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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계미 2년(983), 송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ㆍ요 성종(聖宗) 통화(統和) 원년
○ 12월에 천춘절(千春節)을 천추절(千秋節)로 고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내렸다.
○ 진사(進士)를 뽑도록 명하였다. 왕이 친히 복시(覆試)에 거둥하여 강은천(姜殷川)등 3명과 명경(明經)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복시(覆試)를 보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은천(殷川)은 곧 감찬(邯贊)이다.
현종 경술 원년(1010), 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 11월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청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제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도망해 돌아와서 스스로 호종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보이지 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 경은 이미 밖에서 노고했는데 또 나를 호종하고자 하니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내 주식(酒食)과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고삐를 내려 주었다. 이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계유일에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漣川))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 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자, 응인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그때 그때의 시기(時機)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곧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는데 국근이 말하기를, “나의 의복과 행장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하였는데, 채문이 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못했으니 목숨을 붙이고 산 것만도 다행이다."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충필(忠弼)이 절문에 있다가 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서, “지장군(智將軍)이 왔습니다." 하고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문밖에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적이 빼앗아간 장물(臟物)을 찾았는데 실상 공진(拱辰)이 한 짓은 아니오며, 또 공진과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하였다.
현종 임자 3년(1012), 송 대중상부 5년ㆍ거란 개태(開泰) 원년
○ 6월에 용진진(龍津鎭)의 3백 40여 호가 불에 타버렸다.
○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인택(李仁澤)이 면직되었다. 인택이 동북면 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 강감찬(姜邯贊)과 서로 틈이 생겨 논소(論訴)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면직되었다.
갑인 5년(1014), 송 대중상부 7년ㆍ거란 개태 3년
○ 가을 7월에 중추사(中樞使) 강감찬(姜邯贊)이 사직단(社稷壇)을 수축하고 예사(禮司)가 의주(儀注 예식 행사의 순서)를 의정(議定)하게 하도록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병진 7년(1016), 송 대중상부 9년ㆍ거란 개태 5년
○ 12월에 이부상서 강감찬(姜邯贊)이 아뢰기를, “신이 개녕현(開寧縣 경북 상주(尙州))에 좋은 전지 12결이 있으니 군호(軍戶)에게 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무오 9년(1018), 송 천희 2년ㆍ거란 개태 7년
○ 5월에 거란의 사부(史夫)가 와서 의탁하였다.
○ 강감찬을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고 왕이 손수 고신(告身 벼슬 임명장)의 뒤에 쓰기를, “경술 연간에 오랑캐의 난리가 있어 군사가 깊이 한강 가에까지 들어왔도다. 그 당시에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庚戌年中有虜塵, 干戈深入漢江濱, 當時不用姜公策, 擧國皆爲左衽人]" 하였다. 세상에서 대부분 그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 겨울 10월에 우복야(右僕射) 김노현(金老玄)이 졸하였다. 노현은 근실하고 재간이 있다고 알려졌으므로 매양 영조(營造 건축ㆍ축성 등의 토목 공사)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감독하도록 하였다.
○ 내사시랑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았다.
○ 12월에 동북 여진 아차(阿次)ㆍ오을불(烏乙弗) 등 14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쳤다.
○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기미 10년(1019), 송 천희 3년ㆍ거란 개태 8년
○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 2월 초하루 기축일에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자 우리 군사가 형세를 타서 분발하여 치니 저절로 배로 용기가 났다. 거란 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니 우리 군사가 뒤쫓아 쳐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으니,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거란주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손녕에게 꾸짖기를, “네가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짐이 마땅히 네 낯가죽을 벗긴 후에 죽일 것이다." 하였다.
○ 갑오일에 삼군(三軍)이 개선하여 돌아와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왕이 영파역(迎波驛)에서 친히 맞이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음악을 갖추어 잔치를 베풀고 장사들에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왕이 금화(金花) 여덟 가지[枝]를 친히 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오른손으로 금술잔을 들고 왼손으로 감찬의 손을 잡고는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니 감찬이 배사(拜謝)하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마침내 영파역(迎波驛)을 흥의역(興義驛)이라 고치고,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내려주어 주ㆍ현의 이(吏)와 같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수안현(遂安縣 황해도 수안군)ㆍ상산현(象山縣 황해 곡산(谷山))ㆍ협계현(峽溪縣 황해 신계군(新溪郡))ㆍ신은현(新恩縣 황해 신계) 등의 백성이 거란 군사에게 시달렸으므로 관에서 양식을 주었다.
○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퇴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내려주었다.
○ 겨울 11월에 강감찬(姜邯贊)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봉하였다.
경신 11년(1020), 송 천희 4년ㆍ거란 개태 9년
○ 6월에 서북계에서 황충이 발생하였다.
○ 문하시랑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들어주고, 이어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로 올렸다.
기사 20년(1029), 송 천성 7년ㆍ거란 태평 9년
○ 8월 초하루 정해 일에 일식이 있었다.
○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현종 경오 21년(1030), 송 천성 8년ㆍ거란 태평 10년
○ 5월에 동여진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盖)등이 와서 말과 호목 화살ㆍ무기와 과선 3척을 바쳤다.
○ 강감찬을 문하시중으로 올렸다.
○ 6월에 서눌(徐訥)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강감찬(姜邯贊)을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로 삼았다.
○ 8월에 동여진의 장군 고어부(古於夫)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하였다. 감찬은 금주(衿州) 사람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이한 계략이 많았다.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해져서 볼품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얼굴빛을 엄정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큰 일을 만나면 큰 계책을 결정하여 우뚝히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나이 70이 되자 왕이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어서 3일마다 한번씩 조회하게 하였는데, 드디어 관직을 그만두고 성 남쪽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84세로 졸하였다. 뇌(誄)를 내리고 부의를 매우 후히 주었으며, 인헌(仁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백관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ㆍ경술(1010)의 해에 역신(逆臣 강조)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 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갔는데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吏]을 보내어 가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 집 부녀가 사내아이를 낳았기에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겨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길렀는데 이가 감찬이었다. 후에 송의 사신이 감찬을 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뜰 아래 내려가 절하면서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였는데 지금 이곳에 있구나.' 하였다 한다. 이 말이 황당한 것 같으나, 부열(傅說)은 기성(箕星)ㆍ미성(尾星)의 정기(精氣)였고(《장자(莊子)》에 있는 말임), 신백(申伯)과 중산보(仲山甫)는 숭악(崧岳)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으니, 유독 감찬에게만 어찌 의심하랴." 하였다.
[주D-003]뇌(誄)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운문인데, 지금의 만장(輓章)과 비슷한 것이다.
[주D-004]신백(申伯)과……태어났으니 : 《시경(詩經)》에 주 선왕(周宣王) 때의 대신 신백(申白)과 중산보(仲山甫)를 찬미하여 높은 산악의 정기를 타고났다 하였다.
문종 정미 21년(1067), 송 치평 4년ㆍ요 함옹 3년
○ 3월에 중서령으로 치사한 왕총지(王寵之)가 졸하였다.
○ 제하기를, “고 문하시중 최항(崔沆)ㆍ강감찬(姜邯贊)과 참지정사 김맹(金猛)은 청절(淸節)과 곧은 도로써 여러 조정을 겪으면서 보필한 공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사방이 평안하여 백성이 그 은혜를 받는 것은 모두 그들의 힘이다. 최항과 강감찬은 수태사 겸중서령을, 맹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증직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공민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 여름 4월에 응양군 상호군 김원명이 시(市)의 북쪽 거리에 도랑을 파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장차 조정을 누르려 한다." 하였다. 술가(術家)가 말하기를, “시가를 가로질러 도랑을 파면 무관이 성하여지고 문관이 쇠하여진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원명이 신돈에게 아부하였던바, 대간과 문신(文臣)이 신돈의 간계를 적발할까 두려워서 술가의 말을 써서 이를 제지하려 하였다.
사신 윤소종(尹紹宗)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가 교화를 펼친 땅이니, 한 나라 때에는 인현(仁賢)의 교화가 있었고, 당 나라 때에는 군자의 나라라 일컬어졌다. 본조에서는 대대로 문교를 숭상하여 조정의 반열에 늘어선 사람이 모두 독서인이며,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내보낼 때에도 역시 문신(文臣)을 썼으니, 인헌공(仁獻公) 강감찬(姜邯贊)이 요(遼)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고 국토를 튼튼하게 하였으며,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이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쌓았으며, 서경(西京)의 묘청(妙淸)이 반역할 적에 시중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토벌하였으며,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동쪽으로 침범할 적에는 태위(太尉) 조충(趙冲)이 이를 평정하였다. 이는 모두 유신(儒臣)을 써서 큰 공을 이룬 것이니 어찌 유학자라고 무예에 부족함이 있으랴. 의종(毅宗)의 말년에 정중부(鄭仲夫)가 조신을 다 죽이면서 비로소 문신을 가리켜 조정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무부(武夫)가 정권을 차지하여 조종의 법이 허물어지고 지금까지 조정에 글읽는 사람이 얼마 안 되는데, 원명이 변변치 못한 요술(妖術)로써 눌러버리려고 하였다. 소인이 군자를 해치고자 하여 그 음험하고 간사한 꾀를 함부로 하여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음이 이와 매우 비슷하니, 통탄스럽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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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천수(天水)'는 모든 중국 姜氏의 관향(貫鄕)으로 시조는 삼국시대의 촉나라 장수 강유(姜維)이다. 현재는 많은 지명으로 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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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