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6일
한자(漢字)에 늙을 기(耆)자가 있다. 이 글자의 뜻을 살펴보면 예순살 또는 일흔 살 이상의 늙은이를 말한다고 하였다. 다음은 어른이나 스승을 말하고 주를 달아서 지휘하다 강하다 이르다 즐기다 등으로 나열되어있다. 많은 내용 중에 늙은이를 제외하면 모두들 좋은 내용이다.
기덕(耆德)은 덕망이 높은 노인을 말하고 기로소(耆老所)는 70세 이상 문관(文官)의 정이품 이상 되는 노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나라에서 높이 대접하는 곳이다. 기숙(耆宿)은 연로하고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을 말하며 기철(耆哲)은 노성하여 슬기로운 경험을 쌓아 현명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기유(耆儒)는 일방의 사표가 되는 노숙한 선비를 말하며 기훈(耆訓)은 늙은 스승의 가르침을 이른다고 하였다. 살펴보면 정말 좋은 글자이다.
우리 의성향중에는 기목회(耆睦會)라는 모임이 있다. 향교의 전교와 유도회장을 역임한 원로의 친목모임으로 감히 기(耆)를 사용함은 약간의 외람된 점도 없지는 않다. 그동안 유명을 달리한 어른도 계시고 그렇지는 않아도 거동불편으로 참여하지 못한 분도 몇 명이나 된다. 하지만 이미 예정된 일정이다. 10월 14일 소형버스에 몸을 얹고 홀연히 가을소리를 듣기위해 모든 걱정 훌훌 털고 내달린다. 한로와 상강 사이의 날씨는 맑고 바람은 산뜻하며 하늘은 드높다.
현풍휴게소를 지나 남도(南道)의 초입 창녕(昌寧)을 통과한다. 들판은 꽤나 넓고 추수가 한창이다. 거둠을 일찍 한 논 다래기는 양파심기, 마늘심기 일꾼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모양이 마냥 평화로워 보인다. 창녕하면 생각나는 화왕산성(火旺山城)은 창녕읍 옥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며 사적 64호로 지정된 명소이다. 둘레가 1,217m이며 성안에는 샘이 아홉 곳, 못이 세 곳, 군창(軍倉) 한 곳이 있다고 한다. 이 성은 창녕과 영산(靈山) 현풍(玄風)지역까지 포용하고 지키는 큰 성으로 군사적 중요한 요충지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실용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들이 졸지에 대로를 따라 북상하게 되자 화왕산성의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의병 근거지였으며 그는 이 성을 굳게 지킴으로서 왜군이 경상우도 침입을 막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小康狀態)에 들어섰던 1596년과 전쟁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 비변사(備邊司)는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재인식하여 산성수축의 긴급함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 산성은 험준한 바위를 등지고 남봉(南峰)과 북봉(北峰)사이에 말의 안장처럼 움푹하게 들어간 곳이 있으며, 성의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성의 아래편에는 창녕 조씨(曺氏)시조에 관한 전설이 서려있는 작은 못도 있다. 지금은 가을철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장관을 보려는 팔도 관광객이 물결을 이룬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쏜살같이 달린다.
줄다리기로 유명한 고장 영신을 지나쳐서 남강(南江)물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남지대교를 통과하여 추수가 방극인 들판을 얼른 얼른 뒤로하고 칠서(漆西) 나들목에 도착할 때는 12시 정각이다. 이곳은 옛날의 칠원(漆原)현으로 이른바 삼칠(三漆)의 한곳이다. 삼칠은 칠원, 칠서, 칠북을 말하며 이곳의 지배대성은 배(裵) 주(周) 황(黃) 삼성으로 일반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모두들 희성(稀姓)이다. 배는 김해 배씨, 주는 상주 주씨, 황은 창원 황씨이다.
여기서 지방도를 따라 약간은 후미진 곳으로 진입하고 자연석의 큰 돌에 무릉동천(武陵洞天) 문화지향(文華之鄕)의 굵은 각자가 첫눈에 들어오며 이끼 낀 고가(古家) 무산서당(武山書堂)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곳은 상주 주씨의 세거지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오는 손님을 접대하고 마을현황의 설명을 책임진 중년의 후손대표가 손님을 영접하고 안내도 매우 친절하다.
여기는 조선조 명종(明宗) 당시의 문신이요, 학자인 주세붕(周世鵬 1495-1554)선생이 생장하고 출사(出仕)하고 사후에 묻혔으며 이곳의 주씨는 모두들 그 후손들이다. 호는 신제(愼薺)로서 문보(文俌)의 아들이니 일찍이 생원시에 입방하고 별시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서 풍기(豊基)군수에 부임하고 회헌사(晦軒柌)를 세워 안향(安珦)을 모셨으며,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紹修)서원의 전신 백운동서원을 창설하여 문화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5년간 재임하면서 군민의 징삼(徵蔘)의무를 덜어주기 위해 인삼(人蔘) 재배법을 개발 보급하여 민생고를 해결하고, 공납(貢納)에 이바지하였으며 주민경제에 도움을 주었고 그를 칭송하는 송덕비는 지금도 우뚝이 서있다.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창건하고 문풍을 진작 시켰으며 호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을 탐구하고 경의(敬義)를 신조로 생활하며 청백리에 록선되고 문민(文愍)공의 시호가 내렸다. 인간만사 모두 분수에 한정이 있는 것이니 비록 분수를 넘고자 하나 조금도 넘을 수 없고 오히려 환란만 생기는 것이다 하고 평생토록 분외의 마음을 갖지를 않았다. 그의 호 신제는 입을 삼가하고 몸을 삼가하고 마음을 삼가 하라는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호로 삼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내 일찍이 남을 공경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거만함을 당한 적이 없고 남과 겨루어본 적이 없기에 사람들에게 욕을 당한 적이 없다. 네가 사치한 사람을 보았느냐. 마음은 반드시 교만할 것이고 네가 검소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의 마음은 반드시 근신하며 교만한 자는 보전함이 적고 근신한 자는 실패함이 적다고 말씀하였다.
그가 묻힌 묘역은 문화재 제33호로 그를 모신 광풍각(光風閣)은 문화재 142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정을 봉안하고 유림에서 향사를 드린다. 두루 살피고 돌아서는 길에 문중대표는 여행경비에 보태라면서 현금 10만원을 전달하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여기서 대구의 예일 표구사 이광종 사장의 부인 주여사(周女史)가 바로 이곳 출신으로 고향과 신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절바르게 처신하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차는 다시 달린다. 조(趙) 이(李) 안(安) 삼성이 집성촌을 이루고 향촌사회를 지도하던 함안(咸安)땅을 지나 마산(馬山)에 들어선다. 도시는 번화하고 생선시장은 포항의 죽도시장처럼 흥청대며 관광객과 상인들이 활기를 띠었다. 세상은 불경기라 하지만 여기는 살맛나는 세상이다. 그곳 2층의 횟집에서 생선접시를 앞에 놓고 소주를 한잔씩 기울였지만 술병이 줄지 않는 곳으로 보아 모두들 힘이 다했음을 실감나게 한다. 다음에 차를 세운 곳은 도심 속에 고상한 아취(雅趣)를 자아내는 중원서원(中園書院)이다. 빌딩의 이름은 이문(以文)이요, 봉안한 어른의 이름은 문회(文會)이니 곧 이문회우(以文會友)의 뜻을 따랐음이다. 영정을 봉안하고 젯상과 향상을 설치하였으니 아마 향사를 올리는 모양이다. 각종 유품이 진열되었으며 원전(原典)과 국역으로 편성된 중원문초(中園文鈔)를 면면이 나누어 주었다. 살펴보아 자손이 성력과 재력이 함께 수반되니 운수가 좋은 집안이다. 이사장(理事長)을 맡고 있는 배정전(裵正典) 씨는 아버지의 유업을 밝히고 추모하는 효자이다.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한다.
오늘 여정(旅程)의 안내를 맡아 종일토록 수고한 배효길(裵孝吉) 유도회장님과 차편을 제공한 권세목(權世穆) 전교님께 감사를 드린다. 버스는 거침없이 질주하여 19:00시에 의성에 도착하였으며 모두들 손을 흔들어 작별하고 다음날을 약속하였다.
의성신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