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외 2편)
손택수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하다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꽂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 올려 바를 넘을 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결별은 그가 하늘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 위에 펼쳐진 하늘과의 만남도 잠시,
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는 건 차라리 추락이다
어쩌면 추락이야말로 모든 집중된 순간순간들의 아찔한 황홀이 아니던가
당겨진 근육들이 한점 망설임 없이 그를 응원할 때
나른하던 공기들도 칼날이 지나간 듯 쫙 소름이 돋는다
뜨거운 포옹과 날렵한 결별 속에서 태어나는 몸
출렁, 깊게 패는 매트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쏘아올려야 하는 자의 고독이 장대를 들고 달려간다
폭발하는 한점 한점,
딱딱하게 굳은 바닥에 물수제비 물결이 인다
야구공 실밥은 왜 백팔개인가
야구공은 실밥의 높낮이에 따라 회전력과 마찰력이 달라진다
산맥의 높낮이와 산림의 울울창창 밀도에 따라
지구도 회전에 영향을 받는다는데
가죽 위로 도드라져나온 실밥은 말하자면
대륙과 대륙을 당겨 잇는 산맥 같은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바느질, 모두 수작업을 한다
지구의 백팔번뇌가 여기에 있다
메이저리그 류현진의 공이 계산된 제구력에 따라 회전을 할 때
아이티나 코스타리카의 어느 시골 마을
일당벌이 바느질을 한 소년의 빈혈을 앓는 하늘도 따라 같이 돈다
지문과 손금을 뽑아 바느질을 하는 소년들의 노역은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실감이 나질 않는 이야기이지만
한때 내게도 소년들 같은 이모가 있었다
닭장 같은 지하 공장에서 철야에 철야
어디로 수출되는지도 모를 옷감을 재봉질하던 소녀,
뛰는 노루발 속 바늘이 손가락을 꿰뚫었을 때
몸속에 돌돌 감긴 혈관이 실패임을 겨우 알았단다
싼 인건비를 찾아 필리핀이나 캄보디아로 떠난 공장들에서
파업 소식은 들려오고, 동남아도 예전 같지 않아 투덜투덜
출장을 다녀온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야구중계를 보는 시간
엉덩이에 붙은 파리를 소가 꼬리로 냅다 후려치듯 딱!
공이 떠오르면, 나는 괜한 걱정을 한다
실밥이 풀어지면 어쩌나 하고
웬만한 충격에도 속이 터지지 않도록 야무지게 다문 야구공과 함께
지구의 백팔번뇌도 다 날아가버리면 어쩌나 하고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지상엔 수없이 왔으나 처음 당도한 여름 끝의 노을이 걸려 있습니다
모래바람 날리는 저물녘 해변의 산보는 당신의 왕오천축국전
내디딘 대지에 한발 한발 기도를 드리듯이 걷습니다
불안하게 술렁이는 허공을 더듬거리면서 더디게 모아지는 발들,
한참을 머물렀다 또 한걸음을 뗄 때
그 숨 막히는 보행은 차라리 구도가 아닙니까
반쪽 몸에 내린 빙하기가 반쪽 몸의 봄을 더 간절하게 합니다
쇄빙선처럼 길을 트는 가쁜 한걸음 속에서
몸의 밑바닥은 의식의 가장 높은 고원,
불어가는 바람이 해저에서 막 융기하는 산맥의 바위처럼
굽이치는 당신의 이마를 환하게 쓸고 갑니다
단 몇 미터를 걷는 데 평생이 걸린다면
몇 미터의 대륙이 품에 안은 수십억년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
마비된 근육과 혈관 너머로 추방당한 복류천 맥박소리를 향해 걸어가는 것
깨어진 모래 한알이 무릎걸음으로 해변을 동행할 때
더듬거리는 걸음과 걸음 사이의 침묵이 제 유창한 보행을 망설이게 합니다
지상에 말랑한 첫발을 내딛는 아기의 경이처럼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탁, 탁 터져나오는 탄성
한번도 온 적 없는 여름 끝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일만번의 여름을 살며 스스로 풍경이 된 이름이 파도에 잠기고 있습니다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첫댓글 이야기가 시가 되고 시가 이야기가 됩니다. 서정의 경계를 뛰어넘는 산문은 이 시들과 같은 형상을 얻을 듯합니다. 오늘은 야구공 하나를 품고 잠을 자야 겠습니다. 수재공들의 백팔번뇌가 홈런 맞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