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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배고픔과 동물과 인간
"계란 사씨요오, 계란."
대로 얽어 짠 상자 모양의 커다란 망태기를 짊어진 사내가 큰 목청을 뽑았다.
그러나 담이 허리 높이밖에 안 되는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집을 보듬듯이 반원을 이루고 있는 대숲에서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집 안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사내는 큼큼 목을 다듬었다.
"여보시오, 아무도 없소? 계란 사씨요오, 계란."
사내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한결 쿠렁쿠렁하게 울렸다.
"계란 있소. 딴 디 가봇씨요."
집 안에서 여린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가 대문도 사랍문도 달리지 않은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당이 좁아 보폭이 큰 사내의 걸음걸이로는 금방 댓돌 앞에 이르렀다.
"계란을 안 사도 좋으니까 방문이나 열고 거절하시지요."
사내가 방에다 대고 한 말이었다. 그 목소리가 계란을 사라고 외칠 때와는 딴판으로 점잖고 무게가 있었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워메 ……" 하는 여자의 놀라움이 담긴 음성이 짧고 나직하게 뒤를 이었다.
"나요."
엷은 웃음을 얼굴에 담고 있는 남자는 정하섭이었다. 소화는 벌떡 일어서긴 했지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정하섭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하섭은 영락없는 계란장수였다.
광목으로 지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검정물 들인 조끼를 받쳐 입은 입성이며, 검정 고무신에 다 헐어빠진 일본군 모자며, 수염이 더부록한데다가 며칠을 씻지 않았는지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이며 흠잡을 데 없는 계란장수였다.
소화는 그가 불현듯 나타난 데 놀라고, 그가 계란장수로 변해 있는데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화만 놀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소복을 보고 정하섭도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얼렁 드시씨요."
소화는 서둘러 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놀라움을 일순간에 몰아내는 어떤 깨달음이 스치고 갔던 것이다.
"천천히 해도 괜찮소. 나는 계란장수니까."
정하섭은 빙긋 웃기가지 하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대망태기를 마루에 내려놓으려 했다. 소화는 그것을 거들려고 대망태기를 받쳐 잡다가 주춤 놀랐다. 대망태기는 의외로 무거웠던 것이다.
"계란이 있다 했지만 억지로 팔아야겠소."
정하섭은 정말 계란을 팔아먹어야겠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짚을 엮어 만든 덮개를 걷었다. 대망태기에는 짚꾸러미에 열 개씩 넣은 계란이 반 이상 차 있었다.
"요 계란으로 말헐 것 같으면, 암놈 혼자서 깐 빙신계란이 아니고 암놈 숫놈이 항꾼에 일혀서 깐 진짜 계란이요. 그라고 개량종이 아니라 순 토종이요. 요 색깔이럴 봇씨요. 노르족족허고 볼그족족혼 것이 바로 토종계란이란 표식이요. 많이도 말고 두 줄만 팔아줒씨요."
행색뿐만이 아니라 사투리에 가락을 넣어 말하는 것까지 갈 데 없는 계란장수였다. 정말 계란장사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에 익은 행동거지였다. 지난번과는 너무나 다른 정하섭의 면모였다. 소화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몰라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다. 달라진 그 모습이 한결 실해보이고 남자다워 보이고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지난번 그 방에 머물러야겠소."
정하섭이 계란꾸러미를 소화 앞으로 밀어놓으며 낮게 말했다.
"예에 ……"
소화는 들릴락말락 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가슴이 편안해지는 안도감과 빛살처럼 퍼지는 기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솟는 그런 기분이 부끄러워 그녀는 얼굴을 더 숙였다.
"지금 그리 가면 좋겠소."
"알것구만이라."
소화는 치마 귀를 잡아 올리며 마루를 내려섰다.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고 나서 제각 안에 정하섭을 맞을 준비를 그 정도나마 해놓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싶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떠나버린 허망과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머잖아 다시 오게 될 것이오.' 정하섭이 떠나면서 남긴 말이었다.
'머잖아' 오겠다는 말도 그지없이 막연한 것이었지만, 만약 온다고 해도 아무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날 사람이었다. 그때를 위해 최소한의 준비를 해두고 싶었다. 홑이불을 뜯어 빨았고, 간단한 취사도구를 장만했다. 특히 신경을 쓴 것이 땔감이었다. 싸리나무를 다섯 짐 사들였는데, 한 짐마다 다른 사람을 택했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옛날부터 산도적들은 싸리나무로 밥을 해먹었고, 관가에서는 싸리나무가 잘린 곳을 찾아다니며 산도적의 뒤를 쫓았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준비를 해가며 그녀는 어머니를 잃은 허망과 슬픔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아니 ……"
방으로 들어서던 정하섭은 한쪽 구석에 이불과 요가 단정하게 개켜진 위에 베개 하나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머뭇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기에 머물러 있는 소화의 기다림을 보았다. 문득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갔다. 그는 코를 벌름했다. 그러나 그 향기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
"저녁밥은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 가져오는 것이 좋겠소."
정하섭은 벽에 등을 부리고 앉았다. 먼 길을 걸어온 피곤이 바위의 무게로 몸을 눌러왔다.
"밥은 여그서도 헐 수 있구만요."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선 소화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정하섭은 말을 물어놓고 곧 이어, "아, 알았소."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런데 ……"
정하섭의 말에 문고리를 잡았던 소화는 다시 소리 없이 돌아섰다.
"지금 밥을 하지 마시오. 여긴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내가 안 나라고 싸리나무를 구해놨는디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소?"
정하섭은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연기를 안 나게 하기 위해서 싸리나무나 맹감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라는 것은 빨치산 교육에 나오는 것이었다.
"전에 엄니헌테 들었구만요."
정하섭은 소화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복을 입어 키가 더 커 보이는 그녀가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한 떨기 흰 꽃으로 보이고 있었다.
"방이 차구만요."
소화는 쏟아져오는 남자의 눈길을 더 견딜 수가 없어서 돌아섰다.
정하섭은 눈길을 방바닥으로 떨구며 담배를 꺼냈다.
이상스런 감정의 출렁임이었다. 그녀가 한 떨기 흰 꽃으로 보이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가슴에 거센 물결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했고, 전신이 뜨거운 열로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확실하지 않은 느낌들이 따로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동시에 일어났고, 그건 어떤 강한 폭발이나 충격 같은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전에 경험한 일이 없는 감정이었고 그리고 성적 충동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정하섭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담배는 피곤을 더 농도 짙게 만들었다. 피곤이 액체처럼 느껴지고, 몸이 거기에 차츰차츰 빠져드는 것 같았다. 또 담배를 빨았다. 피곤은 더 끈끈해지고, 몸은 점점 더 깊이 잠겨들었다.
소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 소화가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 … 앞으로 외롭겠다 … 무당 노릇은 할래나 … 할래나 … 할래 … 하 …
정하섭의 손가락에 끼워졌던 담배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구르다가 멈춘 담배에서는 파아란 연기가 긴 꼬리를 늘이며 피어올랐다.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푹 떨군 정하섭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소화는 쌀을 안치고 불을 지핀 다음 안심을 할 수가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와 굴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싶었다.
소화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을 때 정하섭은 옆으로 웅크리고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밥상을 놓은 소화는 정하섭 옆으로 다가갔다. 입에서 흘러내린 침이 방바닥에 괴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소화는 가슴이 찡 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밥상을 돌아보았다. 두 가지 김치와 계란찜, 김, 콩나물 무침, 뜨물을 받아 멸치를 넣고 끓인 무국,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반찬의 전부였다.
저런 밥상을 받게 하려고 이리도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워야 하나 하는 망설임으로 소화는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러나 밥때가 된데다가 음식은 식으면 제맛을 잃었다. 잠은 11월 긴 밤이 새도록 자면 될 것이었다.
소화는 정하섭을 깨우려다가 주춤했다. 말을 하려는데 호칭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사람, 그러면서 마음의 문, 몸의 문을 열어준 사람, 저 사람은 나와 무엇이어야 하는가.
소화는 당혹감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신령님은 나한테서 어머니를 데려가고 그 대신 저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
욕심이 하는 말이었다.
그럼 저 사람은 나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 소화는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관계는 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서로는 구름이고 바람이고 철새였다. 시작을 달리하여 흐르다가 합쳐진 물줄기였다. 그래서 인연은 있어도 현생의 집은 장만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소화는 눈물을 훔쳤다.
"진지 드시씨요, 진지 드시씨요."
소화는 아무 호칭도 붙이지 않았다. '예 말이요' '봇씨요' 같은 말은 앞에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나 쓰는 것이었다. 그분은 절대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지 드시씨요, 진지 드시랑께요."
소화는 목소리를 높였다. 정하섭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 무거운 눈꺼풀이 다시 내리감길 것만 같았다.
"밥 다 됐는디, 진지 드시씨요."
내리감길 눈꺼풀에 막대기라도 받치듯 소화는 또렷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으응, 응, 벌써 밥이 ……"
정하섭은 그때서야 정신이 드는지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갑작시러서 찬이 웂는디 ……"
소화는 밥상을 정하섭의 앞으로 옮겨놓았다.
"아니요, 이만하면 계란장수 밥상으로는 성찬이오."
정하섭은 밥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 서두르는 몸짓이 꽤나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잠은 다 깼는지 …… 소화는 염려가 되면서도 천천히 드시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참, 소화 당신 밥은 왜 없소?"
국을 막 입에 떠 넣으려던 정하섭이 고개를 들었다.
"지는 이따가 ……"
소화는 황급히 눈길을 떨구었다. 처음으로 맞부딪힌 눈길에 가슴이 찡 저렸고, '소화 당신'이라는 호칭이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럴 것 없소. 먹을 때 함께 먹어치웁시다."
정하섭은 소화가 이제 혼자라는 것을 생각하며 말했다. 소화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감히 겸상을 하다니 …… 상상만으로도 죄가 될 일이었고, 꿈에서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지체가 같은 부부 사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무당의 몸으로.
그런데 그분은 분명 겸상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닌가. 서울에서 공부를 한 신식주의를 해서 그런가. 소화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뭘 하고 있소. 어서 밥을 가져오시오."
소화는 그만 일어서고 말았다. 그대로 밖에 나갈 기세였다.
"됐소, 됐소. 불편하다면 이따가 혼자 들도록 하고, 거기에 앉으시오."
정하섭은 손까지 흔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소화는 정하섭의 정면으로부터 반쯤 옆으로 돌아앉았다.
"상을 당한 모양인데,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 …… "
소화는 정하섭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려 숙임으로써 예에 대한 답례를 했다.
언제 숟가락을 놓았는지 정하섭은 다시 들 것 같지 않게 무슨 생각엔지 골똘히 잠겨 있었다.
"국 다 식는디 어서 ……"
"아, 알았소."
정하섭은 자세를 바꾸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한동안 밥먹는 데만 열중했다. 소화는 그의 무 씹는 소리까지 새겨들으며 그지없이 마음이 아늑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계란장수가 됐는지 왜 묻지 않소?"
정하섭이 불쑥 말했다.
"그런 것은 여자가 물을 말이 아니라서 ……"
사실이 그랬다. 묻고 싶은 겉마음이었고, 속마음으로는 무슨 연유가 있겠지 하고 헤아렸던 것이다. 정하섭의 눈에는 소화가 또 한 떨기 흰 꽃으로 보이려 하고 있었다.
"계란장수가 됐으니 대낮에도 소화를 찾아올 수 있게 되잖았소."
소화에게는 이 정도의 말로도 설명이 충분할 것 같았다.
"읍내에 토벌대가 새로 왔구만요."
소화는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그가 변장을 너무 믿을까봐 염려가 되어서였다.
"알고 있소."
정하섭은 소화의 말뜻일 헤아리며 고개를 보이듯 말듯 끄덕이고 있었다.
깊고, 영리하고, 기특하고, 따스한 여자 …… 정하섭은 담배를 빼들었다.
소화가 숭늉을 떠가지고 왔다.
"미안하지만 뜨신 물을 좀 데워줬으면 좋겠소. 너무 오래 몸을 씻지 못해서 ……"
정하섭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그 목간통이 있는디요."
"목욕탕이? …… "
이곳이 바로 현부자네 첩들의 거처였다는 사실을 정하섭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청년단 아래층에 있는 공동목욕탕은 거의 일본인들 전용이다시피 했다. 읍민들의 사용을 통제해서가 아니라 돈을 내고 목욕을 할 사람들이 많지 않아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일본인 주인이 쫓겨가게 되자 목욕탕은 일군으로 있던 나씨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목욕탕은 운영이 되지 않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사람들 사는 형편이 그런 지경인데 현 부자는 첩들을 위해 개인 목욕탕까지 만든 것이었다. 부르주아 계급다운 짓이었다.
정하섭은 김범우 선생과 염상진 위원장을 함께 생각했다. 아니, 함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한 사람을 생각하면 다른 한 사람은 연상적으로 떠오른다고 해야 옳았다.
김 선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염 위원장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염 위원장은 사전 지령대로 조계산 속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만, 김 선생은 학교가 아직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염 위원장으로서는 당연히 '위대한 혁명사업'이겠지만, 김 선생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민족분열을 가속화시키는 미친 짓이라고 가혹하게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나 민족 우선주의자였다. 선민족, 후주의였다. 그래서 그분은 이남의 체제도 이북의 체제도 민족을 분열시키는 거대한 무기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분은 남북협상론을 내세운 백범김구의 추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백범이 그러하듯 김 선생도 외로운 분노만을 끓이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염 위원장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완전한 실패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일시적인 후퇴라고 생각할까. 자신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업은 실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았다. 이승만 정권은 날이 갈수록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전개하는 동시에 군내부의 공산세력과 지하공산세력의 색출작업을 어느 때 없이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었다. 이번 사업은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공산세력을 일소하게 하는 필연적 계기만 마련해준 것 같았다. 대충 눈치로 짐작하는 것이지만 당중앙으로서도 이승만의 강경정책에 대처할 만한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염 위원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목간물 다 디워졌는디요."
문밖에서 조심스런 소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섭은 생각을 떨치고 일어섰다.
그런 복잡한 생각보다는 우선 뜨거운 물속에 목까지 푹 잠기고 싶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던 정하섭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서 있는 것, 그만 질겁을 했던 것이다. 그건 소화였다.
"방에 있지 않고 왜 이러고 서 있소?"
말을 하면서도 정하섭의 가슴은 벌떡거리고 있었다.
희미한 둥잔불이 밝혀진 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그때서야 정하섭은 왜 그녀가 밖에 서 있는지를 깨달았다. 방으로 들어선 그는 소화가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댓돌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들어오시오."
그녀는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게 서 있었다.
"할 얘기가 있으니 들어오시오."
그때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엄니 49제가 안직 지나지 않아서 ……"
그녀가 힘들여 한 말이었다. 정하섭은 금방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정하섭은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소복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그녀가 흰 꽃이 아니라 붉은 꽃이 되게 해서 그 꽃 깊이깊이 잠겨 꿀을 빠는 나비이고 싶었음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녀의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건 무가치한 미신이거나 무의미한 관습일 뿐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을 하면 그녀는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강제성을 띤 그 행동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짐승으로서의 배설 행위밖에 더 되는가. 49제 안에 남자와 동침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녀의 신서이고 믿음인 것이다. 그는 그녀의 믿음을 지켜주고 싶었고,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은 사람이고 싶었다.
"알겠소. 할 얘기는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합시다."
정하섭은 툇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고맙구만이라. 편히 주무시씨요."
소화는 깊은 절을 하고는 쫓기듯이 어둠 속을 걸어서 멀어져갔다. 정하섭은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고맙구만이라.' 그녀의 말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무엇이 고맙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결정이 잘된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염상진이 마누란가?"
토벌대장 임만수가 고약스런 얼굴을 해가지고 물었다.
"그러요."
몸피가 큰 여자는 그에 어울리게 대답하는 태도도 불퉁스러웠다. 여자의 왼쪽볼에는 푸르뎅뎅한 멍이 들어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지집이 무신 이름이 있겄소. 그냥 죽산댁이라 허요."
"어허, 그따위 촌 이름 말고 시집오기 전에 부르던 이름 있을 것 아닌가."
임만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못생긴 얼굴이 더욱 못나 보였다.
"넘 처녀 적 이름 머 할라고 물으요?"
"이봐! 개소리치지 말고 고분고분 대답 못하겠어!"
임만수가 버럭 소리치며 책상을 내리쳤다. 말마다 투덜거리는 것 같은 이 여자의 사투리는 한층 듣기가 싫었다.
"성은 임이요. 이름은 끝순이었소."
죽산댁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중얼 했다.
"이봐, 이봐, 지금 무슨 소릴 씨부리고 있는 거야!"
임만수는 곧 내려칠 것처럼 주먹을 치켜 올렸다.
"워메, 왜 그래쌓소. 조사헐 일이나 조사헐 것이제 넘이 속으로 허는 말꺼정 간섭이요, 간섭이."
죽산댁은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전혀 기가 죽어 있지 않았다.
"뭐야! 간섭?"
마침내 임만수의 주먹이 죽산댁의 볼에서 퍽 소리를 냈다.
"워메, 사람 잡네. 사람얼 때릴 대목에서 때레야제 지금 워째 때리요. 넘 서럽고 눈물나라고 처녀 적 이름은 왜 묻느냐고 속말 혔는디, 고것이 머시가 잘못이라고 사람을 복날 개 패대끼 패요."
죽산댁은 한 대 얻어맞고 나더니 오히려 기가 더 펄펄 살아 올랐다.
"죽이기 전에 아가리 닥쳐!"
임만수는 고함을 치며 책상위에 놓아둔 몽둥이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좋소, 죽이씨요. 빨갱이 예펜네로 이리 끌려댕김서 매타작당허고, 저리 끌려댕김서 매타작당허고, 인자 나도 그리 살기는 징상시럽고 징상시런 년잉께, 죽이씨요, 쥑여! 고 몽댕이로 이년 대갈통얼 팍 깨 쥑여줏씨요."
죽산댁은 자기 저고리를 와득와득 잡아 뜯으며 임만수 앞으로 한사코 머리를 디밀었다.
임만수는, 이것이 예삿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빨갱이물을 먹었다면 일부러 음흉을 떠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성깔머리가 억센 여자일 것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몰려면 반죽음이 되도록 세게 몰아쳐야 하고, 그러지 않으려면 인간적인 체하며 부드럽게 다루어야 했다. 어설프게 하다가는 개망신당하기 일쑤였다.
"이봐, 내 낯짝을 똑똑히 봐. 네까짓 것들 대갈통 박살내기는 식은 죽 먹듯 하는 사람이야. 허나, 여자상대로 곤조통 부리고 싶지 않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고분고분 들어."
임만수는 있는 대로 얼굴을 험악하게 해가지고 이빨로 질겅질겅 씹다가 뱉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되얐소, 그쪽서 존 말로 험사 나도 그리 허겄소."
죽산댁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젯밤에 염상진이 왔었지?"
"그 웬수 얼굴 못 본 지가 오래요."
"거짓말하지 말어. 본 사람이 있어."
"허, 참말로. 존 말로 헌다등만 두 마디째에 험헌 소리 혀뿌네. 그리 넘게 짚는다고 웂는 일 있다고 헐 사람 아닝께 그리 허덜 마씨요."
죽산댁은 헛웃음을 쳤다. 임만수는 다시 이것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을 했다.
"어젯밤 총소리가 날 때 어디서 뭘 했지?"
"지름값도 아깝고 혀서 새끼덜 허고 일찍허니 자빠져 잘라고 허는디 총소리가 납디다. 그려서 꼼지락 않고 새끼덜 품고 눠 있었제 뭘혔겄소."
"그게 누구라고 생각했었나?"
"밤중에 서로 총질 험시로 지랄발광허는 것이 순사들허고 빨갱이들 말고 머시가 또 더 있겄소."
"그게 남편일 거라고 생각 안했나?"
"물으나마나헌 소리 아니요. 그리 총질이 심혔는디 대장이 웂을 리가 있었겄소?"
"남편이 숨어들었으면 어쩔려고 했지?"
"워쩌기는 워째라. 내빌나도야제라."
"내빌나도야제라?"
임만수는 떠듬떠듬 되풀이했다.
"으짤 것이요, 명색이 냄편인디."
임만수는 그때서야 그 말이 '내버려 둬야지요'라는 것을 알았다. 임만수가 되풀이한 것은 말을 못 알아들어서였고, 죽산댁은 임만수의 되풀이를 되물음으로 알고 대답을 한 것이었다.
"이봐! 그러면 어떡해."
임만수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음마, 음마, 존 말로 헌다등마 또 번해뿌네."
죽산댁은 째지게 눈을 흘겨댔다. 임만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배짱이 좋은 것인지 모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빨갱이를 숨겨주면 죄가 된다는 걸 몰라서 숨겨줘?"
"아까 대답 안혔소. 냄편잉께 으짤 수가 웂다고."
"글쎄, 남편이라도 숨겨주면 안 돼. 경찰에 알려야지."
"나넌 그리 못혀라. 빨갱이질허는 것이사 징글징글허제만, 하나뿐인 아그덜 애비럴 워치케 나 손으로 죽게 맹글 것이요."
"죽긴 왜 죽어. 마음만 돌리면 얼마든지 살려줘."
"그 남정네가 사람덜얼 을매나 쥑였는디, 경찰이 무신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랍디여? 고런 사람꺼정 살려주게. 허고, 그 남정네 맘 돌릴 남정네가 아니요."
"이것 참, 그럼, 그런 독종을 숨겨주면 당신 죄가 얼마나 커지는지 알기나 해?"
"그렁께 시시때때로 잽혀와 갖고 매타작당허는 것 아니요."
임만수는 그만 맥이 빠지고 있었다. 도대체 말이 먹혀들지 않는 여자였다.
"당신은 매타작 정도로는 안 되겠어. 빨갱이를 그리 감싸고도는 정신상태가 바로 빨갱인데, 콩밥을 좀 먹어야겠어."
"좋을 대로 허시오. 콩밥 공짜로 얻어묵겄다, 거그 들앉아 있으먼 매타작 안 당허겄다, 나는 훨씬 이문이요."
이것을 생똥 좀 깔기게 독한 맛을 보여? 임만수의 성질이 곤두섰다.
그러나, 청년단장 염상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질대로 할 일이 아니었다.
"청년단장과는 어떤 사이지?"
"말허는 투가 다 아는갑는디 멀 헐라고 물으요?"
"고분고분 대답하겠다는 것 잊었나?"
"내 참, 시동상이요."
죽산댁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임만수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시동생 얘기가 나오니까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형 따라서 빨갱이질 안하고, 빨갱이 때려잡는 일 해서 그런가?"
죽산댁은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임만수를 노려보았다.
"순사라고 아무 말이나 씀벅씀벅 허먼 다 말인지 아시요? 그눔은 시동상이 아니라 내 웬수요. 지눔이 나가 빨갱이럴 을매나 싫어허고 치럴 떤지 암스롱도 지눔 낯내고 처신 편허게 허고 살라고 나럴 요 고상시키는 징헌 눔이요. 나야 냄편 하나 잘못 만낸 죄로 으짤 수 웂다쳐도, 지눔이 사람이라먼 어린 조카들헌테꺼정 그리 매정허게 헐라디여, 애비가 빨갱이제 새끼덜이 빨갱이가 아닌디. 지눔은 사시사철 쌀밥만 묵음시로 조카덜이 굶는디도 쌀 한 톨 안 보내는 눔이 바로 그 눔이요."
생전 울지 않을 것 같던 죽산댁이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까 염상진이가 공산당을 하지 말았어야지. 자식들 굶겨가며 공산당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마음만 돌리면 틀림없이 살려줘. 그건 내 목숨을 걸고 보장해.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을 돌리게 해."
"말도 마씨요. 쎄가 닳아지는 물건이었으먼 내 쎄는 진작 없어졌을 것이요. 울어도 보고, 빌어도 보고, 싸와도 보고, 벼라별 짓 다 혔어도 소양이 웂었다요. 그 남정네는 공산당에 홀딱 미쳐 뿐 사람이요. 아그덜 애비니께 경찰에는 못 알려주는 것이제만, 냄편으로 정은 다 띤지 오래요."
"당신은 당신 남편이 바라는 공산당 세상이 올 거라고 믿나?"
"지끔 말허고 있는 순사양반언 허깨비시요? 요리 두 눈 똑똑허니 뜨고 막아대는디 워찌 고런 꿈 겉은 시상이 오겄소?"
"아니, 꿈같은 세상이라니! 그럼 당신은 빨갱이 세상이 되길 바라는 빨갱이가 아닌가!"
임만수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말 꼬랑댕이 잡고 사람 왈기지 마씨요. 공산당은 너나 웂이 공평하게 사는 시상 맹근다는 말얼 두고 허는 소리요. 그런 시상이 꿈속에서나 있고, 말로나 있는 것이제 사람이 사는 시상에 워디 있을랍디여. 우리 냄편 따라 공산당 허는 농꾼들도 다 그 말만 믿고 나선 것이제라. 대대로 물리허는 가난에 한이 맺히고, 배운 것 웂이 무식헌 농꾼덜이 고런 조청맹키로 달디단 말에 워찌 귀 솔깃혀지지 않겄소. 우리 남편맹키로 식자깨나 들었다는 사람덜이 가난허고 불쌍헌 사람덜헌테 죄 많이 짓고 있는 것이제라. 그라고 워디 빨갱이 된 사람덜만 귀 솔깃혔을랍디여. 쌔고쌘 가난헌 사람덜언 나라가 금허고 순사가 겁난께 표식 안내서 그렇제 다 귀 솔깃해 있구…"
"시끄러, 시끄러!"
임만수가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워째 그러시요? 나가 못헐 소리 혔간디요? 순사양반도 시상 속인심얼 형편 그대로 알아야 쓸 것이요. 서럼 중에 배곯는 서럼이 질로 큰 것인디, 풀대죽도 못 묵고 팅팅 부황든 사람덜이 허천나게 많은디, 있는 사람덜언 헛간에 쌀가마니 채곡채곡 쟁게 놓고 떡 해묵고 유과 맹글어 묵고, 요런 시상이 워찌 ……"
"시끄러! 나가, 나가."
임만수는 소리치며 손까지 내저었다. 듣고 있으면 끝도 없이 잔소리가 계속될 것 같았고,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어서 자신이 점점 할 말이 없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죽산댁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임만수는 그녀의 뒷모습에 눈을 박고 앉아서, 고정감시원을 배치할 것을 결정내리고 있었다.
"대장님, 혹시 손 안 물리셨는게라!"
죽산댁을 심문했다는 말을 들은 염상구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안 물렸으먼 대장님 운수가 좋은 줄이나 아시요. 그 여자 별명이 진돗개요. 경찰이 한 대 갈기기만 허먼 맞물고 뎀비는 여자요. 허 순경은 손꾸락 두 개가 짤릴 뿐혔고, 장 부장은 살점이 한 입 떨어져나갈 뿐 혔응께요."
임만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염상구는 형수를 계속 '그 여자'라고 불렀다. 임만수는 귀에 거슬렸지만 탓하지는 않았다.
"사상은 어떻소?"
"머 사상이랄 것이 있간디요. 냄편이 공산당 허는 바람에 마음고상, 몸고상, 안허는 고상이 웂다본께 빨갱이라먼 치를 떨제라."
"대단한 여잡니다."
"말도 마씨요. 염상진이도 빨갱이 대장 노릇은 요러타께 잘해묵음시롱도 그 여자헌테만은 못 이기요."
"생활은 어떻게 하오?"
"원체 싸납고 억씬께 닥치는 대로 일혀서 묵고 살제라."
"그래 가지고 먹고 살아지겠소?"
"그냥저냥 살겄제라."
"그냥저냥이 아니라 조카들이 굶기도 하는 모양이오. 염 단장의 투철한 반공정신이면 빨갱이집 도와줬다고 안할 테니 조카들 굶기지는 마시오.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무, 무신 소리다요?"
"이따 봅시다."
임만수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재판소에서 경찰서로 연락을 취했을 때는 이미 김범우가 한바탕 매타작을 당한 다음이었다. 몽둥이찜질을 당한 엉덩이의 통증이 심해 주저앉지 못하고 김범우는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두 평 남짓한 방에는 열댓 명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두려운 얼굴로 앉아 있었고, 더러는 가늘게 떨리는 앓는 소리를 끊임없이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혐의는 물으나마나 모두 공산주의에 연결되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유치장은 유치장대로,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잡혀온 사람들로 들끓었다. 취조를 하는 형사나 경찰들의 고함소리가 살벌하게 뒤엉켰고 어디선가는 곧 숨 자지러지는 비명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김범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경찰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고, 경찰서가 살벌한 폭행의 장소가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싶었다. 어떤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기 전에 순천경찰서는 이번 사건으로 기존 경찰의 절반 이상을 잃어야 하는 현실적 피해를 입은 형편이었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끌려가 대일본제국의 승리나 천황폐하의 영광을 위해 총을 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총질을 했듯이, 경찰들도 팽배한 보복감정이 앞서 횡포해지고 잔인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수단이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거창한 명분을 실현시키는데 공헌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봐, 김범우!"
김범우는 소리 나는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불렀으면 대답을 혀얄것 아냐."
한창길의 독기 흐르는 얼굴이 쇠창살에 서너 조각으로 갈라져 소리쳤다.
"왜 그러시오."
김범우는 등을 기대고 선 채 말했다. 꼴도 보기 싫은 작자였다.
"그러먼 그렇제. 지눔이 뽈갱이 사상을 가졌응게 그 좋은 군정청 통역자리럴 마다혔제 무담시 그렸을 리가 있었겄어? 아조 자알 만냈구만. 요 한창길이 매질맛 잠 보드라고잉?"
그 작자는 다짜고짜 매타작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시건방진 태도 보소? 요리 싸게 나와."
한창길의 태도는 어딘지 아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풍겼다. 김범우는 느릿느릿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창살 가까이 갔다.
"김범우, 재판소 정 판사영감허고는 워떤 사이여?"
한창길이 대뜸 물은 말이었다.
정 판사 영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직감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모르는 사람이오."
"어허, 워째 뻔헌 거짓말을 허능겨?"
한창길은 어울리지 않게도 눈을 흘겼다. 아까 몽둥이질을 할 때와는 너무나 판이한 얼굴이었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는 거요."
"알겄어, 알겄어. 당신은 키도 훤칠허고 인물도 잘나고 다 존디, 사람을 눈 아래로 깔아보는대끼 허는 거만시럽고 잣지받지헌 태도가 글러묵었어. 지끔도 알먼 안다고 앗싸리허게 헐 것이제, 워째 그러냐 그거여."
"도대체 왜 불렀소?"
그의 표변하는 촉각에 비위가 상한 김범우는 쓴웃음을 물었다.
"여그는 방이 너무 좁은께 일로 나와."
한창길은 자물쇠를 땄다. 김범우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방을 나왔다. 방이 비좁은 것은 사실이었고, 그러나 불법적 특혜를 누리는 것 같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까는 미안허게 되었소. 나는 뽈갱이다 허먼 우리 아부지도 외상 웂는 사람이요. 이해허씨요."
한창길은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유난스럽게 '뽈갱이'라고 발음하는 말과 '아버지도 외상 웂다'는 말이 잔인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빨갱이가 왜 그리 싫으냐고 물으려다가 허튼소리가 될 것 같아 김범우는 그만두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한창길 앞에서는 표나지 않게 걸으려고 했지만 통증과 결림 때문에 다리가 절룩여졌다. 김범우는 얼핏 처남 신석주를 떠올렸다.
"혹시 신석주란 사람을 아시오?"
"신석주? 그런 악질 뽈갱이럴 워찌 아시오?"
복도를 돌아가려던 한창길은 우뚝 멈춰서며 되물었다.
"아는 사람이오."
"워처케 아는 사이요?"
"뭐 그냥 아는 사이요."
김범우는 굳이 처남이라고까지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 김범우의 태도가 또 못마땅한지 한창길의 입술이 씰그러졌다.
"광주 고법으로 넘어갔소."
한창길은 걸음을 떼어놓으며,
"고런 눔은 딱 총살감인디 처가 덕에 목심 구해 고법꺼정 올라간 거요. 당신허고 워처케 아는 사인지는 몰르지만 고런 눔 가차이 혔다가는 당신도 이문 볼 일 하나또 웂을 것이요."
무척 증오스런 감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 내 처남이오."
김범우는 불쑥 말했다.
"워쩌?"
한창길은 또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김범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이 짙은 의혹을 달고 있었다.
"나도 뽈갱이일 것 같소?"
김범우는 한창길의 눈을 맞쏘아보며 '뽈갱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허 참, 열 질 물속은 알아도 한 질 사람 속을 몰르는 법잉께. 어서 갑시다."
한창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서류가 될 때꺼정 여그서 있으씨요."
김범우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묵묵히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보다 넓은 방은 아니었다. 사람이 적을 뿐이었다.
김범우는 의식적으로 시야를 좁게 차단시키며 벽 쪽으로 붙어 섰다. 어찌됐든 제각기 죄목을 가지고 갇혀 있는 사람들의 불안스럽고 두려움에 찬 눈길과 마주치는 어색스러운 순간을 겪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범우는 어깻죽지를 벽에 기대고 팔짱을 끼면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엉덩이는 화끈거리는 열과 함께 욱신거렸다. 살이 터지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은 잠도 엎드려서 자야 할 것 같았다.
전에 그랬던 경험이 있었다.
학병훈련을 받는데 추위도 혹독했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격심한 훈련에 정량의 식사는 모든 훈련병들을 허기로 몰아넣었다. 어느 날 마구간 청소당번이 되었다. 청소를 하다 보니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창고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 냄새는 배고픈 속을 동하게 만들었고, 금방 입안에 군침이 괴게 했다.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둥근 모양의 깻묵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영양식으로 쓰이는 말먹이였던 것이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깨어져 있는 덩어리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 감추고 태연하게 청소를 마쳤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보았지만 그것을 먹어치울 장소가 마땅찮았다. 막사로 가지고 갈 수는 없고 ……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변소였다. 변소로 뛰어가긴 했는데, 차마 변소 안에서 깻묵덩어리를 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배고픔 앞에서 어줍잖은 인간적 체면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말먹이를 훔치면서 인간은 포기했으면서도. 변소 뒤로 돌아가 깻묵덩어리를 눈물겹도록 맛있게 먹고 있다가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하사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자꾸 깻묵이 축이 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네놈이 범인이었다면서 가혹한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 매질 앞에서 처음 한 일이라는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벌써 다른 학병들도 깻묵을 훔쳐 먹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죄까지 다 뒤집어쓰고 매타작을 당했던 것이다. 그 상처로 열흘 이상을 엎드려서 자야만 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동물이란 무엇인가. 굶주림 앞에서는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는가. 동물과 다름은 무엇인가. 시한부적 배고픔도 이리 견디기 어려운데 영속적인 굶주림은 얼마나 큰 형벌인가. 가난한 사람들,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짜여진 사회구조에 얽매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인내심이 강한 것이 아니다. 사회구조룰 장악하고 있는 소수 부류들이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 사회구조는 기필코 바뀌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염상진을 그리워했었다.
김범우는 다리가 저려와 눈을 떴다. 자세를 바꾸면서 무심코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흠칫 놀랐다. 송 … 송 …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그 사람이었다.
언제인가 학교에 초빙되어 와 불교강연을 감명 깊게 했던 송 … 선생.
그 사람은 참선자세로 앉아 눈을 반쯤 내리감고 있었으므로 이쪽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왼쪽 어깨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미간은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그건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표정이었다. 왼쪽 어깨에 무슨 이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김범우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굴이 약간 초췌해졌을 뿐 전에 느꼈던 기품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넓은 이마에 굴곡이 유연한 검은 고수머리, 높은 콧날에 얇으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술, 양쪽 볼의 선이 급하게 이어져 내리면서 합쳐진 매끈한 턱, 지금으로서는 볼 수가 없지만 예리함과 지혜로움이 함께 느껴졌던 눈이었다. 단상에 서 있던 그는 깡마른 체구에 키가 컸었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불교를 이야기했다.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불교를, 인생을, 우주의 섭리를 충분히 말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참으로 오랜만에 경이로운 사람을 만나는 신선감을 맛볼 수 있었다.
"선생님, 참으로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언제 다시 기회를 마련해서 더 들었으면 합니다."
김범우는 굳이 가까이 가서 말했던 것이다.
"좋은 귀를 가져주셔서 고맙군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그렇게 헤어졌는데 무슨 '인연'이어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나게 되는가.
김범우는 반가우면서도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분의 기울어진 어깨와 여기저기 피얼룩이 묻어있는 옷이 그분이 무슨 연유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학교를 떠난 다음에 들은 짤막한 이력이 머리를 스쳐갔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선암사의 부주지까지 지낸 대처승으로 나이가 마흔서넛이라고 했다. 대처승이라는 사실과 긴 고수머리와 잘 어울리던 양복차림이 새삼스럽게 살아 올랐다. 김범우는 그 분이 대처승이라는 말을 듣고도 처음 느꼈던 경이로운 신선감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일본 것들이 나라를 골고로도 망칠라고 든다. 인자 스님들꺼정 일본식으로 결혼을 허라고 잡친다는디, 참말로 요 일을 워째야 쓸랑가 모르겄다."
부처님 믿음이 지극하고 스님을 대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어머니가 장탄식을 하며 되풀이했던 말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범우는 조심스럽게 그분 앞으로 다가갔다. 방안에는 자신까지 여섯 사람이었다.
그분 앞에서 김범우는 잠시 망설였다. 서서 알은 체를 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쪼그리고 앉자니 엉덩이가 당겨 아프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세가 어른 앞에서 취할 바도 못 되었다. 차라리 기는 자세를 취하는 게 아픔도 없을 것이고 그분에게 볼기짝을 맞아서 그런다는 무언의 표현도 될 것 같았다.
김범우는 천천히 무릎을 꺾어서 바닥에 대고 두 손으로도 바닥을 짚었다. 그 동작을 취하는데도 결리는 통증이 입을 벌어지게 했다.
김범우는 그분을 바라보았다. 전혀 미동도 없었다. 완전히 시간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범우는 이제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해 주저하고 있었다. 스님인 줄을 몰랐을 때는 자연스럽게 '선생님'이었는데, 스님인 것을 안 지금에 와서는 호칭이 난처해졌다. 그 난처함은 순전히 자신한테서 비롯된 것이었다. 왠지 그분은 '스님'이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 종교의 수도자라기보다 그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고 있고, 가르쳐줄 '선생'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불렀던 대로 '선생님'으로 하자고 김범우는 마음을 정해버렸다. 그래야 그분이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 …… 선생님 ……"
그분의 반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그에 따라 찡그러졌던 미간도 차츰차츰 펴졌다. 그분이 완전히 눈을 떴을 때, 김범우는 예리함과 지혜로움이 함께 느껴졌던 기억 속의 눈이 바로 앞에 있음을 보았다.
"선생님, 저 김범우라고 합니다. 저, 몇 달 전에 선생님을 순중(순천중학)에서 ……"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했다. 그분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감돌았다.
'좋은 귀를 가져 주셔서 고맙군요' 하던 말의 기묘한 느낌이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는 말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일상적인 냄새가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그분만의 독특한 말이었다.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 …… "
그분은 왼쪽 어깨를 약간 움직이다가 다시 미간이 찡그려지더니,
"업보요." 하고는 아까보다 조금 확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업보 …… 김범우는 속으로 뇌어보았지만 모를 소리였다.
"선생님, 어깨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인데요?"
"성불고행하라는 기회인 모양이오. 선생은 볼기를 상했나 보지요?"
"예, 약간 불편합니다."
"선생도 성불고행을 하시지요. 육신의 아픔이나 고통은 피하려고 하면 점점 커지는 법이지요.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한 고비만 참아 넘기면 그 사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선생도 관세음보살을 계속 염하면서 저처럼 앉아보세요. 순간의 고통은 크겠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평안이 옵니다."
김범우는 전혀 자신 없는 일이었다. 그분의 어감으로는 자신도 볼기를 맞았는데 그렇게 앉아있다는 뜻이었다. 김범우는 고통을 참아낼 자신이 없으면서도 그분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러도 흉보진 마십시오."
"관세음보살을 염하십시오. 아픔의 소리가 삭습니다."
"예, 아픔의 소리가 삭게 해보지요."
김범우는 참 희한한 말도 다 있다 싶어 일부러 되씹어보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
김범우는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뇌며 조심조심 엉덩이를 바닥에다 대었다.
"으웃, 으음 ……"
김범우는 입을 딱 벌리며 신음을 토했다.
"계속 관세음보살을 염하시라니까요."
속이 화끈거리고, 눈앞에서 별똥이 오락가락하게 아픔이 전신을 뒤흔드는데 그분은 변함없는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관세으음보오살, 관세에음보오살 ……"
김범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신음의 변형이지 염불이 아니었다.
김범우는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이었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허약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어린애 장난은 아니었던 것이다.
"과안세음보오사알, 관세으음보사알 ……"
일단 앉기는 했는데 체중이 가중되자 통증은 더 격화되었다. 김범우의 이마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배나고 있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분의 모습이 흐려 보일 정도로 통증은 격렬했다.
그런데 김범우는 자신이 내뱉는 소리가 아닌, 율조를 띤 관세음보살의 염송을 들었다. 그분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분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음을 김범우는 알았다. 김범우는 그분을 따라 염송을 해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김범우는 그야말로 고통이 가라 앉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땀 닦으시오."
그분이 수건을 내밀었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땀이 목까지 적시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건 단순한 땀이 아니라 육신의 아픔과 고통이 육신을 빠져나간 흔적이오."
김범우는 그분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가슴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는 알 수 없는 충족감의 표현이었다. 그분도 미소지었다.
"선생님, 어깨를 어떻게 다치셨는지요?"
김범우는 남은 죽을 고생시켜가며 주저앉혀놓고는 정작 자기는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은 뭐냐는 짓궂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딘가 많이 이상한 것 같아 염려가 되어 다시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하신 모양인데, 빗장뼈가 부러진 게지요."
"아니! ……"
김범우는 입을 딱 벌렸다. 너무 놀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바람에 통증이 치뻗어 오른 것이다.
뼈가 부러진 몸으로 저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다니 ……
김범우는 그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놈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했으면 빗장뼈까지 부러뜨렸을까. 아니, 저분은 무슨 잘못을 얼마나 저질렀기에 그다지 심한 구타를 당해야 했을까.
스님의 신분과 공산주의와 ……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 치료부터 하셔야지요. 제가 여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실 수는 없더라도 의사를 불러들일 수는 있을 겁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생명 있는 만상은 상처를 입으면, 그것이 치명적이지만 않으면 다 저절로 낫게 되어 있어요. 그런 힘이 생명 속에는 들어있는 것이고, 그게 자연의 오묘한 섭리요."
"그렇지만 잘못 치료되어 불구 ……"
김범우는 그만 말을 중단했다.
"상관없어요. 불구로 나아도 낫긴 나은 거니까요. 촌각을 머물다 가는 게 목숨인데 아무려면 어떻겠소."
옷 속에다 부러진 빗장뼈를 감추고 앉아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살이 다친 것만으로도 비명과 신음을 참을 수가 없는데 살을 지나쳐 뼈까지 부러진 아픔과 고통은 얼마일까.
그러나, 치료받기를 더 권해도 그분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김범우는 알았다.
"선생님,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선생님이 여기에 오신 연유를 들을 수는 없을지요."
"다 부질없는 바람소리 아니겠소?"
그분의 얼굴을 얼핏 스쳐가는 웃음은 정말 쓸쓸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유가 있는 어떤 행동을 하신 것 같은데요."
그때 그분의 눈이 이상한 빛을 쏘아내는 것을 김범우는 느꼈다.
"내 죄목은 빨갱이오."
여태까지의 말이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면 이 말은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로서는 그분의 죄목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글쎄올시다. 오해라고 한다면 내 쪽의 입장을 내세우려는 것일 게고, 반대쪽의 입장에서 보면 내 행동은 분명 빨갱이였을 것이오."
"그게 바로 오해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소.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생리지요."
"그럼, 선생님께서 정치생리에 반하는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 …… 죄송합니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선생의 진심을."
그분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온화한 것도 같았고 적막한 것도 같았다.
"줄여 말을 하자면 …… 사답(寺沓)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자는 주장을 했던 것이지요."
"……"
김범우는 그분의 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거기에 공산주의자일 수가 없는 진실한 한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방금 내가 주장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건 잘못된 말이오. 그건 일찍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요. 중생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줘야 할 비구 입장에서 지주 노릇을 하고 앉았다는 사실은 죄업 중에 죄업이지요."
"그런데, 경찰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단 말입니까?"
"그 답은 피하겠소. 선생께선 정치의식이라는 게 국가개념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김범우는 아차 싶었다. 우문 중에 우문을 한 셈이었다. 절이라는 또 다른 조직형태가 있을 것이었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치는 사실이 있었다. 처음 그분의 이력을 들었을 때 '부주지까지 지낸'이라고 했던 말이었다. 그럼, 그분은 현직승려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차마 그 사실까지 물을 수는 없었다.
"절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개혁 없이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지요."
김범우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생도 그런 생각을 지녔으니 여기 오실 밖에요."
그분은 나직한 소리로 웃는 듯하더니,
"세존께서 일찍이 인생 사고를 생, 노, 병, 사라 설파하셨는데, 내 주제넘은 소견으로는 '주릴 아' 아고(餓苦)를 하나 더 첨가시키고 싶습니다. 굶주리는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타고나시어 판단을 하시는 데 환경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인도는 열대에 속하는 땅이라서 최소의 노동을 바치면 절대적 아(餓)는 벗어날 수가 있지요. 땅도 무한히 넓고. 그 대신 기후에 따른 병마는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고는 있으나 아고는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똑같은 사람끼리 짧은 한평생 살다가면서 누구는 기름지게 먹고 누구는 굶주림에 허덕여야 합니까. 배부른 자에게 이승은 극락일지 몰라도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승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자들이 절대다수를 이룰 때 그 세상은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이건 인간사의 끝없는 숙제일 것입니다."
김범우는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다. 마룻바닥을 내려다본 채 그분은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골똘히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다음날 오전에 풀려나왔다.
"선생님, 저는 나가게 되는 모양입니다. 건강 살피시고, 꼭 또 뵙게 될 것입니다."
김범우는 '뵙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그 웃음의 밝음이 순전히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위해 보내는 그 분의 마음인 것을 김범우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