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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가 처음 표준제자로 삼은 9명의 제자. 송규(宋奎)·이재철(李載喆)·이순순(李旬旬)·김기천(金畿千)·오창건(吳昌建)·박세철(朴世喆)·박동국(朴東局)·유건(劉巾)·김광선(金光旋) 등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들 구인제자들과 더불어 저축조합·방언공사·혈인기도 등 교단 창립의 중요 터전을 다져갔다. 또한 구인제자들로 첫 교화단을 조직했고, 이들에게 처음으로 법명과 법호를 내렸으며, 첫 수위단을 조직했다. 구인제자들이 교단을 창립하면서 직접 체현(體現)한 정신, 곧 이소성대·일심합력·무아봉공·근검저축의 정신은 원불교 창립정신으으로 승화되어 후진들에게 계속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구인제자는 서가모니불의 십대 제자, 공자의 공문 십철, 예수 그리스도의 십이 사도와 같이 교단창립의 주축이 되었으며 후세에 존숭받고 있다.
이재철(1891∼1943) 법호 一山. 전남 영광군 백수면 학정리 출생. 오창건의 인도로 소태산의 제자가 됨. 그는 당시 팔촌 동생인 이동안을 대종사께 귀의 시켰으며, 이것이 영광군 묘량면 함평 이씨가문에서 수 십명이 출가하여 교단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산 대봉도는 특히 화술이 능하여 초기 교단의 대외 간판 역할을 하시었으며 방언공사 당시에 외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은행외교로 총부를 건설할때 미약한 경제토대를 세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일산대봉도는 경제외교와 더불어 법조계(法曹界) 외교도 전담하는등 초창 당시 외교인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보좌하였으며, 특히 경제계에 탁월한 식견을 가져 초기교단의 상조조합(相助組合)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교단경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대종사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열반하시었다. 대봉도 법훈.
① 초기교단의 외교가 일산 이재철 대봉도는 외교가 능하여 초기 교단의 대외 간판역할을 하였다. 방언공사시 허가신청의 분쟁이 일어나 큰 곤경에 처했을때 군청에 출입하는 등 뛰어난 식견과 언변으로 동분서주 뛰어서 위기를 면하게 하였으며, 은행외교로 총부를 건설할때 미약한 경제토대를 세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일산대봉도는 경제외교와 더불어 법조계(法曹界) 외교도 전담하는등 초창 당시 외교인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보좌하였으며, 특히 경제계에 탁월한 식견을 가져 초기교단의 상조조합(相助組合)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교단경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일산대봉도는 1891년 2월 11일 全南 靈光郡 郡西面 鶴丁里에서 부친 이관현(李寬現)선생과 모친 옥타원 김화옥(玉陀圓 金華玉) 선생의 4남매중 독자(獨子)로 태어났다. 부친은 함평 영광지역 동학(동학(東學)접주(接主)로서 농민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으며, 모친은 대범하면서도 내명(內明)한 인품을 지닌 요조숙녀로서 법도에 밝았고, 일찌기 가문의 아녀자들에게 胎敎를 가르쳤으며, 대종사 법하에 귀의하여서는 독실한 신심으로 수행에 적공하여 禪力을 얻어 대종사의 인증을 받기도 했다. 일찌기 漢文私塾에 나가 6~7년간을 수학한 일산대봉도는 그후 老母를 모시고 가사에 종사하면서도 새로운 문명에 관심이 높았고 가정생활을 하는데에도 이상을 가지고 진보적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이상에 맞지 않았으며 마음가운데는 항상 이 세상을 바로 잡을 정법의 지도자와 의인(義人)이 없음을 개탄하였다. 그러던 중 원기 원년(1916)4월 사산 오창건대봉도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拜見하고 장차 교단창설의 취지를 들은후 積世의 소원이 이루어 지는 듯 환희용약(歡喜踊躍)하여 즉석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원년 대각을 한후 비몽사몽간에 생각한 經名이 金剛經이었다.
일산대봉도는 원기 원년 5월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받들고 영산에서 28km정도 떨어져 있는 佛甲寺,(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소재)에 가서 금강경을 구해 소태산 대종사에게 주기도 했다.)그후로 일산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와 大道를 봉대하는 마음이 날로 간절해지는 가운데 원기 2녀(1917)7월26일 교단의 최초 統治團인 男子正首位團이 조직될 때 건방(乾方)단원으로 임명되어 조합의 규정을 성실하게 수행함과 아울러 교단 사업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 노력하였다.
저축조합 초기의 경제관계 사무와 외무는 거의 일산 대봉도가 맡아 처리하였다. 원기 3년(1918)28세때에는 간석지 방언공사와 회실(九間道室)건축에 온갖 정성과 혈심을 기울여 대업을 성취하였는데 일산 대봉도는 주로 외무 일과 금전출납 관계사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직접 지휘를 받으며 동지들과 더불어 흙짐을 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발바닥이 부르트고 어깨와 등이 부어올라 사뭇 못견딜 지경이었다. 차라리 귀한 집 독자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흙짐 지는 연습이라도 해두었을 것을 하는 후회도 생겼고, 추운겨울이라 불을 쬐다 솜옷에 불이 붙어도 모르고 불을 쬔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일편단심 무아봉공 그대로였으니 일호의 사심잡념도 없었다.
일산대봉도는 원기 4년(1919)3월26일부터 대종사의 지도를 받아 8인동지들과 함께 창생의 구원을 위하여 혈심으로 기도하였고,마침내 생명희생의 대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의 감명을 얻어 백지혈인의 이적을 나투었다. 이때에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반은 법명이 이재철이었다. 속명은 재풍(載馮) 혈인기도시 소태산 대종사가 단원을에게 [생사는 인간대사라,만일 조금이라도 자신이나 가정은 물론하고 걱정스런 생각이 있거든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했을때 효성이 남달리 장했던 일산대봉도는 창생을 위하여 자신 한몸 죽는 것은 여한이 없으나 홀로 계신 모친이 걱정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일산대봉도의 심중을 헤아리고는 [모친의 시봉은 내가 책임질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희생의 결실을 굳게 하였으며, 기도 마지막 날에는 환후중인 모친에게 한약을 지어 인편(人便)에 전하기도 했다.
② 봉사가 만져봐도 양반: 일산대봉도는 키가 크고 身相이 구족하며 威風이 좋아 [영광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일산대봉도는 천성이 온순,정직,賢良하여 누구를 대하나 항상 和氣로웠고 인자겸손하였다. 그러나 중심은 철두철미 대의가 분명하고 강직한 면이 있었다. 일산대봉도는 좌담과 외교에 능하였을 뿐아니라 밖으로 신상이 구족하고 안으로 양보의 도가 강하였던 관계로 누구든지 감화를 받았으며,뛰어난 識見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說伏시켰다. 영광지방에서는 이러한 일산대봉도에 대해[봉사가 만져봐도 양반]이라며 異口同聲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지닌 일산대봉도는 평소에는 말이 퍽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옳은 일에는 몸을 돌보지 않았으며, 아랫 사람들의 세정을 일일이 살펴주었고 항상 용기와 희망을 넣어준 자비로운 선진이었다. 후진들이 일산대봉도를 대하면 어딘가 모르게 다정다감하여 친부모처럼 간격을 느낄 수 없었으며,온갖 괴로움이 얼음녹듯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또한 일산대봉도는 무슨 일이든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여러 사람 앞에서 꾸중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조용히 타이르고 자상히 가르쳐 주었다. 일산대봉도는 언제나 소태산 대종사 앞에서는 손을 내려 놓는 일이 없었다. 겸허한 태도로 拱手를 하고 물러날 때에도 그냥 뒤돌아 서는 일이 없었다. 진퇴의 예를 갖추어서 행했던 것이다. 산골벽지에서 그 누가 이 대회상의 큰 뜻을 알았으랴,겨우 10여인이 모인 이 회상의 초창 사업에는 외부적 장애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방언공사시 허가 신청의 분쟁이 일어나 큰 곤경에 처했을 때 동분서주 뛰어서 위기를 면하게 한것도 일산대봉도의 공적이었으며,총부 건설후 미약한 경제 토대를 튼튼히 세우는 데에도 일산대봉도의 은행외교로 경제적 기반이 더욱 수월하게 쌓여져 갔던 것이다. 또한,일산대봉도는 心氣가 상통한 팔촌동생인 도산 이동안(道山李東安) 대봉도를 대종사에게 귀의시켰으며 이것이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함평이씨 일가문이 이회상에 귀의하고 또한 이 가문에 수십명이 출가,전무출신하여 교단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③ 23년간 교단창업에 헌신 : 8인단원과 함께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등을 마친 일산 대봉도는 그후 영산에서 계속 교단창립에 조력하다가 원기 9년(1924)부터는 총부건설에 협력,원기 10년(1925)36세때에는 육영부 창립단원으로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교단 전문훈련의 근원을 이룩하였다. 원기 12년(1927)37세때에는 총부 서무부장에 임명되어 1년간 誠勤하였다. 원기 13년(1928)38세때에는 영산 상조부장으로 전임되어 2년을 근무하였고, 원기 15년(1930)40세때에는 영산지부장을 겸임하여 2년간 일하였으며, 원기 17년(1932)42세시에는 가정 형편에 의하여 부득이 1년간 공무를 쉬고 가사를 돌보았다. 원기 18년(1933)에는 귀임하여 총부 상조부지접장 겸 공익인재부장으로 일하였고 원기 19년(1934) 44세시부터는 총부 서정원장으로 2년간 봉직하였으며, 원기 21년(1936)부터는 서정원장 겸 총부 상조육영부장으로 2년간 근무하였고, 원기 23년(1938)에는 다시 서정원장직만 가졌고,원기 24년(1939)49세시에는 가정형편에 의하여 다시 휴무하였고,원기 25년(1940)에는 서정원장직을 맡았다. 원기 26년(1941)51세시에는 총부 이사겸 산업부장으로 일하였고, 원기 27년(1942)부터는 총부 산업부장으로 열반전까지 근무하였다.
일산대봉도는 원기 28년(1943) 11월15일 영광군 백수면 천마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53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다. 특히 일산대봉도는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와 한해에 태어나 한해에 열반한 묘한 인연이 있다. 일삼대봉도는 출가후 재근 23여년간을 영광 혹은 총부에서 교단 사업계의 중책을 맡아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공헌하였고,원기 20년대에는 총부 서정전반에 걸쳐 그 역량을 발휘하여 교단의 위치를 대외에 드러내는데 공헌하는 등 공사에 전력할때 자신의 명예와 권리이욕은 조금도 불고하고 오직 교단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공하였다. 일산대봉도가 열반하자 장의는 교회전체장으로 엄수하였고, 유해는 영광군 백수면 천마리에 안장하였다가 원기 70년(1985)3월에 왕궁 영모묘원으로 법훈묘역에 이장했다.
일산대봉도는 원기 38년(1953)4월 제1대 성업봉찬회때 법위가 정식법강항마위요 사업등급 정특등으로 원성적은 준특등 8인중 8호였으며, 원리 49년(1964)제2차 법훈증여시 대봉도위로 추존되었다. 일산대봉도의 유족으로는 부인 각타원 김평운선생과의 사이에 아들 진산 이명진선생이 있었으나 열반하였고 육남사녀이 손자녀가운데 손녀 이타원 이정무법사가 전무출신하였다.
④ 일산대봉도 어록(語錄) ◇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요 아무나 할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애로와 난관이 남달리 많지만 참고 견디어 나가면 언젠가는 성공하는 날이 온다.
◇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를 가리지 말고 언제든지 한결같이 진실하게 살자. 진실하고 보면 모든 일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지금은 교단 창립의 초창기라서 많은 역경과 고생스러움이 있지마는 내 마음에 아무 사심이 없이 꾸준히 일하고 보면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 자신의 발전도 따라서 있는 것이다.
◇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신용을 잃어서는 안된다. 내가 먼저 신용을 잃지 않아야 남도 나를 신용해 주는 것이다.(제일대창립유공인 역사에 수록)
⑤ 대종경속의 일산 대봉도 : 한사람이 이재철에게 묻기를 [들은 즉 귀하의 선생님이 성인이시라 하니 사리간에 무엇이든지 다 알으시는가.] 재철이 말하기를 [다 알으시나니라.] 그 사람이 말하기를 [비행기나 기차 제조하는 법도 알으시는가.] 재철이 말하기를 [성인은 사리의 대체를 알으시는 것이요. 그러한 기술 부분은 거기에 전문하는 사람이 아나니라.]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사리간에 다 알으신다는 것이 모순된 말이 아닌가.] 재철이 말하기를 [대체라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이름이니 무엇이든지 그 근본을 알면 가지와 잎은 다 그 가운데 있나니라.
이에 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한 지방의 장관이나 한 나라의 원수가 저 말단에 가서는 한 서기나 기사의 아는 것을 다 알지 못할 수가 있으나 그 행정의 대체를 잘 알아서 각 부분을 순서있게 지도한다면 그가 그 일을 알았다고 하겠는가 몰랐다고 하겠는가. 성현의 지견도 또환 이와 같아서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의 대의를 통달하시므로 사리를 다 알으신다 하는것이요, 말단의 기술 부분까지 알으신다는 것은 아니니, 그 대의에 통달하시므로 천만 지식이 모두 그 강령과 범위 안에 들어 있나니라.]하고, 돌아와 대종사께 그대로 고하였더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산의 말이 대의에 옳다.]하시니라.(대종경 변의품15장)
⑥ 소태산 대종사와 일산 대봉도의 일화 : ◇ 이재풍(이載馮)은 본시 풍골이 늠름하고 세상 상식이 풍부하여 매양 대종사를 친결할 때마다 보통 사람과 다르신 점을 대종사의 체상(體相)에서 살피려 하였다. 대종사 하루는 재풍에게 배코를 처달라고 명령하신 후, 상투머리를 풀어 그의 앞에 보이시었다. 재풍이 배코를 치려고 대종사의 두상을 들여다보니 곧 대종사의 이환현궁(泥丸玄宮)이 샘같이 뚫어지며 재풍의 몸이 그속에 빠져드는 것같았다. 재풍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서 있었다.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었다. [성현을 마음의 법으로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몸의 표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곧 하열한 근기인 것이다.] 재풍이 정신을 차려 다시 보니 대종사의 이환에 아무 흔적도 없었다. 재풍이 크게 깨달아 다시는 이적을 살피지 아니하고 평생토록 정법을 받들었다.(대종경선외록 초도이적장6)
◇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기적이나 요행수에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제자들을 교화할 때에는 때때로 방편으로 기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대종사가 봉래정사에서 수양하고 있을때 모친 환후의 소식을 듣고 영광으로 출발했다. 이재철을 데리고 급히 곰소항으로 나와보니 법성포로 가는 배가 조금 전에 떠나가고 없었다. 다음의 배편은 며칠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급해서 며칠간이나 기다릴 수가 없었다. 대종사는 방편을 쓰기로 했다. [재철이, 한눈 팔지 말고 정신 똑 바로 채려서 내가 걸어가는 발걸음을 놓치지 말고 잘 따라오게] 대종사가 지팡이로 바닷물을 툭치니 바닷물이 두쪽으로 쫙 갈라졌다. 대종사는 바닷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재철도 대종사의 바닷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갔다. 이재철도 대종사이 발걸음을 놓칠세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뒤를 따랐다. 잠시 걸어 가더니 대종사가 말했다. [재철이 이제 다왔다.] 이재철은 뒤를 돌아 보고 깜짝 놀랐다. 망망한 바다 뿐이었다. 바다 속을 걸어서 곰소에서 법성포까지 온 것이었다.(소태산 대종사 일화, 기적같은 이야기중에서)
◇ 곰소항의 괴기(怪奇) 원기 4년(1919)5월에 대종사는 이재철과 잠시 변산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영광에서 변산으로 가던 도중 곰소항의 어느 여관에서 하룻밤을 유숙할 때 일어난 일이다. 밤이 깊어 막 잠이 들려할 무렵, 여관방 문앞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재철이 문을 열어 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깊은 밤중에 이런 해변가에 소복 입은 여인이 혼자서 나타나다니, 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저여인에게서 느껴져 오는 기운이란 정말 알 수가 없이 괴이하군.] 이재철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인에게 물었다. [거 누구시요?} 그러나 소복의 여인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디서 오신 분이요?] 여인은 역시 아무 말도 없이 교개만 숙이고 있었을 뿐 주위는 괴이한 정적이 싸늘하게 감돈다. [대체 어떠한 여인이길래 이 깊은 밤중에 나타나서 말없이 서있기만 하오?]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기만 할뿐, 이재철은 약간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에는 대종사가 물었다. [거 누군가? 무슨 일이 있어서 왔으면 말을 해야지. 몇번씩이나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니 예의에 벗어나지 않았는가. 그대가 분명 사람이고, 할말이 있어서 왔다면 들어와서 말을 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썩 물러가라.] 그제서야 여인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대종사에게 사배를 올리더니 그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대종사에게는 무엇인가 마음 속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너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와서 울고만 있단 말인가? 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고 여기에 온 사유를 말하라.] 이재철도 자세히 보니 얼굴을 잘 아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여인은 분명 몇년전에 죽은 여인이 아닌가? [이거 내가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닌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재철은 자신의 허벅다리를 꼬집어 봤다. 분명 아픔을 느꼈다. 그 여인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 대종사를 우러러 보며 입을 열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나를 찾아 왔는가?] [저의 사정을 다 말씀 드리지 않아도 대종사님께서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와 덕화로써 구원해 주소서. 저로서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이라 여기에 머무르시는 틈을 타서 감히 찾아 뵙고 이렇게 호소합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생각하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여인의 흐느끼는 목소리는 적막한 밤을 더욱 슬프게 한다.
대종사는 한참동안 묵묵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느 곳에 의지하고 있는가?] [지은 죄가 매우 무거워서 축생계에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금사망(金絲網)을 쓴 큰 구렁이의 몸을 받아서 저 앞 竹島 주위를 맡고 있습니다. 금사망을 삼천년 동안 벗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종사님의 자비로써 이 금사망보를 벗게 해주옵소서.] 여인은 말을 마치자 다시 엎드려 어賁를 들먹이며 서럽게 운다.
[너의 마음은 실로 기특하나, 죄와 복은 지은대로 받는 것이 만고 불변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하늘에 사무치는 진실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과거의 죄업을 참회하고 앞으로 다시는 악업을 지지 아니하면, 천지가 감동하고 불보살들의 호렴하심을 힘입어 그 죄업을 쉽게 벗을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명심하라. 죄업을 하루라도 빨리 벗고 못벗는 것은 너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지난날 너와의 친분대로 하자면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죄를 벗도록 해줄 수도 있으나, 이것은 天理를 어기는 일이라. 그렇게 할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그대의 정성을 봐서 하루 속히 금사망보에서 벗어나도록 내 깊이 심축할 터이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라.] [저의 죄를 불쌍히 여기시어 꼭 구원해 주옵소서.] 여인은 몇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 하더니 무거운 발걸음을 힘없이 옮기어 천천히 문밖으로 사라졌다. 여인은 슬픔을 금치 못하겠다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대종사와 이재철도 여인을 따라 밖으로 나와 바닷가에 이르렀다. [저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제가 받은 몸입니다.] 여인은 또 다시 흐느껴 운다. [염려말고 어서 가거라. 너의 마음에 진실로 참회하면 악업을 속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여인이 바닷가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곁으로 가니, 순식간에 여인은 없어지고 괴물은 몸을 스르르 풀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인과의 이치가 저렇게 분명하다. 죄 많은 여인이여, 진실로 참회 개과하여 죄업에서 빨리 벗어나라.] 대종사는 그 여인을 위하여 심고를 올렸다. 대종사가 이재철에게 물었다. [재철이, 이제 그 여인의 죄업을 잘 알겠는가?] [이제 그 여인을 잘 알겠습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여관과 음식점을 경영하던 여인이지요. 얼굴이 아름다워 남자들을 많이 농락했지요. 아까 그 여인으로 인하여 재물을 빼앗기고 패가망신하고 감옥생활까지 한 남자들이 부지기수였지요. 그 여인은 주위 사람들로 부터 많은 비난과 원망을 받았지요, 저도 그 여인의 음식집에 몇번 가본 일이 있습니다. 과연 여우같은 여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몇년 전에 갑자기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인과의 이치가 그렇게 무서운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일화중에서)
(1879.9.1-1941) 교단 초창기 人和의 표본 이산 이순순대호법은 1879년 9월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이다익(李多益)선생과 모친 金선생의 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산대호법은 천성이 호걸다워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남자다운 성격을 가진 일면 온순다정하기도 하였다. 온유선량한 성품과 率性의 정직함은 창업기 교단에서 인화의 표본이 되었다. 또한 이산대호법은 몸집이 부담하고 키가 크며 기상이 늠름하고 의용(儀容)이 활달하였으며, 원기 원년(1916)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성취하자 삼산 김기천종사의 인도로 12살 연하인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여 師弟之義를 맺었다. 원기3년(1918)3월 간석지 방언공사가 시작되었을때 이산대호법은 동지들과 함께 흙짐을 져 나르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일호의 사심도 없이 모든 난관을 감수하며 정성을 다했다. 그후 이산대호법은 전무출신을 단행하지는 못했으나 거진출진으로서 회상의 발전에 협조하다가 원기 26년(1941)63세를 일기로 영광에서 열반하였다.
① 교단 초창기 人和의 표본 이산 이순순대호법은 1879년 9월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이다익(李多益)선생과 모친 金선생의 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산대호법은 천성이 호걸다워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남자다운 성격을 가진 일면 온순다정하기도 하였다. 온유선량한 성품과 率性의 정직함은 창업기 교단에서 인화의 표본이 되었다.
또한 이산대호법은 몸집이 부담하고 키가 크며 기상이 늠름하고 의용(儀容)이 활달하였다. 한때는 어떤 인연으로 서울의 신여성과 가정적 향락생활을 한적도 있었으나 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후에는 세간의 향락생활을 일시에 청산하고 결연히 수도에 발심한 무서운 용단력의 소유자였다. 이산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전부터 이미 교분이 있었다.
이산대호법이 32세 되던 해는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6년전이었다. 이산대호법은 인근동네에 사는 소태산 대종사가 세상을 알지 못하는(不知世上)가운데 분별없이 입정에 들어 새활의 곤궁이 이루 말할수 없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배편을 마련하여 전라남도 서해상의 안마군도에 속해있는 작은 섬인 낙월도로 장사를 떠나기로 작정한 이산대호법은 대종사를 찾아가 함께 장사 가기를 권하였다. 대종사가 응낙하자 가족과 상의하고 대종사와 함께 장사하러 갔었는데 예상외로 장사가 잘되어 대종사의 가정으로 하여금 일시적 곤경을 면하게 했다. 이와같이 교분을갖고 내왕하던 이산대호법은 원기 원년(1916)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성취하자 삼산 김기천종사의 인도로 12살 연하인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여 師弟之義를 맺었다.
이산대호법은 원기 2년(1917) 7월26일 교단의 최초 통치단인 남자정수위단이 조직될때 감방(坎方)단원으로 임명되어 허례폐지와 미신타파,금주단연등으로 저축조합 자금조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원기3년(1918)3월 간석지 방언공사가 시작되었을때 이산대호법은 동지들과 함께 흙짐을 져 나르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일호의 사심도 없이 모든 난관을 감수하며 정성을 다했다.
또한 이산 대호법은 원기 4년(1919) 3월26일부터 대종사의 지도를 받으며 다른 단원들과 함께 창생의 구원과 회상창립을 위하여 혈심으로 기도하였고 마침내 사무여한의 대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어 백지혈인을 나투었다. 이때 대종사로부터 세계공명으로 봉수받은 법명이 이순순이다.
속명은 인명(仁明). 그후 이산대호법은 전무출신을 단행하지는 못했으나 거진출진으로서 회상의 발전에 협조하다가 원기 26년(1941)63세를 일기로 영광에서 열반하였다. 이산대호법의 유해는 영광군 백수면 구수산에 안장되었다가 원기 70년(1985) 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에 이장했다. 시산대호법은 제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법마상전급이요, 사업등급 정 4등으로 원성적은 居塵出塵 준3등 77인중 37호였다. 법위는 원기 62년(1977)3월29일 제2대 2회말 결산시 수위단회에서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되었고, 이어 원기 70년(1985) 3월20일 제 20일 제103호 임시수위단회의 결의에 의해 대호법의 법훈이 증여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본일화 선생과의 사이에 딸 이진친과 사위 배영록이 있었으나 죽었다.
② 재가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 대종사 이순순에게 물으시기를 [그대는 재가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순순이 사뢰기를 [그저 안정하고자 할 따름이옵고 특별한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무릇,사람에게는 항상 동과 정 두 때가 있고 정정(定靜)을 얻는 법도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가지 길이 있나니, 외정정은 동하는 경계를 당할 때에 반드시 大義를 세우고 취사를 먼저하여 망녕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는 것으로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魔의 근원을 없이하는 것이요. 내정정은 일이 없을 때에 염불과 좌선도 하며 기타 무슨 방법으로든지 일어나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으로 온전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것이니 외정정은 내정정의 근본이 되고 내정정은 외정정의 근본이 되어 내와 외를 아울러 진행하여야만 참다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리라.] (대종경 수행품19장)
③ 소태산 대종사와 이산 대호법의 일화 : 이순순은 구인제자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종사와 이순순의 만남은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기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대종사가 노루목에서 입정상태에 들어 있을 무렵의 어느 비오는 여름날이었다. 이날 따라 비바람은 거칠고 세찼다. 노루목의 외딴 집은 기괴한 정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 낡은 집은 비바람에 금방 쓰러질듯 했다. 그러나 대종사는 오직 入定三昧에 들어 있을 뿐이다.
마침내 사나운 비바람은 지붕 나래를 걷어가 버렸다. 방에는 비가 새어 대종사의 몸을 적셨다. 그러나 대종사는 비에 젖는 줄도 몰랐다. 이때 이순순은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끌려 자신도 모르게 노루목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원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지붕이 걷혀 비가 새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기만 하다니, 쯧쯧 저럴수도 있나? ]이순순은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지붕을 고쳤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끌렸던 것이다.(소태산 대종사일화중) .이순순(李旬旬)(1879∼1941) 본명 仁明. 법호 二山. 구인제자중의 한 사람. 1879년 9월 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출생. 김기천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고, 온유하고 선량한 성품으로 교단 초창기에 인화의 표본이 되었다. 가정형편으로 출가하지 못하고 재가교도로서 수행에 정진하였다.
3산
김기천(金幾千)(1890∼1935) 본명 聖久. 2월 5일生.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출생. 구인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대종사로 부터 최초로 견성인가를 받았다. 1916년 김광선의 인도로 대종사에게 귀의 하였고 교단 창립에 공헌하였다. 6세 서당에서 한문 배움, 12세 한문의 文理를 깨쳤으며, 詩律을 배워 16세 때 서당 훈장이 되었다. 출가하여 현실생활에 등한한듯 했으나 성리연마가 깊었다.(성리품 22장) 1935(원기 20)년 당리교당에서 순직 법위는 출가위로 추존되어 종사위에 올랐다. <철자집> <교리송> <사은찬송가> <단원의 노래> <심월송>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과 감각 감상문을 발표하였다.(회보 20호 참고) <인도품 9장, 전망품 8장>
① 17세 서당훈장 삼산 김기천 종사는 1890년 2월 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김다유(金多有)선생의 1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함평서 5대조까지 살다 천정리 천기동에 들어와 살았다. 천기동은 구수산에서 버금으로 높은 수리봉 아래 있는 부락이다. 7세때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재예(才藝)가 출중하여 13세때는 학문에 문리를 얻어 시율(詩律)공부에 들어갔다. 15세시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 사는 김순천과 결혼을 하였고, 한달 뒤 부친 상을 당하였다. 이때 삼산종사는 장례를 치르는데 조금도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고, 어른스럽게 처사하였다.
삼산종사는 부친을 여의고 독자의 몸으로 가정사를 꾸려나가야 할 형편이었으나 도무지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골방을 마련해 놓고 거기서 책을 읽고 소일하였다. 논밭일이 바빠 안식구들이 마당에 나락을 널어 놓고 일을 나간새 비가 와서 곡식을 다 적시는 줄도 모르고 책 읽는데만 재미를 붙였다. 이렇게 가정사에 무심하고 태평이었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근동의 아이들을 가르칠 지경에 이르러 벌써 17세 나이에 아이들의 훈장이 되었고 학동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또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었다. 한번은 학동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그릇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는 학동들을 불러놓고 회초리를 준비해 오게 했다. [내가 못나고 잘못 가르친 까닭이니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하고 자신의 종아리를 호되게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학동들을 훈도해 갔으므로 어떤 아이든 감화를 받지 않을수 없었고 좋은 길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②소태산의 제자되어 : 삼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 보다 한살 연상으로 이웃동제에 사는 관계로 서로 알고 지내던 처지였다. 소태산이 대각한 1916년에는 삼산종사가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이때 삼산종사는 벌써 두딸의 아버지가 되었고 22살에 모친상마저 당하여 한가정의 가장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가사를 경영할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누이 동생(김순진화)의 시숙 팔산 김광선 대봉도의 인도로 길룡리 범현동 전주이씨 제각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났다. [정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삼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체상을 우러러 보고, 말씀을 듣고, 과연 [소문대로 도통을 하긴 했구나]감복을 한후 즉석에서 사제지의를 맺었다.
원기 2년(1917)7월 소태산 대종사가 남자정수위단인 기성단을 조직할때 삼산종사는 간방(艮方) 단원이 되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소태산 대종사의 일언일귀는 헛됨이 없고 거짓이 없음을 알고 심중에 경탄하여 그 지도에 복종하게 되었다. 이후 영산에서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에 9인단원과 함께 참여, 교단창업에 혈성을 다했다.
법인성사때 삼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김기천이었다. 속명을 성구(聖久)영산에서 교단창업에 조력하는 가운데 원기 7년(1922)33세때에는 출생지인 천정리에서 천정조합(天定組合)을 설시하고 주민들에게 근검절약을 장려하는 한편 대종사로부터 받들었던 법설로써 도덕교화에 전력하였던바 불과 삼년안에 많은 동지와 자본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삼산종사가 전무출신하여 정신을 그곳으로만 주력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동지중에 불충실한 일이 생기게 되므로 조합을 해체하고 각자 자원에 따라 그 자산을 영산지부에 편입시키는 동시에 조합원들을 대종사에게 인도하였다.
원기 8년(1923) 34세때에는 옥녀봉 아래 있던 구간도실을 현 영산원 위치로 옮기게 되었는데 몸소 동지들과 함께 지게지고 돌과 나무를 운반하여 육신에는 고통을 받지마는 정신에는 항상 일맥의 낙도심이 끊이지 않았다. 원기 9년(1924) 35세부터 영광지부(현 영산교당) 살림을 전담하여 내치외무에 전력하며 산가수려(山佳秀麗)한 성지 영역에서 정신과 육체를 정양하며 만 4년간 동지부의 서무부장겸 지부장격으로 근무하였다. 원기 13년(1928)39세때에는 익산총부 서무부장에 피임되어 2년간 근무하였으며, 동년 4월 제1대 제1회 기념총회에서는 공부등위 특신부, 사업등급 제2등 제1호의 명예로운 상장을 봉수하였다. 원기 15년(1930)41세때에는 총부 교무부장에 피선되어 1년간 근무하였고, 이듬해에는 각처에서 집합하는 선원을 훈련하기 위해 선원교무가 되어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지혜로써 선원을 일깨웠다.
원기 17년(1932)43세때에는 부산 하단지부 (현 당리교당)가 창설되어 교무로 임명되었다. 초창이라 가옥과 장소가 협착할뿐아니라 이해없는 자들의 비평도 많았으며 여러가지 역경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삼산종사는 견인불발의 수양력으로 능히 이를 초월하여 자기 할일만 충실하였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반대하던 사람들도 차차 이해가 생겨나고 정법에 훈련받은 사람이 생겨 남을 따라 지부의 토대가 점점 견고하게 되었다. 이 해에 부산 남부민동에서도 삼산종사의 노력으로 수십명이 입교하여 교당을 설치할수 있게 되었다. 삼산종사는 회원훈련과 지방발전에 노력하느라고 홀망(忽忙)함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심오한 진리의 감각감상과 가사등을 제작하여 본관에서 발행하는 [회보]에 기고를 하여 일반회원의 신성을 장려하고 공부와 사업을 하는데에 길을 얻게 하였으며, 야학을 실시하여 지역사회 무산 아동들의 문맹을 퇴치시키는등 순일무사의 정성으로써 본교의 교화발전에 헌신하였다. 원기 20년(1935) 46세때에는 삼산종사의 교화에 힘입어 정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초량등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여 바야흐로 부산지방에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전망이 보였다.
삼산종사가 부산에서 교화하던 시절에 읊었던 아래와 같은 내용의 [하단회가]는 그 당시 생활 모습을 알려준다. 승학산 높은 밑에 강선대가 나직고/제석골 장생수는 평림속에 흐르네/낙동강 짐대 노래 구도선자 실은 듯/고대봉 그림자는 명호에 잠겼네/ 가려한 이 강산에 우리 회관 종소리/울리고 울리어서 잠든 동포 꿈깨네/이 강산 회운인지 사중은의 덕인지/대성인,우리 종사 도덕풍이 불었네 진세에 맛든 낙 좋아 말고 착 마소/그낙이 극한 끝에 죄가 오고 苦오네/죄고를 해탈하고 생사 바다 건널랑 /대자비 우리 종사 법선 우에 실어보 반갑고 반갑도다 입도자는 반갑다/혜복을 갖춰 닦아 자신 제도해가네/장하고 장하도다 득도자는 장하다/도덕을 잡아들고 일체세계 건지네 신미 8월16일은 우리 회의 창설 날/이 도덕과 이 사업을 힘쓰고 힘써서/거룩하신 동지들의 희생한 공일세/영광스런 이 날을 영원히 기리세(삼산종사 유고집중에서)
삼산종사는 회원들을 능동적으로 회중 일에 참예하도록 하였다. 예회 때 사회는 언제나 회원들이 주관하도록 하였고 수시로 윤회강연을 실하여 그들의 감각감상과 발표력을 길렀다. 회중의 유일한 기관지인 [월보]와 [회보]를 소개하여 회중 일에 적극 참예하도록 하였고, 회원들로 하여금 회보에 글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청년회원 장보석은 총부 동선(원기17년)을 나고서 [잡은수제]를 발표하였고, 양혜성은 [구도자여[]부산지부자]를 발표하였다. 삼산종사는 예회 때 반드시 월말통신(또는 회보) 을 소개하여 회중 전반에 걸쳐 회원들로 하여금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이 발표하는 감각 감상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회보에 소개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월말통신 초기에 몇몇 젊은이의 기록에 의해 발표되었던 4편에 비해 배가 넘는 9편의 감상담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지상발표하였던 것이다.
③ 최초의 見性認可 : 삼산종사는 키가 아주 크고 몸은 좀 후리후리한 편이었으나 견성후에는 몸이 부담해졌고 人相은 달마대사와 비슷하였다. 외관상으로도 훌륭한 용모를 타고난 삼산종사는 차차 도가 성숙됨에 따라 온몸에는 사람을 누르는 엄숙한 기운이 넘쳐 흘러 실로 태산교악과도 같은 중후성이 드러나는 대도인의 상이었다. 삼산종사느 천성이 관유정직하고 행동이 침착 신중하여 매사에 유유자적하는 기풍이 있었으며, 견인불발의 의지력은 중인의 시범이 되었다.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전생애를 학문연마와 진리탐구에 열중하는 그 천성으로 인하여 가정사에 곤란함에 많았다 한다. 현실문제는 다소 등한시했으나 밝은 성리연구로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원불교 최초의 견성인가를 받았다.
삼산종사는 석가모니불의 십대제자중 성리에 밝기로 유명한 解空 제일 수보리 존자와 동등시되기도 한다. 침착 정중 관유한 삼산종사는 비가 와도 뛰지 않고 걸었고 평생에 질언거색이 없었으며, 언행이 항상 일치하였고, 아무리 화가 날 일이라도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심중에는 시비가 명확하나 사람들과 버둘어 겉으로 그 시비를 지나치게 밝히지 않았다. 세상의 조그마한 시비를 초월하여 초연하게 살았으나 대의에는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희노애락에 초연,오직 공중사에만 열중하였고, 무슨 일이든지 모난 적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미운 생각을 조금치도 갖지 않았다. 삼산종사는 지혜가 출중하고 겸하여 수양력이 풍부하며 또한 계행이 청정하여 만인으로부터 존모를 받았고 [시비를 초월하고 희노애락에 끌리지 안흔 부처]라고 소태산 대종사도 극착하였다.
외관상으로 훌륭한 용모를 타고 났을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도 인격 지식 덕행을 두루 갖춘 훌륭한 대공심가요, 원만한 지도자로서 사표적 인물이었다. 원기 13년(1928)은 삼산종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해(당시39세)였다.
어느 가을 날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하루는 강당(현 구종법실)에 법좌를 차리라 하고 종을 쳐 대중을 불러 모았다. [수도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이는 목수가 목수노릇을 잘하려면 잣대가 있어야 하고, 용이 승천을 하려면 여의주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견성을 하려면 성리공부를 하여야 하나니, 성리는 내가 손을 내놔라 하면 손을 내놔야지 발을 내면 안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들에게 성리를 물어야겠다.]하고 의두요목을 하나씩 놓고 물었다. 제자들이 번번이 대답은 하나 갈수록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나중까지 대답하는 사람은 삼산뿐이었다.
삼산종사가 성리 설하는 것을 듣고 소태산 대종사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말하였다. [오늘 내가 비몽 사몽간에 여의주를 얻어 삼산에게 주었더니 받아 먹고 즉시 환골 탈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실지로 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 정신이 상쾌하다.] 이어 말하기를 [법은 사정으로 주고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저의 혜안이 열려야 그 법을 받아 들이나니, 용은 여의주를 얻어야 조화가 나고 수도인은 성품을 보아서 단련할 줄 알아야 능력이 나나니라.] 이것이 새 회상이 생긴 이래 공식적으로 제자에게 내린 최초의 견성 인가였다. 대중의 찬탄과 선망을 한몸에 받으며 삼산은 견성인가를 받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아울러 이청춘 정사등 몇몇 여인들은 벌떡 일어나 [우리 회상에 견성도인 나섰다.] 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분위기는 법락의 극에 달하였다. 삼산종사의 견성 인가는 다른 동지들에게 더 한층 공부심을 분발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한 후배가 삼산종사에게 물었다. [형님, 어쩌면 빨리 견성을 합니까?] [귀한 물건을 잃어버리면 밥 먹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심지어는 똥 눌 때까지 그 생각이 나지? 화두를 그렇게 잡아야지.] 삼산종사는 쉽고 간명하게 일러 주었다. [또 자네보고 도둑질 했다 하면 얼마나 분하겠나.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이 애매한 욕을 벗을꼬 하고 진짜 도둑을 잡아야지 하겠지. 의두를 그렇게 잡아야 견성을 하지] 키가 훤출하게 크고 약간 꾸부정한 듯한 몸집에 언행은 느릿느릿한 편이나 그 태도는 청한자적하여 마치 저 선연한 연꽃 이 물위에 드러난듯 백학이 청송에 깃들인 듯, 진속을 초월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삼산 김기천종사였다.
그는 평소 연구가 깊고 이론에 밝으며 또 공심이 풍부하고 임무에 성실하여 쉼 없이 꾸준하게 매사를 대하였다. 그는 내심에는 시비가 명확하였으나생활에 있어서는 시비를 따지거나 분명히 밝히지를 않았다. 후진들에게 늘 말하였다. [너무 시비를 가려도 못 쓰네] 그는 공연한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언제나 초연하였다. 스스로 할 일만 자행하였다. 밥이 질면 질어서 좋고 되면 된대로 달게 먹었다. 옷이 크면 시원해서 좋고 작으면 작은 대로 좋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는 모가 나지 않았고 촉이 없었다.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혹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도 그는 당황하거나 순서를 잃지 않았다. 너그럽고 부드럽고 맑고 한가한 그의 인품을 훗날 소태산 대종사는 [지금까지 만18년간 일호의 사념과 퇴보가 없이 참으로 향내나는 전무출신을 한 유일무이한 공인이었다.]고 표현했다.
④ 스승과의 문답 : 삼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보다 한살 위이고 어릴 때 친구였지만 사부님으로 모시고 부터 그의 명이라면 水火를 무릅쓰고 오롯이 복종하였다. 자신도 이미 하늘의 이치와 인간 만사의 도리를 賁달았으나 자만함이 없이 대중살이 손에 모나지 않고 수선에 힘썼고 규율을 지켰으며 또한 대중 앞에서 대종사에게 묻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보다 동지들의 미망을 타파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견성을 못한 사람으로서 정식 법강항마위에서 여래위에 오르는 공력이 어느 편이 어렵나이까] [그는 근기에 다르나니 혹 최상 근기는 항마하면서 바로 여래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항마위에 올라가서 오랜 시일을 지체하는 근기도 있나니라.] [수도인이 공부를 하여 나아가면 시해법(尸解法)을 행하는 경지가 있다 하오니 어느 위(位)에나 승급하여야 그리 되나이까.] [여래위에 오른 사람도 그리 안되는 사람이 있고, 설사 견성도 못 하고 항마위에 승급도 못한 사람이라도 일방 수양에 전공하여 그와 같이 되는 수가 있으나, 그것으로 원만한 도를 이루었다고는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돌아오는 시대에는 아무리 위로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 지리를 통하여 골육이 분형되고 영통을 하였다 할지라도 인간 사리를 잘 알지 못하면 조각 도인이니, 그대들은 삼학의 공부를 병진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라.]
[법강항마위 승급 조합에 생.노.병.사에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한 바가 있사오니, 과거 고승들과 같이 좌탈입망(坐脫立亡)의 경지를 두고 이르심이 오니까.] [그는 불생 불멸의 진리를 요달하여 나고 죽는 데에 끌리지 않는다는 말이니라.] [앞으로 종법사 선거에 어느 위에 오른 분이라야 추대될 수 있아오리까.] [아무리 말세라도 항마위 이상이라야 종법사의 자격이 있나니라.] [혹 당대 종법사보다 법력 높은 도인이 날 때에는 법위 승급을 어떻게 하오리까.] [대중의 공의를 얻어 하나니라.](이상 대종경 변의품34-38장)
어느 때 삼산종사가 대종사에게 물었다. [사람이 어찌하면 순(順)과 역(逆)을 알게 되오리까.] [순이라 함은 저 춘.하.추.동 사시절의 변천이 차서를 잃지 아니함과 같이 모든 일에 그 순서를 찾아서 하는 것이요, 역이라 함은 일의 순서를 알지 못하고 힘에 감당못할 일을 구태여 권하며, 남의 마음을 매양 거슬려 주는 것이니,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에 먼저 이 순과 역을 잘 구분해서 순을 주로하여 행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으리라.(대종경 인도품 9장) 어느 때 또 삼산종사가 대종사에게 물었다. [근래에 여러 사람이 각기 파당을 지어 서로 옳다 하며 사방에서 제 스스로 선생이라 일컬으오나 그 내용을 보면 무엇으로 가히 선생이라 할 가치가 없사오니, 그들을 참 선생이라 할 수 있사오리까.] [참 선생이니라.] [어찌하여 참 선생이라 하시나이까.] [그대가 그 사람들로 인하여 사람의 허(虛]와 실(實)을 알았다 하니 그것만 하여도 참 선생이 아닌가.] [그것은 그러하오나 그들도 어느 때가 되오면 자신이 바로 참선생의 자격을 갖추게 되오리까.] [허를 지내면 실이 돌아 오고 거짓을 깨치면 참이 나타나나니, 허실과 진위(眞僞)를 단련하고 또 단련하며 지내고 또 지내고 보면 그 중에서 자연히 거짓 선생이 참 선생으로 전환될 수 있나니라.] (대종경 전망품 8장)
⑤문필(文筆)에도 능한 도인 삼산종사는 주로 해탈 도리를 많이 설하였다. 소박한 화술,간이 명백한 내용으로 교리 전반에 걸쳐 좋외 문진, 무애 자재, 사통 오달로 법을 설했던 삼산종사는 문필에도 능해 많은 사문을 남겼다. 삼산종사는 처음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전음광 대봉도 송도성종사 김영신대봉도등에 의해 감각감상담이 소개되었는데 견성인가 받은 이후 많은 후진들의 질의와 요청에 의해 초학자들에게 교리에 바탕한 효과적인 한문공부를 위해 [철자집]을 저술하였고, 그 이후 가사조의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단법찬미곡]을 비롯하여 원기 18년(1933)에는 교리 전반에 걸쳐 읊조린 의욕적인 장시 [교리송(敎理頌)]은 유명하다. 저 허공에 밝은 달은 다만 한낱 원체로되/일천강에 당하오면 이런 낱이 나타나고/나의 성중(性中)밝은 맘도 또한 한낱 원체(圓體)로되/일만경계 당하오면 일만 낱이 나타나니/맘과 달이 둘이 오나 그 이치는 하나일세/ 달 사랑는 벗님네야 강 밑에 잠긴 달은 참 달이 아니오니 부디 그 달 사랑 말고 허공 달을 사랑하소/ 마음 찾는 주인공아 경계에 착된 마음 참 마음이 아니오니 부디 그 맘 딸치 말고 본성 맘을 찾아보소/고요한 밤 홀로 앉아 이 마음을 간(看)하올제 분별 주착 딸치 않고 무심적적(無心寂寂)들어가니/달도 이미 그믐 되고 심행처(心行處)도 멸하였遁[/적적요요(寂寂寥寥)본연(本然)한데 일각심월(一覺心月)원명(圓明)하다/소소영영(昭昭靈靈)저 심월아/보고 봐도 둘 아니요 홀로 비친 너 하나라 취하여도 얻음 없고 사(捨)하여도 버림 없다/그러하나 일각상(一覺相)은 안전(眼前)에 역역(歷歷)하니 없는 것도 아니도다/존귀하다 저 심월아 짝할 물건 없었으니 심계독존(三界獨尊)아닐런가/아름답다 저 심월아 일점 하자(瑕子)없었으니 빙옥(氷玉)인들 당할소냐/견고하다 저 심월아 불생불멸 그 진체(眞體)가 만고장존(萬古長尊)하였으니 금강인들 당할소냐/광명하다 저 심월아 시방에게 대천계(大千界)를 여지없이 비추오니 천일(千日)인들 당할소냐/신통하다 저 심월아 감추면 개자(芥子)속에 펴 놓으면 우주 밖에 능소능대(能小能大)하는구나/지혜롭다 저 심월아 천만사리(千萬事理)당한 대로 걸림 없이 분석하네/여보소 주인공아 보배할 것 무엇이며 귀의할 것이 어디 있나/보배함도 심월이요 귀의함도 심월일레 여보소 벗님네야 이 심월을 구경하소.(회보24호)
그외에도 발표되지 않은 유작으로는 [설중(雪中)의 박노래][육일가][착심해탈가]등의 장편가사가 있다. 산문으로는 대개 감각 감상문을 썼는데 원기 19년(1934)에는 [대중살이 하는데 몇 가지 감상](회보6호),[술 취한 운전수를 보고](회보9호),원기 20년(1935)에는 [무형한 함정](회보15호)[원기 없는 자는 마른 나무와 같다](회보17호)를 발표하였다. 삼산종사의 가사는 거의 전부가 교리와 의식에 관한 내용을 읊었고, 산문은 자신의 수행과 관조에서 얻은 감각 감상들 뿐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삼산종사가 얼마나 자신의 수행과 적공에 오롯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모두 견성 이후 자필에 의해 발표된 글이라 볼때 각후(覺後)에 얼마나 수행에 철저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⑥선생은 참으로 순진한 옥(玉)입니다 : 부산에서 교화에 전념,대성을 기약하던 삼산종사는 원기 20년(1935)8월 중순 우연히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각처 동지의 지성기원과 백방의 구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회생을 하지 못하고 9월 6일 부산 하단지부에서 4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인격 지식 덕행을 구비하였던 삼산종사는 교단 초창 당시부터 18년간을 하루같이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 그 신성은 하늘에 사무쳤고 공부와 사업은 대중 가운데 뛰어났으며, 총.지부 발전을 위해 가는 곳마다 그 성과가 컸었는데, 한창 일할 46세에 열반하니 일반동지와 친족들은 애석하고 섭섭하여 대성통곡하였다.
그 당시 소태산 대종사는 서울 유가(留駕)중에 금강산에 가기로 결정하였었는데, 삼산종사가 위독하다는 병보를 듣고 즉시 총부로 환가(還駕)하여 일산 이재철 대봉도를 문병차 부산으로 파견하는 한편 대중과 더불어 완쾌를 기원하였으나 거듭 열반의 비보를 받고서 [김기천은 나를 만난지 18년에 일호의 사심도 내지않은 정진불퇴의 전무출신이요, 오직 희유(稀有)의 공로자라, 가는 기천이도 섭섭하거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다....]며 말을 마치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정산종사는 추도사를 통해 [순진한 옥이라 하면 옥 가운데에도 가장 완전하여 티끌만한 흠도 없어야만 순진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선생은 참으로 순진한 옥입니다. 18년 동안이나 심간(心肝)을 통하고 고락을 같이 하며 종사주 슬하에 영원히 한 마음을 변치 않기로 혈심을 다하여 같이 서원하던 한 동지 한 단원 나아가 한 몸으로 여기던 그 선생을 잃은 우리 몇 사람의 마음은 슬프다 섭섭다 하기 보다 오직 정신이 멍멍하여 무엇이라고 그 감회를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고 술회했다.
삼산종사는 제일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법강항마위요, 사업등급정특등으로 원성적은 준특등 8인중 4호였으며, 원기 49년(1964)제2차 법훈증여시 종사위로 추존되었다. 삼산종사의 장의(葬儀)는 교회전체장으로 영구(靈柩)를 총부로 옮겨와 당시 익산군 북일면(현 이리 총부근방)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는데 후일 그 자손들이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로 이장해 갔었다가 원기 70년(1965)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에 다시 이장했다. 삼산종사의 유족으로는둘째딸 김수련(金修煉)이 중앙수양원에 수양하고 있으며, 세째딸 김양화(金兩華)가 북일교당 주무로 있으며, 외손자 정귀원.인덕교무와 외손녀 정도원이 전무출신하여 외조부의 뒤를 잇고 있다.
⑦삼산종사 어록 ◇ 근(勤)은 부지런하다는 뜻이니 나태의 반대요, 검(儉)은 검박하다는 뜻이니 사치의 반대이다. 근은 또한 지성(至誠)을 짝한 것이다. 지성은 능히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한다. ◇ 우리의 생명은 적은 물의 고기와 같고 서산에 지는 해와 같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생사고해를 초월하자.
◇ 큰 원을 지극하게 세운 후에는 어떠한 소소한 사념이 올 때마다 그 원하는 바를 회상하여 볼 것이니 그리하면 소소한 사념이 저절로 물러난다. ◇ 계명과 규칙 행하는 것을 나의 원하는 바 목적지를 가는 차나 사다리로 알아서 잠시라도 탈선하지 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심신이 태연하고 세욕에 냉담하여지며 도락(道樂)이 진지할 것이다. ◇ 시방을 나의 한 집으로 알고 대중을 나의 부모 처자로 보아 나의 몸과 마음을 오로지 여기에 바쳐 희생할 것을 맹세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백사(百事)를 해탈하여 사은사요의 실행이 어렵지 않고 생노병사를 초월하여 무궁한 생명과 복전(福田)을 얻을 것이다.
◇ 겸양심을 써야 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교만심이 없어지고 잘한다 잘못한다 하는데에 화나 상(相)이 나지 않을 것이다. ◇ 남을 위하고 자기를 낮추는 머리에 대중과 촉이 없고 충고의 문이 열려서 허물은 날로 고치게 되고 지식은 날로 증진하게 된다. ◇ 큰 고기를 낚으려 하는 어부 앞에는 작은 고기의 류가 보이지 않는다. ◇ 공부와 사업에는 부지런하고 의식과 주처에는 검박하여야 한다. ◇ 일이 있을 때는 상시응용주의사항,1,2,6조를 잘 지키면서 일을 부지런히 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3,4,5조를 잘 지켜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야 한다.
◇ 꽃이 너무 황홀하면 열매가 오히려 가볍다. 사람의 말이나 글도 그와 같아서 너무 번다하면 매우 자상할 것 같지만 중(中)을 잃기 쉽고 듣는 사람이 요령을 얻기 어렵다. 글자에 끌리지도 말고 언어에 팔리지도 말것이다. 마음공부는 먼데 있지않고 어렵고 복잡한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가까운 데 있고, 간이한 데 있다. 우리를 지도하시는 대종사님의 교법이 바로 그것이다.(제1대 창립유공인역사에 수록) 참조:회보20호
4산
.오창건(1887.10.17-1953.1.23) 본명 재겸. 전남 영광군 백수면 학산리에서 출생. 구인제자중의 한 사람. 평소에 근검과 봉공을 생활신조로 사회와 교단에 봉사하였다. 방언공사에 항상 앞장서서 일했고, 뒷 모습이 대종사와 많이 닮아 좌우 동지들로 작은 대종사라 불리기도 했다. 주밀하고 철저한 성격으로 지방의 교당 신축 때에는 그를 파견하여 공사 감독을 하게 하였다. 영산 서무부장, 상조부장, 원평교무, 총부 서무부장, 예감, 감찰원장, 서정원장 등 역임. 구인제자 중에서도 대종사를 가까이 모시고 많은 보좌를 하였다.
① 28년간 교단에 헌신 사산 오창건 대봉도는 1887년 10월 17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학산리에서 부친 오윤안 선생과 모친 김중풍 선생의 3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산대봉도는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으며 특히 그의 부친은 불심이 장하여 동네 근방에 있는 대절산에 초당을 지어 수양을 하기도 하였다.
12세시에 한무사숙에 입학하여 4-5년간 수학하였고,성년이 되어서는 약간의 전수받은 재산으로 가사에 전력하면서 당시 일대에 만연되어 오던 태을교에 뜻을 두고 열심히 신봉하였다. 사산대봉도는 일찌기 소태산 대종사와 이웃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잘아는 사이였으나,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그 인격과 도덕에 감동하고 대도회상의 창립 취지에 찬동하여 제자되기를 서원하였다. 한번 대종사에게 바친 신심은 일호의 사심이 없었으며, 서있는 곳이 비록 진흙땅이라 하더라도 대종사를 뵈옵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엎드려 지극히 공손한 예를 올렸다.
사산대봉도는 대종사를 숭배하는 마음과 대도정법에로 향한 마음이 날로 더욱 깊고 두터워져서 부친의 승락이 없음에도 불고하고 시간을 내어 청법낙도에 여념이 없었다. 원기2년(1917)7월 소태산 대종사가 최초의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때 사산대봉도는 진방(震方)단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석중이던 중앙단원의 대리임무도 맡아 절약절식,금주단연,주경야독으로 교단초창의 기초사업에 혈심노력을 기울였다.
원기 3년(1918)32세시에는 방언공사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 건축에 단원들과 힘을 합쳐 힘든 흙지게를 기쁘게 졌다. 방언공사 중 흙을 져 나르고 띠짐을 지는등 고된 일로 피로하여도 소태산 대종사가 [자 시작하자]하면 맨 먼저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사산대봉도였다. 원기 4년(1919)33세때에는 9인단원과 함께 창생을 위한 정성스런 기도로 마침내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나투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오창건이었다.
속명은 재겸(在謙) 사산대봉도는 원기 4년 3월 소태산 대종사가 새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기 위해 전북 부안 봉래산 월명암(月明庵)에 1차 행가하여 10여일 유할때 배종하였고, 그 해 10월,소태산 대종사가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며, 회상창립의 교리제도를 초안하고, 사방인연을 연락하여 회상공개를 준비하여,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指目을 피하기 위해 변산에 입산할 때 대종사를 배종하여, 정산종사와 함께 월명암 뒷산인 쌍선봉에서 혈인기도 해재식을 마쳤다.
또한 사산대봉도는 대종사가 석두암 만덕산 내장산등을 다닐 때에는 원산험로를 막론하고 시봉할 식량을 지고 다녔으며, 변산에서 수년간 있을 때에는 영광에서 그곳까지 걸어서 짐을 져 날라 대종사를 시봉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진안 만덕산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식량이 떨어져 사산대봉도가 아랫마을로 쌀을 구하러 가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사산대봉도를 머슴으로 알고 [자네 이 쌀을 짊어지고 가겠는가]하고 하대를 하였다. 그러나 사상대봉도는 그 언사에 괴념치 아니하고 주는 쌀을 받아 매었다. 평소 짐을 많이 매어 보지 못한 사산대봉도는 기를 쓰며 매고 오다가 할수없이 중간에서 지게 하나를 구해서 이미 저물어 어두워진 10여 km의 험한 사비탈 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때 [거 창건이 오느냐]하는 대종사의 성음이 들려왔다. 사산대봉도는 반갑고 감격한 마음으로 무거움도 괴로움도 잊어버리고 날아오르듯 산상에 올라 소태산 대종사를 뵈었다.
사산대봉도는 원기 12년(1927)부터 영산 서무로 1년,서무부장으로 1년간 근무하였고, 원기 14년(1929)부터는 총부 서무부장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어려운 초창기 교단 살림을 알뜰히 보살폈다.
이어 원기 19년(1934)부터 영산 서무.상조부장으로 2년간 봉직하였으며, 원기 21년(1936)에는 총부서무부장으로 일했다. 원기 23년(1938) 부터는 전주교무로 1년,김제 원평교무로 3년간 근무하는등 일선교화에도 정성을 다했다. 이어 원기 29년(1944)부터 총부 예감으로 3년,감찰원장으로 1년,영산지부장으로 2년간 근무하였다. 이처럼 사산대봉도는 28년간 총부 영광 원평등지에서 교단 창업에 헌신하였다.
②무서운 공심가(公心家) 사산대봉도는 키가 크고 기골이 호걸다웠고 기력이 장하였으며, 모습이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와 비슷하여 뒤에서 얼핏보면 대종사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작은 대종사]라고도 불리웠으며, 대종사의 의복이 몸에 맞아 많이 얻어 입기도 했다. 사산대봉도는 천성이 쾌할인자하고 관유다정하여 사람을 대함에 감화력이 풍부하였다. 기골이 호걸다워 무서운 기개를 품었으면서도 한없이 자비스러웠고 인정이 많았으며, 또한 주밀철저하였다. 그리하여 전무출신 남녀동지들은 마치 세정을 잘아는 어머니와 같이 따르고 심지어 여자동지들은 사산대봉도를 언니라 부르며 국한없이 따랐다.
특히 소태산 대종사를 직접 가까이서 많이 시봉하였기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의 교중사 감역하는 것을 많이 보아 그 처사법을 따라 교중사 감역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건축감역을 많이 하였는데 지방교당을 건축할 때는 사산대봉도가 주로 감역하였다. 특히 서울교당 건축시에는 몸소 노동일을 하였으며, 초량교당 건축시에는 폭풍우속에서 밤을 세워가며 교당을 지켰다.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에 수년간 있을때는 사산대봉도가 영광에서 도보로 식량을 짊어져 날라 시봉하였고,총부 서무부장직에 있으면서 소태산 대종사를 시봉하고 서울에 갔을 때도 짐짝을 짊어지고 서울역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런 고역을 하면서도 기쁨으로 감수하고 조금치도 상이 없는 무상도인이었다. 사산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신심이 지극하였다.
사산대봉도가 영산 상조부장에 재직할때 (원기 19-20년)는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총부에 있을 때이다. 이 때 대종사가 있지 않은 봉래정사를 사산대봉도가 후배 동지들과 함께 찾은 적이 있었다. 봉래정사 어귀에 이르자 [종사님! 종사님! 창건이가 왔습니다.]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사산대봉도와 동행하던 후진들은 사산대봉도의 투철한 신심을 보고, 자신들의 신성을 다지기도 했다.
사산대봉도는 공중사라면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금을 지극히 아끼는 무서운 대공심가요, 소태산 대종사의 경제적 보좌역할을 한 혈심제자였다. 한번은 익산총부에서 영광까지 걸어서 갔는데, 하루종일 걸어도 3일이 걸리는 2백수십리의 길을 도보로 가면서 하루 저녁 유숙경비를 떡값 5전밖에 안써으며 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갈 때는 국수 3전짜리 한 그릇을 사서 둘이 나누어 먹을 정도로 철저히 공금을 아끼었다.
사산대봉도는 28년간 총부 또는 지방에서 공사를 위해 몸을 잊은 무서운 공심가요, 향내나는 전무출신이었으나 제 1대 성업봉창회의 결산을 보지 못한채 원기 38년(1953)1월23일 66세를 일기로 영산교당에서 열반하였다.
사산대봉도의 공을 향한 혈심 어린 정성과 만인을 두루 화합한 원만한 심법을 길이 후진만대의 영원한 사표가 될 것이다. 사산대봉도가 열반하자, 장의는 교회전체장으로 엄수하였고 묘지는 영산성지에 있었는데, 원기 70년(1985)3월에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사산대봉도는 제 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 법강항마위요, 사업등급은 정특등으로 원성적은 준특등 8인중 7호였으며, 원기 49년(1964)제2차 법훈증여시 대봉도위로 추존되었다.
사산대봉도는 부인 장하욱 선생과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딸 오용봉이 영산교당 주무로 있으며 외손녀 서정길이 전무출신의 길을 걷고 있다.
③ 대종경 속의 사산 대봉도 : 일경 한 사람이 대종사의 명함을 함부로 부르는지라 오창건이 그 무례함에 분개하여 크게 꾸짖어 보내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이 나를 아직 잘 알지 못하여 그러하거늘 크게 탓할 것이 무엇이리요, 사람을 교화하는 사람은 항상 심복으로 저 편을 감화시키는데 힘써야 하나니, 질자리에 질 줄 알면 반드시 이길 날이 올 것이요, 이기지 아니할 자리에 이기면 반드시 지는 날이 오나니라.](실시품9장)
5산
(1879.1.16-1926.7.30)소태산 대종사의 조카 : 오산 박세철 대봉도는 1879년 1월 16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박다여(朴多汝)선생과 모친 노(盧)선생의 2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9세시 칠산 유건 대호법의 인도로 집안 아저씨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와 사제지의를 맺고 원기 2년(1917)7월 남자정수위단 조직시 손방(巽方)단원이 되었다. 오산대봉도는 천성이 온량 공손하고 근검겸양하여 무슨 일이나 하기 어려운 일은 항상 스스로 담당하는 특성을 가졌다. 성격은 누구 못지 않게 어질고 섬세온후하였으나 그 심중에는 불같은 의지와 어려움을 참는 무서운 힘이 갊아 있었다.
① 소태산 대종사의 조카 : 오산 박세철 대봉도는 1879년 1월 16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박다여(朴多汝)선생과 모친 노(盧)선생의 2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이 간구하여 비록 학문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농업에 근면하였고, 부모 공양과 함께 형제 우애가 극진하였다. 15세 때에 족숙(族叔)인 박군서씨에게 양자로 출계한후 농업에 종사하며 가정을 돌보던중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39세시 칠산 유건 대호법의 인도로 집안 아저씨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와 사제지의를 맺고 원기 2년(1917)7월 남자정수위단 조직시 손방(巽方)단원이 되었다.
원기 3년(1918)3월 방언공사가 시작되자, 오산대봉도는 매양 선두에서 심혈을 다해 일하면서도 공은 언제나 타인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덕화의 기운이 연하였고,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항상 넘쳐 흐르고 그리하여 종전에 병으로 신음하던 몸이 약도 쓰지 않고 완치가 되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또한 오산대봉도는 원기 4년(1919)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로 단원들과 함께 창생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고, 마침내 생명희생의 대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백지혈인을 나투었다. 이 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박세철이었다. 속명을 경문(京文) 그해 겨울 오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부안 봉래산 행가시 배종하게 되었는데, 험한 산길에 고생이 심했으나 대종사를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후 오산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명에 의하여 영산으로 돌아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의 수호책임을 맡아 정성을 다하였으며, 원기 6년(1921)43세시에는 수년간 다소 저축하였던 금액 전부를 본교 기성조합에 희사하였다. 원기 10년(1925)47세되던 2월에는 우연히 내종병(內腫病)에 걸려 크게 위경을 맞았으나 양의(良醫)의 치료로 차효가 있음에 이속출가의 좋은 시기라 생각하고 익산총부로 나와 교중사업에 전무하였다.
원기 11년(1926)소태산 대종사와 양하운대사모가 전북 임실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었다. 이때 오산 대봉도는 팔산대봉도와 함께 가사전반을 돌봐 주기도 하였으나 그해 6월부터 다시 전일의 병이 재발하여 그곳에서 한달가까이 신음하다가 7월에는 부득이 영산 자택으로 귀가하여 백방으로 치료에 노력하였으나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점점 병근이 깊어 갔다.
오산대봉도는 자신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자녀손들을 불러 앉히고는 [나의 심신은 공중에 바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너희는 나를 사가인물로 알지 말고 사후에도 교중의 지시를 받아 초상절차도 신정예법에 의하여 집행하여 달라]고 유언하였다.
임종을 지켜보는 삼산 김기천 종사와 정산 송규종사의 손을 꼭 잡고 비창한 어조로 [불초제는 대종사님과 형님들을 길이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하옵니다. 형님들께서는 부디 오래 사시어 공부 사업을 잘하시와 인도정의의 기초를 확립하시고 세계문명의 선구자가 되어 주시며, 불초제의 앞길을 선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고 원기 11년(1926)7월 30일이었다.
장의는 영광지방장으로 엄수하였고 묘지는 영산성지에 있었는데 원기 70년(1985)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하였다.
② 조선총독과 바꾸지 않을 인물 : 오산대봉도는 9인선진 가운데 키가 제일 작았으며, 체질이 약하고 얼굴이 못나 9인선진중 인물로는 가장 뒤떨어졌었다. 오산대봉도는 천성이 온량공순하고 근검겸양하여 무슨 일이나 하기 어려운 일은 항상 스스로 담당하는 특성을 가졌다. 성격은 누구 못지 않게 어질고 섬세온후하였으나 그 심중에는 불같은 의지와 어려움을 참는 무서운 힘이 갊아 있었다.
오산대봉도는 언제나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은 앞장서고 도맡아서 하는 무서운 공심가였으며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조금도 장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상없는 무상도인이었다. 방언공사때는 9인선진가운데 40세로 최고연장자였으나 힘이 부족해 직접 흙짐을 짊어지기가 어려움으로 밥 심부름,물 심부름을 비롯,모든 잔심부름을 연하인 동지가 시키더라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이 방언공사하는데 자신의 소임으로 알고 했다한다. 이처럼 실천면에 있어서의 오산대봉도의 특징은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몸소 앞장서서 하는 것으로서 추호도 자기자신의 몸이나 주어진 상황에 붙들리는 적이 없이 충천의 신성으로 생애를 일관하였다.
언제나 어떠한 일이 있을때나 남이 하기 싫고 남이 하기 어려운 고경(苦境)중의 고경을 찾아서 이를 능히 개척해내는 주동적인 역군으로서 그의 독특한 저력을 적극적으로 체현하였다. 그러한 오산대봉도가 지닌 특징은 바로 자리(自利)를 버리고 이타희생적(利他犧牲的)인 각행실천(覺行實踐)으로 선행하는 보살의 천품 그것이요, 그러한 힘은 신성과 인행이 어리고 어리어서 마침내 그의 어진 인격을 현창하는데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오산관을 살펴보자. 오산 대봉도를 종래의 인물관념이었던 신언서판(身言書判)의 기준에서 살펴본다면 정말 거의 영점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오산대봉도는 남달리 얼굴이 잘난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못났고,글에 있어서나 말에 있어서도 빈농의 출신이라서 무학(無學)인데다 견문마저 넓지 못하니 이 또한 남만 못하고,판단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당시 외부인사들은 소태산 대종사의 9인제자중 오산이 인물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 제일 뒤떨어 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그의 위대한 천품,훌륭한 특징을 인정하여 오산대봉도를 어느 국왕이나 재상과도 바꾸지 않고 당시 조선총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밖으로 나타난 외모는 비록 저 조선총독보다 못하겠지만 안으로 상없는 용심(用心)과 그 희생적 보살행은 조선총독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후인들은 오산대봉도의 숨은 보살된 인격을 앙모하거니와 오산대봉도 자신으로서도 그의 외관상으로 봐서 잘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라든가 부조리한 사회적 생활환경을 능히 깊이 트인 향내력으로 극복하고 융화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착하고 진실되고 어진 내성적인 모습과 말이 없고 소박순실한 정신이 오산 대봉도의 특성이라 하겠다.
오산대봉도는 원기 13년(1928)제1대 제1회말 기념총회시 사후 정식법강항마위로서 춘산 서동풍정사와 함께 교단 최초의 정식법강항마위요,사업등급 정4등으로 원성적은 정3등 28인중 28호였다. 그후 원기 70년(1985) 3월 20일 제 103회 임시수위단회 결의에 의해 대봉도로 추존되었다. 오선대봉도의 유족으로는 부인 정순월 선생과의 사이에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박계축씨가 영산성지에 살고 있다.
6산
(1897.1.18-1950.9.21)1897년 1월 18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박회경(朴晦傾)대희사와 모친 유정천(劉正天)대희사의 6남매중 네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친아우이다. 일찌기 한문사숙에서 수학하였으며, 가사에 조력하던중 형이 대각을 이루자 제자가 되었다. 육산대호법은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품이 호협(豪俠)하고 키가 크며 용모는 형인 대종사와 닮았었다.
육산대호법은 원기 2년(1917)7월 남자정수위단 조직시 이방(彖方)단원이 되어 저축조합운동 방언공사 혈인기도등에 동참하였으며, 비록 재가에 머물러 지냈으나 한때 모친의 시봉을 직접하기도 했으며, 모친이 환후(患侯)중에는 형인 대종사를 대신하여 시탕(侍湯)함으로써 소태산 대종사가 안심하고 회상창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공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육산대호법은 그후 계속하여 가사에 종사하다가 원기 35년(1950)9월21일 53세를 일기로 영광자택에서 열반했다.
①소태산 대종사의 친제 : 육산 박동국대호법은 1897년 1월 18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박회경(朴晦傾)대희사와 모친 유정천(劉正天)대희사의 6남매중 네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친아우이다. 일찌기 한문사숙에서 수학하였으며, 가사에 조력하던중 형이 대각을 이루자 제자가 되었다. 육산대호법은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품이 호협(豪俠)하고 키가 크며 용모는 형인 대종사와 닮았었다.
② 형대신 모친을 시봉 : 육산대호법은 원기 2년(1917)7월 남자정수위단 조직시 이방(彖方)단원이 되어 저축조합운동 방언공사 혈인기도등에 동참하였다. 혈인기도 끝에 법인성사를 이루고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박동국이었다. 속명은 한석(漢碩) 혈인기도를 마친후에도 육산대호법은 정신 육신물질로 대도회상 창립에 힘껏 노력하였으나 얼마후 종숙(從叔) 세규(世圭)씨에게 출계하여 영광을 연성리(連成里)에 살게됨에 따라 전무출신을 하지는 못했다. 육산대호법은 비록 재가에 머물러 지냈으나 한때 모친의 시봉을 직접하기도 했으며, 모친이 환후(患侯)중에는 형인 대종사를 대신하여 시탕(侍湯)함으로써 소태산 대종사가 안심하고 회상창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공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육산대호법은 그후 계속하여 가사에 종사하다가 원기 35년(1950)9월21일 53세를 일기로 영광자택에서 열반했다. 묘지는 영산성지에 있었는데 원기 70년(1985)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육산대호법은 제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법마상전급이요, 사업등급 정 3등으로 원성적 정3등 23인중 5호였다. 그후 법위는 원기 62년(1977)3월 29일 수위단회에서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되었으며 원기 70년(1985)3월 20일 제103회 임시수위단회 결의에 의해 대호법으로 추존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해월(金海月)선생과의 사이에 4남4녀를 두었으며 현재 딸 셋과 원광대한방병원에 근무하는 막내아들 용만(庸滿)씨가 있다.
③ 대종경 속의 육산 대호법 : 대종사 봉래정사에서 모친 환후의 소식을 들으시고 급거히 영광 본가에 가시사 시탕하시다가 아우 동국에게 이르시기를 [도덕을 밝힌다는 나로서 모친의 병환을 어찌 불고하리요마는,나의 현재 사정이 시탕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너도 아는 바와 같이 나를 따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벌써 많은 수에 이르러 나 한 사람이 돌보지 아니하면 그들의 전도에 지장이 있을 것이요, 이제까지 하여온 모든 사업도 큰 지장이 많을 것이니, 너는 나를 대신하여 모친 시탕을 정성껏 하라. 그러하면 나도 불효의 허물을 만일이라도 벗을 수 있을 것이요, 너도 이 사업에 큰 창립주가 될 것이다.]하시고, 또 한 모친에게 위로하시기를 [인간의 생사는 다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오니 모친께서는 안심하시고 항상 일심천정의 진경에 주하시옵소서.]하시고 강연히 그 곳을 떠나 정사로 돌아오시어 제도 사업에 전심하시니라.(인도품49장)
7산
(1880.11.11-1963.2.22)소태산 대종사의 외숙(外叔)인 칠산 유건대호법은 1880년 11월1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선생과 모친 이(李)선생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대호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상이 호풍하고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원기 원년(1916)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부임에도 불구하고 칠산대호법은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단호히 제자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되는 대종사에게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원기 2년(1917)7월 남자 정수위단 조직시 곤방(坤方)단원으로 입참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등 회상창립에 공헌하였다.
① 소태산 대종사의 외숙(外叔) : 칠산 유건대호법은 1880년 11월11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선생과 모친 이(李)선생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대호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상이 호풍하고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학문에는 소홀하였으나 일찍 동학에 입문하여 득도묘술에만 발원한 관계로 범인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그것이 무실함을 깨닫고 32세때에 퇴교하였다. 원기 원년(1916)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부임에도 불구하고 칠산대호법은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단호히 제자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되는 대종사에게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처음에는 생질되는 대종사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차차 신성이 깊어감에 따라 추호의 개교심이 없이 독실한 신성으로 대종사를 받들었다. 친산 대호법은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꼭 [종사님]이라 불렀다. 혹 묻기를 [생질을 스승님으로 모시기가 어색하지 않느냐?]고 하면 [육신은 생질이지만 법은 지존(至尊)의 스승이시다]고 하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원기 2년(1917)7월 남자 정수위단 조직시 곤방(坤方)단원으로 입참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등 회상창립에 공헌하였다. 혈인기도때 친살대호법이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유건이었다. 속명은 성국(成國)
② 위대한 심법의 소유자 : 혈인기도를 마친후 칠산대호법은 수년간 수시로 언답 감독도 하고 사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그후 칠산대호법은 영광 사가에 계속 머물면서 가사에 주력,거진출진으로서 담담한 심정으로 심산평야에서 32년간을 목우작농(牧牛作農)하다가 원기 42년(1957)78세시에는 죄송하고 민망해 마지않는 후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총부 옆 중앙수양원에 이거(移居)하여 만년 수양에 힘쓰시다가 원기 48년(1963)2월22일 83세를 일기로 열반하니 9인성진중 최후 생종자였다. 칠산대호법은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堂堂)하며 특히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시에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혈인기도 때에는 가장 멀고 험한 기도봉을 맡았으며, 때로는 강건너 기도터를 약한 단원을 대신하여 다니기도 했었다. 칠산대호법의 심법상(心法上)위대한 점을 대산 김대거종법사의 법문을 인거해서 밝혀보면, 첫째,사가로 돌아간후 아들이 병으로 누워 있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였으나 땔 나무하러 산에 다닐 때 남들은 다 교중(敎中)의 산에서 나무를 베고 야단이지마는 칠산대호법은 손자를 데리고 교중 산을 훨씬 넘어 10리,20리 다니며 땔 나무 한 점이요, 둘째,9인선진이었으나 훨씬 후진에게도 법으로 대하여 조금도 9인선진중의 1인이라는 상이 없은 점이요, 세째, 영산재방언공사때 품팔이와 땅떼기를 하므로 [일은 그만두고 감독만 하시드라도 노임을 드리겠으니 그리하시라]고 종용(慫慂)하였더니 [과거에 칠산이지 지금도 칠산이냐]고 하면서 일체 거부하고 그대로 손자와 땅떼기한 점 등이다. 칠산대호법이 열반하자 장의는 교회중앙장으로 엄수하였고, 묘지는 총부부근 알본에 있었으나 원기 70년(1985)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칠산대호법은 제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법마상전급이요, 사업등급 정4등을 원성적은 준 3등77인중 36호에 해당되었고, 열반후 바로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되었으며, 원기 70년(1985)3월20일 제103회 임시수위단회 결의에 의해 대호법으로 추존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일곤 선생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으며 손자가 서울에 살고 있다.
③ 외숙과 제자 : 유건이 여러 제자와 함께 무릎을 꿇고 대종사를 모시고 있었다. 대종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분은 나의 외숙인데도 나를 이처럼 공경한다. 내가 미안해서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항상 저렇게 한다.] 유건이 말했다. [이 생의 육신 인연으로는 내가 비록 대종사님의 이삼촌이지만, 영생을 통해 놓고 보면 대종사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님이요,나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스승을 대할 때에는 항상 공경해야 하는것입니다.](소태산 대종사 일화중에서)
8산
(1879.9.6∼1939)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출생. 10세 한문서당 입학하여 16세까지 한문 배웠고, 17세 때 길룡리 마촌 산중에 들어가 음양복술을 공부하기도 했고, 31세 때 12세나 나이가 어린 대종사와 의형제의 관계를 맺고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 주었다. 그러다가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첫 제자가 되어 스승으로 받들었다. 인생으로서 새 출발을 다짐하고 이웃 주민들로 받은 채권증서를 불살라 버렸다. 방언공사 도중 둑에서 새는 물을 자신의 몸으로 물구멍을 막아 위기를 구하였다. 총부건설에 적극 참여하여 농업부원으로 일하였다. 원기 42년 대봉도 법훈을 추증받음.
①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 : 팔산 김광선대봉도는 1879년9월6일에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김응오 선생과 모친 강선생의 3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숙부 김응칠씨에게 출계하여 앙묘인 조연푼씨의 극진한 애호를 받으며 양육되었다. 팔산대봉도는 10세때부터 한문사숙에 나가 16세까지 수학하였고, 17세때에는 길룡리 마촌 산중에 들어가 1년동안 음양복술(陰陽卜術)공부를 한적이 있었다. 울창한 잡목으로 천막을 치고 주문을 읽으며 심축을 드리는데 매일 밤이 이슥하면 큰 범이 내려와 그 출입구에 앉아서 팔산대봉도의 거동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무서운 생각이 없었고 나중에는 개처럼 친근히 지냈다 한다.
18세시부터 30세까지 10여년간은 가계를 돕기 위하여 작농(作農)도 하고 혹은 상업도 경영하면서 각지 각처를 순회도 하였으며, 31세부터 3년간은 광산김씨 문중의 대동보(大同譜)를 꾸미는데 정신 물질등 각방으로 전심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팔산대봉도는 그 당시 부근 동리에서 입정 삼매(入定三昧)중에 부지세상(不知世上)하는 소태산 대종사의 지극히 간구한 생활을 직접 목도하고 우연히 남다른 동정심이 발하여 가끔 심방도 하고 식사도 공궤하는 등 물질 또는 정신적으로 자주 그 살림을 보조하고 공부하는 배용을 후원하게 되었으며 혹은 고창 연화봉을 비롯,각지로 동반하여 공부한 일도 있었다.
팔산대봉도가 38세 되던 해에 소태산 대종사가 일원대도(一圓大道)를 대각하였다.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어 그 동안 피골상접(皮骨相接)하던 체신(體身)이 다시 혈육충만(血肉充滿)하고 형모의 광명이 일월같이 명랑 원만해 지는 의표(儀表)를 접하고 심중에 깊이 감동된 바 있어 환희불승(歡喜不勝)하는 가운데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전일에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12살 아래인 소태산 대종사를 선생님으로 받들기로 작정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가 되었다.
팔산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은 이후는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분요(紛擾)한 세상사를 청산하기 위하여 채무자에게 수금할 채권증서(당시 3천여원)를 스스로 모두 소각해 버린후 채금을 전부 탕감해 주었으며 사랑하던 작은 부인에게는 생활비를 다소 주어 부부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등 그 용감한 결단에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와는 본래 가정적으로도 교의(交誼)의 두터웠고 한 동리에서 같이 성장하였으므로 동기 형제(同氣兄弟)처럼 친하게 지내던 터이라, 대종사가 대각을 이룬후 종종 허물없는 팔산대봉도를 불러 붓을 잡으라 명하여 친히 문귀(文句)와 시가(詩歌)등을 불러 주며 수필편집(受筆編集)케 하니, 그 책명은 법의대전(法義大全),백일소(白日蕭),심적편 등인바 후일 [나의 지은 바 그 책으로 말하면 일시적 발심조흥은 될지언정 인간 지도의 정식교과서는 못될 것]이라는 대종사의 뜻에 따라 소각되었다.
팔산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보다 12살이나 연상이지만 한번 사제지의를 정한 후로는 모든 예의에 조금도 서투른 점이 없었으며, 대종사를 모심에 언어동작이 극히 겸공하여 효자가 엄부를 대한 듯한 태도가 나타났나니, 아무리 효자가 엄부를 대한 듯한 태도가 나타났나니,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대종사가 부르면 일각도 지체하는 일이 없었으며, 대종사와 자리를 같이하여 나란히 앉는 일이 없었고, 대종사가 사용하는 도구등속까지도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② 20여년간 교단 창업에 헌신 : 금주단연 근검저축등으로 저축조합운동에 솔선수범하던 팔산대봉도는 원기 3년(1918) 40세 되던 해에 방언공사에 동참하게 되었다. 키가 아주 크고 건강한 몸으로 9인단원중 으뜸가는 기력을 가졌던 팔산대봉도는 가정형편도 제일 넉넉한 편이어서 정신 육신 물질 삼방면으로 방언공사에 솔선수범하였다. 방언작답(防堰作沓)후 어느 때에는 제방이 무너져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침입하는지라 팔산대봉도는 그를 막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인역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하고 사지(死地)를 평지(平地)같이 뛰어드니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만류하는 동시에 감격하여 마지 않았다.
팔산대봉도는 방언공사를 마친후 혈인기도에 동참하였고, 법인성사를 이루고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김광선이었다. 속명은 성섭(成燮). 이어 원기 8년(1923)까지 방언답을 관리하며 영산성지의 일을 돌보며 전무출신을 꾀하던 중 당시 정읍 내장사에 임시 주가(住駕)중이던 소태산 대종사에게 가서 본격적으로 출가수도를 시작하였다.
원기 9년(1924)46세 때에는 이미 송학동 박원석 선생 집에서 오창건.이동안.대봉도등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 익산총부 건설당시 엿장사등의 물질적 근거를 이루게 되었다. 원기 10년(1925) 47세때에는 익산총부에 거주하며 만석리 방면의 작농으로 시발한 농업부의 부원으로 활동하였던 바 의식의 곤란은 물론 정신 육신의 노고가 자심하였으나 밤이면 청법의 환희와 진리연구에 몰두하여 이른바 주경야독의 근로정신으로써 일반후진의 모범이 되었으며 팔산대봉도의 그러한 정신이 계승되어 오늘날 산업부가 구성되었다.
원기 11년(1926) 48세때에는 소태산 대종사와 양하운대사모가 임시로 임실에 구자할 때에 오산 박세철 대봉도와 함께 가사감독및 시봉절차를 전담하였다. 원기 14년(1929)에는 총부 감원으로 1년,원기 15년(1930)부터는 영산 서무부장으로 2년간 봉직하였다. 원기 17년(1932) 54세때에는 진안 마령 교당 교무로 임명되었는데 창설 초의 빈한한 교당이라 유지대책이 없었다. 팔산대봉도는 부임하자 교리를 훈련시키는 일방 주경야독식으로 친히 전답 개간,수박 재배, 과수원 경영등으로 노력을 기울여 근무 3년만에 논 4두락(9백여평)을 매입하여 마령 교당의 유지토대를 세워놓았다.
원기 20년(1935)57세때부터2년간은 김제 원평 교당 교무로서 성근일관으로 노력하여 협착한 행랑채를 증축하였으며, 백방으로 노력하여 김제 용신교당의 가옥을 건축하는등 교화에 다대한 업적을 나타냈다. 원기 22년(1937) 4월 59세시에 우연히 소화불량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부득이 원평교무를 사임하고 익산총부로 귀관하여 휴양하며, 치료에 전력하였다. 원기 23년(1938)60세시에는 총부 순교무로 임명을 받고 각지를 순회하며 영산교당에 내려갔던바 7월부터 다시 병이 재발하여 그곳 동지들과 전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백방으로 구명하였으나, 인명은 재천이라 마침내 회춘의 기쁨을 보지 못하고 원기 24년(1939)1월3일 영산교당에서 61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팔산대봉도는 열반에 임하여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형제 자녀 친척들을 잠시 다른 방에 가게 한 후 정산 송규종사를 조용히 옆으로 청한후 다정히 손목을 꼭 잡고 [내가 다행히 회복이 되어 공무에 활동하게 되면 어려운 교당의 유지비에 보조할 계획이었는데 이제 더 있지 못하게 되니 공중을 위하여 처리하여 주십시오]하면서 그 동안 동지들로부터 조금씩 받은 돈 20원을 정산종사의 손에 쥐어 주고는 [부디 건강한 몸으로 종사주 모시고 공사에 노력하십시오]하면서 동지들에게 최후인사를 한후 원적의 길을 떠나갔다한다.
팔산대봉도는 21년간 영광 총부 마령 원평등지에서 중책을 맡아 교단창업에 멸사봉공(滅死奉公)하였다. 중앙총부에서 팔산대봉도의 열반비보를 받은 소태산 대종사는 성루를 흘리며 비통해하는 가운데 대각전에서 간단한 추도식을 거행케 한후 법상에 올라 팔산대봉도의 영혼천도를 위하여 [생사거래와 업보멸도]란 제목의 해탈법문을 다음과 같이 설했다. [팔산으로 말하면 20여년동안 고락을 같이하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정이 들었는지라 법신은 비록 생멸성쇠가 없다 하나 색신은 이제 또 다시 그 얼굴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어찌 섭섭하지 아니하리요, 내 이제 팔산의 영을 위하여 생사 거래와 업보 멸도에 대한 법을 설하리니 그대들은 팔산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이 법을 더욱 잘 들으라. 그대들이 이 말을 듣고 賁달음이 있다면 그대들에게 이익이 있을 뿐 아니라 팔산에게도 또한 이익이 되리라. 과거 부처님 말씀에 생멸 거래가 없는 큰 도를 얻어 수행하면 다생의 업보가 멸도된다 하셨나니, 그 업보를 멸도시키는 방법은 이러 하나니라. 누가 나에게 고통과 손해를 끼쳐 주는 일이 있거든 그 사람을 속 깊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과거의 빚을 갚은 것으로 알아 안심하며 또한 그에 대항하지 말라.
이 편에서 갚을 차례에 져버리면 그 업보는 쉬어버리나리라. 또는 생사 거래와 고락이 구공한 자리를 알아서 마음이 그 자리에 그치게 하라. 거기에는 생사도 없고 업보도 없나니, 이 지경에 이르면 생사 업보가 완전히 멸도되었다 하리라.](대종경 천도품 28장) 이어 소태산 대종사는 즉시 유산 유허일정사등 남녀 5인을 선정하여 영산교당으로 파견, 교회전체장으로 장의를 정성껏 거행케했다. 묘지는 처음 영산성지에 있었으나 후일 알봉으로 이장하였으며 원기 70년(1985) 3월에는 다시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하였다.
팔산대봉도는 제 1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 법강항마위요, 사업등급 정특등으로 원성적은 준특등 8인중 3호요, 원기 42년(1957)4월26일 제1차 법훈증여시 대봉도위로 추존되었다. 팔산대봉도는 부인 심타원 신정랑정사와의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는데 장남 형산 김홍철종사와 손자 김대현.김혜광교무와 손녀 김대심.김대관법사와 김정심교무,외손자 이운천법사,증손자 김덕상 등 많은 후손들이 전무출신하여 팔산대봉도의 뒤를 잇고 있다. 팔산대봉도는 천성이 근실강직하고 심지견고하며 특별한 용단력이 있어서 한번 하기로 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였고, 한번 않기로 한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또한 백천사마를 일거에 무찌를 둣한 늠름한 기상을 가졌고 위의가 있으면서도 후진 동지들을 내몸같이 아끼고 사랑해 주는 온정의 소유자였다. 팔산대봉도는 검박하고 주밀하며 신성이 독실할 뿐만 아니라 철두철미하고 순일무사한 무서운 공심가로서 공사에 있어서는 엄격하나 사교에 있어서는 온유친절하여 도처마다 춘일을 대한듯 화기만만하였으며 경제력이 9인선진중 제일이었다.
팔산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첫제자로 교단창립에 여러 면으로 희생과 노력도 제일 먼저,제일 많이 한 창립의 원훈으로서 정신 육신 물질의 삼공덕이 구비하였으며, 알뜰한 혈심인물로서 소태산 대종사가 가장 허물이 없이 가까이 대하고 깊이 정이 든 제자였다. 그의 공적은 흔히 공자문중의 자공에 비유되기도 한다. 팔산 대봉도의 열반을 당하여 주산 송도성종사는 [선생은 신성으로도 장하신 어른이시요, 과단성도 무서운 어른이시며 공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어른이시지마는 장한 중에도 더 장하고 특별한 중에도 더 특별한 점으로서 후인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선생의 철두철미하고 순일무사한 그 공심이십니다. 과연 선생은 본회를 창립하려고 굳은 서원을 세우고 나신 어른이 분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음이 어찌 그러실 수가 있겠습니까.
종사주의 수양시대로부터 영광의 방언이며 각처의 회관건축역사며 엿장사 수박장사까지 다해가시면서 창립에 노력하였으되 그 마음이 한번도 풀어지신 때가 없었습니다.]고 전형적인 공심가로서의 팔산대봉도를 추모했다.
③ 학이불능(學而不能) : 팔산대봉도는 원기 22년(1937) 8월 당시 교단 유일의 정기간행물인 회보37호에 [학이불능]이라는 글을 발표,스승인 소태산 대종사의 성인다움을 높이 찬양했다. 대종경 실시품 47장(김광선이 위연 찬탄하기를 [종문에 모신지 20여년에 대종사의 한 말씀 한 행동을 모두 우러러 흠모하여 본받아 행하고자 하되 그 만분의 일도 아직 감히 능한지 못하거니와,그 가운데 가장 흠모하여 배우고자 하나 능하지 못함이 세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순일 무사하신 공심이요, 둘은 시종 일관하신 성의요, 셋은 청탁 병용하시는 포용이라.
대저, 대종사의 운심 처사하시는 것을 뵈오면 일언 일동이 순연히 공(公)하나 뿐이시요, 사(私)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아니하사, 오직 이 회상을 창건하시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씀도 행동도 없으시나니, 이것이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대종사의 사업하시는 것을 뵈오면 천품이 우월하시기도 하지마는 영광 길룡리에서 우리 9인을 지도하사 간석지를 개척하실 때에 보이시던 성의나 오랜 세월이 지낸 지금에 보이시는 성의가 전보다 오히려 더하실지언정 조금도 감소됨이 없으시나니, 이 또한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대종사의 대중거느리시는 것을 뵈오면 미운 짓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잘 무마하시고 애호하시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좋은 사람이야 누가 잘못 보느냐, 미운 사람을 잘 보는 것이 이른바 대자대비의 행이라"하시니 이 또한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라.]하니라.)의 법문이 바로 다음과 같은 [학이불능]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옛적의 공명선은 증자의 제자였다.
증자의 문하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도록 일찌기 한번도 글 읽는 것을 보지 못하였었다. 이것을 이상히 여긴 증자께서 하루는 공명선을 불러 물으셨다. [공명선아 너는 어찌하여 나의 문하에 들어 온지가 3년이 되도록 도무지 배우지를 아니 하니 그 왠일이냐] 공명선이 머리를 조아 가로대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 않사오리까. 제가 선생님께서 가정에 처하심을 뵈옴에 부모의 앞에서는 성내어 꾸지람하는 소리가 개와 말에게도 이르지 아니할실제 제 마음에 감탄하야 배우고자 하되 아직 능치 못하오며, 또 제가 선생님께서 빈객 응접하심을 뵈옴에 공순하고 검소하여 해태함이 없으실세 제 마음에 감탄하여 배우고저 하되 아직 능치 못하오며, 또 제가 선생님께서 조정에 거하심을 뵈옴에 엄격하게 아랫사람을 어거하되 각박함이 없으실세 제 마음에 감탄하여 배우고저 하되 아직 능치 못하오며 이 세가지는 모두 흠모하여 배우고저 하되 능치 못함이라 어찌 감히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거하겠습니까.]하였다 한다. 위의 일절은 소학에 있는 말로서 공명선이가 증자에게 배우는 태도를 명시해 놓은 것이어니와 이야말로 천하 만고의 모든 배우는 사람의 명감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말이나 글이나 배우면 그것은 배우는 줄 아나 어떠한 행동을 본 받고 마음을 체받는 것은 배우는 것인줄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주의도 극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서는 이것이 참으로 큰 배움이며 고상한 품격의 수련이니 공명선은 가히 배우는 도를 알았다. 할지로다. 나도 이미 도문에 들어와서 법해를 헤엄친지 벌써 이십유여년이다. 그 동안 무상대도의 진리법설을 들은 바가 많으며 또는 종사주의 정직 공평사힌 처사 행동에 대하여 느낀 바도 한 두가지가 아니지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히 명뇌 각골하여 항상 배우고자 하되 능치 못한遁 몇가지를 들어서 써 나의 장래 지침을 삼는 동시에 일반 학인에게도 무언의 교를 지어 주고저 함이다. 순일(純一)하신 공심(公心) 나는 첫째 종사주의 순일 무이하신 공심에 감탄하였다.
자상히 주의해 볼진대 종사주의 일언 일행은 하나도 공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시다. 세상에서 공심이 있다는 사람을 보면 대개 공과 사 두가지를 놓고 그 대소 경중을 비교해 보아서 공사로 기울어지는 마음이 사무에 끌리는 정신보다 승하면 그것을 일러 공삼이라고 하나 종사주의 운심 처사하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완전히 공이다 사다 하는 구별이 없으시고 순연히 공하나 뿐이시니 사라는 대상이 별로 서 있지 아니하거니 어찌 끌리고 안 끌릴 일이 있으리요. 그런고로 간단히 말하자면 종사주께서는 오직 본교를 창건하시는 일이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씀도 행동도 없으시나니 이야말로 우리 동지가 모두 함께 체받아야 할 정신이며, 마음으로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나 능치 못하는 바이다. 일관(一貫)하신 성의(誠意) 세월은 무궁,세사는 무한,그러나 사람의 정력(精力)은 한이 있나니, 이 한이 있는 정력으로써 저 무한한 세월에 무한한 사업을 경영해가자면 반드시 중간에 무수한 파란곡절도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자연이 권태기가 있어서 만사가 귀찮고 하기 싫은 생각이 드는 때가 않은 것이니 이로 인하여 거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사업에 태만하여 실패를 보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종사주의 모든 일하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언제든지 성의 일관으로 20년전 영광 길룡리에서 우리 9인을 지도하여 간석지를 개척하실 때에 뵈옵던 그 열열하신 성의가 금일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감소됨 참고(회보52호 교고총간3권340)
정산종사
(1900-1962)원불교 제2대 종법사.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넓으며 기상이 화청하여 선동이라 불리웠다. 8세 경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세계를 바로잡고 모든 인류를 구제하는 큰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 각처를 헤매다녔다. 1917(원기2)에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정읍군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집으로 찾아와서 처음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에 송규는 영광으로 가서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었고, 수위단 중앙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송규는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서 다른 구인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에 노력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부안 봉래정사에서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제정할 때 크게 보필하였고, 익산총부와 영산성지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43년(원기28)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8.15해방 이후에 교단의 명칭을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라 바꾸었다. 1961년(원기46) 4월에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설했고, 이듬해 1월 24일 총부에서 대중들에게 삼동윤리를 최후 법문으로 남기고 열반했다.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 본명 도군(道君), 법호 정산(鼎山).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넓으며 기상이 화청하여 선동이라 불리웠다. 8세 경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세계를 바로잡고 모든 인류를 구제하는 큰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 각처를 헤매다녔다. 16세 경에 당시 신흥종교의 본거지이던 전라도로 와서 보천교의 교조인 차경석을 만나 보았으나, 그가 정법도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정법의 스승을 만나지 못해 우울한 심경으로 모악산 대원사에서 혼자 수도에 전념하던 중 마침 이절에 불공하러 온 김해운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김해운의 집으로 가서 몇 달동안 스승없이 기도하며 수련을 쌓았다. 1917(원기2)에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정읍군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집으로 찾아와서 처음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에 송규는 영광으로 가서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었고, 수위단 중앙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송규는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서 다른 구인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에 노력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부안 봉래정사에서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제정할 때 크게 보필하였고, 익산총부와 영산성지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43년(원기28)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의 탄압과 8.15의 혼란, 6.25의 수난 등을 극복하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성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8.15해방 이후에 교단의 명칭을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라 바꾸었다. 1953년(원기38)에 거행된 제1대 성업봉찬 기념대회를 주도하고 각종 사업을 전개하면서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을 친히 집필하였다.
1961년(원기46) 4월에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설했고, 이듬해 1월 24일 총부에서 대중들에게 삼동윤리를 최후 법문으로 남기고 열반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송규에 대해 <송규는 보통 사람의 지량으로 능히 측략할 인물이 아니다. 내가 그를 만난 후로 그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 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고 그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원각가>.<불법연구회 창건사><건국론>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법어>가 1972년(원기57)에 발간되어 원불교 교서의 하나로 쓰여지고 있다. 후세 제자들은 그를 개벽계성(開闢繼聖)이라 추앙하고 있다. 수행품9,26장,성리품22장,기연편1,18장,근실편33장,신성품18장,서품6장,부촉품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