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1~13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약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세운 교회였으며 당시 로마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서 거대한 상업도시였기에 인구도 많았고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내포한 교회였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수 많은 문제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견지해야 할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분쟁과 파당, 음행, 결혼, 성도의 법정 소송, 우상제물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중부정적 표현입니다. 이중부정은 강한 긍정을 위한 표현방식입니다. 그동안 다룬 문제들에 비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제는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이중부정의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조상이 걸어온 잘못된 전철을 뒤따라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1절~4절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건넌 사건을 세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연합,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나는 것이 세례인데, 홍해를 건넌 사건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세례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마셨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 의미하고, 음료는 반석에서 터져나온 물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풀 한포기 찾아보기 쉽지 않은 아무것도 없는 빈들입니다. 그런 곳에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었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한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광야에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은 사건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결국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애급 할 수 있었던 것도, 광야에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능력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고, 인도하심의 결과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멸망시키셨습니다. 5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의 다수, 즉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체적인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믿었으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숭배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숭배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며 인용한 출애급기 32장 6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출애급 시킨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가 안보이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생각하며 섬겼습니다.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을 숭배했는가? 금송아지에게 절하면서도 하나님께 절하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 행위를 하나님을 잘 믿는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바꾸려는 유혹에 사로잡힙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를 확보해야만 불안한 자신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기에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증거를 확인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옆에 계시다는 증거말입니다. 그 증거가 어떤 이는 물질일 수 있고, 건강일 수 있고, 명예일 수 있고, 세상의 높은 지위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우상입니다. 인간의 탐욕인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8절~10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우상숭배의 결과는 음행, 시험, 원망으로 인한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빗어진 우상을 섬기는 인간은 반드시 음행하는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주를 시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를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우신 분이 계십니까?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주어진 이 말씀은 본보기였습니다.
11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출애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인해 음행, 시험, 원망으로 죽음에 이른 사실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듯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오늘 우리들의 본보기입니다.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우상숭배를 멈춘 이들은 구원을 받았겠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우상숭배 한 이들은 똑같이 음행, 시험, 원망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 또한 누군가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다 멸망받았습니다. 이것을 본보기 삼으라는 것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자 임에 틀림없지만, 끊임없는 경건과 영적인 각성 없이는 멸망받은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보기로 삼아 돌이키지 않으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본보기로 삼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언젠가 누군가의 본보기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까? 1
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자신들이 섰다고 착각하는 것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도상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는 온전히 선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 ‘페이라조’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왜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인가? 하나님께서 늘 피할 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피할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피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늘 자신을 비추어 살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의 탐욕이 빗어낸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선 줄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내 욕심의 탐욕이 빗어낸 우상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기면 섬길수록 우상숭배의 깊은 골짜기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보기 된 것처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본보기 된 것처럼, 오늘 내 삶이 누군가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옵소서. 주의 말씀에 나 자신을 비추는 끊임없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을 향한 나의 열심히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행위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