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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이야기 – 17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대외(對外) 관계사(關係史) - 3(三神五帝本紀)
1.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의 확장(擴張)
앞선 장까지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그리고 범위를 넓혀서 보기로 한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어왔던 삼신할매는 사실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를 부정하고 왜곡(歪曲) ‧ 축소(縮小)하고 우리 조상들의 사상(思想)과 철학(哲學) 그리고 문화(文化)가 협소(狹小)하며 그 어떤 과학성(科學性)이나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원시(元始) 미개(未開)한 사상(思想)이요 종교적 미신(迷信)이라고 우리겨레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과장되고 확대된 것일 뿐이다.
물론 삼신할매에 대한 사상이나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선 장들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사상이나 믿음은 미개하거나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고 정확히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사상(三思想)에 근거한 과학적인 믿음이요 사상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삼신할매≫가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믿음이 허황된 미신이 아니고 과학적이라고 하니 혹자들은 터무니없는 억설(臆說)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 그리 어리석지 않았다. 대단히 과학적(자연과학적自然科學的‧社會科學的 모두)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삼신사상(三神思想) 혹은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삼았다.
“ 하늘의 기(氣)가 흙(土)의 몸(體)을 빌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 따라서 “ 이 세상에서 사람이 명(命)을 다하면 몸(體‧魄백-몸 백)은 땅으로, 넋(魂)은 하늘로 돌아간다”라고 믿었다. 이 얼마나 과학적인 믿음이었나.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은 사람이 명을 다하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정확히 왔던 길을 되돌아 간 것이다. 절대 죽은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사람을 존중하는 사상이자 표현인가? 그리고 정확하고 과학적인 표현인가.
“ 하늘의 기(氣)가 흙(土)의 몸(體)을 빌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 한 문장으로 ≪삼신할매≫가 애기를 점지해준다는 믿음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본다. ≪하늘의 기(氣)≫는 바로 삼신사상(三神思想)에서 곧 「천신(天神) ‧ 하늘」이다. ≪흙(土)의 몸(體)≫은 「지신(地神) ‧ 땅」이다. 또 ≪사람의 몸≫은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서 「인신(人神) ‧ 땅」이다. 따라서 위 문장은 하늘 ‧ 땅 ‧ 사람이 곧 하나라는 걸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천신(天神) ‧ 지신(地神) ‧ 인신(人神)이 하나 되니 ≪삼신(三神)≫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상과 믿음에서 탄생한 것이 곧 ≪삼신할매≫인 것이다. 우리가 TV극에서 흔히 보아오던 ≪전설(傳說)의 고향(故鄕)≫이나 전설(傳說)이라는 주제(主題)를 달고 나온 소설(小說)이라는 것들이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이고 순결한 믿음을 얼마나 폄하하고 왜곡해댔는지 이해를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극을 제작하거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학자 혹은 사상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삼신할매≫라는 화두로 극을 쓸 때에는 자신들이 제작하고 쓰고자 했던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인 연구와 접근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우리의 역사와 문화만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아들이다 보니 시중에 떠도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삼신할매≫에 대한 설(說)을 확대(擴大) ‧ 재생산(再生産)하여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자신들 조상이 형편없이 저급하고 미개한 사람들이었다는 혐오감(嫌惡感)을 주입시키는데 커다란 공헌(貢獻)을 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 모든 삶의 궤적(軌跡)을 연구(硏究)하면 우리겨레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 과학적인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사회과학(社會科學)적 측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믿음은 절대 미신(迷信)이 아니며 결코 원시적(原始的)인 비과학적 믿음 역시 아니다. 왜 우리 조상들의 믿음과 사상이 미신(迷信)이 아니며, 비과학적(非科學的) 사상(思想)이 나닌지 그 원리(原理)를 아래 설명한다.
“ 하늘의 기(氣)가 흙(土)의 몸(體)을 빌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라는 믿음은 또 다른 중요한 사회과학적(社會科學的)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종교사상(宗敎思想)적인 뿌리가 되는 근본적(根本的)인 내용(內容)을 포함(包含)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늘(天)의 기(氣)는 천신(天神)이요 천일(天一)이다. 흙(土)의 몸(體)은 지신(地神)이요 지일(地一)이다. 사람(人) 몸(體)는 인신(人神)이요 태일(太一)이다. 우리가 앞선 장들에서 여러 번 언급을 했듯이 “천일(天一) ‧ 지일(地一) ‧ 태일(太一)” 중에 ≪태일(太一)≫이 으뜸이라 천지만물(天地萬物) 간(間)에는 “ ≪사람(人 ‧ 太一)≫이 으뜸이 된다 ”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회과학적(社會科學的)으로 중요한 내용을 위 문장은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사상(東學思想)의 핵심(核心) 사상(思想)인 “≪천(天)≫ 즉(卽) ≪인(人)≫, ≪인(人)≫ 즉(卽) ≪천(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바로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끈이지 않고 내려온 우리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이지 절대 동학(東學)을 창시(創始)했다는 최수운(崔水雲)이 창작(創作)해낸 것이 아니다.
본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우리네 전통종교(傳統宗敎) 뿐 아니라 온 누리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뿌리이자 줄기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마치나 대단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믿음인 것처럼 광고해대는 서양의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화하족이 독창적으로 창작해낸 것처럼 오도(誤導)되고 있는 유교(儒敎)‧유학의 모든 이론(理論)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 역시 “천일(天一) ‧ 지일(地一) ‧ 태일(太一)” 중에 ≪태일(太一)≫이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천일(天一)은 말한(馬韓)이요, 지일(地一)은 불한(番韓)이요, 태일(太一)이 신한(辰韓)이니 신한(辰韓)이 삼한(三澣)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한(辰韓)이 삼한(三澣)의 우두머리로 앉아서 다스렸다고 하였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비단 종교(宗敎), 사상(思想), 철학(哲學)등의 사회과학적(社會科學的)인 부분만이 아니라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수학(數學)의 원리(原理)에도 기초를 이룬다. 즉 삼수분화(三數分化)의 原理는 3‧6‧9‧‧‧81의 3의 제곱 수 뿐만 아니라 인간사(人間事)의 366사의 기본이 된다. 또 81의 수자는 바둑판의 원리에 적용이 되고 있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우리와 화하족의 행정구역과 행정관직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되었다. 위 단재 선생의 삼한론(三韓論)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3정승제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또한 군사조직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되었는데, 중앙군, 우위군, 좌위군의 삼군체제가 기본이 되어 중(中)‧전(前)‧후(後)‧좌(左)‧우(右)의 5군제가 편성이 되어 전쟁에 참전을 하여 전투를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오제(五帝)사상에 기초를 한 것이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로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홍익인간(弘益人間)≫ ‧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사상(思想)이 나왔으며, ≪홍익인간(弘益人間)≫ ‧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사상(思想)으로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이 나왔다. 또 신교(神敎)의 ≪아홉가지 맹세≫ ‧ ≪다섯 가지 계율≫이 나왔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우리겨레가 건물을 짓고, 탑을 쌓고, 제사를 지내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을 미치었다. 문화(文化) ‧ 예술(藝術) 역시 마찬가지 이다. 소리, 가락, 악기, 그림, 그림도구 등 모든 영역에 그 영향을 주었다.
2.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 의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 역시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에 기초하여 글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기본자 3자는 天 ‧ 地 ‧ 人(三才)를 본떠 만들고, 나머지 글자들은 이들을 복합하여(組合)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기본자 3자는 ≪ ‧ ‧ ㅡ ‧ ㅣ≫를 말하며 ≪ ‧ ≫는 하늘 곧 「天」이며 ≪ ㅡ ≫는 땅(地)이요 ≪ ㅣ ≫는 사람(人)이다. 필자가 분석하는 우리 글의 원리는 위 기본 3자 말고도 모든 자음(字音)과 모음(母音)의 원리 역시 天 ‧ 地 ‧ 人(三才)가 기본이 된다. 여기서는 우리글을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
1982년에 출판된 학력고사 대비 종로교재시리즈 중 ≪종로 古文≫의 한 대목을 보기로 하자. 본 글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일제에 의해 왜곡‧조작되고 이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서 이 땅에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자신들 조상들의 업적을 이민족의 업적으로 둔갑시켜 교육을 했는지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라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교재로 또 그 교재를 바탕으로 선생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면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남쪽의 극심한 사대주의사상(事大主義思想)은 일제가 왜곡, 조작한 식민사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럼 그 한 대목을 보도록 하자.
❝ 훈민정음(訓民正音 : 글자)
연대: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 완성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순 반포
창제: 세종(집현전 학사들이 협찬) ☞ 본 문제는 추후 연재할 것임 ☜
배경: 사상적 배경: 성리학(性理學) 학문적 배경: 중국 운학(韻學)
제자원리 : 초성은 모두 17자인데 기본자(基本字: ㄱ‧ㄴ‧ㅁ‧ㅅ‧ㅇ)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상형(象形)」, 그 밖의 글자들은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만들었다「가획 (加劃)」, 그리고 중성(모두 11자)은 “天 ‧ 地 ‧ 人” 三才를 본떠 만들었다. ❞
학력고사대비 고등학교국어교과서의 고문(古文)에 나오는 “작품 개관”에 첫 번째 서문형식으로 나오는 부분이다. 저 필자들은 그래도 당시에는 고등학교교재집필자들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교사 혹은 교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저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본 글을 쓰면서 위 문장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앞에서는 분명 ≪사상적 배경≫에는 화하족이 삼신사상에 기초해서 만들어낸 ≪성리학(性理學)≫이고 ≪학문적 배경≫은 ≪중국 운학(韻學)≫이라고 했으면서, 글 맨 끝부분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사상적 배경과 학문적 배경을 뒤집어엎는 “중성(모두 11자)은 “天 ‧ 地 ‧ 人” 三才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어찌 해석해야 할지.
물론 이해는 한다. 저 글을 쓸 때 분명 저자는 우리겨레가 창작하고 온 누리 인간 삶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아니 몰랐다기 보다는 오히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원시적 형태의 미신(迷信)이요 비과학적(非科學的)이며 저급한 우리겨레가 내다 버려야할 부끄러운 것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천(天) ‧ 지(地) ‧ 인(人) 삼사상(三思想)은 우리겨레의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 절대불변(絶對不變) 사상(思想)이요 교리(敎理)다. 절대 화하족의 사상이라거나 화하족이 창조한 유학(儒學)이나 유교(儒敎)의 교리(敎理)가 아니다. 근본이 이럴진데 하물며 유학(儒學)이나 유교(儒敎)의 한 파인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은 더더구나 아니다. 또 학문적(學問的) 배경(背景)이 화하족의 음운론(音韻論)에 있다는데 할 말이 없다. 필자가 화하족이라고 계속 강조하는 것은 현재 불리워지는 중국(中國)은 「중화인민공화국(中和人民共和國)」을 줄여서 부른 약칭국호이지 절대 지구의 가운데 나라라는 의미의 중국(中國)이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中和人民共和國)」의 탄생은 1948년 모택동(毛澤東) 주석이 이끄는 홍군(紅軍)이 장개석(蔣介石)이 이끌던 국민당군(國民黨軍)에 승리를 하고 선포한 나라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화하족의 나라 이름에는 가운데 중(中)자가 들어간 나라 이름이 없었다. 역사적 사실이 증명을 함에도 여전히 조선시대(朝鮮時代) 혹은 훨씬 더 이전의 시대를 서술하는데 있어서도 중국(中國)이라고 하고있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본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중국음운학(中國音韻學)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전제부터 오류가 발생했는데 그 결과야 더 이상 언급을 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상기 ≪종로 古文≫에 기록되어 있는 사상적 배경으로서 ≪성리학(性理學)≫이요, 학문적 배경으로서 ≪중국 음운학(音韻學)≫이라는 해석은 명백한 오류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글은 화하족의 영향을 받아서 창제된 것이 아니고 정확히는 위 저자도 끝에서 언급을 했듯이 우리겨레의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의 핵심(核心)인 천(天) ‧ 지(地) ‧ 인(人) 삼사상을 기초로 창제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글 창제(創製)의 사상적(思想的) ‧ 학문적(學問的) 배경(背景) 모두 우리겨레의 전통사상(傳統思想)과 과학적(科學的)인 음운학(音韻學)이다.
기왕 언급한 김에 우리글 창제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간단히 보도록 하자.
오랫동안 영어통역을 하였으며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우리말글과 온 누리 말글과의 연구를 해온 강상원 박사의 ≪ㅎ+한글 古語辭典 실담語 註釋≫ 서문(序文)의 일부를 보기로 하자. 이에 대해서는 후일 더 상세하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짧지만 언급을 하기로 한다.
❝ 우리의 전통토속어(傳統土俗語)인 사투리(ksatria, 샤뜨리야는 王族이란 뜻이다. 故로 “사투리”는 즉 王族言語라 해석됨)는 실담어(悉曇語)의 상형문자로 표기(表記)하므로서 한국의 고어(古語)를 복원(復原)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
위 문장과 우리글 창제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하고 반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근본부터 알아야 우리글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우리 말은 또 온 누리에 현존하는 현생인류(現生人類)와 어떤 연관성(聯關性)을 갖는지를 이해 할 수가 있다.
위 강산원 박사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리겨레의 오래된 옛 말 특히 우리가 ≪사투리≫라고 해서 쓰기를 주저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끄러워하기 까지 한 말이 곧 온 누리 존재하는 인류의 말의 뿌리요 줄기라는 사실이다. 특히나 전라도(全羅道)의 토속말들은 더욱더 그렇다. 이 점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위 강상원 박사의 서문의 시작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도어”의 모어(母語)는 천축실담어(天竺悉曇語)이다. 또 천축실담어(天竺悉曇語)의 뿌리와 줄기는 바로 우리의 오래된 말들 혹은 사투리라고 알려진 말들이다. 특히나 전라도의 옛말이 바로 그 뿌리요 줄기이다.
말의 뿌리를 먼저 거론하는가 하면 글의 탄생은 바로 말을 눈으로 보일 수 있도록 기호화 문자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글은 필히 말과 땔레야 땔수 없는 필연성을 같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을 뿌리를 거론하였다.
❝1874년에 출판된 샤를르 다레의 “한국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한국어(당시 조선어)가 인도남부의 드라비다어(語)와 비숫 하다고 결론(結論)짓는다. 이러한 유사성(類似性)을 심도있게 연구(硏究)하면 인두민족들의 원시역사(元始歷史) 및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류학적(人類學的) 문제들의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될 것”라는 점(點)이다.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F. Boulesteix 著, pp.106,7〕. 범어(Sanskrit語)를 인도 – 유럽어의 기원(基源)이라고 정설(定設)로 규정한 사실(事實)을 상기(想起)할 때, 한국어가 상고대시대(上古代時代)에 속한다고 확인(確認)해도 무리(無理)가 없을 것이다. ❞
물론 강단사학에서는 절대 믿을 수 없는 억측이요 자의적 역사해석이라고 부정하지만 드러나는 사실들을 면밀하게 연구 분석하면 위 강상원 박사의 논증은 타당성을 갖는다. 필자가 삼신오제본기를 연재하는 목적도 단재 신채호 선생의 단군조선시기 대외관계사를 분석 연구하여 연재하는 것도 바로 상고대시기 우리겨레가 온 누리의 역사와 문화를 선도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가벼운 여담 하나 소개를 하도록 한다. 본 이야기는 필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위 1874년에 출판된 샤를르 다레의 “한국교회사”에서 논증한 ““한국어(당시 조선어)가 인도남부의 드라비다어(語)와 비숫 하다고 결론(結論)짓는다”는 고증(考證)과 강상원 박사가 논증하는 “한국어가 상고대시대(上古代時代)에 속한다고 확인(確認)해도 무리(無理)가 없을 것이다”는 내용을 연결지어 보기바란다.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 소고기 전면수입개방에 맞서서 그해 5월2일부터 전국민적인 촛불시위가 있었을 때였다. 시위가 계속 되던 때인 6월중순경 서울시청광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하려고 하던 때 몇이서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한창 연구를 하고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역사 문화 말글에 대해 운을 때었다. 그때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중년의 남자가 기겁을 하면서 필자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하였다.
❝ 그는 당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기절 하는 줄 알았다”는 표현을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그는 섬유회사 직원으로 “스리랑카”에 오랫동안 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약 15년 정도 있었다고 했다. 그가 파견된 섬유광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타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타밀족≫은 스리랑카 원주민들이다. 그들은 현 스리랑카의 권력 및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 침입자라고 하면서 타밀독립운동을 가열차게 벌이던 종족이다. ≪타밀족≫은 인도 동남부의 타밀라두주에 있는 종족과 같다.
그 경험자는 자신이 처음 ≪타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갔을 때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3일째 되는 날 이상한 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고 증언을 하였다. 즉 띄엄띄엄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로서 하는 의사소통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파견된 일주일 후 부터는 어느 정도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으며 보름이 지난 후부터는 그들과 말로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어찌 해서 이 먼 곳에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머나먼 나라인 스리랑카에 그것도 소수민족으로서 고통을 받고 있던 ≪타밀족≫들이 쓰는 말이 우리와 똑 같은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였다면 두 번째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우리와 너무나도 똑같다는 점이었다고 증언을 하였다. 그 증언자는 필자가 먼 상고시대에 우리 역사가 현 지나대륙을 넘어 중동과 인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고 할 때 스스로가 먼저 필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을 한다고 하면서 들려준 일화이다. 그는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까지 “놀랍기 그지없다” “기절 할 뻔 했다”라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면서 필자의 이야기에 자신이 직접 경험을 했기에 절대적 공감을 한다고 하였다. ❞
필자의 경험을 했던 사실과 샤를르 다레의 “한국교회사”에서 논증한 ““한국어(당시 조선어)가 인도남부의 드라비다어(語)와 비숫 하다고 결론(結論)짓는다”는 고증(考證)과 강상원 박사가 논증하는 “한국어가 상고대시대(上古代時代)에 속한다고 확인(確認)해도 무리(無理)가 없을 것이다는 논증에 대해서 연관지어 사색을 해보기를 권한다.
또 필자의 해석으로는 ≪쓰리랑카≫ 역시 우리 말이다. 즉 우리 겨레에게 유전적이다 시피 전수해온 ≪아리랑 쓰리랑≫의 ≪쓰리랑≫과 ≪카= 칸 = 한≫의 합성어가 곧 나라 이름이 된 것이다. ≪쓰리랑 + 한(칸, 카) = 쓰리랑카≫가 된다. 이러한 언어적 해석을 하면 온 누리 곳곳에 우리 말로 된 지명이나 이름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본 문제 역시 추후 상세할 예정이다.
인도와 우리 겨레가 상‧고대시기 언어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 간략히 보았으니 이제 우리 글 창제에 대해서 강상원 박사가 고증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좀 길게 느꺼질지 모르겠지만 한글창제부분 서문격인 전문을 올려준다. 아마도 꽤 흥미로울 것이며 많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본 필자(筆者-강상원 박가)가 이번에 저술(著述)한 훈민정음(訓民正音)28자(字) 어원적(語源的)인 신해석(新解釋)에서 제자원리(制字原理), 음운표기법(音韻表記法), 언해방법(諺解方法)과 자음합용병서(子音合用竝書)의 비밀(秘密)은 훈민정의의 창제원리(創製原理)를 해석(解釋)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복천암(福泉唵), 신미당(信眉堂) 수암대선교종사실기(秀巖大禪敎宗師實記), 영산김씨세보(永山金氏世譜), 및 기타 기록(記錄)에 의거하여 고찰하면, 신미대사(信眉大師)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초빙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싯담어(悉曇語는 梵語의 母胎)의 음가(音價)와 석의(釋義)가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 등 오음(五音), 즉 오행(五行)과 모음(母音)은 천인지(天人地)의 삼재(三才)로 구성된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일치(一致)한다. 싯담어에 정통(正統)하지 못하면, 정음(正音)을 창제(創製)할 수도 없으며, 언해(諺解)할 때, 어법(語法)에 맞게 운용(運用)할 수도 없다. 필자(筆者- 강상원 박사)가 저술한 상기 신해석(新解釋)에 의하면,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표기(表記)된 음운(音韻)이 모두 Oxford 범어사전에 기술된 것과 일치(一致)한다. 세종대왕의 어명(御名)인즉, “가장 쉽고, 쓰기 편리한 글”을 맹글라 하시매, 신미대사(信眉大師)는 실담어(悉曇語)에 근거(根據)하여 주도적(主導的)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創製)하였다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상기 수암대사선교종사실기(秀巖大禪敎宗師實記)의 발췌문(拔萃文) ~ 후략~ ❞
위 강상원 박사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논증을 통해 보면 앞선 고등학교 고어(古語)고재의 나와 있는 훈민정음 창제의 사상적 배경이 화하족의 성리학(性理學)이요, 음운학(音韻學)적 배경이 화하족의 음운학(音韻學)에 있다는 설이 얼마나 황당하며 무근거한 가를 알 수 있다. 또 상기 강상원 박사의 글 중에서 “싯담어(悉曇語는 梵語의 母胎)의 음가(音價)와 석의(釋義)가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 등 오음(五音), 즉 오행(五行)과 모음(母音)은 천인지(天人地)의 삼재(三才)로 구성된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일치(一致)한다”는 문장은 지금까지 강조해온 우리 글의 창제 역시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오제론(五帝論)이 그 근본임을 알 수 있다.
강상원 박사가 고증한 실담어의 음가와 석의가 훈민정음의 아, 설, 순, 치, 후의 오행과 천 ‧ 지 ‧ 인 삼재로 구성된 원리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면 실담어 역시 우리 겨레의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오제론(五帝論)이 그 근본임을 알 수가 있다.
강상원 박사의 논증에 의거하면 그동안 한글창제에 참여한 집현전학사들에 대해서도 그 근거가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윗 글에 “세종대왕의 어명(御名)인즉, “가장 쉽고, 쓰기 편리한 글”을 맹글라 하시매, 신미대사(信眉大師)는 실담어(悉曇語)에 근거(根據)하여 주도적(主導的)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創製)하였다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상기 수암대사선교종사실기(秀巖大禪敎宗師實記)의 발췌문(拔萃文)”라는 문장이 그 근거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강상원 박사의 한글창제에 대한 “수암대사선교종사실기(秀巖大禪敎宗師實記)의 발췌문(拔萃文)”을 근거로 하여 한글의 창제가 실담어를 참고하여(물론 실담어의 뿌리가 우리 말이라는 건 위에서 논증을 하였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논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글창제에 대한 연재가 아니기에 그 문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 논증을 하고자 하는 것은 한글의 창제원리 역시 우리겨레의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오제론(五帝論)에 근거하였다는 것이다.
또 삼신설(三神說)과 오제론(五帝論)이 화하족 뿐만 아니라 인도(天竺國)에 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 사실은 상 ‧ 고대시기 우리겨레의 역사(歷史) ‧ 문화(文化) ‧ 사상(思想) ‧ 종교(宗敎)등이 온 누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증명해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화하족 그것도 화하족 이라고도 하지 않고 중국(中國)의 사상적 음운학적 영향으로 한글이 창제되었다고 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겨레의 고유한 얼과 넋을 되찾는 길이다. 또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되찾는 길이기도 하다.
3.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의 사회적 규범으로 확대정립(擴大定立)
김교헌 선생(金敎憲) 선생(先生)이 고증한 신교(神敎)의 계율(戒律) 및 사회규범(社會規範)
앞선 장들에서도 논하였듯이 단군조선(檀君朝鮮) 혹은 그 훨씬 이전에 창조(創造)된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우리겨레의 후세들 뿐만 아니라 온 누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는 다음과 같이 확대(擴大) ‧ 발전(發展)되었다.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 → 홍익인간(弘益人間) ‧ 재세이화(在世理化) →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법금(八條法禁) → 신교의 아홉가지 맹세 → 신교(神敎)의 더섯 가지 계율(戒律)등으로 확대 발전이 되었다. 물론 이 사상적(思想的), 교리적(敎理的) 원리(原理)는 우리겨레의 삶의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지금도 여전하다.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소위 학자입네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앞선 장에서 언급하였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한다는 의미로 살펴보기로 한다.
① 신교(神敎)의 문을 엶
❝ 단군이 신의 이치로 인간을 화육(化育)하며 신교로 국가를 건설하였다. 참 종교의 대도(大道)는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다섯 가지 가르침은, 하늘(天)과 신(神)과 천궁(天宮)과 세계와 진리의 근본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거기에 현묘(玄妙)한 깊은 뜻이 있어 세상을 깨우쳐 미련한 자들을 건지고 깨달은 자를 인도하는 문이 열려 있다. 먼 옛날에는 정치가 종교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미풍양속이 신교에 관한 일 밖에 없었다. 신단민족(神壇民族)은 신교문화(神敎文化)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
김교헌 선생은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기록을 하다 보니 우리의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가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시작이 된 것으로 기록을 하였지만 실상은 단군조선(檀君朝鮮) 훨씬 이전부터였다. 그 증거는 위 한글창제에 대한 강상원 박사의 고증을 봐도 명백하다. 그리고 고려(高麗)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봐도 명백히 드러난다. 물론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모든 면에서 고대국가(古代國家)의 틀을 갖추었다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참 종교의 대도는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는데”라는 문장은 단군조선의 다섯가지 계율을 말한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논할 것이다. “ 다섯 가지 가르침은, 하늘(天)과 신(神)과 천궁(天宮)과 세계와 진리의 근본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다섯 가지 계율≫ 역시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로부터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문장이다.
“신단민족(神壇民族)은 신교문화(神敎文化)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결국 우리겨레는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겨레 외에도 다른 민족들이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고 또 오늘 날에도 여전히 그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겨레의 역사와 문화 삶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위 김교헌 선생의 신단민족(神檀民族)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려(高麗)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발췌해서 분석해보도록 하자. 본 삼국유사부분은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 옛날에 한인(桓因, 帝釋을 말함)이 있었는데, 한인의 여러 아들 중에 한웅(桓雄)이 있었다. 한웅은 자주 천하를 다스리고 어려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뜻을 두었다. 이에 한인(한님=하느님)이 아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아래 삼위태백을 내려다 보시메, 가히 홍익인간을 펼칠 수 있는 곳이로구나. 이에 한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한웅에게 주어 인간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한웅은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원주) 꼭대기(마루턱, 頂上)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 -검불, 검벌,-박달)라고 한다. 또한 이 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이른다.
중략부분: 한웅천왕은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穀食) ‧ 수명(壽命) ‧ 질병(疾病) ‧ 형벌(刑罰) ‧ 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사를 주관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를 하였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신웅(神雄, 한검)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으메,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묶음(다발)과 마늘(달래-아마도 현대 마늘의 원조는 달래가 아니었는가 한다) 20개를 주며 말 하기를 “그대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곧 괌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3 ‧ 7(三 ‧ 七일 = 3×7=21일) 동안 忌(꺼리다. 멀리하다, 참다)하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참지를 못했으니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곰여는 남자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날 마다 단수(壇樹) 아래에 가서 아기 가지기를(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이때 한웅(桓雄)이 잠시 거짓 남자로 변신하여 웅여와 혼인을 했다. 그리하여 웅여는 곧 아기를 가지게 되고 낳게 되니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
“한인의 여러 아들 중에 한웅(桓雄)이 있었다. 한웅은 자주 천하를 다스리고 어려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뜻을 두었다”는 한인(환인桓因)의 아들들 중에서 한웅(桓雄)이라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웅(桓雄)이 땅(地)에 내려가 아직 미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웅(桓雄)≫이라는 단어를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본 해석은 필자만이 하고있음을 일러둔다. ≪한 = 하늘(天)≫이다. 뜻글자 ≪환(桓)≫은 이두로서 “하늘”을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다. ≪검(감, 곰, 금)= 웅(雄) = 웅(熊)≫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웅(雄)은 소리나는 대로 동물 곰을 나타내는 웅(熊)과 그 소리를 함께 썼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웅(雄) = 웅(熊)≫이 되며, 이는 또 다시 ≪검(감, 곰, 금)≫이 된다. 따라서 ≪한웅(桓雄)≫은 ≪한 = 하늘(天)≫에 ≪웅(雄) = 웅(熊) =검(감, 곰, 금) ≫이 합해진 이름이다. 따라서 ≪한웅(桓雄) = 한(天)+웅(雄‧熊 = 검(감, 곰, 금)≫이 된다. 즉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땅신(지신(地神))인 ≪한검≫이 된다.≪한검≫은 하늘의 성정과 땅의 성정을 다 가진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신(神)」이 된다. 이를 이두로 표기한 것인 바로 한웅(桓雄)이다.
“어려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뜻을 두었다”는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되고자 하는 뜻을 두었다는 의미이다. 즉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개하여 자연으로부터 혹은 힘이 있는 동물로부터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인간들을 앞선 문명과 문화를 가지고 그들을 자연재앙과 힘 있는 동물로부터 구원하여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뜻을 품었다는 것을 말한다. 또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사상도 역시 이로부터 나오고 있다.
“한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한웅에게 주어 인간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한웅은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에서 보듯이 여기서도 역시 삼사상(三思想)이 나온다. 즉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었다고 하여 우리겨레는 역사시기(歷史時期) 시작부터 삼사상(三思想)이 기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는 ≪거울, 북, 칼≫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 대다수 이다. 그 외 일부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거울, 북, 방울≫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본 문제는 추후 상세할 예정이다. 다만 ≪거울, 북, 칼≫이건 ≪거울, 북, 방울≫이건 이 속에는 삼신사상(三神思想) 혹은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가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한웅은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원주) 꼭대기(마루턱, 頂上)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 -검불, 검벌,-박달)라고 한다. 또한 이 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이른다”
한웅이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원주) 꼭대기(마루턱, 頂上)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바로 ≪개천(開天)≫을 말한다. 즉 한님의 명을 받들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아 하늘의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기리는 ≪개천절(開天節)≫이 바로 이 날이다.
여기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얼과 넋을 모두 상실하다 보니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분기점을 이루었던 ≪개천절(開天節)≫ 마저도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다. 원래 우리 겨레는 양력(陽曆)을 사용하지 않았다. 양력은 서양인들이 사용을 하였다. 우리겨레는 음력(陰曆) 혹은 월력(月曆)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우리겨레가 기렸다는 3월과 10월은 음력을 가리키는 것이지 양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개천절(開天節)≫ 음력 10월 3일에 기리는 것이 정확하고 또 시간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우리겨레는 10월을 상달(上月)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달(上月)은 월력으로 맨 처음 시작되는 달(月)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천절(開天節)≫은 양력(揚力) 10월에 기려서는 안된다. 음력(月曆) 10월에 기려야 한다.
≪개천일(開天日)≫이 언제 시작이 되었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가 기리는 ≪개천일(開天日)≫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건국일(建國日)이었다. 하지만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보면 분명 한웅(桓雄)이 한인(桓因)의 명(命)을 받들어 하늘에서 한웅은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원주) 꼭대기(마루턱, 頂上)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고 되어있다. 분명하게 한웅(桓雄)이 ≪개천(開天)≫을 한 것이다.
반면 ≪단군(檀君)≫ 대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보면 “한웅(桓雄)이 잠시 거짓 남자로 변신하여 웅여와 혼인을 했다. 그리하여 웅여는 곧 아기를 가지게 되고 낳게 되니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라고 하여 ≪단군왕검(壇君王儉)- 밝달 임금≫이 ≪개천(開天)≫을 했다고 하지 않았다. ≪단군왕검(壇君王儉)- 밝달 임금≫은 한웅(桓雄)이 거짓 남자로 변신하여 웅여(熊女)와 결혼하여 낳았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탄생설(誕生說)≫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근거하면 정확한 ≪개천일(開天日)≫은 한웅(桓雄)이 신시(神市)를 건국(建國)한 날이다. 따라서 ≪개천절(開天節)≫은 ≪단군왕검(壇君王儉)- 밝달 임금≫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건국(建國)한 날을 기리는 것은 잘 명백히 잘 못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천절(開天節)≫은 음력(陰曆) 10월 3일에 기려야 하며, ≪개천절(開天節)≫에 기려야 할 것은 ≪단군왕검(壇君王儉)- 밝달 임금≫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건국(建國)한 날이 아니라 한웅(桓雄)이 신시(神市)를 건국(建國)한 날이어야 한다.
“이곳을 신시(神市 -검불, 검벌,-박달)라고 한다. 또한 이 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이른다”에를 정확히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밝달 나라≫의 첫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또 우리는 ≪배달겨레 – 배달겨레는 밝달 겨레가 변천하여 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겨레의 시조(始祖)는 ≪단군(檀君)≫이라고 결정해버린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북한의 역사학계(歷史學界) 역시 남쪽과 마찬가지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배달겨레를 정밀 분석하면 그 ≪배달≫의 시초(始初)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을 신시(神市 -검불, 검벌,-박달)라고 한다”라는 기록에서 우리가 그동안 ≪밝달 나라≫의 첫 시초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아니며, ≪배달겨레 – 배달겨레는 밝달 겨레가 변천하여 된 것이다)≫의 시조(始祖)가 ≪단군(檀君)≫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을 하면 아래와 같다.
≪신시(神市)≫를 분석하면 ≪신시(神市)≫는 ≪검불(벌)≫을 이두로 나타낸 것이다. ≪신(神)≫은 땅신(地神)을 나타내는 ≪검(감, 곰, 금)≫이다. ≪시(市)≫는 옛날에는 ≪불(벌)≫로 읽었다. 여기서 ≪불(벌)≫은 ≪밝≫이 변천하여 된 말이다. ≪불(벌)≫은 ≪밝≫이다. 또 ≪밝≫은 ≪배≫로 변천한다. 즉 ≪밝≫ → ≪박(拍)≫ → ≪백(白)≫ → ≪배 혹은 애≫로 변천한다. 따라서 ≪신시(神市)≫는 ≪검불(벌)≫이 되며 이를 다시 표현하면 ≪“검”님≫이 세운 ≪밝달(박달) 나라≫이다. 이에 대해서 일부 재야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필자와 같이 나라 이름을 ≪신시(神市) 배달국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시(神市) 배달국시대≫라고 하는 것은 중복된 표현으로서 옳지 못하다. 정확히는 한웅(桓雄 - 한검)이 세운 ≪배달나라≫ 혹은 ≪박달나라≫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혹자들은 몇 가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어찌하여 ≪신(神)≫이 ≪검(감, 곰, 금)≫이 될 수 있으며, ≪시(市)≫가 ≪불(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신(神)≫에 대해서 먼저 보기로 하자. 옛날에 아이를 낳으면 낳자마자 대문에다가 새끼(전라도 사내끼. 더 정확한 표현임. 위 강상원 박사의 글 분석 참조할 것)를 꼬아 그 줄에 붉은 고추 등을 끼워놓고 걸어놓았다. 또 각 가정에서 간장을 담그고 담아놓은 간장독(沆아리, 전라도 독가지, 독가지 역시 독아리임)에 또 새끼줄에 고추, 숯 등을 끼워 넣어 줄을 감아놓았다. 우리 조상들은 이 줄을 가리켜 ≪신(神)줄≫로 쎃놓고 읽기는 ≪금줄≫로 읽었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금줄≫이라고 하니 마치나 무엇을 하지 말라는 의미의 ≪금(禁)≫를 쓰는 줄 아는데 절대 아니다. 금(禁)한다고 하여 금줄이 아니다. 위에 말한 ≪신(神)줄≫로 쓰고 읽기는 ≪금줄≫로 읽는다. 여기서 ≪금(검, 감, 곰)≫은 곧 ≪신(神)≫ 즉 땅신(地神)을 일컫는다. 즉 땅신의 힘을 빌어 갓 태어난 아이가 액운(厄運)에 들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금줄≫ ‧ ≪신(神)줄≫을 걸어놓았던 것이다. 이는 현대 서양과학으로 분석을 해도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神)≫은 ≪검(감, 곰, 금)≫을 이두로 나타낸 것이다.
≪시(市)≫는 원래 ≪벌≫로 읽었다. ≪도시(都市)≫는 ≪도읍지≫가 들어선 ≪벌≫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상고시대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도읍(都邑)이 형성 될 수 있는 조건은 산골(뫼골)은 될 수 없고 적어도 일정 정도의 넓이를 가진 ≪벌≫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도시(都市)≫의 뒷 글자 ≪시(市)≫는 ≪벌≫을 뜻한다. 따라서 ≪시(市)≫는 ≪벌≫을 이두로 나타낸 것이다. 즉 뜻을 이두로 사용을 한 것이다.
≪신시(神市)≫에 대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언어적(言語的) 분석(分析)을 기준으로 결론을 내리면 ≪신시(神市)≫는 ≪검불≫이며 ≪검불≫은 한웅(桓雄) 즉 땅신(地神)들이 세운 우리겨레 최초의 ≪박달나라≫이다. 또 ≪박달≫은 ≪배달≫이니 우리가 우리 겨레를 일컬어 하는 ≪배달겨레≫의 시초는 바로 우리 겨레의 최초의 나라는 한웅(桓雄) 즉 땅신(地神)들이 세운 우리겨레 최초의 ≪박달나라≫이니 우리겨레의 시조(始祖)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단군(檀君- 이 역시 박달 임금)이 아니고 한웅(桓雄) 즉 ≪한검≫이다.
이제 김교헌 선생이 왜 우리 겨레를 일컬어 신단민족(神檀民族)이라고 했는지 이해를 할 것이다. 신단민족(神壇民族)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면 ≪신(神) - 검≫, ≪단(檀) - 박달≫, ≪민족(民族) - 겨레≫이다. 즉 ≪신(神) - 검≫들이 세운 ≪단(檀) - 박달나라≫의 ≪민족(民族) - 겨레≫이다. 이는 바로 ≪하늘 자손 배달겨레≫라는 말이다. 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위 ≪천손민족(天孫民族)≫도 같은 의미이며, 신단민족(神壇民族) ‧ ≪배달겨레≫의 또 다른 표현이다. 신단민족(神壇民族), ≪배달겨레≫, ≪천손민족(天孫民族)≫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모두 ≪우리겨레≫을 일컫는 말이다.
“신단민족(神壇民族)은 신교문화(神敎文化)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이었다”는 우리겨레 모두는 곧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사상과 교리를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겨레는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높은 도덕성(道德性)과 예의(禮義) 속에서 살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줄기차게 강조를 하고 있는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 속에서만 살아왔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겨레는 결코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를 벗어난 삶을 살 수 없었다. 그건 우리겨레의 모든 삶의 행위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건 아직까지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걸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② 신교의 하늘에 제사함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는 일을 행한 후에 그것이 대대로 이어져 매 해 10월마다 나라 안이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불었다. 이것을 부여(夫餘)에서는 맞이 북(迎鼓)이라 하고, 예와 맥에서는 무천(舞天)이라 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서는 계음(稧飮)이라 하고, 마한(馬韓)은 곳곳에 소도(蘇塗)를 세우니, 소도(수두)는 하느님을 섬기며 노래하고 춤추는 집을 표시하는 이름이다.
거기에 큰 나무를 세워 종과 북을 달고 매년 10월에 고을(邑國)에서 각기 한 사람씩 뽑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 이름은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는 일을 행한 후에 그것이 대대로 이어져 매 해 10월마다 나라 안이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불었다”
김교헌 선생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건국(建國)한 단군(檀君) 즉 ≪밝달 임금≫시기 처음 하늘에 제사를 하는 것으로 기록을 하였지만 우리겨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겨레가 하늘에 제사를 하는 것은 단군조선(檀君朝鮮)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김교헌 선생이 기록을 한 우리겨레의 제사(祭祀)에 대한 기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위에서도 이미 논하였듯이 우리겨레는 음력10월을 상달이라고 하여 크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도 양력10월 3일에 ≪개천절(開天節)≫이라고 하여 제천행사(祭天行祀)를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마리, 머리를 이두로 표현한 이름, 본래는 머리를 상징하는 이름이며 본래 산 이름은 “밝메”이다. 추후 논할 것임)≫에서 거행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제천행사를 양력10월 3일에 지내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를 않는다.
우리겨레가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기록이 되어있듯이 ≪한웅(桓雄)≫이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역시 “밝메”이다) 신단수(神檀樹)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 즉 ≪밝달 나라(검불)≫를 세운 달이 음력10월 3일이라고 본다. 그 날을 기려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도 단군(檀君)이 제주(際主)가 되어 ≪제천행사(祭天行祀)≫를 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겨레가 음력10월 3일에 거행을 한 ≪제천행사(祭天行祀)≫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 단군(檀君)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고, 한웅(桓雄)≫이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역시 “밝메”이다) 신단수(神檀樹)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 즉 ≪밝달 나라(검불)≫를 세운 음력10월 3일 이래 당시부터 ≪제천행사(祭天行祀)≫를 거행을 해왔을 것을 ㅗ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늘에 제사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불었다”
이 문장으로 보아 우리겨레는 언제나 소리와 가락 그리고 춤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듯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증한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 ≪선배≫를 선발하는데 ≪소리와 가락, 춤, 시창≫이 주요 종목이었다고 하였다. 또 ≪선배≫들의 수련과목에도 무예(武藝)를 익히는 것과 함께 ≪소리와 가락, 춤, 시창≫이 주요과목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하였다. ≪소리와 가락, 춤, 시창≫은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들의 수련과정의 주요 과목이었다.
“
위 기록을 봤을 때 우리겨레에게 있어서 ≪소리와 가락, 춤, 시창≫은 서양의 음악(音樂)과 춤(舞, dance)와는 그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겨레에게 있어서 ≪소리와 가락, 춤, 시창≫은 우주탄생(宇宙誕生)과 그 유지(維持)를 할 수 있도록 균제(均齊)와 균형(均衡)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바탕에 있기에 우리겨레가 ≪소리와 가락, 춤, 시창≫을 그리도 중요시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하늘에 제사(祭祀)를 하는 신성(神聖)한 ≪제천행사(祭天行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불었던 것이다. 필자의 고향에서는 풍물(풍장-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벅구 등을 치면서 춤추는 행위. 농악이라 하나 절대로 농악이라고 하면 안 된다.)을 ≪굿≫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바로 ≪제천행사(祭天行祀)≫는 곧 ≪굿≫이요 ≪굿≫은 ≪제천행사(祭天行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겨레가 ≪제천행사(祭天行祀)≫ ‧ ≪굿≫을 하는데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부는 것을 당연한 것이다. 아니 당위성을 넘어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부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무인 것이다.
지금도 당골(“무당(巫堂)”이라고 하나 그리 부르면 안 된다)들이 ≪굿≫을 할 때에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고 피리를 분다. 이를 통해 ≪굿≫을 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굿≫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늘과 땅이 하나됨을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겨레의 ≪제의(祭儀)≫인 것이다.
“마한(馬韓)은 곳곳에 소도(蘇塗)를 세우니, 소도(수두)는 하느님을 섬기며 노래하고 춤추는 집을 표시하는 이름이다”
≪소도(蘇塗)≫ 혹은 ≪수두≫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장들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여기서 다시 언급을 하는 것은 김교헌 선생의 ≪소도(蘇塗)≫ ‧ ≪수두≫에 대한 기록이 단재 신채호 선생과 동일함을 논증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두≫에서 기록을 했듯이 ≪수두≫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하느님을 섬기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고증을 하였다. 역시 김교헌 선생의 ≪수두≫에 대한 기록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거기에 큰 나무를 세워 종과 북을 달고 매년 10월에 고을(邑國)에서 각기 한 사람씩 뽑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 이름은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이 역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증한 ≪수두≫에서 행한 내용과 동일하다. 특히 “10월에 고을(邑國)에서 각기 한 사람씩 뽑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은 한 사람이 기록을 한 것처럼 똑같다.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수두≫에서 10월에 제사를 지낼 때 각 ≪수두≫가 있는 「고을」에서 신망이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뽑아서 “단(壇)”위에 앉혀놓고 그를 ≪하느님≫이라고 떠받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단재 선생의 ≪하느님≫은 김교헌 선생이 기록한 천군(天君)과 똑같은 말이다. ≪천군(天君)≫은 하늘의 임금 곧 ≪한님, 하느님≫이다.
③ 신교의 아홉 가지 맹세
❝ 부여(夫餘)의 옛 풍속에 신교를 믿는 무리들이 봄과 가을에 모여 나이 차례대로 하는 예식이 있었는데, 넓은 강당에 나이 차례대로 들어가 앉고 오르내릴 때에는 읍(揖)하여 자기를 낮추며 맹세하는 글을 읽고 두 번 절했다.
그 글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내치며, 우애가 없는 자는 내치며, 믿지 않는 자는 내치며, 충성하지 않는 자는 내치며, 겸손하지 않는 자는 내치며, 덕을 끼치는 일에 힘쓰며, 과실(過失)을 막으며, 환란을 근심하며, 예의와 풍속을 바로 세워 이를 더욱 튼튼히 뿌리내리게 한다” 하였다.” ❞
우리 조상들 참 대단하다고 밖에 더 할 말이 없다. 그 시절 위와 같은 맹세 즉 규약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참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맹세이다.
“은 강당에 나이 차례대로 들어가 앉고 오르내릴 때에는 읍(揖)하여 자기를 낮추며 맹세하는 글을 읽고 두 번 절했다”
봄 가을 즉 음력 3월과 10월에 치루는 행사이다. 강당에 드나들어가 앉을 때에도 나이 차례대로 하였다는 것은 윗사람에 대한 철저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는 행위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까지만 하여도 윗사람에 대해서 눈을 부릅뜨고 대든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물론 갑론을박(甲論乙駁)할 때도 있었지만 이때에도 예의를 갖추어 논증을 통해서 윗사람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렇듯 우리 겨레는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지켰다. 물론 윗사람을 아랫사람을 한 없는 사랑으로 대했다. 이게 바로 우리겨레의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규율인 것이다.
“오르내릴 때에는 읍(揖)하여 자기를 낮추며 맹세하는 글을 읽고 두 번 절했다”는 것은 우리겨레가 한 없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주는 겸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서양의 성경에도 “자기를 낮추려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 자기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화하족의 덕목에 “겸양지덕”이라는 덕목이 나온다. 성경구절과 화하족의 겸양지덕을 우리 겨레의 아홉 가지 맹세와 비교해보아라. 우리겨레의 인간관이 얼마나 대단한가. 단군조선 시기에 벌써 위와 같은 맹세를 지켜나가는 예절을 가졌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효도하지 않는 자는 내치며, 우애가 없는 자는 내치며, 믿지 않는 자는 내치며, 충성하지 않는 자는 내치며, 겸손하지 않는 자는 내치며, 덕을 끼치는 일에 힘쓰며, 과실(過失)을 막으며, 환란을 근심하며, 예의와 풍속을 바로 세워 이를 더욱 튼튼히 뿌리내리게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모에 효도하여라. (孝)
둘째. 형제간의 우애하라. (友愛)
셋째. 사람을 믿어라. (信)
넷째. 나라에 충성하라. (忠)
다섯째.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을 낮춰라. (謙遜)
여섯째. 이웃과 사회에 덕을 베풀어라. (德業)
일곱째. 의도하지 않은 과실을 줄여라. (愼重)
여덟째. 환란에 항상 대비하라. (有備無患)
아홉째. 사람간의 관계, 사회 속에서 예와 풍속을 바로 세우는데 힘써라. (美風良俗)
위 아홉까지 맹세는 화하족의 유교(儒敎)의 덕목(德目)들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수수 천년 지켜온 아름답고 숭고한 도덕률이라거나 사회, 문화, 사상 등을 모두 화하족의 것들이라고 알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가슴을 칠 일인가. 그 모든 것이 우리 조상들 고유의 덕목이요 신성하기까지 한 삶속에 실천하는 계율이었음에도 어찌하여 우리 것이 화하족의 것이 되었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일제가 악랄하게 왜곡 조작한 식민사학에 그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루 빨리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우리겨레의 역사와 문화 풍습 말,글 등을 가르쳐야 한다. 그 길만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뛰어난 우리겨레의 얼과 넋을 되살리는 길이다.
④ 신교의 다섯 가지 계율
❝ 신교의 계율이 엄하여 스승의 경계하는 명을 어기고 내침을 당한 자를 손도(損徒)라 하여 동네 어귀의 문을 함께 쓸 수 없게 하였다. 그 계율이 남녀의 직업과 학식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르기는 하나 그중 함께 통용되는 계율은 이렇다.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며 . (忠) -----------(事君以忠)
둘째.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며. (孝) -----------(事親以孝)
셋째. 벗은 신의로 사귀며. (信) -----------(交友以信)
넷째. 싸움에 이르러서는 물러섬이 없으며. (勇)----(臨戰無退)
다섯째. 살상을 하는 데는 가려서 해야 한다. (愼)---(殺生有擇)
이 계율이 마땅이 세상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로 되어 지므로 후에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이 귀산(貴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신하라서 불계(佛戒)가 합당치 않으니 세속의 다섯 가지 계율(五戒)을 꼭 행하라 하였다. ❞
신교(神敎)의 다섯 가지 계율(戒律)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기는 신라(新羅) 화랑도(花郞徒)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하지만 진실(眞實)은 어떤가. 우리가 그 동안 우리 조상(祖上)들의 업적(業績)에 대해서 얼마나 잘 못된 것을 배워왔고 또 가르쳐왔는가. 그저 가슴만 답답해져올 뿐이다. 김교헌 선생이나 단재 신채호 선생 그리고 강단사학에서 소위 ≪위서(僞書)≫라고 폄하하는 수많은 자료들에는 “세속오계(世俗五戒)”는 단군조선(檀君朝鮮)시기의 사회적(社會的) 계율(戒律)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전히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시기부터 존재해오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신라(新羅) 화랑도(花郞徒)의 “세속오계(世俗五戒)”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서 빨리 수정해야 한다. 또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불교 중인 원광법사가 창조한 것도 아니다.
또 신교의 아홉 가지 맹세나 세속오계를 보면 그동안 유교(儒敎)의 덕목(德目)을 우리겨레가 받아들여서 지켜왔다고 하는 것들이 모두 우리겨레의 고유한 계율(戒律)이요 전통(傳統)이었다. 그건 곧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화하족이 창조(創造)한 유학(儒學)의 덕목(德目)에 신교(神敎)의 아홉 가지 맹세의 내용이나 세속오계(世俗五戒)의 덕목(德目)이 나온다면 그건 화하족이 독자적(獨自的)으로 창조(創造)한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조상(祖上)들의 덕목(德目)을 받아들였다는 걸 증명(證明)해주는 것이다.
우리겨레가 왜 그리도 나라에 충성(忠誠)하고 부모에 효도(孝道)를 하며, 스승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존경(尊敬)과 따름을 요구했는지 이제 이해를 할 것이다. 그건 곧 하느님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사상(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건 아들이나 제자들에게만 부여된 의무(義務)가 아닌 상호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즉 임금과 스승, 아버지도 자식들이나 제자 그리고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서 하느님처럼 한없는 사랑과 넓은 도량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무도 지워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스스로 정해놓은 규약(規約)이나 계율(戒律)을 어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嚴格)하였다. 만약 그 계율(戒律)이나 규약(規約)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집단(集團) 속에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억지로 그 죄를 벌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는 스스로 그 사회에서 존재(存在)를 할 수 없을 만큼 엄(嚴)한 도덕률(道德律)이 흐르고 있었다. “신교의 계율이 엄하여 스승의 경계하는 명을 어기고 내침을 당한 자를 손도(損徒)라 하여 동네 어귀의 문을 함께 쓸 수 없게 하였다”는 이를 잘 증명(證明)해주고 있다. 이게 바로 배달겨레의 도덕률(道德律)이다.
⑤ 신교의 여덟 가지 금함
❝역대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에는 성결하게 재계할 뜻으로 맹세하는 예식을 행하고 복을 빌었는데 그것을 팔관회(八關會)라 했다. 팔관은 곧 여덟 가지 죄를 금하자는 것이다. 곧 살생과 도적질 하는 것과 음란과 거짓말과 술 마시는 것과 높고 큰 상에 앉는 것과 향화(香華)를 가까이 하는 것과 보고 듣는 것을 함부로 즐기는 일이다.
이 모임의 제도에는 윤등(輪燈)을 한 군데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네 줄로 세우고 채붕(彩棚- 옛 관람석) 두 군데를 만든다. 그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왕과 왕비가 나와 앉고 모든 신하들은 예복을 입고 홀(笏)을 갖추어 예식을 행한다. 사고 파는 일을 그치고 나라와 고을이 모여 음식을 갖추어 매우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진다. ❞
이전 장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에 대해서 보았다. 강단사학에서 보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과 김교헌 선생이 고증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을 동시에 보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한다는 의미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을 정리해보도록 한다.
첫째 – 살생을 금한다.
둘째 – 도적질을 금한다.
셋째 – 음란한 짓을 금한다.
넷째 – 거짓말을 금한다.
다섯째 – 술 마시는 것을 금한다.
여섯째 – 높고 큰 상에 앉는 것을 금한다.
일곱째 – 향화(향락)를 가까이 하는 것을 금한다.
여덟째 – 향화(향락)를 보고 듣는 것을 함부로 즐기지 말라.
이렇게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 정확하게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강단사학에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팔조금법(八條禁法)의 8조(條) 중에서 3개 조항만 전해진다고 이민족의 기록인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를 인용하여 후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제 조상들이 엄연히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 있음에도 제 조상들의 기록은 모른 체 하고 아니 위서(僞書)라고 배척(排斥)하면서 이민족이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엉터리 자료만을 신봉(信奉)하면서 이를 후대(後代)들에게 강압적(强壓的)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 어찌 한탄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록된 3개 조항(條項)은 그 계율(戒律)을 어겼을 시 주어지는 형벌(刑罰)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위 금팔조 가운데에 3개 조항(條項)을 제외(除外)한 나머지는 조항(條項)들은 이를 어겼을 시 형벌(刑罰)을 가하지 않고 집단(集團) 내에서 자체적(自體的)으로 해결(解決)을 했기에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록(記錄)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 정밀(精密)하게 연구(硏究)를 하지 않고 그저 일제(日帝)가 왜곡(歪曲) ‧ 조작(造作)한 식민사학에 의해 전수(傳受)된 자료(資料)들만 앵무새처럼 되 뇌이기에 벌어지는 현상(現狀)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겨레에게 미치는 악영향(惡影響)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하루라도 빨리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길만이 사라져버린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되찾아 다가오는 미래(未來)에는 온 누리에서 가장 우수(優秀)한 겨레로 존엄(尊嚴)을 떨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단기 4347년(2014년) 8월 15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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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자주민보 독자들에게 대단히 죄송하다는 인사 먼저 드립니다. 이미 공지로 올려드렸다 시피 우리역사 이야기 17회분을 집필하고 자주민보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컴퓨터의 오류로 모든 자료가 사라져버리는 불상사가 발생을 하여 부득이 제 날짜에 올려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열과 성을 다하여 재집필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오늘 다시 올려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주민보 독자 여러분들께 금 번 사고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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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오제본기를 연재하다 보니 독자 여러분들에게 필히 전해주어야 할 내용들이 많기에 이번 연재에서도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상세를 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연재를 함에도 전해드려야 할 량이 많아 다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몇 회 정도 더 연재를 해야 마칠 듯합니다. 삼신오제본기를 이해를 해야 단군조선과 그 이후의 대외관계사를 이해를 할 수가 있기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삼신오제본기를 마친 후 단재 신채호 선생의 단군조선의 대회관계사를 연재를 할 계획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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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몀 3월 5일)
한단고기(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년 3월 25일)
삼국유사(일연 저. 이민수 주역. 을유문화사. 1975년 2월 20일)
삼국유사(일연 저. 박성봉 / 고경식 주역. 서문문화사. 1985년 10월 15일)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불함문화론(최남선 저. 정재승 / 이주현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12월 12일)
삼국사기(김부식 지음, 신호열 옮김. 동서문화사, 2판1쇄. 2007년 7월 20일)
삼국사기(원문)(김부식 지음. 강무학. 청화 1989년 2월 15일)
신단민사( 김교헌 지음. 고동영 주역. 한뿌리. 2006년 3월 15일)
교양한국사(성균관대학교 국사교재편찬위원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4년 2월 28일)
한국사신론 신수판(이기백. 일조각. 1967년 3월 20일 초판. 1997년1월10일5판본)
한국사특강(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한영우, 노태돈외 16명.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년 1월 19일)
ㅎ+한글 古語辭典 실담語 註釋(강상원 박사. 한국세종한림원. 2002년 6월 14일)
종로 교재 시리즈. (학력고사대비) 종로 古文(백조현. 대학입시사. 1982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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