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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선사 행장
큰 스님의 첫 이름은 순천이요,
강릉 최씨 사홍공의 3대 독자로 태어나셨으니
황해도 백천군 해월면 해암리가 고향이시다.
黃해는 불보를 뜻하고 바다-달(海月)은 법보요,
바다-바위(海岩)는 차라리 寺庵이 있는 승보를 뜻하지 않던가?
을묘년 섣달 초하루에 나시니 불멸 후 2429년이요,
서력으로 따지면 1886년 1월 5일 이시다.
순천이란 '하늘의 뜻대로'란 말이겠거니와,
태어나시던 그 날 어머니 전주 이씨께서 꿈을 꾸시는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보살님 한 분이 흰 코끼리를 타고
하늘 끝을 뚫고 강하해서는 꽃과 보배로 장엄을 이룬
성스러운 岩台 위에 앉아 한참동안을 말없이 정진하다가
문득 삼매에서 깨어나 가슴속에 간직했던 감로병을 부인에게
건네주고는 사라져버리었다.
그 날 새벽 스님의 모친께서 별 고통도 없이 순산하시었다.
때에 온 곳도 없는 해무리가 해암리 일대를 감싸고 돌면서
떠날 줄을 모르더라.
부친을 병신년(1896) 11세 당시에 여의시고,
12세 되던 때 우연히 모친을 따라 경기도 양주 흥국사로 구경을 갔는데
마치 수 백 년 대대로 살아 온 옛 집인 양 도무지
어색해 하지도 않고 도리어 묵어가기를 조르는 것이었다.
세상 누가 이날로 영영 속세 인연이 끊기고 말리라 짐작이나마 했었겠는가?
소년은 스님이 되어 버린 것이다. 3대 독자가 이와 같이 되자
그 어머니도 뒤따라 절에 와서 지내게 되었다.
경자년(1900), 15세 때에 보암스님을 은사로
금운스님을 계사로 득도하니 법명을 성암性岩이라 하였다.
스님께서는 일평생 학교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으시다.
글도 쓰시지 않았고 독서를 하지도 않으셨다.
혹 필요하면 다른 이의 손에 의존하시곤 했다.
임인년(1902)에는 그나마 한 분밖에 안 계시던
자친마저 타계하시니 그야말로 의지할 곳 없는 혈혈단신이 된 것이다.
산란함도 달랠 겸 스님은 이 때부터 끝없는
방랑의 행각 길에 드시니 거리거리로 문전 걸식으로
소위 '동냥중' 노릇하며 염불로 살아가기만 꼬박 6년을 다 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 멈추는 대로
다만 누더기 한 벌과 메마른 지팡이 하나가
성암스님의 일생 전부가 아닌가?
내 행장 겨우 누더기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니
동서로 치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뉘 있어 그리 어디로 다녔느냐 물으면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 없었다 하리로다.
무신년(1908) 23세 되시던 때에는 금강산, 묘향산 등지를 다니다가,
비로소 참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듣게 되면서
크게 발심하고는 저 끝없는 방황 대신에
철따라 안거에 들며 승려의 본분사를 지어가게 되었다.
4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공부는 별 진전이 없었다.
분명한 일은 이 공부에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뚜렷한 이룸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신해년(1911) 성월선사로부터 화두를 간택 받으시더니
같은 해에 수덕사에 계시던 만공선사를 친견케 되었다.
어제가 새봄이더니 오늘은 가을이 되었네.
해마다 날 바꿔 달 가기 시냇물 흐르듯
명성 탐하고 이끗을 찾아 구구히 떠다니는 자여
회포를 미처 채우기도 전에 쇤 머리로 돌아 오네
올바른 스승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았다.
한번 인간으로 태어나 기필코 성취해야만 할 문제들이
분명하게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부모도 나와 친하지 않나니 뉘 가장 친한 고 하면
눈 먼 거북과 절름발이 자라라 하리라.
만공스님 외에 그 사형이신 혜월스님과 용성스님도
즈음해서 모두 친견케 되는
"이 분들이 아니고야 어찌 오늘의 <나>랄 것이 있겠는가?" 하신다.
눈 먼 거북의 나무토막 만난 인연이며
영산회상에 꽃 들어 높은 기틀 보임이로다.
경허스님 아래 두 거봉이 있으니 만공스님과 혜월스님이시라,
"만공스님은 위대한 지도자요 근엄한 스승같으시며,
혜월스님을 자비로운 보살이시며 천진한 무심불이라,
마음 없는 부처님 같으셨다" 한다.
일생을 두고 혜암스님께 법의 감로수는 베푼 큰 스승들이었다.
여기에, 만공스님 회하에서 많은 큰 스님들이 나셨지만
특별한 두 분이 계셨으니 대안선사와 성월선사라,
이 분들은 실제로 만공스님보다도 연상이셨다고 한다.
교분이 있으셨던 다른 스님들 중에는
전강스님, 고봉스님, 춘성스님 등이 계시다.
이렇게 해서 만공, 혜월스님을 위시하여
당시 오대산에 계시면서 선과 교에 두루 능하셨던
선지식 용성스님과 성월, 대안스님 그리고 가장 가깝게 지내시던
도우 전강스님은 혜암스님 평생의 功德海(공덕의 바다)였으며
불도의 원천이었다.
그 동안 벌써 15년여의 용맹정진이 단절 없는 탁마와 정진 속에 있었다.
그러던 중 스님이 44세 되시던 해 기사년(1929) 3월 7일,
양력으로 4월 18일 마침 만공 조실 스님 생신날이 되어
모든 대중이 금선대로 모인 자리에
조실스님은 문득 지필묵을집으시더니
소매를 다시 높이 걷어 올리신 다음
붓에 듬뿍 먹물을 먹혀서는 단숨에 게송을 지으시는 것이 아닌가?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이 없으며
다시금 큰 가풍이랄 것도 없나니
이와 같은 문자 없는 法印
그대 혜암*에게 부촉하노라
* 뒤에 혜월 스님의 법호와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혜암으로 글자를 바꾸신 것이다.
한국불교가 지리멸렬하여 부처님의 혜명이 꺼져가던 차
근세에 다시없는 경허라는 큰 기둥이 나와 불법을 일으켜 세우니
본개 이 법은 달마스님과 육조 혜능스님을 원천으로 하고,
그 맥을 임제스님에 두니 경허(1849∼1912)스님은
세존하 칠십오세요, 임제하 삼십칠세며 자국의 선맥은
고려말의 나옹(1380∼1436)을 거쳐 이조의 청허(1520∼1604)를
주류로 하여 오다가 암흑기를 둔 후 근세에 와서야 부활케
된 것이니 청허로부터 12세 손이시다.
경허하 그 초대가 만공(1871∼1946)스님과 혜월(1861∼1937)스님이시다.
특히 만공스님께 내리신 게문에,
구름과 달과 시내와 산 곳곳이 같나니
수산선자의 큰 가풍이라 하겠다.
은근히 문자 없는 법임을 나누어 부촉하니
한 가닥 권세기를 산-눈(活眼) 속에 있도다.
선맥은 이렇게 해서 명예도 공명도 아랑곳없이
오직 불철주야 공부밖에 모르던 젊은 스님 앞에 홀연히 이른 것이다.
어찌된 영문을 몰라 혜암스님은 여쭈었다.
"스님, 제 공부가 아직 멀었습니다.
도를 이루지도 못한 제게 무슨 법을 전하십니까?"
혜암스님의 이 질문에 만공 조실스님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이 법은 생일선물이라는 것일세!"
예사롭지 않은 일이요, 더구나 기대 밖의 일이라서 다시 여쭙게 되었다.
"이 산중에는 허구한 큰 제자들이 많고 저는 아직 그릇이 안 되옵니다."
만공스님은 이에 흔연히 일어나
다락에서 발우를 꺼내시더니 짧게 맺으셨다.
"그럼 이 그릇을 쓰게나.!"
혜암스님도 지금 말이 끊어졌다.
문득 전해 들어온 옛 글이 떠올랐다.
나에게 있는 마음 - 가르침은 볼 수 있는 형상도 없고
눈에 띄는 모양도 또한 없어서
언어로 따질 말이 끊기었고
생각으로 헤아릴 곳마저 멸하였도다.
붉은 비단에 게문을 싸 넣으시고
대중에게 선포하시니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묻는 이도 없었다. 어차피, '둥글고 둥근 것은 둥근 것을 모른다.'
법과 발우를 전해 받으신 후에도
禪師께서는 일체 공부 밖의 일에는 상관치 않고
대 선지식들의 회상에 나아가 탁마하고 보임하는 일에만 전념하시었다.
"죽는 그 날까지 공들여 나아간 힘으로
지옥의 고통을 면할지언정 다소의 자부심으로
생사의 바다에 뛰어들지 말 일이다."
스승 없는 공부는 죽음과 같으며,
탁마 없는 공부는 발광해 미친 짓이며,
공들이지 않는 공부는 병든 일이라. 고도 말씀하신다.
선지식을 여의고 산다는 것은 부모가 없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두순선사께서도 송하였다.
회주의 소가 나락을 먹으니
익중의 말이 복창이 났다.
천하를 두루 다니며 의원을 찾은 끝에
돼지의 어깨 왼쪽을 뜸 떠 나았느니라.
참된 스승 아래 탁마를 거듭하고 공들여 힘을 기른 내실은
저 세상이 추구하는 일체의 보상과는 무관하지 않던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이치는 바로 출가자의 본분이리라.
한때 시자가 여쭈었다.
"깨달음이 없는 제자는 무슨 인연으로 佛祖의 혜명을 잇는 것입니까?"
노사께서 말씀하시었다.
"견성이다 견성이 아니다 하는 것은 한가닥 功行을 이른 것이니
간절 (切)字로 믿음의 내용을 삼으면 견성이 그것이요,
信이 없으면 마음에 공행이 끊어져
결국 생사의 바다에 떨어지게 되니
이를 일러 '성품(性稟)을 못 보았다'하느니라."
앞서 만공 조실스님께서 말씀하신 생일선물이 바로 그것이니
法器라 함은 대저 功器[공 담아두는 그릇]를 이르기 때문에
大悟[크게 깨달았다]라 부르는 것이요,
깨달을 것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일찍이 육조스님께서도 누차에 걸쳐 일깨워 주신 바
성품 보는 것이 功이요, 평등이 곧 덕이기 때문이다.
육조스님 말씀이다.
능히 공들여 불조의 법문 탁마하는 그것이
바로 여래의 깨닫는 그 성품이니
만일 나무를 부벼 불을 일으킬 수 있다면
진흙 속에 결정코 붉은 연꽃 피리로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가깝고 마음이 깊으면 말이 적은 법이다.
공행이 깊으면 깨달음이 크다.
이때 즈음해서 마침 오대산의
용성선사께서 만공선사에게 공안을 물어 오셨다.
용성 : 語默動靜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 보시오.
만공 : ……….
용성 : 良久란 말이요?
만공 : 아니오!
이 법담은 여기서 끝나고 뒤에
전강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평해 말씀드리게 되었다.
전강 : 두 선지식께서 서로 부등켜안고 진흙탕 속으로 빠진 격입니다.
만공 : 그럼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전강 : 어묵동정을 여의고 도대체 무엇을 이르란 말씀입니까?
만공 : 옳다, 옳다.
혜암 師께서는 이 법담이 크게 마음에 걸려 참구하여 오시다가
드디어 기회가 오자 다시 물으시게 되었다.
혜암 : '어묵동정을 여의고 도대체 무엇을 이르란 말씀입니까'라고
노 선지식께 아뢴 그것이 옳단 말이오?
어째서 여읠[離] 것이 있는데 이를 [吐] 것이 없다는 말이오?
전강 : ……….
혜암 : 그럼 내게 노스님께 여쭌 것처럼 물어 보시오.
전강 : 어묵동정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 보시오.
"이것은 胎中에 들어가기 전의 소식을 알아야 한다.
태중에 들어가기 이전의 소식은 무엇이냐?
나보고 이 도리를 이르라 할 것 같으면 破器相從이라,
즉 깨진 그릇은 맞추지 못한다 하겠다"
하시고 곧이어 게송을 지으시니
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낱 가운데 뉘 감히 마주칠 것인가?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라면
바로,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
세상에서는 이를 일러 悟道頌이라 불렀다.
어찌되었든 제방에서는 이 놀라운 소식에
선잠깨는 사람처럼 벙벙하였다.
전강스님의 평처럼,
"부처님 말씀을 탁마하는 것이 조사들이라"
공안을 탁마하지 않고는 바른 불제자가 되지 못한다.
만공 조실스님이 입적하시자 덕숭산 또한 빈 집이 되었다.
몇몇 선덕 스님들이 모여 상의한 끝에
혜암스님을 모셔 조실로 추대하였다. 허나 여늬 때처럼 거절하신다.
"조실이란 자리 생지옥일세. 하필이면 그겐가? 그저 공부나 같이 함세."
해방이 되었으나 앞뒤가 없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던 중
다시 6.25가 터지니 이래저래 국민은 불안과 굶주림에서
기적 같은 행운을 기대하는 쪽으로 심량이 기울었다.
불교가 무슨 아랑곳인가?
당시 승려는 사회적으로 천대시 되었고 직업적으로 되었으며,
고아, 사생아, 정신박약아의 피난처로 절집이 이용되었다.
몇몇은 다만 불사라는 명목을 띄우고 재산관리인, 고리채업자,
지주가 되어 호의호식하는데 급급하였다.
기억도 분명한 만공스님의 사자후는 바로 공부하는 학인의 지표가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이냐?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구더기요,
구더기보다도 더러운 것은
바로 팔도 안에 있는 본사 주지들이다. "
진정한 학인은 극소수요, 불교 종단은 부귀와 금권의 매개체로 되었다.
스승을 자처하는 도적은 많고
수좌를 자처하는 선량은 없다.
주지노릇 한 번 남처럼 않고 평생을 수좌로 지내신 스님! 최후의 말년
덕숭총림의 방장으로 추대되시자 다시 한 번 일갈 호령이시다.
"먹다 버린 개밥 먹으란 말이냐?
개살구야 개살구!"
세상을 살아가는 노 선지식의 분명한 처세에
제자들은 문득 놀랍고 황송하여 한동안 말을 잃었다.
승려 대신 백의[흰 옷의 속인]가 공부하는 세상이요,
비구는 잠자고 비구니가 공부하는 세상알고 늘 한탄하신 이유가 있었다.
노 선지식 밑에서 공부한 무리만도 수만에 이르렀지만
법을 얻은 이는 백의가 60여요, 비구니가 20여에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하는 비구가 전부였다.
기껏 오는 이는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과 공명을 얻어 보려는 낮은 계산에서였다.
그렇다. "학인이 스승을 찾아다니는 세상이 아니라
도리어 스승이 학인을 찾아 나서는 때였다."
세상은 탓해 무엇 하는가? 부처님 당시도, 달마스님 당시도,
경허스님 당시도 꼭 같았다.
노사께서 말년 출입도 못하실 지경이 되어 누워서 여생을 보내실 제의 탄식 :
경허스님의 지금도 생생한 날벼락.
허공을 깨는 외마디.
주고 다시 걸머쥐는 眞音
사방 둘러보나 사람하나 없으니
의발은 누구에게 전할꼬?
저들은 악인입니까?
"법을 믿지 않는 까닭이니라."
지옥고를 받게 됩니까?
"선지식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어째서 그러합니까?
"저들이 스스로 마음에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니라."
100년의 인생을 師께서는 한마디로 "功行"이라고 부르신다.
"공들이는 가운데 불조의 本參公案이 열리기 때문이다.
혹 견성한 사람도 그래서 공들이지 않기 때문에
다시 쓸모없이 된다."고 하셨다.
참선공부에 세 가지가 구비되어야 하니
바로 큰 信心과, 疑團과 憤心이라.
견성을 본 사람에게
공들이는 그것이 대신심이 아니고 무어냐?
견성을 본 사람에게
공들이매 스스로 큰 의심덩이가 역력하지 않던가?
견성을 본 사람에게
공들이는 그것이 대분심 없이 되던가?
믿기 때문에 공들이는 것이요
의심덩이 뚜렷함으로 공들이는 것이요
분하기에 공들일 밖에 없지 않던가?
어린 아이 쉽게 공 가지고 놀 듯 조사공안을 '알았다!'는
천박한 생각으로 다루는 제방의 납자들을 가차 없이 때려 부순
노 선지식의 法刀는 애초에 부처님 법을 탁마해서
빛을 더욱 내게 하는 조사스님 네들의 바로 그 정신이 아닌가?
황벽스님 송에,
六塵 멀리 벗겨버리는 일 예사롭지 않나니
고삐 끝을 꼭 쥐고 한바탕 다리기 함이로다.
한 때 뼈 에이는 추위를 겪어 보지 못하고
어찌 싱그러운 매화향기 코끝에 대보랴.
노 선지식은 이제 인생의 황혼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낙상으로 인하여 허리와 무릎 한쪽을 불구로 만들고
8년 여를 자리에 누워 계셔야 했다.
반 그릇 뜨거운 물에 밥 한 술로 끼니가 메꿔 지면
잣토리기와 꿀로 입맛과 영양을 대신하시었다.
음식은 삶처럼 단조로왔다.
그러나, 공부하는 무리는 예나 같아 수덕사에 계시든,
온양 무쌍원에 계시든, 어느 사암에 계시든지
스님계신 곳이 그대로 총림이어서 참선과 법담으로
그칠 새가 없었다. 기뻐하시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공부하는 학인을 찾으시는
숙업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쇠약하신 몸, 그림자 같은 세상 보기로 눈은 밤낮이 분명치 않았고,
거리 없는 소리로 북소리와 종소리조차 구별 없는 귀는 적막의 벽,
無聲의 늪에 빠진 듯, 하였다.
시자는 고래고래, 스님은 말귀에 동녘바람이다.
齒根은 무너지고 돌 뿌리 같은 서너 기둥의 잇바위로,
음식은 기실 얼마나 부담 큰 것인가?
하나 어찌하여 건강하고 힘센 자가 이 힘 못 쓰고 병든
작은 육신 앞에서 송장만도 못하게 안절 부절이며
몸 둘 바를 모르게 되고 마는가?
저 건강한 잇몸과 잇뿌리를 가지고도 어째서 입을 열 수 없는
벙어리가 되는 것인가?
저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지 못하였던가?
비교하건대, 세상이 한 결 같이 권력과 금전에 친할 즈음
소위 한국불교 종단이라는 이름뿐인 괴물은
문중과 금권을 쥔 실력자 밑에서 살림살이하는
무법의 왕국이었다.
도인은 모두 <보잘 것 없는 늙은이요>
선지식은 <무능력한 골칫덩어리>였다.
허나 이런 불평조차 노스님께서는 차라리 나무라신다.
"용사혼잡(龍蛇混雜)이 아닌가?
비교하여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더러운 법이야.
밖을 향하여 구함이 있으면 부처와 조사가 이니 죽나니
스스로 제 목숨 잃는 도리가 여기 있다.
저들을 욕하여 제 몸만 상하고
비난하여 스스로 마구니 권속되니
피가 터지도록 떠들어 봐야 쓸모없나니
차라리 입 다물고 남은 여생이나 보내리로다."
工夫,工夫,工夫라! 나옹스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참선은 모름지기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라
쾌히 공부를 짓되 다지 채찍에 채찍을 가할 것이니라.
모르는 결에 의단을 깨달아 부수게 되면
진흙소가 겁 앞의 밭에서 쟁기질하게 되리라.
세월은 번갯불 보다 빨랐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세연을 아시고
제자들을 독촉하신다.
"빨리 물으라!"
갑자년(1984)! 노 선지식은 이미 부처님보다도 20년을
더 사신 한국의 古佛이시었다.
모든 무리를 불러 일일이 공부를 점검하시고는
급히, 그리고 비밀스러이 시자를 불러 이르시었다.
무척이나 더운 수덕사의 한 여름이었다.
이 땅에 종자는 충족되었다.
서양은 이제 새로운 인연처니라.
급히 허나 비밀리에 이루거라
진법을 펴는 일이 쉽지 않도다.
"이런 건강으로 어디를 가신다고 하십니까?"
"성품을 보는 법은 무슨 이유로든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이니라.
이 일은 세상에 처음이라.... 불경을 가르치고,
禪을 내세워 사람을 모아 주먹 쥐고, 할하고,
세송이나 지으며 결국 검고 흰 것도 구별 못하면서도
이것이 禪 생활이니, 이것이 선의 기도니,
이것이 선적 염불이라 떠드는 자칭 조사는 있어도,
직접 불조의 화제를 통해서 견성해 들어 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법은 아직 없었느니라.
내 20년 전부터 이러한 기회를 기다려 왓음이라,
지체할 수 없느니라. 저 혼자 견성했다 떠들며 무리를 끌어 모으니,
굶주린 학인은 먹을 것이 없도다.
여우 새끼되어 재주부리며 스승의 흉내나 내다가
염왕이 심판할 제 무엇을 이를 겐가.?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모른다.
제자를 가르치지 못하면 그들의 병만 尤甚하게 되리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마왕의 자손이니라.
한때 미국에 사는 이가 말하기를,
'서양에는 이 책 저 책 만들어 불법에 대한 약방문은 들어가 있는데
막상 병을 치료할 의사가 없다'는 거야!
자! 어서 짐을 꾸리라! 서둘러 성사시키되
"쥐 잡는 고양이처럼
애 낳는 어머니처럼 하라.
이번에 낭패를 보면 불법은 다시 여망이 없게 되리라."
세인의 조롱과 비난은 뒷전에 두고
100세의 노 선지식은 여전히 부처님 은혜 갚는 일로 분주하시다.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 송하시기를,
갑자년 윤 10월 5일(11월 27일)
믿고 또 믿어 믿음이랄 것도 없는 곳에
절정에 이를 경허와 만공의 옛 자취가
한번 움직여 서양의 초조가 되었도다.
약한 자들은 모르는 체 입 다물고
어리석은 무리들은 뒷전 입방아를 찧는 동안
노 선지식은 어떻든 참되고 바른 공부를 지키고
가르쳐야 한다는 변함없는 과제를 성취시키고 계셨다.
관광의 도시 로스앤젤리스 근교에는
수 많은 산업, 교육 도시들이 있었고,
특히 유능한 과학자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자유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오렌지 카운티에는 적어도 300만 이상의 상류계급 지식인들로
가득 차 있었고 특히 동남아시아, 동구유럽 피난민과
전통적 영국계, 남미계열의 지식층들이 더욱 밀집해 살고 있었다.
미국은 과연 '세계인의 백화점'이었다.
신문기자인 북구 덴마크 여인이 그 첫 상대가 되어
제일 먼저 찾아와 가장 큰신문에 일면 톱기사로
한국불교의 최고 지도자가 이 땅에 온 까닭을 알리는
길조역할을 하였다.
매일 3,4십 명 씩 쉬지 않고 모여 들었다.
3개월여 동안 약 천명의 지식층을 만나시니,
그 중 3·4명은 아주 높은 경지에 까지 이르러 법명을 주시며
공부 잘 하여 성불할 것을 부촉하시었다.
허나 병든 노자에 이 얼마나 큰 무리인가?
100세 생신에 큰 잔치를 열어 제자들과
미국 학인들의 축례를 받으신 얼마 후
무리한 대인 접촉을 견디지 못하시면 서도 한사코 막무가내이시더니
갑자기 기력이 떨러지면서 식음을 전폐하시기에 이르렀다.
긴 여행은 마침내 까닭이 있음에서였다.
"내가 너희와 곧 작별할 것이니 그리 알라."
"언제 가시렵니까?"
"수덕사 인경 꼭지가 말랑말랑해질 때 가겠노라."
"어디로 가십니까?"
"화탕지옥으로 가노라."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도시에서 죽으면 영구차에 실어다가 화장장에 집어넣을 것이고,
또 혹 산중에서 세상을 버린다면 상여도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다가 석유 한 사발로 불에 태울 것이요,
곧 돌아와서는 상단에 향하나 꽂고 삼정례하고
영단에도 향하나 꽂고 심경 한편 외울 뿐이지 물질을 소비하지 말아라.
또 나는 부처님 사리도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사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사리가 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같은 사리는 아닐 것이다.
혹 있더라도 곧 땅 속에 파묻든지 아무데나 버리든지 할 일이지
만일 한 줌이라도 거두어 탑을 짓고 세우거나 한다면
나하고는 대천지 원수가 될 것이다.
사리라는 것은 오직 명안종사가 택한 사리만이 진정한 사리이기 때문에
본래 정법을 갖춘 대선지식이 택사리할 제 소위 사리라는 것을
손바닥에 놓고 법력으로 관하면 음사리는 피고름으로 화하고,
탐사리는 구렁이나 뱀으로 화하고, 치사리는 도깨비로 화한다고 하였다.
허나 진정한 사리라 할지라도, 심지어 부처님 진신사리라 하더라도
거기에 공경심을 내어 예배하거나 기도하지도 말 것이니
그 모두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업이 되리라.
왜냐하면 공경심을 내는 것이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모두 상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자연히 부처님 법과는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상은 모두 허망하니라 하셨으니
도무지 일정한 실체랄 게 없으니
환 또한 일정한 실상이 없느니라.
'이를 일러 無相之法이라 하느니라.'
다만 상을 취하지 않으면 저 성인의 뜻에 부합하고
일체의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이른다.
나의 게송을 들으라.
佛과 祖師의 봉우리 위에
오래 숨겨 둔 사리가 나타나니
자신의 사리는 보지 못하고
대중들이 부산하게 치달리는구나.
내 부처님의 사리를 보니
부처는 사리에 있는 게 아니라.
사리는 부처로조차 나왔으되
보고 있는 부처가 부처의 사리를 본다.
그러므로 앞으로 재 불심종의 문인들은 밝게 밝게 오로지
공부에만 정진하고 이 몸이 다하도록 무량-중생을 위해
무량 서원을 닦을 것이니라."
벽안의 제자들이 물었다.
"앞으로 공부를 어떻게 지어야 하며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공들이는 것이 스승이요, 이 밖에 다른 할 일이 도무지 없느리라.
듣자니 소크라테스도
'공들이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하였느니라."
"달리하실 마지막 말씀은 없습니까?"
" 굳 바이!"
짧은 이 말씀 한마디 후 뒤로 돌아 누우시니
서양의 힘든 여행을 여기서 끝내신다.
마땅히 객지인 미국에서 입적하마고 고집하시었으나
제자들이 엎드려 빌며 고국 땅에서 기다리고 있는
많은 제자들을 생각하여 부디 귀국하실 것을 간청하였다.
겨우 허가를 얻어 모셔 건너오니 그 해 2월 16일이다.
문을 걸어 잠그시어 외인의 출입을 금하신 후
제자들의 공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시면서 3개월을 더 지내시었다.
모셔온 글 : <우담바라> <별하나 나하나> 글
출처 : 무진장 - 불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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