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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수문금군(白虎守門禁軍)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지던 비무가 줄어들어 한가해진 라혼은 비무에 쏟던 열정을 이제 32명으로 늘어난 지원병 훈련에 쏟았다. 기초 체력 만들기와 기공 체조, 그리고 창법과 기초 군사 훈련을 시키는 일이었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일이었기에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보름간 훈련을 계속하자 그런대로 번듯한 병졸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지원병들을 보며 나름대로 흡족해했다.
“대장님, 이제 그런대로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모 정령의 말마따나 그런대로 정병이라 말할 수 있겠어.”
“참, 그리고 곧 봉록이 나올 때가 되었을 텐데?”
“이미 나왔습니다.”
“얼마나 되나?”
“입에 풀칠할 만큼은 됩니다!”
넉넉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오장(伍長) 이상의 금군에게는 군인전이 주어지지만 금군이 한가롭게 농사지을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대부분 군인전으로 받은 땅을 팔아 그 돈으로 장사를 했다. 물론 직접 챙기지는 못하고 아내나 가족이 대신 장사를 했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네 번 봉록이 지급되는데 문제는 이 복록이 규정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라혼은 지원병을 모병하면서 금군들이 받는 봉록을 기준 삼아 그만큼을 주기로 했는데, 이들에게 그만큼을 챙겨주면 기존의 금군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 뻔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자네 군인전 아직 팔지 않았지?”
“예, 팔려고 내놨는데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라혼은 모석에게 군인계(軍人契)를 제안했다. 군인계는 군인전을 가진 동료들과 땅을 합쳐 소작을 주거나 공동으로 경작해서 거기서 나온 소출을 나누는 것을 말했다. 모석은 라혼의 제안을 수락했다. 모석은 라혼의 농사 솜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승낙했다. 하지만 라혼이 모석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이유가 있었으니, 라혼이 원하는 것은 군인계라기보다는 둔전(屯田)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라혼의 계획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군인전을 가질 자격이 있는 금군들 명의로 땅을 사서 공동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려온 봉록도 백호수문금군이 일괄 관리하여 적절하게 지급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글쎄요? 어차피대부분이 받은 군인전을 팔았을 테니 명의만 빌리는 거야 뭐…. 그리고 대장님 뜻대로 병력을 1천명으로 늘리면 3교대나 4교대까지 가능할 것이므로 농사지을 시간이야 충분할 것이니 상관없지만 봉록까지 그렇게 관리하는 것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잘 설명해주게. 지원병이 늘어 그들도 금군이 되면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같이 고생하는 처지가 될 터인데.”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중론을 모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대에 걸친 병졸 집안인 모석은 병가(兵家)에서 그런대로 인망이 높았다. 그리고 사실 백호문의 금군은 대장인 라혼보다 그를 더 따르고 믿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라혼이 백호문의 금군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모석이 라혼을 따르고 공경하기에 그런 것일 뿐, 금군들이 라혼에게 딱히 충성할 이유는 없었다. 일반 병졸로 출사(出仕)해 한 달 만에 백호수문대장이 되고, 백호수문대장이 된 지 이제 100일도 채 되지 않은 라혼에게 무예가 출중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진심으로 감복하여 따르는 자는 없었다. 금군(禁軍)은 수행하는 무인(武人)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혼은 참장(參將)의 벼슬을 얻었으나 아직 조정의 정식 인준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상경(上京) 황진성 사문수비대장(四門守備隊將)과 황진성부윤(黃辰城府尹)의 주청(奏請)에 의해 조정에 품신된 상태일 뿐이었다. 그래서 가임용(假任用) 상태인 라혼은 백호수문대장에게 수여되는 군인전과 참장으로서 받게 되는 땅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라혼은 모석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예?”
“나는 왜 봉록을 안 주는 건가?”
“대장님 봉록은 없습니다.”
“?”
라혼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모석을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 직급이 없어 봉록이 없습니다.”
“이런, 젠장! 그럼 그동안 무료 봉사 했다는 거야?”
상인 정신이 투철한 라혼은 봉록 없이 일했다는 것보다 모르고 착취당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
“소궁주님 정말 대단하신가 봐.”
“….”
여인천궁의 제자 취하(翠霞)와 초련(椒蓮)은 한가로운 오전 시간을 맞아 수다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글쎄, 세 분 장로님들이 천고의 기재라면서 입이 귀에 걸려 있지 뭐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설화 아가씨가 불쌍하더라고….”
“왜?”
“장로님들이 신이 난 만큼 소궁주님을 더 몰아붙이시잖아!”
“맞아. 그건, 그래….”
취하는 초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설화 소궁주에게 옥녀심공을 전수하기 위해 동행한 여인천궁의 세 장로들은 비전의 전수 절차에 따라 설화의 몸에 세 장로 각각 10년 공력에 해당하는 옥녀진기를 주입했다. 이것은 문파 고유의 내공력을 경험하고 심결에 따를 운용을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즉, 진기가 흐르는 혈도를 개척하는 것이다. 평평한 평지에 물을 흘리면 제멋대로 퍼지지만 누군가 그 평지에 막대기 같은 것으로 선을 그으면 물이 그 길을 따라 흐르고, 물이 계속 흐르면 그 선이 내가 되고 강이 되는 이치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같은 기공(氣功)을 수련한 세 명의 장로였지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공력도 개개인의 차이가 나게 마련이었다. 격체전력(隔體傳力)으로 전수한 이인(異人)의 공력은 종국에는 공(空)으로 흩어져버리게 된다. 단지 그 공력이 지나간 길(道)이 만들어져 무공 전수를 받은 자가 쉽게 경지에 도달하도록 도울 뿐이었다. 즉 세 장로가 설화에게 주입한 공력은 설화가 공력을 익히기 위한 작은 불씨 같은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 장로가 놀란 것은 설화가 선천진기(先天眞氣)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천진기란 생명 본연의 힘이라는 선천지기(先天之氣)를 기반으로 하는 공력이었다. 그리고 임시로 주입한 30년에 해당하는 옥녀심공의 공력을 그대로 유지하더니 곧 자신의 본신공력(本身功力)으로 만들어버리자 세 장로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신기해하면서도 선천진기의 영향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여인천궁의 세 장로는 길을 닦는 어렵고 지겨운 과정을 아무 어려움 없이 건너뛴 설화에게 본격적인 옥녀심결을 전수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설화가 다른 사람의 공력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라혼의 설화가 태어난 직후 심어둔 인조 드래곤 하트인 드라시안 하트 때문이었다. 마나를 다루는 기관인 드라시안 하트는 세 장로들이 설화에게 격체전력으로 임시 주입한 옥녀심공의 공력을 본신공력화한 것이다. 거기다 드라시안 하트를 가진 설화에게 마나의 운용, 즉 옥녀심결에 의한 공력의 운용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또 아직 나이가 어려 장로들이 하는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저녁에 라혼이 설화가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모르는 세 장로는 설화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는 문일지십(聞一知十), 아니 문일지백(聞一知百)의 기재로 평가하며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더욱더 설화를 몰아쳐갔다.
지금껏 설화 소궁주의 인간 같지 않은 깜찍함과 귀여움, 그리고 몇 년 후가 기대된다는 얘기를 나누던 초련과 취하는 부부 같지 않고 마치 부녀지간 같은 상공과 소궁주의 이야기를 하다 취하가 은근한 어투로 궁주님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말야! 궁주님이 요새 이상하시지 않니?”
“궁주님이 뭘?”
“아니 왜, 궁주님이 상공을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잖아.”
“뭐어?”
“가끔 상공이 소궁주님이랑 같이 있는 모습을 아련한 시선으로 보시면서 한숨을 내쉬시는 걸 봤거든.”
“어머, 정말? 나는 외당주님이 그러는 걸 봤는데?”
“어디 검선자뿐이겠니. 문선자도 그러는데, 무선자는 워낙에 빙녀라 봐도 잘 모르겠고….”
“그렇단 말이야?”
“에휴~! 나도 솔직히 말하건대, 상공은 보면 볼수록 멋있어!”
취하처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초련 또한 상공에게 자신의 마음이 자꾸 기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초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한 점 욕념(欲念) 없는 담담한 눈빛과 아이를―아무리 봐도 상공과 소궁주는 부부로 안 보인다― 키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강했다. 무림의 여인인 이들은 모두 무인(武人)이었고 강한 자에게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칼끝에서 살아가는 무인, 특히나 무림인들에게는 상대가 적이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든 강한 자에게는 경의와 존경의 염(念)을 보냈다.
“그런데 점심때 다 되지 않았니?”
“어머, 정말이네. 그런데 오늘은 들어오셔서 식사하시려나?”
“초련이 너, 수상해.”
“내, 내가 뭘?”
“고백해! 나도 고백했잖아.”
“몰라! 가서 식사 준비하는 포란(蒲蘭) 언니나 도울 거야!”
“초련이 배신자, 너 거기 안 서?”
초련은 도망치듯 대청으로 뛰어나왔다. 취하는 그런 초란을 쫓아 대청까지 나왔는데,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초련을 보고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간파했다.
―창, 와장창~!
―죽어~! 썅~!
―쿵!
그리고 취하는 밖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새 대청에는 여인천궁의 여인들이 무기를 챙겨들고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궁주님, 밖에 있던 무사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는 연공실을 지키고, 묘연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라!”
“존명!”
여인천궁은 갑작스런 소란에 긴장하며 궁주의 명(命)에 따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무선자 초항아는 연공 중인 소궁주를 보호하기 위해 연공실을 지켰고, 검선자 주묘연은 굳은 안색으로 검녀들을 백호나한부 전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주묘연 자신은 대문 앞을 지켰다.
“갑자기 웬 소란이지?”
“주 언니, 아마도 이건 인세(人世)의 무리들이 상공에게 잡힌 일권파천과 초상비협을 구명하기 위한 소란일 거예요.”
“인세?”
“오늘이 그들을 참형(慘刑)에 처하는 날이거든요.”
검선자 주묘연은 정보를 통괄하는 순찰 당주로 있는 문선자 오단예의 말을 듣고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저들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이곳 백호나한부에 침입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었다.
―쿵~!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굳게 닫힌 백호나한부의 대문이 크게 울렸다. 주묘연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급히 2층으로 올라섰다. 이곳은 원래 술과 요리 그리고 숙박업을 하던 주점이었기에 대로가 보이는 곳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을 백호나한부로 바꾸며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창으로 막아두고 식당으로 사용했다. 백호나한부의 대문 밖 상황은 다행히 여인천궁의 입장에선 심각하지 않았다. 일단의 무리들이 서로 엉겨붙어 싸우면서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지만 백호나한부로 침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가끔 백호나한부 쪽을 향해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자가 있었으나, 일단의 무사들이 그것을 막아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조산투귀 만력의 모습까지 보였다.
―쾅! 퍽, 와장창~!
―캉, 창
―크어억~!
“백호나한이다.”
일이 벌어진지 일다경(一茶頃 : 15분)이 지나서야 라혼은 금군을 이끌고 일이 벌어진 자신의 집 앞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수습하기 위해 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금군만 있다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일이 속수무책일 뻔했으나 그들의 인솔자는 다름 아닌 백호나한이었다. 그러나 백호나한이 나섰음에도 그의 출현에 잠시 멈칫하던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망할 놈이 등 뒤에서 공격을 해?”
“어떤 놈이 내 엉덩이에 구멍을 냈어?”
“뭘 봐? 죽고 싶냐?”
인세에 속한 무사들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수백 명의 무사들 사이에 껴서 분란을 조성했다. 다시 혼란스런 싸움판이 벌어지며 무사들은 싸움판의 광기에 미쳐 상대가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얼떨결에 눈먼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진 무사들이 무기를 꺼내들고 휘두르기 시작하자 선혈이 낭자하며 피를 보자 백호나한 라혼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라혼의 빠른 공격에 무사들은 허공으로 폭발하듯이 나가떨어졌다. 소란이 일어난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들 눈에는 백호나한이 싸움판에 뛰어들자 마치 연못에 바위가 떨어져 물이 솟구치듯 무사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허! 대단하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성을 연발할 때 일단의 기마가 대로를 따라 들이닥쳤다.
“비켜라!”
―두두두두두두두….
말을 탄 금위위(禁衛衛)가 대오를 맞추어 달리자, 사람들은 분분히 길에서 비켜섰다. 널찍한 대로를 가득 메우며 출동한 금위들은 순식간에 일부가 말에서 내려 포진했다. 그러나 이곳의 상황은 백호나한 라혼의 신위에 거의 정리되 가고 있었다.
인세의 고수들은 금위위의 출동을 미리 알고 진즉에 몸을 뺐고, 소란이 일어난 영문도 모른 채 싸움에 취해 있던 무사들은 이미 백호나한의 손속에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멈춰라!”
금위위(禁衛衛) 금위대장(禁衛大將) 호덕창(虎德昌)은 포진(鋪陳)이 완료된 순간, 외쳤으나 소란은 사실상 종료된 상태였다.
“백호수문대장, 참장 라혼입니다.”
소란의 한가운데 당당히 선 무관의 군례를 눈으로 받은 금위대장 호덕창은 멀리 보이는 백호문에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속았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북쪽의 현무문 쪽에서 폭죽이 터져올랐다.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였다.
“이런, 위령 호포산은 이곳에 남아 상황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현무문으로 간다.”
“존명!”
50여 명의 금위만 남고 모든 금위들이 금위대장 호덕창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렸다.
“금위들은 적도를 포박하라!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금위위 위령 호포산의 명(命)에 금위들은 쓰러져 신음하는 무사들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금위라고 하지만 칼밥을 먹고 사는 무사들이 가만히 누워 순순히 오라를 받을 리 없었다. 저마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백호나한 라혼의 뒤로 가며 습관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수백의 무리 중 단 수십 명만을 잡은 금위들은 적도들이 모여 반항할 기미를 보이자 따로 명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진형을 정비했다.
“뭐 하는 거냐? 지금 반역을 하려는 것이냐?”
앞으로 나선 호포산이 공교롭게도 무리를 이끄는 위치에 서 있는 무관에게 호통을 쳤다.
“너는 백호문의 무관 같은데? 어찌하여 적도들을 감싸느냐!”
라혼은 말 위에서 거만하게 말하는 금위의 위령이라는 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소란이 백호문으로 향하지 못하게 막으려 포진한 백호수문금군을 지휘하던 모석이 다가오자 일부러 소리내어 물었다.
“아까 저자가 위령이라고 하던데, 참장인 나하고 어느 쪽이 상급자요!”
“아니….”
“….”
모석은 라혼이 여기 있는 누구나 다 듣도록 큰 소리로 묻자 눈에 보이도록 당황하며 금위위 위령의 눈치를 살폈다. 금위위 위령은 분노에 몸을 떨었지만 라혼 대장은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백호수문대장인 나는 참장으로 장군의 반열에 있는 반면, 금위위 위령은 장군의 반열에 있지 않으렷다?”
“금위위 위령이 비록 장군의 반열에 있지는 않지만 권한은 그에 못지않습니다. 그리고 비상 상황에선 금위위에게 지휘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금위대장으로부터 이곳 상황을 정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모석은 거듭된 라혼의 질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라혼은 의도적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소리쳤다.
“분명 나보다 직급이 낮은 자렷다. 나보다 직급이 낮은 자의 지휘를 받을 일이 없다.”
“감히 네놈이 날 놀리려는 것이냐?”
“갈(喝)!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지도 않았고, 또 나는 조정의 명령서를 받은 적도 없다. 또한 책임자였던 금위대장으로부터 어떠한 협조 요청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감히 일개 위령 따위가 상급자이자 참장인 날 욕보이다니…. 모 정령, 금위가 아무 데나 가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 용황 폐하나 호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면 임의로 누구든지 지휘할 수 있습니다.”
라혼은 모석에 말에 건방진 위령이라는 작자에게 물었다.
“너는 용황 폐하나 호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느냐?”
“이, 이런….”
사실 이번일은 인세(人世)의 반역자들을 잡으려는 금위위의 독단적인 작전이었다. 비록 호제(虎帝) 폐하에게 인세(人世)의 반역자들은 잡으라는 성지(聖旨)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호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고 우기기엔 명분이 약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네가 감히 반역을 꾀하려는 것이냐?”
“모 정령, 상급자에게 하급자의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극상의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비록 금위에게 어떤 신체적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되나 고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대문의 수문대장은 모든 일은 선참후보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아예 막 나가는 모석이었다.
“그럼 상급자에게 폭언을 하고 예의를 갖추지 않은 자는 어떤 형벌을 내리는가?”
“곤장 1백대입니다.”
라혼은 모석이 ‘곤장(棍杖)’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링크Blink] 주문으로 금위위 위령 호포산의 곁으로 가서 그의 목줄을 잡아 말에서 끌어내렸다.
―허! 컥!
그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패대기쳐버렸다.
―퍽!
라혼은 발작하려는 금위들을 피어(Fear)로 제압하며 고함쳤다.
“곤장을 가져와라!”
갑작스런 사태에 얼이 빠져 있던 모석은 이제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하며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백호문의 금군들에게 곤장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라혼은 모석이 전해준 곤장을 받아들어 인정사정 보지 않고 그대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퍽….
―크억, 칵, 악, 악, 악!
묘한 침묵 속에 곤장을 때리는 소리와 맞는 자의 비명 소리만 울려퍼졌다. 그리고 꼭 1백대의 태형을 가하고서야 매질은 멈추었다.
“모 부대장은 장계를 준비하라!”
“존명!”
“아무런 이유 없이 백호수문금군의 행사를 방해한 죄, 상급자를 모욕한 죄, 그리고 백호문에서 직책을 믿고 함부로 소란을 일으킨 죄, 그리고 하극상의 죄. 그리고 금위 다음 책임자는 누군가?”
그러자 금위위에서 한 사람이 나와 군례를 하고 나섰다. 역시 예의범절은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금위위 위장(衛長) 견사찬(犬使讚)입니다.”
“금위대장은 내게 아무런 협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 맞는가?”
“맞습니다.”
견사찬은 금위위로 일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해보는지라 정신이 없었다. 단지 그의 본능은 참장이라는 백호수문대장을 자극하지 말라는 신호만 계속 보냈다.
“금위대장에게 명을 받은 위령도 내게 협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 맞는가?”
“맞습니다.”
“직급이 낮은 위령이 장군의 반열에 있는 내게 하대하고 또 반역자라 모함했다. 들었는가?”
“드, 들었습니다.”
“되었다. 모 부대장은 위장의 증언을 장계에 같이 적으라.”
“조, 존명!”
견사찬은 이대로 물러서면 자신의 꼴이 우스워지기에 몇 마디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이들이 일으킨 소란으로 중요한 죄인을 잡는 데 방해됐습니다. 이들 가운데 그들을 도운 적도가 있을지 모르니 협조해주십시오!”
“우습구나! 자기들이 잘못해서 놓친 죄인을 왜 여기 와서 찾는가? 그리고 이들은 백호문의 금군을 모병하기에 찾아온 자들이다. 조정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찾아온 자들을 있을지 없을지 모를 적도를 찾겠다며 문초를 하겠다는 것인가?”
“저들이 금군에 지원하기 위해 모인 자들이란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아니라면 수상한 놈이 분명하지!”
“그렇다면 저희가 백호문의 모병을 받는 자리에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좋도록 하라! 하지만 방해는 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수백의 무사들은 소란을 일으킨 죄로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금군이 되었다. 금군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면 졸지에 적도로 몰리게 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날 하루에 모병된 지원병은 총 57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명단을 금위위가 가져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
백호수문대장 라혼이 금위위 위령을 치도곤한 일은 금위위가 죄인들을 놓치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버렸다. 하지만 그 일은 라혼의 이름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그동안 금위위의 위세가 사문수비금군(四門守備禁軍)을 압도했지만 이번 두 명의 인세 고수를 통해 다른 인세(人世)의 반역자들을 잡는 작전에 대한 실패와 백호문의 사건으로 위세가 크게 꺾여버렸다. 금위위의 위세를 믿고 장교에 불과한 위령이 장군(將軍)의 반열에 있는 금군 참장을 겁박한 것은 누가 봐도 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금위대장 호덕창에게 밀려 죽어지내던 사문수비대장 낭차랑은 이번에 보란 듯이 조정에서 백호수문대장 라혼 참장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덤으로 존장의 법도를 세운 공(?)으로 포상까지 주어지니 금위위의 위세가 크게 꺾였다.
그러나 라혼은 갑자기 늘어난 떨거지들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동안 서로 손발을 섞은 정(情)과 보나마나 치안을 안정시키지 못했다고 뭐라 그럴까 봐 이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개새끼―금위위 위장 견사찬은 견인족이다―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찌어찌 변명을 하다 보니 이들을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라혼이 원한 것은 말 잘 듣는(?) 병졸이지 쓸데없이 자존심 강한 무사들이 아니었다. 대충 이름만 받고 이들을 보내려 했지만 그 개코 금위 위장(衛長)은 그 명단까지 베껴갔다. 결국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한 무사들을 말 잘 듣는 강아지로 만들어야 하는 라혼의 입장에선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라혼은 ‘지금 무지 기분 나쁘다’라는 기운을 풍기며 백호영(白虎營)을 들어서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패잔병들이었다. 자신들의 최고 상관인 백호수문대장이 왔는데도 멀뚱히 앉아서 얼굴만 쳐다보고만 있으니 라혼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라혼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넓은 연무장을 돌면서 담벼락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라혼은 장봉(長棒) 두 개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음껏 분노를 폭발시켰다.
“니들 죽었써!”
라혼은 그대로 패잔병 꼴을 하고 있는 무사들을 패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예 작정하고 염동력(念動力)으로 무사들의 독문무기들를 조종해 무사들을 쳐나갔다. [뱀파이어릭 터치Vampiric touch],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등 4대 마법 속성을 무기에 걸어 무사들을 팼다. 무사들은 감전되고, 태워지고, 얼리며, 허공을 부유하고, 한 대 맞을 때마다 힘이 빠지는 아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들을 살살 달래며 무공을 전수하면 충성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라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라혼은 울화가 치밀어 있었다. 참을 수도 있지만 라혼에겐 참을 이유가 없었다. 백호영의 연무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지만 밖에서 본 백호영은 평상시와 같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모석은 라혼 수비대장이 앞으로 사흘간 백호영의 출입을 통제하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을 달래기 위해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흘 후, 모석은 1천인분의 밥을 지어 백호영을 찾았다. 그리고 둘러보니 어떻게 했는지 무사들의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라혼 수문대장님이 설득한 모양이군.’
거칠고 개성 강한 그들을 사흘 밤낮을 설득(?)한 라혼은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한 무사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반면에 겉모양만 멀쩡한 무사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인간 같지 않은 백호나한의 징계가 두려웠다. 여기서 쓰러져 다시 사흘 동안 그 지옥을 맛보게 된다면 차라리 죽어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사흘 이상을 굶은 그들에게 저기 저 밥 수레에서 바람에 실려 퍼지는 향기에 정신이 다 몽롱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기강이 흐트러지면 다시 사흘 동안 교육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에 무사들은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무사들은 각자 밥그릇을 받아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578명 전원이 밥그릇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지옥이었지만 이건 견디면 될 일이었다. 이윽고 기다리는 이들까지 모두 밥을 받자 백호나한의 ‘식사 시작’이란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냉혈한 백호나한의 입에서 식사 시작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 그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식사 시작’이란 말이 백호나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식사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여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또 사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 있던 실은 이내 끊어졌다.
“아우, 내 밥~! 헉!”
누군가 밥을 흘려 잡소리를 낸 것이다. 그렇게 또다시 지옥의 사흘이 시작되었다. 다시 사흘 후 이번엔 조용히 식사까지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빈 그릇 회수 과정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또 사흘…. 이제는 무사들의 눈에는 독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라혼은 그쯤에서 손을 털고 모든 군사 훈련을 모석에게 맡겼다. 모석은 그들에게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미 전원이 오랜 기간 수행을 해온 자들이었기에 체력이나 무력은 출중했다. 문제는 개성 강한 그들이 병가(兵家)의 경색된 조직을 견딜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명령에 절대 복종했다. 그리고 스무 날이 지나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그들은 훌륭한 금군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백호수문금군은 총병력 1024명이 되었고 그들은 사문수비대장과 황진성부윤의 약조대로 백호문에만 소속된 금군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라혼은 화풀이를 과하게(?) 한 것이 미안해 그들에게 약간의 무공을 전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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