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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싱가폴 공항은 동남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항중 하나일 것이다. 보세구역은 반대쪽 끝에 선 사람들이 아득하게 보일 정도로 트여 있다. 건물의 오른쪽 벽은 유리로 덮여 있어서 활주로와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바라보인다. 진홍색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놓인 의자에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활주로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오전 10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쿠웨이트에서 아홉 시간을 비행해 오는 동안 비행기의 흔들림이 심했던 탓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김영남은 빠른 걸음으로 보세구역을 지나 수화물 찾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직 가방은 나오고 있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는 대형 유리창 너머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대합실에서 김영남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 명은 김영남 쪽을 향하여 손을 흔들고 있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같은 비행기로 도착한 서너 명의 사람들이 그쪽을 향하여 응답을 한다. 동양인도 있었지만 서양인도 많았다.
이윽고 김영남은 자신을 바라보고 선 오희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긴머리를 가슴 앞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두 팔을 기둥 위에 얹고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자 오희주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받은 듯 김영남의 몸에는 활력이 솟구쳤다.
아직도 가방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는 유리벽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말레이지아인과 노랗고 둥글둥글한 중국계 그리고 영국계들이다.
두 손바닥을 유리벽에 붙인 김영남은 바깥쪽의 오희주를 바라보았다. 5미터쯤 떨어진 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쿠웨이트에서 나머지 출장일정을 취소하고, 곧장 싱가폴로 들어온 길이다.
오희주는 어제 오후에 싱가폴에 도착해서 그를 마중나온 것이다.
소리를 쳐도 들리지가 않을 것이므로 김영남은 입만 벌리고 웃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다.
한 손을 들어올려 살짝 흔들며 웃음을 띠었는데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대합실로 나온 그의 손가방을 받아 쥐면서 그녀가 말했다.
"걱정 많이 했어요, 안 오시나 하고."
"비행기가 30분 늦게 출발했어."
"난 돈도 3백 불밖에 없단 말예요."
오희주는 서슴없이 빈 손으로 그의 팔을 끼었다. 그녀의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이제는 익숙한 그녀만의 냄새였다.
"어젠 한숨도 못 잤어요. 시차 때문인가 봐."
그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대합실을 나섰다.
갑자기 싱가폴의 호텔방에 혼자 있게 되었으니 쉽게 잠을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소리는 맑았고 얼굴은 생기에 차 있었다.
택시는 가로수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직선도로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소나기가 내렸던 모양으로 도로는 검게 젖어 있었다.
"회사에 연락은 하셨어요?"
창 밖을 바라보던 오희주가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그건 왜 물어?"
"싱가폴에서 나하고 함께 있는 것, 그건 비밀이지요?"
"그야 당연하지."
입술 끝으로 웃으며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럴 권리가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하는 건 아녜요."
직선으로 곧장 뚫린 길이어서 택시는 가속이 붙은 모양이었다. 조그맣게 종이 울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왔다. 시속 1백 킬로미터가 넘은 것이다.
오희주는 두 손으로 침대의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파란 정맥이 돋아난 주먹이 보였다. 끈끈한 땀이 배인 몸은 뜨거웠다.
그녀의 입에서는 과일즙 냄새가 났다. 반쯤 감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흐리고 물기에 젖어 있어서 시선이 없다. 김영남은 그녀의 온몸을 손끝으로 쓸고 입술로 닦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드라운 귓볼이 드러났다. 그의 혀끝이 귀에 닿자 그녀가 다시 온몸을 틀었다.
다리 하나가 들리더니 그의 하반신을 안는다. 둘 다 알몸이었고 방안은 그들의 뜨겁고 가쁜 호흡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김영남은 그녀의 몸 한부분씩을 확인하듯이 정성들여 애무해 나갔다. 그의 입술이 어깨의 선에서 다시 가슴으로 옮겨져 탄력 있게 일어선 그녀의 젖꼭지를 건드리자 오희주는 엉덩이를 번쩍 들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아랫입술을 깨무는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어 번 머리를 좌우로 젓던 그녀는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어서요."
김영남의 입술은 멈추지 않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으나 떠밀지도 그렇다고 잡아 당기지도 않는다. 더욱 아래로 내려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뜨겁고 깊은 샘에 닿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오희주의 입에서 커다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엉덩이를 번쩍 치켜 들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녀는 방안이 울리도록 신음소리를 냈다. 한국에서는 이런 신음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억눌려서 절제의 흔적이 보이는 낮고 자주 끊기는 신음소리였었다. 얼굴을 든 김영남은 상체를 세우고는 그녀의 가슴 위로 그의 가슴을 맞대었다. 오희주는 금방 자세를 잡는다. 이마에 조그맣게 돋아난 땀방울이 보였다. 이윽고 그가 진입하자 이맛살을 조금 찌푸린 얼굴이 되어서 오희주는 입을 딱 벌렸다.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는 두 팔과 다리로 그의 온몸을 힘껏 감았다.
"이사 한 명이 있었는데 다른 회사로 옮겼어."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김영남이 입을 열었다. 방안은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하였으나 아직 그들의 몸은 식지 않았다. 피부 위를 스치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런데 놈이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해. 내 샘플을 빼내서 우리 회사 제다 지사장하고 짜고는."
그의 팔 안에 안겨 눈을 감고 있던 오희주가 얼굴을 들었다.
"공장에서 샘플을 빼내서 그놈한테 넘겨 준 놈도 있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그의 가슴에 턱을 올려놓은 오희주는 잠자코 있었다.
좀체로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김영남이었다. 간혹 기분이 날 때는 매출액이 몇 프로 신장했다든가 사우디나 쿠웨이트에서 어마어마한 오더를 받았다는 이야기나 했다.
"그런데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
"그렇게 허점을 보인 내가 잘못이지. 그놈들은 물론 그럴 듯한 이유가 있을 거야."
오희주는 손가락을 쫙 펴고 그의 가슴을 살그머니 쓸었다. 축축했고 찼다. 김영남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넌 참 아름다운 여자다."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으므로 오희주는 어깨를 움칠 올렸다.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다른 한 손으로 쓸어 내리던 김영남이 말을 이었다.
"우리, 내일은 식물원에 가자. 실컷 구경시켜 줄게. 배도 타고."
"거기 앉아. 조금 옆으로. 그렇지."
카메라의 렌즈를 들여다보면서 김영남이 말했다.
렌즈 안에 오희주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하늘색의 반팔 티셔츠에 남색 무늬가 있는 흰색 바지 차림으로 짙은 숲속의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싱그러웠고 아름다웠다. 지나치는 서양인들이 그녀를 힐끗거리는 것을 봐도 즐거웠다.
셔터를 누른 김영남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다리 아프니?"
"응."
두 다리를 쭈욱 뻗은 채 그녀가 대답했다.
아침부터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오후에는 식물원에 들른 것이다.
"내일은 케이블카를 타고 저쪽 섬으로 가자. 어질어질해."
"배는 언제 타고?"
"그건 내일 오후에."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지만 오희주는 어젯밤에 계획한 관광예정지를 하나도 빼놓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밤에는 나이트클럽에 갈 예정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어둑한 숲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식물원이라고 하였지만 관광코스의 하나로 갖가지 식물과 함께 동물들도 있었다. 오희주는 처음에는 무서워하였으나 나중에는 키득이며 침팬지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좋구나."
문득 김영남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숲속의 공기도 좋고, 보이는 것도."
오희주가 잠자코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가 옆에 있으니까 좋다."
손을 마주잡은 서양인 노부부가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남자는 비쩍마른 노인이었는데 여자 쪽은 그 두 배가 넘을 듯한 몸매였다. 그것이 더욱 어울려 보였다.
"한국에 있을 때 하고 다른 기분이 들지 않니?"
오희주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으나 대답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이를테면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그런 것."
"......."
"여기서는 그런 것 없지?"
"난 한국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조금 기울이며 오희주가 말했다.
"거기는 신경 쓰고 있었어요?"
김영남이 풀썩 웃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단지 네가."
"내가 뭘?"
"네가 어색해할까 봐."
"자기가 아무렇지 않으면 나두 그래요. 괜히 나한테 신경쓴다면서."
"그러면서?"
머리를 돌린 오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함께 호텔에 들어갈 경우가 생겼을 때 먼저 김영남이 수속을 마치고는 키를 받아 들면 오희주는 뒤를 따라왔다.
어떤 때는 그녀에게 키를 넘겨주고 먼저 방에 들어가게 한 다음 일을 보고 난 김영남이 나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둘이서 나란히 방문 앞에 섰던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나이 차가 열일곱이나 되는 남녀이다. 남들은 한눈에 자신들의 관계를 짐작할지도 몰랐다.
"그것이 어색하게 보여요?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이건 정말 세대차이가 나는가 보군."
그들의 머리 위를 꾸르륵거리며 한 쌍의 이름 모를 새가 날아 지나갔다. 검은 털에 긴 꼬리를 가진 커다란 새였다.
"네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내가 더 바랄 것이 없다."
흐흥하면서 오희주가 짧게 웃었다.
"자, 이제 일어나. 방에 돌아가서 샤워하고 저녁 먹고 나이트클럽 가야지."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산책로에는 지나는 관광객도 뜸해져 있었다.
"나 업어 줘, 저쪽 길 끝까지."
두 팔을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치켜 뜬 두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화가 난 표정같이도 보였다. 김영남은 말없이 돌아서서 허리를 굽혔다. 목에 맨 카메라가 허공에서 묵직하게 흔들거렸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껴안은 오희주는 등에 업혔다. 43킬로그램이 나간다고 했는데 군대시절 사역병으로 나가 비료 포대 두 개를 등에 진 것보다도 훨씬 가벼웠다. 가끔씩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뚫고 들어와 그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숲속은 서늘하였고 구수한 나무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두 명의 일본 관광객이 저희끼리 지껄이면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서울에 가서도 이렇게 업어 달라고 할 거야."
오희주가 등에서 말했다.
"아무데서나. 그때 어쩌는가 봐야지."
그녀의 두 발이 그의 걸음에 맞추려는 듯 흔들거렸다.
이틀 간 싱가폴에서 쉬다가, 가는 길에 방콕에 들러 하루쯤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파타야에서 하루쯤 더 머무를 수도 있겠다.
귀국하면 아지크의 오더 생산에 눈코 뜰 새가 없을 것이다. 원자재 구입자금을 마련해야 하고 미리 공장들의 가동 일정들을 조정해 놓아야만 한다. 아침에 장일수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다. 장일수는 그가 아직도 쿠웨이트에 있는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말라피에게 며칠 쉴 작정이니 연락이 오면 쿠웨이트에 있다고만 말하라고 했던 것이다.
낮은 소리로 오희주가 콧노래를 불렀다. 목에 맨 카메라는 제법 큰것이었으므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덜렁거리며 가슴을 쳤다.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서늘한 숲속길이었으나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온몸에 열이 났다.
김영남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를 추스려 올렸다.
오희주의 노랫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응접실에서 김영남이 회사 직원과 통화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들어가 앉은 오희주는 머리를 흰색의 욕조 끝에 눕혔다. 온몸에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또 그만큼의 쾌감이 몰려왔다.
김영남은 여러 번 왔던 때문인지 아는 곳이 많았다. 서울의 나이트클럽보다 나은 것도 없었으나 색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외국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위스키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세 시간이 넘도록 클럽에 파묻혀 있다가 호텔에 돌아온 것이다.
오희주는 눈을 감았다. 이제까지 그와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희주는 자신이 김영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와 함께 가정을 꾸밀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반대하겠지만 설득할 수 있다. 아버지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연락이야 해야겠지만 자신이 결정한 일을 반대할 자격조차 없다.
김영남의 자식을 키울 수도 있다. 오희주는 두 손으로 물을 움켜쥐고 얼굴에 뿌렸다. 그는 포근하다. 물질적인 여유가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옆에 있으면 기반이 굳은 사람의 자신감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응접실에서 다시 김영남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꽤 심각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오희주는 욕조 안에서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물에 잠긴 두 다리와 보기 좋은 발가락들이 보였다. 다시 욕조 끝에 머리를 기댄 오희주는 눈을 감았다. 전화가 끝나면 김영남이 올 것이었다.
"장 이사, 자네 마음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수화기를 고쳐 쥔 김영남은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사나흘 후에는 내가 귀국할테니까. 서두르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사장님 기간이 45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린 8월 15일까지는 물건을 실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소리가 메아리치듯이 두 번 들렸다. 김영남은 입맛을 다셨다. 45일 안에 선적을 시키려면 원사는 최소한 앞으로 10일 안에 전량 공급이 되어야 한다. 일부 봉제공장들은 15일 후부터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장일수가 서두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원사의 구입자금이 모자라자 자신의 아파트와 시골에 있는 형님의 땅을 은행에 담보로 집어 넣겠다는 것이었다.
1차로 소요될 원부자재 대금만도 4억이 넘는다. 은행에서는 한도가 꽉 찼고 담보 없이는 말을 붙일 수도 없다. 신용장을 내밀고 갖은 수단을 다 써 봐도 그들 또한 그런 경우를 수없이 겪어본 터이라 결코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장 이사, 원자재 걱정할 필요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김영남은 발을 흔들어 신발을 벗었다.
"한성상사하고 이야기가 되었어. 그쪽에서 완제품 오더를 받을 거야. 원자재도 그쪽에서 공급해 줄 것이고."
장일수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외국에서 한성과 연락한 것에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우린 손해볼 것 하나도 없어. 다만 직접 수출 실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걸리지만 그런다고 정부에서 도와주는 것 있나?"
직접 수출 실적이 많으면 아마 유망 중소기업으로 선정될 것이다. 공문이 오고 회사의 내역이나 실적통계를 내라고 한다. 대단한 일인 줄로 알고 흥분한 회사에서는 상공부에 서류를 내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마 그쪽의 기록에는 그럴듯하게 표기되어서 선전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쪽은 달라질 것이 없다. 돈이 나오는 은행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 수백 가지의 지원정책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담보나 다른 것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이다.
"사장님이 한성에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장일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했어. 그쪽에서는 이미 원사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원사값만 떼고 나머지 금액으로 L/C 개설한답니까?"
"그래. 원사는 한성이 공급해 주니까, 나머지는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아?"
"그거야......."
제일 크게 목돈이 드는 것은 원자재 대금이다. 다른 것은 늦어도 한달 반 후에 결산해 주기로 하고 어음을 주면 된다. 어쩐지 풀이 죽은 것같은 장일수의 목소리를 들은 김영남의 가슴도 답답해졌다. 고생고생해서 개발한 제품을 들고 오더를 따와서는 한성의 이름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이봐, 장 이사. 지금은 할 수 없어. 상황이 급하고 한성과 손을 잡아야 돼. 저쪽 진일도 서두를테니까 말이야."
"잘 알았습니다."
마음을 고쳐 먹은 듯이 장일수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더위에 고생하시는군요."
"더위는 한국도 지금 한창이겠구만."
"그럼 도착하실 날을 알려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영남은 머리를 돌렸다. 욕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한동안 그쪽을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일정을 하루쯤은 앞당겨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장일수는 하기철을 불렀다.
"하 이사, 어젯밤 사장님 전화를 받았는데......."
앞쪽에 앉은 하기철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오더를 한성에다 넘길 모양이야. 우리는 하청을 받고."
"죽 쒀서 개 주는군요."
그러나 하기철의 말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했다.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당장에 원사도 들여오지 못할 형편인데."
"이러다가는 회사 이름도 바꿔야 하는 것 아냐? 한성 계열회사라고."
"그래도 우리는 낫습니다. 오더가 없어서 빌빌대는 회사들도 많으니까요. 한성의 계열회사가 되려고 줄을 서고 있는 형편 아닙니까?"
장일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하기철의 말도 틀린 점이 없다.
오더를 받아 공장을 돌리려고 한성의 사무실은 하청회사의 직원들로 언제나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생산비나 겨우 나오는 오더를 감지덕지하면서 받아가고 있다.
"그래도 우린 낫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한성에게 오더를 넘겨 주고 다시 하청을 받는 입장이라 말발도 서구요."
"그렇군."
커피잔을 들면서 장일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에게는 자신의 아파트와 형의 토지를 은행에 담보로 넣고 원자재 구매대금의 보증을 서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안일제가 언제 원사가 입고되느냐고 안달을 부리던데 연락해 주어야겠군요. 한성에서 원사가 공급될테니까."
"그래. 그렇지만 앞으로는 철저히 입조심을 시켜야 돼. 그쪽에 문제가 있어."
"결국은 알게 될 것 아닙니까?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금방 소문이 날텐데."
하기철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박재호 때문에, 진일도 오더를 가지고 부딪혀 올 거야. 아마 우리 계열공장들을 쑤석거리고 다닐 것이 틀림없어."
"......."
"거의 같은 기간에 오더가 쏟아져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제는 공장들이 재게 생겼구만."
"현갑호가 설치고 다니겠어요. 박재호 오더를 들고."
하기철이 담배 끝으로 탁자 위를 두드리며 말했다.
"공장지역에서는 안일제하고 현갑호의 싸움이 되겠습니다."
"그 새끼."
눈을 부릅뜬 장일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공장들만 쑤시고 다녔다가는 밤에 차로 깔아 버릴 거야."
"술 처먹고 나오는 것을 두드릴 수도 있지요."
"이봐, 내 말은 진담이야. 농담으로 받지 말어."
장일수가 눈살을 찌푸리자 하기철도 눈을 치켜 떴다.
"저도 진담입니다.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 돼요. 샘플이 유출된 것도 그놈하고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일수는 톡톡거리며 하기철의 손에서 튀어오르는 담배를 잡아 채어서는 입에 물었다.
"반장 이야기로는 여섯 매씩 만들었다고 하는데 미싱사들은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누구는 5, 6매, 어떤 사람은 10매, 재단 장부에는 기록되지도 않았고, 샘플 대장에는 8매로 되어 있는데,"
8매는 맞는 숫자였다. 1매는 견본으로 남겨 두고 김영남이 7매씩을 들고 출장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장에도 누가 있다는 이야기야. 사무실 쪽 하고 짜고."
"공장 사무실의 고진섭이가 현갑호 동생하고 친구랍니다."
"고진섭이?"
머리를 든 장일수가 눈을 껌벅이며 하기철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그런 대담한 짓을 해? 아냐."
장일수는 머리를 저었다.
"현장의 반장급과 짜고 견본을 빼돌릴 만한 뱃심은 없어. 경력도 이제 겨우 1년이 넘은 놈인데."
"그럼 김주현이는 어떻습니까?"
"그놈은 성실한 놈이야. 내가 알아."
공장에 내려갈 때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김주현은 옆에서 업무를 도와주었다. 과묵하고 책임감이 있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김영남도 아끼는 직원인 것이다.
"빌어먹을. 우선 내부의 배신자를 잡아 내야 하는데. 이러다간 공장의 생산진행 사항이 모조리 빠져 나갈지 모른단 말입니다."
하기철이 호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어 다시 손에 쥐었다. 길게 담배연기를 내어 뿜으며 장일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재호는 귀국했겠지요?"
하기철이 물었다.
"글쎄, 돌아왔겠지. 여권 잃어버린 지 1주일이 지났는데."
"그 사람, 수단이 좋기는 해요. 어느 사이에 제다의 홍성구를......."
말을 멈춘 하기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직원들은 분주하게 일에 매달려 있어서 듣는 사람이 없다. 회사에서 이것은 사장과 셋이서만 알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박재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박재호 이사 되십니까?"
낯선 목소리였으므로 박재호는 무심결에 상체를 세웠다.
"네, 그렇습니다만."
"이거 오랫만이로군요. 나 이찬구 변호사올시다. 기억하시지요?"
박재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찬구를 세영무역에서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아니, 이거 웬일이십니까?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말은 부드럽게 나왔으나 박재호는 앞쪽을 쏘아보았다. 아침시간이어서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휴가 가셨다던데, 잘 쉬셨습니까?"
"아아, 네."
대사관에서 발급해 준 여권분실 증명서 한 장만 들고 그제 밤에 도착한 참이다.
박재호 자신은 웬지 분하고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이태환 사장은 지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열흘도 안 되는 출장에서 멋지게 한탕 해 온 것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알리의 선적계획을 짜느라고 간부들과 회의실에 박혀 있었다.
"박 이사님, 시간을 조금 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낮았으나 또박또박 끊어지는 말투로 이찬구가 말했다.
"내가 그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박 이사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무슨 일인데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박재호가 물었다.
"소송 문제입니다. 박 이사님에 관한."
박재호의 시선이 사무실 이쪽저쪽을 쏘아보았다.
"어떤 일입니까?"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으므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되물었다.
"공금횡령입니다. 어쩌면 사기에도 해당이 될지도. 증거 자료가 제법 있어요. 와 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대일산업이다. 직감적으로 박재호의 머리가 그렇게 알려 주었다. 김오식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진일무역은 부자재 공급의 주거래선이 있다. 이태환 사장의 처조카가 되는 사람이 맡아 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김오식은 이쪽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싹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누가 그 따위......."
그러다가 박재호는 말을 멈췄다. 앞쪽에 앉은 직원들의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놈들에게 약점을 보일 수는 없다.
"좋습니다. 만납시다."
박재호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여기 영수증 사본이 있군요. 확인해 보시지요."
이찬구가 서류를 앞쪽으로 밀어 놓는다.
"본인은 증언이라도 하겠다고 하는데 내 생각은 이것만 가지고도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찬구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잔잔한 웃음이었고 남이 보면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줄로 알 것이다.
서류에는 자신이 휘갈겨 쓴 사인이 보였다. 여러 장의 영수증이었다. 7백만 원짜리도 있었고 1천3백만 원짜리도 있었다. 철석같이 김오식을 믿었으므로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도 꿔보지 않았다. 김오식은 내부 정리를 위해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서류는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것은 형사법으로 처리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도대체."
박재호가 머리를 들고 이찬구를 쏘아보았다.
"나한테 김영남 씨가 바라는 것이 뭡니까? 그것이 있을텐데요."
"허어."
웃음 띤 얼굴로 이찬구가 그의 시선을 받았다.
"박 이사님, 현실적으로 나오시는군요. 좋습니다. 그런데."
"나도 자세히 듣지를 않아서, 그저 서류만 준비해서 소송을 내라고 하길래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요."
"......."
"내일 접수시킬 수도 있습니다."
"........"
"며칠 후면 소환장이 갈 것이고."
"날더러 변상하라는 겁니까?"
"글쎄."
이찬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내 생각은 1억 몇천만 원 변상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
"다른 문제일 것 같습니다. 변상도 중요하겠지만, 이를테면 감정 문제."
박재호는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감정 문제라면 저도 할 말이 있지요. 그리고 내가 가져간 돈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회사에 공헌도 했고."
이번에는 이찬구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난 돈이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나도 김영남 씨 비리를 폭로할 작정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이찬구가 커다랗게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김오식 씨의 진술서까지 첨부해서 사기죄로 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진술서를 읽어 보세요."
아직 들추어보지 않았던 서류의 뒤쪽 페이지에 진술서 사본이 보였다.
"박 이사님도 변호사를 부르셔야 하겠지만 얼마 동안은 고생하시게 되겠습니다. 난 이런 이야길 하려고 오시라고 했던 것은 아닌데."
눈썹을 찌푸린 이찬구가 입맛을 다셨다.
"서로 간에 좋은 해결책이 없겠는가 하고 상의해 볼 생각이었는데."
"......."
"이걸 내일 접수시키면 3,4일 내로 구속이 되든지 소환장과 함께 누가 가든지 할 겁니다. 그렇다면 박 이사님도 서두르셔야 할 건데, 김사장 비리를 고발하실 시간이 촉박해요."
라이터를 켜 담배 끝에 갖다 댄 박재호는 불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마음을 놓았다. 이런 공갈에 흔들릴 자신이 아니었다.
"참고로 말씀드리겠는데 난 이 서류를 내용증명으로 귀사의 사장에게 보내드릴 작정입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지요. 이사는 대부분이 별정직이어서 이력서 1통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 사람의 내막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쪽 사장님도 참조를 하셔야 할 것 같군요."
눈을 부릅뜬 박재호가 그를 쏘아보았으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았다.
검사 생활을 20년 가깝게 했던 탓인지 이찬구는 그의 시선을 받아서는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다.
"장담하지만 박 이사님은 며칠 사이로 직장 생활을 그만두셔야 할 겁니다. 그쪽 이 무슨 사장님이었더라? 그분도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실 것이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박재호는 자신의 양쪽 볼이 딱딱해져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요."
낮은 소리로 이찬구가 말을 이었다.
"나도 세영무역의 고문 변호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인간인 이상 나도 감정이 있습니다. 박 이사님은 지금 그렇게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나한테 어떤 방법이 좋겠느냐고 솔직하게 물어봐 줘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 간에 이롭고 현실적인 태도입니다."
박재호는 책상 위로 시선을 옮기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최진규가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자 박남표는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세영무역의 올해 매출목표는 1천2백50만 불이었는데 현재 상황으로 보면 1천5백만 불도 가능하겠군 그래."
"네. 현재까지의 오더 수주액만 해도 1천3백만 불이 넘습니다."
박남표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최진규가 20일 동안에 걸쳐서 조사해 온 보고서였다.
타이핑된 서류에는 세영무역의 자산에서부터 인원 현황, 계열공장, 생산 능력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거, 재미있군. 현갑호란 사람, 박재호와 손잡고 진일무역의 일을 맡아하고 있구만?"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은 박남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영측에서는 이걸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공장지역에서는 진일무역의 영향력이 강화되겠군 그래."
"네. 오더가 있을 경우에는 진일과 세영의 공장확보 경쟁이 심해질 것 같습니다."
현갑호가 세영의 전임 공장장으로서 공장지역을 관리해 왔으니만치 안면도 많을 것이다. 박남표는 김영남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영업담당 이사와 생산담당 공장장 두 명을 동시에 잃었다. 더구나 그들은 거의 동시에 그에게 적이 되었다.
"김 사장, 이 사람, 관리에 문제가 있는 것 아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장님."
최진규가 선 채로 상체를 조금 숙였다.
"박재호와 현갑호는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사기도 좋습니다."
"하긴 김 사장에 대해서는 내가 자네보다 더 잘 알지."
그러면서 박남표는 싱긋 웃었다.
"이번에 김 사장이 사우디에서 4백만 불이 넘는 오더를 따왔어. 지금 우리가 원사를 준비하고 있네. 우리 이름으로 수출할 거야."
최진규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하긴 우리도 김 사장을 도와 한몫을 했지. 사우디에서 자네하고 황과장이 신경을 많이 써야 돼. 특히 자네는."
박남표가 턱을 내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색을 하여서 딱딱해진 표정이 되었다.
"우리가 원사까지 공급하는 회사가 흔들리는 것은 좋지 않아. 자네는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회사의 재무상태나 다른 상황도 수시로 체크해서 나한테 보고해야 돼. 내 말 알겠나?"
"잘 알겠습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해야 된단 말이야.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야. 인간관계를 따진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야."
"알겠습니다."
최진규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김영남과 동창생 관계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창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바보는 없다.
"김 사장은 오더 수주 능력이 뛰어나, 그건 내가 알아. 임기응변도 보통이 아닌 사람이지. 역경을 헤쳐나갈 능력은 있는 놈이지."
말을 멈춘 박남표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조그만 정보 하나라도 놓치지 말도록. 이제 7백만 불이 넘는 오더가 걸려 있는 회사니까 말이야."
"부장님,"
눈을 깜박이며 최진규가 그를 불렀다.
"김 사장이 여자 관계가 있는 모양이던데요. 공장지역에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입술 끝을 올려 웃는 모양을 만든 박남표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 번 여자하고 공장으로 내려온 모양입니다. 공장 직원들 대부분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흠, 그래?"
"부인하고는 별거하고 계시다는군요. 가정생활이 조금 복잡한 것 같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으나 박남표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영남은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입을 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알았어. 그것도 중요한 정보로군."
최진규는 박남표가 내심으로는 놀란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한동안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김영남의 여자가 젊고 예쁘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창 밖은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비행기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빈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굵고 쇳소리가 나는 엔진 소리도 귀에 익어서인지 웅하고 고막을 울릴 뿐이다.
짙은 남색의 바다 위에 흩어진 서너 개의 섬이 보였다. 비행기는 남 지나해를 벗어나고 있었다.
오희주는 머리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좌석에 머리를 눕히고는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세 시간 후에 도착이야. 그러니까 잠이나 자."
"집에 가면 실컷 잘텐데, 뭘."
시계를 내려다보자 싱가폴 시간으로 12시였다.
"난 공항에서 바로 회사로 갈 거야. 희주는 집으로 들어가."
"저녁때 집에 오시는 거죠?"
"그럼, 내가 어디 갈 데가 있어?"
웃는 얼굴로 그가 말했으나 오희주는 잠자코 머리를 돌렸다.
"넌 아까부터 표정이 어두워. 왜 그래?"
팔걸이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덮어 쥐면서 그가 물었다.
"오고 가는 것뿐인데, 그리고 같이 있을 것이고."
"......."
"다음에는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 쓰자구. 그때는 좋은 곳에서 푹 쉴 테니까."
김영남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제 애들한테 전화했어요?"
"응, 성훈이한테."
힐끗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옆 얼굴을 스치고 지났다.
"학교에다 전화했어. 바꿔 주지는 않더구만. 아빠가 오늘 도착할 것이라고 전해 달라고 했지."
".......'
"성훈이 그놈이 동생한테 이야기할 거야."
그가 굳이 회사로 가겠다고 하는 것도 회사에서 자식들의 전화를 기다리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오희주는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어제 오후에는 쇼핑을 했다. 방콕의 일정을 취소하고 싱가폴에만 나흘을 묵었는데 구경은 나흘 가지고도 모자랐으니 이번에 방콕을 가보지 않은 것에 미련은 없다.
그녀에게 시계와 예쁜 목걸이를 사 준 김영남은 아이들의 선물을 고르려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이윽고 카메라와 녹음기를 사든 그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녹음기는 오희주가 골라준 것이었다.
"출장 나와서 아이들의 선물을 고를 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야."
그가 말하면서 멋적게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기쁜 시간이 없다."
그렇게도 말했었다.
흰 꼬리를 조그맣게 달고 성냥의 알만한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자세히 내려다보자 서너 척의 다른 배도 보였다.
공항에 내리면 그는 회사로, 오희주는 집으로 갈라선다. 그의 말대로 저녁에 그가 찾아올 것이니까 헤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 며칠처럼 나한테 행복한 시간이 없었어."
그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렇게 외국에 널 데리고 나온 건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리고 너에게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생각보다 더."
머리를 돌린 오희주가 그를 바라보았다.
"나 없으면 오갈 데 없는 너, 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너를 보고 싶었는지도 몰라."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희주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자신이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좋았고 생소한 분위기에 흥분된 며칠 간이었지만 그가 바랐던 자신은 아닌 것 같다.
"쫓기는 사람 같아요."
불쑥 그렇게 말을 뱉었으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오희주는 그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나한테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이 살그머니 아래 위로 움직였다.
"나하고 같이 있으면 모든 걸 잊는다고 했지만 그 말은 믿기지 않아요."
"......."
"당신은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회사 생각, 아이들 생각. 회사에 있을 때에는 아마 내 생각과 아이들 생각으로......."
"나는 충실하게 살아 왔어.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성격인가 봐."
김영남의 손이 무릎 위에서 조물락거리는 그녀의 손을 덮어 눌렀다.
"자신감이 없다는 이야기는 안 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본 채 오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을 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게도 보이네."
오희주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지면서 입술 끝이 아래로 처졌다.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김영남은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여름이 다가온 듯 더웠다. 습기가 많은 날씨였다. 중동 지역의 더위가 습기가 적어 타버리는 듯한 더위라면 한국은 중기 사우나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든다.
주차장에서 빌딩의 현관까지는 1백 미터쯤의 거리였으나 김영남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17층에 있는 이찬구 변호사의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여어, 어서 오게. 오랜만에 보는구만."
이찬구가 활짝 웃으면서 일어섰다.
"늦게 찾아 뵈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손을 잡으며 김영남이 말했다.
"회사 일이 바빠서요."
귀국한 지 1주일이 넘었다. 그 동안 생산진행 관계로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해 왔던 것이다. 공장에도 한 번 내려가 생산계획을 점검하고 올라왔다. 바빴으나 활력이 솟구쳐 오르는 나날이었고 장일수나 하기철, 신태현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래, 성과는 있었나?"
비서가 날라온 얼음을 띄운 콜라잔을 든 김영남에게 그가 물었다.
"네, 조금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요즘 경기가 안 좋아 야단인데. 자넨 재주가 많은 사내야."
방안은 서늘했고 시원한 음료수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내장을 식혔다.
"선배님이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잔을 내려놓은 김영남이 말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수고는 무슨. 하지만 그 친구도 만만하지가 않더구만. 하긴 그런 성격이니까 그런 짓을 했겠지만."
이찬구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시 50분이 되었군. 2시까지 그 친구가 오기로 했으니까."
박재호가 오기로 한 것이다. 그와는 헤어진 지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김영남은 2년도 더 된 것 같았다.
"그 친구, 휴가갔던 것이 아니고 자네를 앞질러서 사우디에 들어갔다면서? 나한테는 휴가 다녀왔다고 시치미를 뚝 떼던데."
이찬구가 그를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가 단단히 말해 놓았더니만 그 친구가 다급해진 거야."
단정하게 잠궈진 그의 와이셔츠의 윗단추를 바라보면서 김영남은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자, 그림 옆방으로 가 보세."
이찬구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박 이사, 그 동안 잘 지났어?"
방으로 들어서자 엉거주춤 의사에서 몸을 세우는 박재호에게 김영남이 말했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찬구의 방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이었다. 책장에는 갖가지의 법률서적이 꽂혀 있었고 긴 탁자가 방 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이 변호사는 자네도 알다시피 내 선배이기도 해서 나름대로 내 일에 신경을 써 주시는데 어떤 때에는 그것이 조금 난처하단 말이야."
박재호와 시선이 부딪쳤고 이내 그가 시선을 내렸다.
"이제 서로 체면 가릴 것도 없는 처지야. 알 건 다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요점만 말하도록 하지."
"말씀해 보세요."
박재호가 말을 받았는데 가라앉은 말투였으므로 김영남은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한동안 박재호를 쏘아보았으나 얼굴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자네는 횡령한 돈을 변상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는데. 난 딱 두 가지의 조건을 내겠어. 그 두 가지를 모두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내일 아침부터 소송 준비를 하든가 자네가 택일해."
"......."
"첫째는 자네가 이번에 알리한테서 받은 오더, 그것을 취소할 수는 없겠지."
머리를 돌린 박재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껌벅이고 있는 것이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도 보였다. 사우디에 다녀온 것을 김영남이 알고 있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납기를 연기할 수는 있을 거야, 20일 정도. 그래서 8월 20일쯤 싣게 되면 알리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고, 자네 회사도 문제가 없어."
"......."
"취소시켰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가혹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백번 양보한 거야."
김영남의 가슴 언저리를 바라본 채 박재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두번째. 자네에게 샘플을 넘겨준 우리 회사의 직원 이름을 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김영남의 말소리는 격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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