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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가장 중요한 질문 :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관을 크게는 두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유신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신론적 세계관이나 무신론적 세계관은 각각의 영역에서 세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신론적 세계관이라도 기독․유대교 세계관과 이슬람 세계관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힌두교적 세계관, 불교적 세계관은 유신론적 세계관으로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나 이슬람 세계관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으나 유사 유신론적 세계관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적 세계관은 서로 겹치는 것이 많아서 세분화하는 것이 좀 모호할 수도 있지만, 자연주의적 세계관, 인본주의적 세계관, 유물론적 세계관 그리고 진화론적 세계관으로 세분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독자들이 유신론적 관점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무신론적 관점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독자들의 행복론과 삶에 가장 근본적이고도 엄청난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선 이것을 고찰하는 것이 현명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하나님(신)이 계신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충분한 답을 얻었다고 확신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독자 여러분들의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시작합니다. 즉 성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다 조사할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크게는 기독교인들처럼 초월적이며 이성적인 설계자 곧 하나님(절대자)
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연히 또는 자연적인 발생을 통해 우주와 생명체가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전자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이며, 후자는 무신론자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관점 중에서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든지 간에 필자는 한 가지 주의할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신은 있다” 혹은, “신은 없다”라는 문제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이 더 신뢰할 만한가’라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견해 가운데서 각자 나름의 확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견해가 분명하게 옳다는 것을 모든 사람 앞에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모든 지식을 요구하는 문제이며, 실제로 그렇게 모든 지식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원과 우주의 발생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 “신은 있다” 또는 “신은 없다”를 사람 앞에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신이라면 어차피 그 대상은 인간 지성의 능력 안에 있는 신일 것이며, 그 신은 사실상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신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신은 인간의 능력 밖에, 위에 있어야만 신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인간과 우주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기원과 그 과정과 현재 세계의 모습을 신이 없다는 가정하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할 수도 없는 일일뿐더러 지금까지 그렇게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지 신이 없다고 주장하며 허세를 부린 사람들은 있었지만, 자신의 말을 증명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증명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해서,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신뢰할 만한 근거들이 충분히 있는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 견해 중에 그 하나는 분명 사실이거나 다른 하나는 거짓일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를 살펴보고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관과 행복론을 세우는 것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단언컨대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관 또는 세계관과 우리의 실제 삶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생각과 사상을 가졌느냐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신)이 있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신)이 없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이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와 하나님 없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려 했던 다윈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양심과 도덕이라는 어리석고도 치욕스런 오류들로부터 독일을 자유롭게 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세계가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나는 폭력이 가능한 청년들을 원한다. 도도하고, 냉혹하고, 그리고 잔인한 젊은이들을.” 또는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한 개체가 강한 개체와 결합하는 일을 자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우월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과 결합하는 일은 더더욱 바라지 않을 터. 왜 그럴까? 그런 결합이 일어날 경우, 수백 수천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더욱 고귀한 존재를 탄생시키려는 자연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과연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며, 가장 파괴적인 전쟁을 일으켰으며, 600만명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생각과 사상적 체계를 고려할 때 그의 그러한 행동은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신이 없다면 양심과 도덕의 기준은 없어지고, 자기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데에 아무 제약이 없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인간을 학살하는 데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갔던 사람 중에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봉사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의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는 한센병 걸린 사람들이 거주하는 애양원교회에서 그들을 도우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9월 28일에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총살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지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러한 차이를 빚을 수 있는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간 히틀러와 손양원 이 두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차이를 만든 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신)은 없다고 믿는가에서 오는 차이였습니다. 유신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적 세계관은 이렇게 간극이 큰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증명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어떤 신념이 더 신뢰할 만하고, 실재 세계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신념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고려사항(증거)들은 충분하다고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세 가지 영역 - 우주와 인간의 기원, 도덕과 양심, 성경의 신빙성- 을 고려해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기에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우주와 인간의 기원
우주의 기원
광대한 우주 그리고 지구와 이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의 기원은 사람이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무시하는 것은 우주의 실재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가볍게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놀랍도록 광대한 우주와 이 지구상에서 고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는 우주와 인간이 우리에게 실재(real existence)인 만큼이나 우리에게 중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하도록 요구한다면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는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어떤 관점이 합리적이며 실제적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먼저 무신론자들은 놀랍도록 광대하고도 정교한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그것을 설명하려면 그것이 무(無)에서 나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주는 스스로 그렇게 발생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알 수 없는 원인 즉 우연(偶然) 또는 자연(自然)을 우주의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원인 없이 결과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R.C 스프로울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원인 없는 결과라는 개념은 분석적으로 오류다. 그것은 ‘사각형 원’이나 ‘결혼한 미혼남’이라는 말과 비슷한 난센스 진술이다.....원인 없이는 결과도 있을 수 없다는 말에는 전지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형식논리를 피력한 것이다.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전지성이 아니라 합리성이다. 원인 없는 결과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성으로 물러났음을 의미한다.”라고 지적합니다.
오늘날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우주의 기원은 소위 빅뱅(우주폭발)이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자들은 빅뱅이 무질서한 원시적 사건이 아니라 고도의 질서 정연한 사건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즉 지금 우리의 생명과 생명체가 존재하려면 우주는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불가해할 정도의 정확한 수준으로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P.C.W 데이비스는 별들의 생성에 적합한 맨 처음 조건, 즉 행성들의 필수 조건이자 생명의 필수 조건이 갖춰질 확률이 최소한 1023분의 1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이 말은 곧 우연에 의해서 놀랍도록 광대한 우주가 생겨나고 또한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지구가 발생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 따르면 “빅뱅이 있은 지 1초 후 우주의 팽창 속도가 1019분의 1만 늦었어도 우주는 불덩어리로 붕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과연 이러한 지적 발견들은 이 우주가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하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분명 우주의 시작은 원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가 놀랍도록 정밀하게 조정되고 있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합리적 해답이 이성적인 설계자에게 있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피해 보려고 우주의 나이가 무한하다는 정상(定常) 우주론을 고안한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lye,1915-2001)은 후에 우주의 이성적인 설계자를 믿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초지성(superintellectual)이 화학과 생물학은 물론이요 물리학도 가지고 놀았으며, 자연 속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힘들 중 아무 목적 없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일러 준다”어린 시절부터 무신론자였던 저명한 천문학자인 앨런 샌디지(Allan Sandage)는 1985년 우주의 기원이라는 토론 주제로 빅뱅에 대해 발언하던 도중에 50세의 나이에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바로 그가 “존재의 기적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뿐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생명과 인간의 기원
이제는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주의 기원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창조인가? 진화인가? 라는 질문에 과연 어느 편이 합리적 설명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적 관점은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그 첫 생명이 발생하였으며, 그 생명이 어떻게 진화하여 지금의 엄청난 종류의 동식물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의 존재하는 인간은 어떻게 진화되어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가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신론적 관점은 생명 우연 발생과 진화론을 통해서 추정하여 설명하는 것이며, 그저 엄청난 시간이 흘러 그렇게 진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그것은 분명 엄청난 추정이요, 억측입니다. 진화론은 실상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의견이 분분할 뿐이며, 증거는 없이 억측과 추정으로 그 이론을 지탱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분자생물학을 통한 접근
무신론적인 관점의 과학자들은 원시지구에서의 생명의 우연 발생을 주장하기도 해왔으나, 이에 대하여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는 100개의 아미노산이 우연히 연결돼 단백질 분자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은 거대한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 눈가리개를 쓰고 특별한 표시를 해 놓은 모래 알갱이 하나를 찾는데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찾아내는 확률과 같다고 했습니다.이 비유는 생명의 우연 발생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말과 같습니다. 베히는 세포의 체계와 관련하여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세포는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음을 증거하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베히는 쥐덫을 만들 때, 나무판, 스프링, 망치, 각각이 무작위로 첨가되어 쥐덫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적합한 상태로 부품들을 연결하지 않으면, 쥐덫이 될 수 없다는 비유를 들어, 부품들 자체로는 전혀 쥐덫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선택은 사소한 무작위적 기능상의 진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진화론은 어떤 기능들이 계속 첨가되어 진화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은 그러한 주장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시스템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 관점은 심리적으로 상상하는 주장이지만, 베히의 분자생물학적 주장은 전체가 어떻게 부분들로 구성되는지에 관한 논리적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화학자 클라우스 도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학적 진화와 분자 진화 분야에서 생명 기원에 관한 실험이 30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결국 우리가 다다른 곳은 해답이 아니라 지구상의 생명 기원의 관한 문제가 정말 막막하다는 인식의 심화이다. 현재 이 분야에서 원리적 이론과 실험에 대한 논의는 모두 막다른 궁지에 몰렸든지 무지를 고백함으로 종결되고 있다.” DNA의 공동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은 “생명 기원에 관한 논문을 쓸 때마다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사실은 턱없이 부족하고 억측만 난무하기 때문이다.”
생명 기원의 신비(The Mystery of Life's Origin)이라는 책을 쓴 월터 L. 브래들리 교수는 칼 세이건의 말 “우주에서 메시지가 수신돼도 저 밖에 이성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주에서 메시지가 단 하나만 와도 그 배후에 이성적인 존재가 있다고 결론 짓기에 충분하다면, 모든 살아 있는 동식물의 DNA에 들어 있는 방대한 양의 정보는 어떻겠습니까? 인체의 각 세포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 30권에 들어 있는 것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외부의 유도 없는 자연의 우연적 산물이 아니라 이성적인 설계자가 존재하는 분명한 증거라고 추론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입니다.”
진화론적 접근에 대하여
창조론을 부정하는 미국의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이며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 조차 “모든 고생물학자들은 중간 형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화석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사(Natural History)라는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칼럼에서는 “화석 기록에서 변이 형태들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은 고생물학계에서 일종의 기업 비밀처럼 여겨지고 있다. 우리 교과서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진화 계보들은 그 계보의 가지들의 끝부분과 마디들에서 얻은 데이터만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나머지는 유추에 불과하며 설령 추론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화석들로부터 나온 증거는 아니다”이러한 언급들은 진화론을 신봉하며 연구하며 가르치는 학자들조차도 진화론을 입증하는 화석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모든 동물의 화석이 캄브리아기 지질층에서 종류대로 다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동물이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을 마치 그럴듯해 보이는 화석을 통해서 유인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그 유인원이 진화되어 현재의 인간이 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 유인원이 과연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진화되었는지를 질문한다면, 더욱더 애매모호한 추정에 추정을 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맹목적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진화는 종 안에서 환경에 따라, 종 안에서 변이를 보여 줄 때, 우리는 그것을 소진화라고 말하며, 종을 뛰어넘어 진화하는 것을 대진화라고 구분합니다. 소진화는 종 안에서 변화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하느냐에 따라 외모도 약간씩 변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종을 뛰어넘어 단세포 동물이 다세포 동물이 되고, 다세포 동물이 그 다음 단계로.... 시간이 지나 인간으로 진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연속되는 대진화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상 그 어떤 역사 가운데서도 그러한 것을 증명해 보여 준 적이 없음에도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추정하며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견을 마치 입증된 사실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그저 환상과 신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교과서에서는 진화론과 관련하여 각 동물의 배아와 인간의 배아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서 마치 진화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은 배 발생도 그림이 있었습니다. 과학자 헤겔이 어류 -> 도룡뇽 -> 거북 -> 닭 -> 토끼 -> 인간의 순서로 작성한 배 발생도를 통해 진화론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그 그림에 대해, 한 발생학자는 1997년 사이언스지에 그것이 “생물학에서 가장 유명한 날조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현미경으로 찍은 배아의 사진은 전혀 그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학자 헤겔의 시대에 그가 그림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이미 알았으며 그를 사기꾼으로 비난했다고 합니다.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조차도 자신의 견해가 사실로 입증되려면, 중간 단계의 생물들의 화석이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된 화석들은 오히려 처음부터 모든 종이 다 존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중간단계를 보여 주는 화석은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음을 진화론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조차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화론자들은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진화하는 데 약 1억 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주장하는데 그 사이의 중간 형태는 한 종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1968년 6월 미국 유타 주에서는 캄브리아기 지층(무척추동물들이 생성되었다고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시기)에서 무척추동물인 삼엽충과 사람의 샌들 자국이 함께 발견되어 진화론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또한 어류의 지느러미에서 양서류의 다리로 진화하는 중간 형태 역시 한 종도 없습니다. 오랫동안 중간 형태의 동물로 주장되어 온 실러칸스는 1938년 마다가스카르섬 근해에서 화석과 동일한 모습으로 현재도 생존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무신론적 세계관은 무신론적 진화론을 기반으로 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기원을 무(無)에 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단 무에서 생명체가 발생한 후에 그 생명체가 지금 존재하는 모든 동물과 인간으로 진화하게 되었다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데, 어떻게 무에서 지적이며 도덕적 존재인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느냐는 참으로 놀라운 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無)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무(無)일 뿐입니다.
화석에서 나타나는 진화론의 오류
인류의 진화를 증거한다고 제시하는 자바인으로 알려져 있는 화석에 대해 언급하자면, 이것은 필자가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가르침을 받은바 있는 내용입니다. 이 화석에 대하여 무신론자 법학 기자에서 유신론자가 된 리스트로벨의 창조 설계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은 네델란드의 과학자 유진 듀보아가 1891년과 1892년에 발견한 두개골을 대략 50만년 전의 자바인이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것에 대하여 케임브릿지 대학의 저명한 해부학자 아서 키스 경에 따르면, 그 두개골은 인간의 것이 분명했고 뇌의 용량도 오늘날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19명의 진화론자들로 이루어진 진상 조사단이 제출한 342쪽의 보고서는 듀보아의 주장을 뒤엎었고 자바인은 인간 진화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은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때로는 위조화석들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관련한 논문에서 실험결과를 조작한 것과 같이, 미국국립지리학회는 애리조나의 한 공물전시회에서 구입한 화석이 조류와 육상 공룡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라며 ‘아르케오랍토르’ 라고 불렀습니다. 화석에는 공룡의 꼬리와 새의 앞날개가 함께 있었습니다. 199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이를 근거로 깃털 달린 공룡이 첫 번째 새의 조상이라는 새로운 증거에 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러나 한 중국인 고생물학자가 그 화석은 누군가 원시 새에다 공룡의 꼬리를 붙인 화석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진화생물학자이자 조류학자인 앨런 페듀치아는 「디스커버」지에서 “아르케오랍토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수십 개의 위조 화석들이 널려 있고, 그것들이 고생물학 분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화석 전시회에 가면 어느 것이 위조품이고, 어느 것이 진짜 화석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최근에 깃털 달린 공룡들이 많이 발견된 퇴적층 부근, 즉 중국 동북부 라오닝성에 위조 화석 공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진화론의 전문가인 조나단 웰스는 다윈주의는 과학을 가장한 유물론 철학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가장 합당한 견해는 무엇일까요? 놀랍도록 정교하게 조정되어 있으며 측량할 수 없이 광대한 우주와 탁월하게 지성적이며 도덕적 존재인 인간의 기원은 초월적인 이성적 설계자 곧 하나님(신)에게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합당한 견해일 것입니다. 하나님(신)이 계신다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심리학적 또는 종합적 논증에 대하여는 여러 저명한 저자들의 훌륭한 책들이 이미 있습니다. C.S 루이스, 앨빈 플랜팅카, 라비 재키라이어스, 팀 켈러, 알리스터 맥그래스, 리스트로 벨과 같은 저자들의 책들은 그러한 질문에 대해 상당히 섬세하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필자도 그와 같은 책들의 요점과 일치하는 내용들을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성경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과연 하나님(신)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증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음을 받은 만물(피조세계)이 바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어진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온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간과 자연 세계는 초월적이며 지성적인 존재 곧 하나님(신)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이 모호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반응이면서도, 지금껏 인간의 역사 가운데 성경이 차지하고 있는 권위 있는 증언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이 왜 믿을만한 것인가에 대하여는 다음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양심과 도덕
하나님(신)이 계신가에 대해 살펴볼 두 번째 고려사항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입니다.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 중에 제일 두드러진 점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도덕적 양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도덕적 양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살인하는 것에 있어서 이렇게 하면 옳지 않다는 것을 양심에서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양심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양심이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한 악한 살인자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궁극적으로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무신론자들 가운데 인기 있는 학자요 유력한 저자인 리차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이것을 다르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는 신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진화된 유전자를 가진 동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대해서 다르게 말할 것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 분야 도서에서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필독서로 소개되는 책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실재하는 경험들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생물학적 또는 기계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유전자 곧 생존과 개체 보존의 이기적 유전자에게 돌릴 것입니다.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 자체를 무시하는 논증일 뿐입니다. 사람은 결코 그런 것을 믿으며, 유전자에 의해 행동방식이 선택(결정)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작용과 도덕을 철저히 무시하는 편협한 지적 장난일 뿐입니다. 리처드 도킨스 자신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만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서 살아갔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타인을 고소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는 타인이 부당하게 자신을 대했다고 고소했습니다. 즉 자신의 도덕적 양심이 작용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리차드 도킨스의 인간에 대한 설명은 결국 자신의 실재와 경험도 설명하지 못하는 지적인 장난과 억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양심과 도덕은 모든 인간에게 실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왜 도덕적 양심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도덕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성경은 그것에 대한 근원적 해답을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지정의를 가지신도덕적 존재이기에 인간도 그렇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설명을 제외하고 그 어떤 설명도 인간의 마음이 왜 그러한지를 말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대한 무신론적 설명은 역사의 검증을 거치면서 이내 설득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폴 포트 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 20세기 최악의 잔혹한 사건인 세계 2차 대전과 독일, 러시아, 캄보디아 등에서 일어난 대학살 및 숙청 사건의 지적인 배후에 인간의 도덕적 양심을 무신론적 관점으로 해석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을 가진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양심의 실재에 대하여 부인하거나 외면하면서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행위와 사건들에 대하여 인간의 본래적 양심이 작동하는 것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건을 일으키는 행위를 악하다고 말할 근거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무시하는 순간부터 모든 판단과 결정은 인간 마음의 동의를 벗어나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외부적 압박이나 도덕 권력이 인간의 양심을 대체하게 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히틀러의 나치정권하에서 보게 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양심의 도덕에서 결코 분리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정치적 세력의 강압으로 인해 도덕적 양심이 인간과 일시적으로 분리되거나 혹은 양심의 기능이 상실되는 것 같은 위기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도덕적 재앙을 뛰어넘는 최악의 삶으로의 전락을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경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신)을 알 수 있는 감각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마음의 지성과도 관련이 있는 감각이면서도, 양심의 기능과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인간의 마음은 우주와 지구와 자연 세계를 보면서, 그 모든 만물에 그것을 지으신 신(하나님)의 능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아름다운 색을 띠는 다양한 꽃들이나 앵무새나 열대어를 보면서 색깔의 다양함과 조화로운 빛깔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보거나 측량하기 어려운 광대한 우주를 생각하면서 그것들의 배후에 분명 그것들을 창조하신 신(하나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에게 실재하는 이 양심과 도덕은 바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는 것이기에 그 출처인 하나님을 증거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의 신빙성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 에 대하여 세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성경의 신빙성(信憑性)입니다.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선언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성경의 신빙성이 입증된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주장도 신빙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즉 성경의 신빙성이 충분하다면, 하나님(신)이 계시다는 성경의 주장이 믿을 만한 합리적인 주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개략적으로 언급한다면, 성경의 수많은 증언들은 역사적으로 검증이 되었고,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성경이 실제적이며 진실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확립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주장에 대한 첫 번째 근거로 제시한 성경의 역사적 검증에 대해서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역사적 증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과 큰 제국이었던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로마제국 등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나라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과 증언들이 많기에, 만일에 성경의 증언들이 실제 역사와 다르다면, 고고학자들을 통해서 성경의 내용이 역사의 실증에 어긋난다고 밝혀질 내용이 수없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의 진실성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윌리엄 램지라는 고고학자는 무신론자의 아들로 태어난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밝히고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기록을 자세히 살피며, 25년의 연구 끝에 그는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책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저명한 고고학자인 넬슨 글루에크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고고학적인 발견도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반박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모든 고고학적 발견은 성경이 진실한 증언이었음을 여전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300가지 넘는 예언이 나오는데, 그 예언들이 다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대략 600여 년 전에 그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게 될 것이 미가서 5장 2절에 예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예언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성읍들과 나라들에 관한 2,000개 이상의 예언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이스라엘과 주변국의 역사가 실현되기 훨씬 전에 예언된 기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프로듀서인 박진영 씨는 성경의 예언들이 과연 사실로 드러났는지를 확인하고자 예루살렘에 가서 두 달 동안 핸드폰도 꺼두면서 성경의 내용과 역사 자료들을 비교하면서 성경의 신빙성에 충격을 받고 성경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고고학적/과학적 증거들
노아의 홍수는 전설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성경의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하여 종교 대 과학의 대결 구도인 것처럼 그러한 프레임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신앙일 뿐 과학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사실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진화론은 과학의 옷을 입으려 하지만, 실상 과학으로 입증하려고 해도 입증하기 어려운 추정과 억측일 뿐입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은 과학에 반하는 것임이 드러났습니까? 이것 또한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고고학과 지질학은 여전히 성경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증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방주가 홍수가 그친 후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터기의 아라랏트(Ararat)에서 방주를 보았다는 증거는 탐험가들의 증언들도 있으며, 이와 관련한 신문기사들과 방송영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들이나 신문기사를 언급하기보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노아의 홍수와 관련하여 지층형성에 관해 격변설과 동일과정설이라는 이 두 이론에 대해서 한국창조과학회에서 발행한 책자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격변설(대홍수설)은 현재의 지층과 화석, 지표면의 모양은 과거에 일어난 전 지구적 규모의 대홍수와 화산 폭발, 지층의 융기와 침강과 같은 대격변에 의해 단기간 동안에 갑작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이론입니다. 단지 홍수 때 매몰되었던 순서에 불과하고, 지층은 수억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일과정설에 대해서는 1790~1830년 영국의 허튼, 라이엘, 스미스 등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 이론으로, “현재는 과거를 아는 열쇠이다”라는 기치 아래, 오늘날과 같은 느린 퇴적과 침식과정이 과거에도 동일한 율로 있었고, 이러한 점진적인 과정에 의해서 지층은 수억 년의 장구한 세월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허튼은 1788년 「지구 이론」이란 책을 통해 동일과정설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여 무한한 지질 연대 개념을 도입하였다. 뒤를 이어 등장한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동일과정설을 보편화하기에 이른다. 그는 지층 형성에 관한 대격변설을 기독교인들의 이론으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19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창조론과 대격변설에 의해 매우 짧았다고 믿었으나, 이 후자의 이론은 이후에 등장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당신의 인본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신론자, 제국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이 진화론을 지탱하기에 적합한 이론이 되어 지층형성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오늘날은 후자의 동일과정설의 지층이론으로 지질연대를 추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히 과학적이지도 않으며, 사실을 외면하는 억측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연구조사와 그 결과들은 오히려 노아홍수로 인한 대격변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노아홍수의 과학적 증거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다생물 화석들이 높이 8,000m를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의 고지대 석회암층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히말라야뿐 아니라 안데스 산맥 4,000m 고지대에서도 거대한 굴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바닷물이 이런 바다생물 화석을 이 석회암층에 매몰시켰음에 틀림없다는 데 동의합니다.어떻게 이 바다생물이 히말라야와 안데스 산맥 고지대에 매몰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동일과정설의 지층이론은 설명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답은 바로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전 지구적인 노아 홍수에 있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인한 대격변설은 이 현상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노아홍수의 증거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전 지구적인 광범위한 화석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세 번째로 그 광범위한 화석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의 섬세한 보존 상태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물고기가 너무도 빨리, 사실상 살아 있는 채로 묻혔기 때문에 심지어 지느러미와 눈구멍의 세밀한 부분조차도 보존되었습니다.한국창조과학회에서 발간한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맘모스들이 급격스럽게 파묻혔다는 증거가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들의 위 속과 입 안에서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입 안에서는 녹색식물, 블루벨, 버터컵, 사초과의 각종 목초, 야생콩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섬세하게 보존된 화석의 발견들은 성경의 노아 홍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연속된 지층 암석들의 습곡(휘어짐)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연속된 지층 암석들이 부서지지 않고 휘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퇴적지층들이 빠르게 연속적으로 퇴적되고, 아직 굳어지지 않은 부드럽고 유연한 상태에서 습곡 되는 것인데, 바로 노아의 홍수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980년 5월 18일에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세인트 헬렌 화산 폭발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창조과학회에서 발행한 책자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폭발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질학적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날 분출한 화산의 총에너지는 TNT 4억 톤과 맞먹는 위력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2만 개에 해당하는 위력이었다. 이 에너지는 빠른 시간 내에 엄청난 지질학적 과정들을 일으켰고 대격변설의 축소형 실험실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며 지구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관한 전통적인 동일과정설에 대해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세인트 헬렌 산의 화산 폭발 동안 증기폭풍, 산사태, 호수의 파도, 뜨거운 화산재의 흐름, 진흙 흐름 등의 의한 쓸어냄으로 엄청난 침식이 동반되었다. 터틀강 계곡의 북쪽 요새 60km²는 3km³정도의 산사태와 화산분출물 등으로 막혀 1980년 이후 빠르게 침식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광경인 그랜드 캐년은 수천만 년의 오랜 시간 동안 콜로라도 강의 침식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교과서들은 말하고 있다. 오늘날 침식 분야의 전문 과학자들은 그랜드 캐년은 세인트 헬렌 산의 협곡과 같이 빠르게 형성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동안 동일과정설의 지층이론에 의해 수천 년이라고 추정했던 협곡의 지층이 이 화산 폭발로 인해 5달 만에 형성되었다는 것은 지구의 지층의 연대를 추정하는 지층이론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지구의 연대를 장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오늘날의 지구의 지층은 노아의 홍수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시간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관점일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릇된 이론에 근거한 추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이 실제 세계의 현상들에 대한 거짓 없는 진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날의 과학이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실재에 대한 진실한 증언
‘내가 해가 떴다고 믿는 것은 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 덕분에 다른 모든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도 그와 같다’ - C.S. 루이스
성경이 진실하며 믿을만하다는 주장에 대한 두 번째 근거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과 인간의 삶 그리고 운명에 대하여 그 어떤 출처의 이론이나 책이나 주장보다 더 실재적으로 진실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 또는 인생관이 실재하는 인간의 모습과 삶을 신빙성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안경이 실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잘 보게 한다면, 그 안경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하는 면에서 신뢰할 만한 안경일 것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기사(article)가 결과적으로 사실(fact)에 근거하여 기록된 기사였다면, 그 기사는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일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하여 심오한 통찰로 진실하게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통합적으로 균형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신)이 창조한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지적, 도덕적(의지적)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고귀함과 존귀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존귀한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지적, 도덕적 존재라는 것은 기계적 로봇과 같은 존재가 아닌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첫 인간은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지적, 도덕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가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마음은 모든 인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첫 번째 인간의 마음에 죄가 들어와서 그 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 본성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성경의 진단이야말로 실제 인간의 상태에 부합하는 진실한 증언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정직하게 성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신)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적, 도덕적 형상을 닮은 존귀함이 있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자신과 타인의 악함과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며 고통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인간 사회에서 발견되어 온 인간의 실재입니다. 분명 모든 인간은 존귀한 존재지만, 죄의 본성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는 선하고 고귀하게 살고자 하는 이러한 마음과 죄의 본성을 따라 악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 있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일관성 있게 그 이유와 상태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이러한 모습인가? 라는 질문에 성경은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죄로 인해 타락된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누구이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지음을 받았는가를 말하는 것도 성경이 유일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성경을 자세히 살펴서 알게 된다면, 참으로 놀라워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 안에서 영광스러운 복을 누리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이를 달리 표현하면, 성경은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정리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최고 행복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은 놀랍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추구하게 될 때, 채움을 받으며, 안식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 삶에서 빠트릴 수 없는 본질적인 실재입니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그 표현이 좀 다를지는 모르지만,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각 시대와 문화와 인종과 지역에 따라 또한 각 사람의 배경과 경험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것을 얻고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은 육체와 영혼(마음을 포함하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무엇을 소유하는 것만을 통해서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성경은 인생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이 있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솔로몬의 전도서를 읽고 이해하게 된다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말하는 행복론은 분명 실제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자살하지 말라고 말하며 행복 전문가로 불린 최윤희씨는 자신이 전파한 행복론에 어긋나게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살’을 바꾸면 ‘살자’가 된다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오면서 희망과 행복에 관한 주제로 20 여권의 책을 출간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전한 것과 반대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극심한 통증 때문이었다고 유서에 밝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고통과 죽음을 뛰어넘는 기쁨과 소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고통 가운데서도,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이 멋진 행복론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궁극적으로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당연히 그러한 이해에 바탕을 둔 행복론도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를 진실하게 보여 주고 있으며,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위기를 만나게 되는지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삶의 의미와 목적과 더불어 참된 행복을 추구하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그 초청에 응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 운명은 무엇인가? 인간이 죽으면 끝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도 성경은 확실하게 말합니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보여 주지 않는 세계관과 행복론은 인간을 영원한 허무와 후회와 파멸로 인도할 것입니다. 진지하게 삶을 대하는 모든 사람은 성경의 주장에 반드시 자신의 세계관과 행복론을 비춰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라고 주장하는 성경의 주장 앞에 자신을 대면시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복론이 실재에 근거한 든든한 행복론인지를 검증하는 유일하고도 진실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어떤 종교적 경전들과 성경을 비교해 본다고 하여도, 또는 비종교적인 책으로서 어떠한 권위 있는 책이나 이론을 성경과 견주어 본다 해도 성경은 그 권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상 성경보다 모든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더 준 책도 없거니와 진실성과 신빙성의 측면에서도 성경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철학이나 이론도 변화되지만, 성경은 시대에 맞추어 사람에 의해 그 본질적 내용이 결코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았음에도 그 진실한 영향력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만큼 진실하게 신빙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말이나 주장이 진실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진리를 말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다음 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