또 여러 지역에서 지부 창립 및 인준을 대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뉴욕, LA, 시카고, 워싱턴, 캐나다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시카고 디카시연구회에서는 주 정부에 공식적인 문학단체 등록을 마쳤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 국가들에서도 디카시는 확산일로를 거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해외의 지역에서 디카시가 한글로 창작되는 이른바 새로운 한류(韓流)라는 사실이다. 거의 온 세계의 대학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과가 있는 상황이기에 이러한 문학·문화적 흐름에 어려운 일이 없다. 참으로 찬탄할만한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디카시를 아무 전제 조건 없이 기리기만 한다면, 기리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모든 문학 또는 예술의 창작에는 지킬만한 규범이 있는 동시에 그 규범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정신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난초를 그리는 데 있어서 법이 있다는 것도 안 될 말이지만, 법이 없다는 것도 안 될 말이다"라고 한 것이다. 디카시의 선험적인 기준을 수용하되, 그 단발의 영상과 축약된 문면(文面) 속에 넘치는 사유(思惟)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디카시를 하나의 새로운 예술 형식이자 문학 운동이라고 할 때, 자칫 예술이나 문학이 사라지고 형식이나 운동만 남는 스산한 풍경을 걱정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라도 시는, 디카시는 미학적 가치 곧 예술성을 지향하는 그 고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에 쓰기는 쉬우나 잘 쓰기가 쉽지 않은 터이다. 짧고 압축된 시로서 하이쿠가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얻고, 그 가운데 수발한 작품이 즐비한 것은 여기에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근자에 이르러 디카시의 원래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서 유사한 시의 사례가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다. 우선은 그 자발성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연후에 디카시의 전제를 성의 있게 설명해주는 것이 우리의 방략이다. 통제보다는 자발성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그것이 하나의 대열이 되도록 애써 보자는 의미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디카시의 전도에서 마주칠 여러 상황 가운데 극히 소수일 뿐이다. 디카시가 하나의 문에 운동인 까닭에 어느결에 패거리 주의로 흘러갈 우려도 없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체적 노력에 앞서 한 개인의 치밀한 영상과 시의 조합이 여러 부면으로 성과를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이 기본적인 시 쓰기의 방정식이 잘 작동해야 소위 '운동'이 가치가 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은 시간과 세월을 아기지 못한다. 표현을 달리하면 지속적인 시간과 더불어 디카시 창작에 고군분투한 사람의 시가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이치다. 이제 19년 성년에 이른 디카시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단처(短處)와 그를 넘어설 방안을 더불어 궁구(窮究)해 보는 노력은 앞으로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82024. 9. 1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