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언어의 범위
언어는 고요한 자리에 놓고 위하기만 하는 미술작품이 아니다. 일용잡화와 마찬가지의 생활용품으로 존재한다. 눈만 뜨면 불을 쓰듯, 물이나 비누를 쓰듯, 아니 그보다 더 절박하게 먼저 사용되는 것이 언어라 하겠다. 언어는 철두철미 생활용품이다. 그러므로 잡화나 마찬가지로 생활에 필요한 대로 언어는 생기고 변하고 없어지고 한다.
상쾌! 룩쌕에 가을을 지고
산천돌이하는 좋은 씨 -즌
현대적 주말휴양을 위한 토요특집
이것은 1937년 가을 어느 토요일, 『조선일보』에 실린 산책지 특집기사의 제목이다. ‘룩쌕(rucksack)’과 ‘씨즌(season)’은 외래어다.‘주말휴양’이나 ‘토요특집’도 한자어긴 하나 전 시대에 없던 새 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외래어나 한자어를 쓰지 않고는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한번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길이 없기어든 가지야 못하리요마는 그 말미암을 땅이 어데며 본이 없기어든 말이야 못하리요마는, 그 말미암을 바가 무엇이뇨. 이러므로 감에는 반드시 길이 있고, 말에는 반드시 본이 있게 되는 것이로다.
김두봉의 『말본』에서
외래어나 한자어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시험해보느라고 만든 것 같다. 더구나 그 『말본』의 본문에 들어가
쓰임 | ㅏ, | 몸은 다른 씨 위에 쓰일 때가 있어도 뜻은 반드시 그 아래 어느 씀씨에만 매임 |
ㅓ, | 짓골억과 빛갈억은 흔히 풀이로도 쓰임 |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암호로 쓴 것같이 보통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거의 저자 개인의 전용어란 느낌이 든다. 개인 전용어의 느낌을 주며라도 무슨 내용이든 다 써낼 수나 있을까가 의문이다.
선풍기의 동작에 관한 조출(操出) 공기량, 발생압력, 회전도, 소요마력 및 효율 등의 상호관계로 일어나는 변화상황을 표시하는 것을 선풍기의 성능이라 한다.
이런 내용을 '씀씨' '짓골억' 식 용어법으로 어떻게 제3자가 선뜻 인식할 수 있게 써낼 수 있을 것이며, 더욱이
그는 클로우크에서 캡을 찾아 들고 트라비아타를 휘파람으로 날리면서 호텔을 나섰다. 비 갠 가을 아침, 길에는 샘물같이 서늘한 바람이 풍긴다. 이제 식당에서 마신 짙은 커피 향기를 다시 한번 입술에 느끼며 그는 언제든지 혼자 걷는 남산 코스를 향해 전찻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클로우크, 캡, 트라비아타, 호텔, 커피, 코스 등의 외래어를 굳이 안 쓴다고 해보라. 이 외에 무슨 말로 '그'라는 현대인의 생활을 묘사해낼 것인가? 만일 춘향이라도 그가 현대의 여성이라면 그도 머리를 파마로 지질 것이요 코티를 바르고 파라솔을 받치고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을 것이다. “흑운(黑雲) 같은 검은 머리, 반달 같은 와룡소(臥龍梳)로 솰솰 빗겨 전반같이 넓게 땋아……”나 “초록갑사 곁마기” “초록우단 수운혜(繡雲鞋)”이런 말들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새말을 만들고 새말을 쓰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 유행 이상 엄숙하게, 생활에 필요하니까 나타나는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먹는 생활이 먼저 생기고, 파마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이 먼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인 ‘커피’ ‘파마’가 생기는 것이다. 교통이 발달되어 문화의 교류가 밀접해지면 밀접해질수록 신어(新語)가 많이 생길 것은 정한 이치로, 어디 말이 와서든지 음과 의의가 그대로 차용되게 될 경우에는 그 말은 벌써 외국어가 아닌 것이다. 한자어든 영어든 괘념할 필요가 없다. 그 단어가 들지 않고는 자연스럽고 적확(的確)한 표현이 불가능할 경우엔 그 말들은 이미 여깃말로 여겨 안심하고 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신어의 남용으로, 넉넉히 표현할 수 있는 말에까지 버릇처럼 외국어를 꺼낼 필요는 없다. 신어를 남용함은, 문장에선 물론 담화에서도, 어조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보나 현학(衒學)이 되는 것으로 보나 다 품위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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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우크(극장, 호텔 따위의) 휴대품 보관소인 '클로우크룸(cloakroom)'을 말함.
코티(Cory) 향수제조업자인 코티가 세운 화장품회사, 또는 그 회사의 상품.
흑운(黑雲) 검은 구름. 여기선 검고 고운 머리칼을 가리킴.
와룡소(臥龍梳) 용틀임 무늬가 조각된 빗,
전반(剪板) 종이를 자를 때 쓰는 좁다랗고 얇은 긴 나뭇조각,
갑사(甲紗) 품질이 좋은 여름용 비단
곁마기 ①여자가 예복으로 입던 저고리의 하나. 연두나 노랑 바탕에 자줏빛으로 겨드랑이, 깃, 고름, 끝동을 닮. ②저고리 겨드랑이 안쪽에 자줏빛으로 댄 헝겊.
우단(羽緞) 거죽에 곱고 짧은 털이 촘촘히 돋게 짠 비단, 벨벳,
수운혜(繡雲鞋) 구름을 수놓은 신발.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1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