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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최정미(중앙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창덕궁은 태종 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왕자의 난에 의해 왕에 오른 이방원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골육상쟁의 현장이였던 경복궁을 벗어나 창덕궁을 짓고 그곳에 머물렀다. 태종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선호했지만 다른 임금들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선호하였는데 이는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산에서 살던 ‘유전인자’를 가진 조선 사람들에게 불편한 경복궁보다 산림이 우거진 산자락에 자리잡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창덕궁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덕궁의 위상이 더욱 확고해진 것은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 버린 후 광해군때 다른 궁궐에 앞서 재건되고 부터이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창덕궁의 운명은 조선시대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데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의 계획적 훼손과 더불어 친일파의 유희장소로 변했다. 해방이후 왕실문화의 훼손이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21세기에 조선을 상징하는 궁궐에 대한 경외심은 아직까지 한국 사람들의 정서속에 남아 있다.
전각
창덕궁의 건축
창덕궁은 유교적 질서에 따른 궁궐 배치의 원칙과 자연과의 어울림을 함께 존중한 궁궐이였다. 배산임수, 전조후침, 구중궁궐, 동궁, 동조등으로 표현되는 당시 궁궐 건축의 기본 배치원칙을 따랐으며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금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었고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과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의 조건을 갖추었다.
전조후침에 따라 앞쪽에는 인정전, 선정전, 궐내각사가 자리하고 뒤쪽에는 임금을 비롯한 왕실가족의 사적인 공간으로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구중궁궐이라는 표현에 맞게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과 희정당, 그리고 낙선재등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중희당과 연영합같은 세자의 공간과 대비의 처소인 수강재를 궁궐의 동쪽에 배치했다.
궁궐의 외부공간: 돈화문
돈화문은 태종 12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광해군 원년에 재건된 것이다. 창덕궁의 정문으로 궁궐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데 이는 궁궐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모서리에 있는 것은 산자락에 위치한 창덕궁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궁궐 정면에는 북악의 매봉이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는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인 종묘가 있어 창덕궁의 정문이 들어설 수 없었다.
궁궐의 첫 마당: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완충공간
동양의 궁궐은 나무로 지어진 여러 채의 집으로 분산 배치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자칫하면 산만함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창덕궁의 건물 배치를 보면 도리어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공간을 흥미롭게 구성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심에 마당이 있다. 마당을 매개로 하여 그 안에서 건물들은 서로 연결되고 외부와 구별되는 독립된 공간을 가지게 된다. 마당은 다른 마당을 에워싸기 위해 만들어기도 한다.이러한 마당은 그 안에 있는 마당에 공간적인 깊이를 더해 더욱 장엄한 곳으로 만든다.
두 번째 마당: 절제된 전이의 공간
첫 번째 마당 동쪽에 있는 진선문을 들어서면 궁궐의 두 번째 마당을 만난다. 이 마당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에 사다리꼴로 둘러싸여 있어 인정전의 외행랑 뜰 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당을 만들고 있는 서쪽 행랑은 서향하고 있어 사실상 첫 번째 마당의 영역에 속한다. 마당 남쪽 행랑에는 내병조,호위청,상서원이 있으며 동쪽 행랑에는 배설방이 있다. 북쪽행랑은 모두 인정전 마당을 향하고 있어 이 마당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고 남쪽행랑의 내병조 역시 남향하고 있어 이 영역에서 빠진다. 두 번째 마당은 그 모양이 정형화된 직사각형이 아니라 정형에서 벗어난 사다리꼴로 되어 있다. 숙장문 쪽은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 종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넓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사다리꼴 마당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마당: 궁궐의 으뜸 공간
인정문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인정전이 세단의 월대 위에 우뚝 서 있다. 인정전은 태조5년에 창건되었지만 몇차례 불타고 순조 3년에 지금의 건물이 지어졌다. 인정전은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임금의 의상실: 상의원
돈화문 오른쪽으로 불룩하게 남쪽으로 내밀어진 마당에 상의원, 불면각, 교자고등이 자리잡고 있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 왕실의 금은보화와 장식품 등을 공급하던 관청이다. 조선 태조 원년에 고려의 제도를 본떠 공진서를 두었다가 숙종37년에 상의원이라 고쳤다. 상의원에서는 명나라의 의복제도에 따라 임금의 의복을 장만하였는데 면복,평천관, 강사포, 원유관 익선관을 만들어 바쳤다.
새 불씨의 공급처: 내병조
내병조는 두 번째 마당의 남쪽 행랑에 있으나 남향하고 있어 별도의 영역을 갖추고 있다. 이는 땅의 생김새 때문이기도 하고 별도로 마당을 이용할 일이 많은 내병조의 독특한 역할 때문이기도 했다. 내병조는 궐내에 있는 병조의 부속관아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 일과 의식에 쓰이는 무기와 도구등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내병조는 죄인을 신문하는 장소인 동시에 개화행사를 주관했다.
궁궐 안의 종합청사: 궐내각사
궁궐의 첫 번째 마당 바로 북쪽 지역은 임금을 가까이 보좌할 필요성 때문에 궁궐에 들어와 있는 여러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러한 관청을 궐내각사라 불렀다. 내각, 옥당, 약방 그리고 예문관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역대 임금을 모시는 곳: 선원전
인정전 서쪽 문인 만안문을 들어서면 양지당이 있고 양지당 서쪽 담 너머에는 서원전이 있다. 선원전은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진전이라고도 했다. 부속채 중 전면에 있는 두 개와 뒷면 서쪽에 있는 것은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장을 차리던 진설청이고 뒷면 동쪽에 있는 것은 내재실이었다.
없어진 대비전: 경복전
선원전 북쪽에는 경복전이 있었다. 대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순조 24년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경복전 앞에는 남북으로 길쭉한 네모진 연못이 있었고 이 연못 바로 북쪽에는 애련재가 있었는데 경복전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또한 풍기석이 있어 여기에 풍기죽을 꽃아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할 수 있게 하였다. 경복전 서북쪽에는 영모당이 있다. 영모당 남쪽으로는 생물방과 주방등이 있다. 이를 수라간이라 했다.
임금의 집무실: 선정전
인정전 바로 동쪽에는 청기와로 지붕을 덮은 건물이 있는데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인 선정전이다.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을 정전이라하고 선정전처럼 일상적인 업무를 위한 공간을 편전이라 했다. 선정전은 정조 이전에는 한 번도 혼전으로 사용된적이 없다가 순조 즉위년에 정조의 혼전으로 사용된 후 순조, 헌종,철종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선전관청과 장방이 자리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
영조의 마음의 고향: 보경당
선정전 뒤쪽은 담과 행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여러 개 있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보경당, 태화당, 재덕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 중에서 맨 왼쪽에 있는 보경당은 화려한 겉모습과 독립된 공간 구성으로 다른 두 건물과 구별되고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거처지이며 영조가 태어난 곳으로 영조가 매우 아끼는 공간이였다.
임금과 왕비의 생활공간: 희정당과 대조전
선정전 동북쪽은 임금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침전이 있는 곳으로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선정전 동쪽으로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이층집인 징광루, 그 바로 오른쪽에는 집상전이 있다.징광루 아래층은 경훈각이다. 이 건물들은 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으로 모두 불탄 후 인조25년에 옛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희정당은 선정전과 함께 임금의 집무공간이다. 선정전이 공식적 공간이고 희정당은 편안한 업무공간이었다.
왕실 어른의 집: 수정전
징광루 뒤쪽, 숲으로 둘러싸인 널찍하고 한가로운 곳에 수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수정전은 대비전이다. 원래 효종 5년에 대비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위해 세우고 수정당이라 했다 정조의 재위 18년 다음 해에 왕대비 정순황후가 쉰한 살이 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이하는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기 위해 수정당의 이름을 수정전으로 바꾸고 수리하게 했다. 이집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마당이 지나치게 큰데 이는 조선의 궁궐 건축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마당은 건축의 외부공간이기 때문에 내부공간인 집의 규모와 균형을 유지할 때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준다.
대신들의 모임 장소: 빈청
두 번째 마당을 통하여 동쪽에 있는 숙장문을 지나면 작은 동산 밑에 빈청이 있다. 빈청은 비변사의 부설기관으로 건물의 이름은 비궁당이며 대신들과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임금을 만나기 전에 대기하는 곳이다.
궁궐의 동쪽: 왕세자의 공간
궁궐의 동쪽은 예로부터 왕세자의 공간이었다. 세자는 임금의 후계자로 마치 떠오르기 전의 태양과 같은 존재이므로 궁궐 동쪽에 거처하고 그 명칭도 동궁이라 했다.창덕궁에는 선정전과 희정당등 임금의 영역 동쪽에 성정각,중희당 세자와 관계되는 집이 차례로 있었다.
헌종의 예술과 사랑이 빚어낸 곳 : 낙선재,석복헌, 수강재
수방재와 연영합 그리고 매화나무가 가득했던 앞마당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헌종 때 지어진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나란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낙선재,석복헌, 수강재는 헌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경빈 김씨가 곧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세자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현실적으로 반영된 건축물이다. 먼저 헌종의 처소인 낙선재는 경빈 김씨를 맞아들인 헌종 13년에 지어졌고,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의 처소인 석복헌과 수강재는 이듬해인 헌종14년에 지어졌다.
후원
궁궐의 뒷동산: 후원
창덕궁은 남쪽으로 뻗은 북악의 매봉 자락에 그 터를 잡아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이 때문에 궁궐의 주요 전각들은 비교적 평탄한 남쪽에 배치되고 상대적으로 지형이 높은 뒤편에 궁궐의 동산이 위치하게 되었다 창덕궁의 동산은 궁궐 뒤편에 있다고 해서 후원이라 했고, 궁궐 북쪽에 있다고해서 북원이라고도 했다. 궁궐의 동산은 금원이라 불러는데 이는 임금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원의 쓰임새
후원에서는 임금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행사가 열렸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친히 참석한 군사훈련이 자주 실시되기도 하였다. 후원에서는 관화라 하여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도 했다. 또 국가의 기간산업이 농사와 양잠이었으므로 이를 권장하는 행사가 후원에서 열렸다.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도 자주 열렸는데 임금이 대비를 모시는 잔치, 종친을 위한 잔치,신하를 위한 다양한 잔치가 여기에서 열렸다.
정조의 이상과 꿈: 부용정과 주합루
부용정은 후원의 꽃이다. 동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약 300평 넓이로 연못을 파 타액지라하고 이를 중심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 연못을 지금은 부용지라 부른다.평지로 터진 연못의 동쪽에 잘 다듬은 큰 돌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우뚝 건물을 세워 영화당이라 하고 영화당을 따라 연못 동쪽을 담으로 둘러막아 연못이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했다. 연못 남쪽에는 물에 두 다리를 담근 부용정이 있으며 연못 건너편 북쪽 언덕에는 2층 건물인 주합루가 부용지를 내려다 보고 있다.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가 배치된 지역은 후원의 공간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그 언저리 여기저기에 건물을 앉혀 이곳저곳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효명세자의 수신 도량: 의두합
영화당 북쪽에는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인 마당 세 개가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 중 바로 산 밑에 위치한 제일 남쪽 마당에는 이안재와 운림거로 표기된 두 건물이 북향을 한 채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이안재와 운림거는 단청하지 않은 작은 북향 집으로 순조 27년에 효명세자가 조용히 책을 읽기 위해 지었다.
후원의 별당: 어수당
애련지 서쪽에는 연못이 또 하나 있고 이 연못 사이에 어수당이 있었다. 어수당은 후원에 있는 건물 중에서는 제법 규모가 컸는데, 주변으로는 난간을 두르고 지붕에는 하얀 회로 양성을 하여 품위를 높였다. 어수당은 후원에 있는 임금의 별당으로 여기서 여러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학문을 논하고 정사를 보았다. 지금 어수당은 사라지고 어수당 양쪽의 연못만 남아 있다.
의문의 집: 연경당
연경당은 순조 27년에 효명세자가 진장각의 옛터에 세웠다. 때마침 이 집에서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경사스러움을 행하는 집이란 의미로 이름을 연경당이라 했다.
그런데 창덕궁에 있는 건물 중 연경당처럼 현재까지 남아 있어 그 실체가 전해지면서도 많은 의문을 던지는 건물도 없는 듯하다. 현재의 연경당과 동궐도의 연경당이 위치나 모양에서 전혀 다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은 당시 역사와 관련하여 풀어야 할 숙제이다. 연경당은 궁궐에 있는 집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았고, 그 배치 형식 또한 조선시대 사대부 집을 닮았다.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질서에 따라 사랑채와 안채를 따로 두어 남녀의 공간을 구분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일반적인 민가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민가는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되어 있으나 연경당은 약 120칸에 이르러 일반 사대부 집과 차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산 좋고 물 좋아 정자가 많은 곳: 폄우사, 존덕정, 청심정
애련정 북쪽으로 산을 넘으면 계곡을 따라 연못과 정자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궁궐지에 따르면 이곳에는 심추정, 청연각, 척뇌당, 존덕정, 폄우사, 청심정,망춘정, 천향각,등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궐지에는 존덕정, 폄우사, 청심정 그리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초가로 된 집과 세 칸짜리 정자가 여러 개의 연못과 어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중 현재 존덕정, 폄우사, 청심정만이 남아 있다.
유상곡수연의 풍류가 있던 곳: 옥류천
청심정 북쪽에 있는 옥류천은 후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다. 이 지역은 인조 때에 조성되었는데 옥류천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정자가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인조 14년에 돌에 구멍을 뚫고 넓은 바위 둘레에 둥글게 홈을 파서 샘물을 흐르게 하여 옥류천을 만들었다. 이는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풍류를 즐기는 유상곡수를 위해서였다.
하늘에 있는 정자: 능허정과 취규정
청심정 서쪽에는 능허정이 있다. 이곳은 후원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해발 90미터에 이른다. 능허정은 숙종 17년에 세워졌다. 능허란 하늘을 오른다라는 뜻으로 후원에서 가장 높은 능허정에 오르는 것을 빗대어 붙인 이름이다.
궁궐의 토속신앙: 산단과 부군당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지만 예전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온 다양한 신념체계도 인정했다. 후원에 있던 산단은 좋은 실례이다.
동궐도에서 능허정의 뒷담을 따라 산을 내려오면 부군당이라는 작은 집이 보인다. 부군당은 부근당이라고도 하며 관청에서 복을 빌기 위해 설치한 사당이다.
조선의 의리 :대보단
창덕궁 서쪽 궁궐 담장 밖의 북쪽에는 대보단이라 이름한 제단이 있었다. 동궐도에는 황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숙종 30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 신종을 위한 제단이었다. 그 후 영조 25년에는 명나라 태조와 의종을 함께 모셔제사 지냈다. 대보단은 큰 은혜에 보답하는 제단 이란 뜻인데, 한편으로는 황제를 위한 제단이라는 뜻으로 황단이라고 했다.
시를 짓고 활을 쏘던 곳: 몽답정과 괘궁정
현재 신선원전 안에는 정자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몽답정이고 다른 하나는 고ㅐ궁정이다.몽답정은 영조 35년에 훈련대장 김성응이 창덕궁 북서쪽에 있던 훈련원의 군영이었던 북영에 지은 정자이다. 영조가 대보단에 행차했다가 이 정자를 발견하고 몽답정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몽답정 북쪽 언덕에 있는 괘궁정은 사정, 즉 활터에 세운 정자로 북영의 활터를 내려다보던 정자였다.
조선의 품을 떠난 창덕궁
조선시대 창덕궁은 임금이 생활하며 신하들과 나라를 경영했던 왕조 최고의 관청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창덕궁도 본래의 기능과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 때문에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창덕궁의 위상을 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다. 창덕궁은 창건 이후 줄곧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지금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서울 도심에 있는 창덕궁은 숱한 개발의 열풍이 비껴 간 별천지이다. 문화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궁궐의 영역을 보존한 것이 그 나마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창덕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을 상기하고 좀더 직접적으로 5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첫댓글 창덕궁에대한 자세한 소개 잘 읽었습니다ㅣ.
잊었던 창덕궁이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되새겨져 한번 가 보아야 되겠습니다. 아주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