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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의 주해와 적용
공동체 안에서의 대인관계
권성수 / 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마태복음 18장은 흔히 ‘공동체 훈화’로 알려진 본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대인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다.
마태복음 18장이 ‘그 때에’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공동체 훈화는 17장의 변화산 사건 및 성전세 사건과 관련된 것 같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변모하신 사건에 대해서 세 제자에게 부활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어도 그 사건이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백성들이 왕에게 내는 세금(성전세)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자유스럽고 좋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18장은 35절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11절은 (없음)으로 되어 있다. 초기의 사본들에는 ‘인자는 잃어버린 자들을 구하러 왔다(눅19:10)’는 말씀이 들어 있지만 그것이 10절과 12-14절을 잘 연결시키기 위해서 후에 삽입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본문에는 들어 있지 않다.
전체 35절을 공동체 생활, 신자들 간의 대인관계 면에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자들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1-4절). 둘째 소자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고 영접해야 한다(6~10절). 셋째 소자들을 상실된 상태로 버려 두지 말고 찾아야 한다(12~14절). 넷째 범죄하는 자를 사랑으로 권징해야 한다(15~20절). 다섯째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야 한다(21~35절).
1.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1~4절)
예수님은 자신이 곧 당하실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17:22~23) 제자들은 그 말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다투면서(눅9:46에서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되어있다)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나는 바다 위도 걸었어. 나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는 것도 보았어. 나는 물고기 입에서 나온 기적적인 돈으로 주님과 함께 성전세를 냈어’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가장 큰 인물이라고 내세웠을지 모른다. 다른 제자들도 각기 나름대로 큰 인물이라고 내세웠을 것이다. 이런 질문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었다. 교만은 인간 타락의 뿌리이다(창3:5). 교만은 공동체에 갈등과 분쟁을 야기한다(빌2:1이하).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교만한 질문을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을 위대한 인물로 손들어 준 것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상징적인 교훈을 하셨다. 어린아이들을 이등 시민으로 무시하는 것이 당시 유대인 사회였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철이 없다거나 어리석다거나 보챈다거나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의미의 모델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겸손(자신을 낮춤, 4절)과 의존(예수님을 믿음, 6절)의 모델로 세우셨다. 어린아이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당시 사회 상황에서 그들을 긍정적인 모델로 세우신 것 자체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인습적인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었다.
겸손은 자신을 자기 이하로 생각하는 것(출3:11이하의 모세)도 아니고 자기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롬12:3)도 아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알고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부인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는 말씀을 하셨다(3~4절).
예수님은 천국 안에서(in) 누가 크냐로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그런 식의 교만은 친국에서 큰 인물이 되게 하기는커녕 천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죄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여부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천국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마태복음 전체에 전제되어 있는 교훈이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알려주는 데에 더 큰 중점이 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도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라기보다 이미 천국시민이 된 제자들의 성품에 대한 말씀이다.
어린아이의 겸손과 의존은 천국시민들의 특징적인 성품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겸손과 의존은 동시에 천국에서 ‘큰 자’의 특징적인 성품이다. 천국에서는 영적인 사다리(spiritual ladder)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있다는 자가 큰 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자가 큰 자다. 자신이 큰 인물이라는 생각을 가장 작게 하는 사람이 사실 가장 큰 인물이다. 제자들이 ‘누가 크니이까’ 하는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천국에서 작은 자라는 것을 스스로 노출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후(20:20~28)에 천국의 통치질서는 집권자들이 백성들을 마음대로 주관하면서 권세를 부리는 이 세상 질서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천국 시민들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천국의 리더십은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ship)’이다. 예수님은 이것이 자신의 구속사역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2. 실족케 하지 말고 영접하라(5~10절)
겸손한 사람은 남을 무너뜨리지 않고 세워준다. 남에게 거침돌(stumbling block)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발판(stepping stone)이 된다.
예수님이 위에서는 ‘어린아이’를 자기를 낮추는 주체로 등장시키셨으나, 5절 이하에서는 영접하거나 실족케 하는 객체로 등장시키셨다. 예수님은 또한 5절에서 어린아이(파이디온)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다가 6절에서는 ‘소자(미크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선지자와 의인과 대조되는 제자로서의 ‘소자’를 언급하셨다(10:41~42).
‘소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 선지자나 의인처럼 훌륭하게 드러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초라하고 단순해 보이는 무명한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18장 본문에서 ‘어린아이’에서 ‘소자’로 넘어 간 것은 ‘작은 자’ 이미지의 공통점 때문이다. 예수님이 공동체 훈화에서 특별히 ‘소자’를 언급한 것은 사람들은 흔히 위대하고 훌륭하고 탁월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예수님은 ‘소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유명인들보다 무명인들에 대하여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5절). 이 말씀은 ‘어린아이(소자)’를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자 영접을 예수님 영접과 동일시하시면서 소자를 사랑하고 환대할 것을 교훈하셨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10:40).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성부와 성자가 배후에 계신다는 의미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는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예수님의 이름과 직결된 소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듯 그 소자를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자’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는 간단히 한 절로 말씀하시고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은 네 절(7~10절)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다른 제자를 실족케 할 가능성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7절) 서로 어울리는 교제 과정(6절)에서 손, 발, 눈으로 표현되는 죄의 본성(8~9절) 때문에 상대방을 실족케 할 가능성이 많다. ‘실족케 하다(7절)’ 혹은 ‘범죄케 하다(8~9절)’에 해당하는 단어는 ‘σκανδαλίζω(스칸 달리조)’인데 ‘거침돌(rumbling block, σκανδαλον)을 놓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가 말이나 태도나 행동을 통해서 다른 제자가 걸려 넘어져 범죄하도록 하는 거침돌을 놓는 것이 실족케 하는 것이다.
제자는 남으로 범죄하게 할 수도 있고(6~7절) 자기 스스로 범죄케 할 수도 있다(8-9절). 제자는 범죄를 행하는 손과 범죄로 걸어가는 발과 범죄 유혹을 느끼도록 하는 눈을 통해서 범죄할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셨다. 첫째, 소자를 실족케 할 바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다(6절). ‘연자맷돌’은 소나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한다. 소자를 실족게 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무서운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큰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은 그 소자를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문맥은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임한다’는 문맥이다(27절). 소자를 실족에 한 책임은 그를 실족케 한 자에게 있고, 그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유흑으로 들끓는 세상 때문에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할 경우 실족케 하는 그 사람과 세상에는 화가 임한다고 하셨다(7절). 범죄케 하는 본인 자신도 화를 입고 불신자들의 공동체(세상)도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범죄케 한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를 넘어지게 한 죄를 범했으니 화를 입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사망의 결과를 낳는 죄(롬6:23)가 더해진 탓에 화를 입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가 다른 제자를 실족케 하거나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은 지옥에 들어갈 죄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아니라, 위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그 죄의 본질이 지옥에 들어갈 죄라는 것이다. 지옥(γέεννα,게헨나)은 예루살렘 남쪽 ‘게이 힌놈(גֵּיהִנּוֹם,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곳은 아이들이 몰록신에게 불로 바쳐졌던 곳이며(왕하23:10, 대하28:3, 렘7:31, 32:35), 후에 요시야 왕 때 불로 쓰레기를 태우고 벌레가 들끓는 곳이다(왕하23:10). 따라서 ‘게헨나’는 마귀와 악령들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8절, 5:22, 10:28, 25:46, 눅12:5, 약3:6, 계19:20, 20:9~10)’에 대한 적절한 이미지이다.
예수님은 남을 실족케 하든 자신을 실족케 하든 그것이 이렇게 심각한 죄이기 때문에 손이나 발이나 눈이 실족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영적인 수술(spiritual surgery)을 말하는 것이다. 참된 겸손은 자기점검(self-examination)으로 시작되고 자기부인(self-denial)으로 계속된다. 본문은 실제로 손발을 찍거나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범죄케 하는 것(유혹, 습관, 본성의 일부)을 신속하고 단호하고 철저하게 제거해 버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어도 실족케 하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신체의 일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자를 영접할지언정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셨다. 이 구절은 5~10절을 12~14절과 연결시키는 다리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초라하고 단순한 신자들을 무시했고(눅18:9~12) 랍비들은 군중을 ‘땅의 백성’이라고 멸시했지만, 예수님을 ‘소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소자들)처럼 되고(4절) 어린아이들을 영접할지언정(5절)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거나(6절) 어린아이들을 멸시하면 안 된다(10절). 하나님이 소자들을 돌보시고 그 천사들이 소자들을 감시하며 소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될 정도로 하나님은 소자들을 귀하게 보신다. 따라서 우리도 소자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본문은 수호천사설을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도록 하는 구절이다. ‘소자들’의 천사들이라는 개념이 소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소자들’을 전체로 보고 그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개입해서 돕고(시91:11), 민족들을 감시하며(단10:10~14) 구원을 상속할 자들을 섬기는 존재들이다(히1:14).
천사들이 ‘내 아버지(성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는 것은 그들이 항상 성부에게 접근한다는 뜻이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해서 항상 성부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제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자들을 업신여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그들을 항상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3. 잃은 상태로 내버려두지 말고 찾으라 (12~14절)
예수님은 계속 ‘소자’에 대한 교훈을 이어가시면서 잃은 양 비유를 드셨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15:4~7)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잃은 양들로 보고 말씀하신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는 이미 예수를 믿는(6절) 제자들을 ‘잃은 양들’로 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비유나 비슷한 교훈을 여러 경우에 말씀하셨을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양 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어도 많은 양들 중에 한 마리라고 생각하여 그 한 마리를 무시하지 아니하고 찾는 비유를 통해서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 버린 상태에 버려지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14절). 이 비유의 초점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과 찾았을 때 기뻐한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건 잃은 양을 찾는 것이 성부의 뜻이다. 우리는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로서 짝가정, 장기 결석자, 태신자, 새가족 등 네 가지 범주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과의 관계가 정착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본문의 말씀 중에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라는 구절을 99마리를 보호하지 않고 버려둔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잃은 양 한 마리에게도 해당되지만 남아 있는 99마리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기뻐하리라’는 구절도 잃은 양 한 마리가 99마리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더 기뻐한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더 기뻐한다’는 것은 잃었다가 발견한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드실 때에 제자들에게 수사의문문을 던져 그들로 하여금 답변하게 하는 방식을 택하셨다. 듣는 자들이 생각하고 답변하게 되면 그만큼 그들에게 그 교훈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2절)” 예수님은 효과적인 교사, 설득력이 강한 교사였다. 강해할 때에 설득할 자료나 기법이 없이 무작정 윽박질러 밀어붙이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4. 범죄하는 자를 사랑으로 권징하라(15~20절)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교만의 문제, 실족케 하는 문제, 양을 잃는 문제 등도 심각하지만 범죄의 문제도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8~9절에서 자기 손이나 발이나 눈이 자기를 범죄케 할 경우 범죄하게 하는 유혹과 습관과 본성을 제거하는 ‘자기권징(self-discipline)’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공동체 권장(community discipline)’을 말씀하셨다. 권징의 경우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원리(갈6:1)는 ‘네 형제’가 범죄한다는 말씀과 ‘네 형제를 얻는다’는 말씀에서 추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범죄하는 형제를 한 단계로 처리하지 않고 네 단계로 처리하게 하신 주님의 배려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주님께서 ‘너와 그 사람과만’의 제 1단계, ‘두세 증인의 입으로’의 제 2단계, ‘교회에의’ 제 3단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의 제 4단계로 말씀하신 것은 형제자매가 범죄하여 그 범죄를 다룰 때에 최소한의 공중성(east publicity)으로 다루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범죄했다고 하면 일단 터뜨려 놓고 보거나 퍼뜨려 놓고 보는 악한 습성이 있으나 이런 습성을 버려야 한다. 권징은 폭로의 방법이 아니라 가급적 비밀의 방법으로 해야 하고 때리는 데 초점을 두지 말고 얻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알려야 할 경우도 처음부터 교회 앞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당사자끼리 해결하고, 당사자로 안 될 경우는 ‘두세 증인’으로 해결하게 하고, 그래도 안 될 경우 ‘교회에’ 알리고, 교회 말도 안 들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즉 회개할 수 있도록 멀리하고 출교하라는 것이다. 동료 제자들(교회)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여 사랑으로 권면하는 말을 듣지 않는 제자라면 진정한 교제는 불가능하다. 제 4단계도 범죄자를 파멸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도록 경계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제자들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고전5:1~8, 11). 죄는 정직하게 다루지 않으면 누룩처럼 번진다.
여기서 권징의 대상은 사소한 실수나 범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손상시키는 범죄이다. ‘두세 증인’이 있고 교회 전체 앞에 알려도 교회가 당연한 처벌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범죄가 권징의 대상인 것이다. 교회는 자칫 권징 대상을 잘못 정하여 권징에 실패할 수도 있고, 권징의 단계를 제대로 밟지 않아 실패할 수도 있다. 제 1단계에 ‘가서’ 처리하지 않고 멀리하고 말거리를 삼아 실패할 수도 있으며, 제 4단계에 출교의 절차를 밟을 때에 일반 법정과 충돌하는 문제(교회법으로 출교하는 것이 일반 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걸릴 수 있음)를 두려워하여 실패하는 수도 있다.
권징의 정신이 사랑이라는 것과 권징의 목적이 회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징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기 때문에 권징 자체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권징의 과정에서 목회자나 장로로서 목회자나 장로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세, 저 목사님(장로님)이 넘어지면 우리도 넘어진다는 식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갈등을 무시하지 말고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갈등을 과장하지 말고 공적으로 폭로하거나 공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최소화해야 한다. 갈등을 반복하지 말고 일단 해소된 갈등의 경우 바로 원만한 대인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권징을 제대로 시행할 때에 현대교회 자체의 회복과 아울러 대사회적 공신력의 회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권징을 말씀하시면서 18~20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식으로 인감도장을 찍어 권징의 권위를 높이셨다. 교회가 바른 권징을 시행할 때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이 ‘하늘’에서 매고 푸는 것이 되고(18절) ‘땅’에서 구하는 것이 ‘하늘’의 성부께서 시행하시는 것이 된다(19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두세 사람’의 모임에 주님도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20절).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이 하늘에서 매고 푸는 것과 직결된다는 말씀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른 신앙고백의 공동체 문맥에서도 나오고(마16:19) 바른 권징의 문맥인 본문에도 나온다. 본문은 대게 합심기도에 적용되어 왔는데 그것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나 일차적인 의미는 아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말씀(19절)은 권징의 맥락에서 주님을 믿는 공동체가 합심하여 범죄자의 회복을 위해서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권징에는 말씀의 권위와 함께 기도의 합주(symphony)가 있어야 한다.
5. 회개하면 용서하라(21-35절)
1) 올바른 이해
본문은 공로 구원의 근거가 아니다. 칭의와 관계된 하나님의 용서는 한 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미친다. 그러나 본문 21절에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는 말씀에서 ‘몇 번이나’는 여러 번하는 용서를 가리키므로 본문은 칭의의 문맥이 아니라 생활의 문맥이다.
무조건 몇 번이라도 용서해 준다면 국가의 사법제도는 무용지물이 아닌가, 죄를 묵인하고 범죄를 조장함으로써 정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하나님은 국가제도를 창설하셨고 국가로 하여금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도록 하셨다(롬13:1~7). 국가기관에 종사하는 자들은 죄인을 사랑하되, 죄를 미워하는 자세로 법대로 범죄를 정의롭게 처리해야 한다. 15~20절은 범죄하는 형제가 있으면 징계하되 소자를 중시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징계하라고 한 후에 본 비유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라고 한다. 본 비유는 ‘용서하지 않는’ 불의를 무너뜨리는 비유이다. ‘만일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17:3)’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는 질문을 했다. 유대인 랍비들은 3회까지는 용서해 주되 4회는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베드로는 당시의 용서 규율에 비해 아주 너그러운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칭찬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뜻밖이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최고로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17장 4절에는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되어 있다. 베드로의 기존관념은 쇠몽둥이로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의 차원과 예수님의 차원은 뱁새와 황새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결코 베드로의 경우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3회까지 용서한다는 당시인들에게 ‘우물안 개구리들아, 우물 밖으로 나가라’는 도전이었다.
우리들은 용서에 대해 너무 인색한 자들이다. 열 번 잘 하다가도 한 번 잘 못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면서 따돌린다. 십 년 전에 들었던 섭섭한 말 한 마디가 넘어가다가 걸린 생선 가시처럼 걸려 있다. ‘하루에 일곱 번’은 고사하고 평생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 는 경우도 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원한의 진지를 부수는 미사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관대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은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다시 전직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사랑을 확인하셨으며, 로마에서 도망가던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십자가 지러 다시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신(전설) 예수님의 삶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용서의 원천이다.
용서하라고 할 때는 흔히 용서하고 잊으라(forgive and forger)고 말한다. 용서할 때는 반드시 잊어야 하고 잊지 못할 때는 용서하지 않은 것이라는 공식이 통하는 것 같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두뇌는 컴퓨터의 저장실과 같아서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분류한 다음 중요한 것은 장기 저장실에 입력된다고 한다. 그래서 용서하고 나서도 그것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용서한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2) 용서 안하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4~35절)” 여기서 ‘옥졸들’은 ‘고문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아 보실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로운 하나님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다.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로 단절된다(마5:7, 6:14-15, 약2:13).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도의 파이프가 막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의 파이프가 막히며(벧전3:7, 사59:1~2), 형제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이 만든 자신의 감옥에 자신이 갇혀 고문을 당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마치 모래시계 맨 꼭대기에서 바둥대는 벌레와 같다. 그 밑의 모래가 자꾸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최대한 빨리 바둥대지 않으면 좁은 구멍을 통해서 밑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밑으로 떨어지면 위에 있는 모래들이 그 위에 떨어져 그 속에 묻히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러니까 밑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 이것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다른 비유를 든다면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마치 깊은 구덩이 속에 혼자 있는 것 같다. 자유가 없다. 낮에는 머리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고 웃으면서 삶을 즐기는 것을 구경만 한다.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되면 이 구멍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독과 불안에 시달린다. 내가 왜 이렇게 깊은 구덩이를 팠으며 왜 용서를 안해서 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왔는가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도 느낀다.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 석방된 자들 중에 용서한 자들은 바깥 세계에서 새 삶을 꾸릴 수 있었으나, 용서하지 않은 자들은 계속 불구자들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정신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이것이 ‘옥졸들’ 즉 ‘고문하는 자들’에게 고문 당하는 모습이다.
3) 천국시민의 생활방식을 익혀야
용서하면 자유를 누리겠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당해 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하지 당해 보면 용서라는 말을 입 밖에도 못 낼 것이 아닌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나온다. 한 달란트는 약 6,000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니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약 20년 노임이다. 1만 달란트는 노동자의 약 20만년 노임이다. 당시 노예 한 명의 최고가가 2,000 데나리온이었는데, 최고가로 해도 가족 30,000명을 노예로 넘겨야 갚을 수 있는 거액이다. 자신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물’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다.
당시에 로마가 사마리아에서 거둔 세금이 600 달란트,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거둔 세금이 200 달란트, 팔레스틴 전역에서 거둔 세금 총액이 이렇게 800 달란트였다. 1만 달란트는 팔레스틴 전역에서 짜낸 세액의 10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렇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거액인데,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했을 때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27절),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것이 전액 탕감의 비결이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졌던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을 대속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다(롬5:8,10).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2~14)”
이렇게 ‘불쌍히 여김’을 받은 종이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의 멱살을 잡았다(28절). ‘참아 주소서’하는 그의 간청을 뿌리치고 그를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29~30절). 비유를 듣는 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아니 도대체 저럴 수가 있는가’하고 격분할 만한 일이다. 그는 과연 ‘악한 종’이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2절)”
1만 달란트의 빚과 100 데나리온의 빚이 잘 대조될 때에 여기 ‘마땅치 아니하냐’는 말씀이 강력하게 부딪혀 오게 된다. 100 데나리온의 빚은 주머니 하나에 다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1만 달란트 빚은 장정 8,600 명이 각기 잔뜩 지고 가야 할 분량이다. 8,600 명이면 한 걸음씩 떨어져 간다 해도 5마일의 줄을 이룬다는 것이다. 주머니 한 개에 들어갈 수 있는 분량과 장정이 5마일 줄을 서서 각기 잔뜩 지고 가야 하는 분량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장정 8,600 명이 힘겹게 지고 가야 할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주머니 한 개에 들어갈 빚을 진 동료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는 것이 천번만번 ‘마땅한’ 것이다.
이렇게 ‘마땅한’ 일을 그 종은 왜 하지 못했는가?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전액 탕감을 받은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렇게 일어난 사건이었을 뿐 그의 세계관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엄청난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이기적인 가치관을 바꾸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을 때에 동료들을 보는 눈이 바꾸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탕감 받은 종은 은총은 받았으나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물에 떠내려 갈 때의 심정과 구출 받은 후의 심정이 달라지기 쉬운 것이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을 건져주면 신발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종의 가치관이 탕감 받은 사실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에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독일의 코리 텐 붐(Corie ten Boom) 여사는 레이번스브루크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가족들을 살해한 간수를 나중에 독일에서 집회 후에 만났다. 그 간수가 접근해서 용서를 구했을 때, 선뜻 용서할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전기 같은 것이 내 어깨에서 시작해서 내 팔로 그리고 우리가 마주 잡은 손으로 흘러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치료하는 따스함이 내 전인격 속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왔고 내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형제여, 진심으로 용서합니다’고 나는 부르짖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작품을 시작하기 전 동료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했다고 한다. 분개한 나머지 그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복수를 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리고 난 다음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는 시간에 아무리 애써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가롯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 시작해서 그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1만 달란트 빚졌는 데 탕감받은 의식을 가지고 주님이 나를 보시는 시각으로 가해자를 용서하여 가족들과 화해해야 한다.
주님이 주신 공동체의 훈화대로 순종하면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 범죄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부패한 본성을 가진 제자들이 서로 마찰 없이 산다는 것은 힘들다. “우리가 사랑하는 성도들과 위(하늘)에서 사는 것은 확실히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성도들과 아래(땅)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이렇게 제자들의 대인관계가 세상에서는 힘들지만 그래도 제자들이 서로에 대해서 시기심과 경쟁심을 가지고 교만을 부리지 말고 겸손하게 서로 섬기면 아름다운 대안사회가 형성된다. 소자를 실족시키지말고 영접하며 잃은 자를 찾으며 범죄한 자를 사랑으로 권징하며 그가 회개할 때 용서하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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