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역사스페샬의 대본을 정리하였음]
최초발굴 신라대왕암
사실 대왕암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곳입니다. 지금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사진과 함께 대왕암에 대한 설명이 실려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대왕암까지 와보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사진으로 대왕암의 모습을 봤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을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망망대해에....그것도 이렇게 험한 암초덩어리에 어떻게 왕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일까..? 사실 왕의 무덤이라고 하면 우리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치 작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봉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다에 릉을 만드는 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대왕암이 진짜 문무왕의 릉인지.. 그리고 릉이라면 어디에 어떻게 왕을 묻었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대왕암에 얽힌 비밀들을 풀어보려합니다.
우선 이 바다위에 떠있는 암초덩어리가 진짜 문무왕의 릉인지.. 그 의문부터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왕암은 진짜 문무왕의 릉일까?
경주앞바다에 솟아있는 대왕암..
먼발치에서 바라본 대왕암의 모습은 그저 거대한 암초덩어리다. 그러나 대왕암위에 올라서면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네 개의 큰 암초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쪽엔 바닷물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중앙엔 거대한 돌이 물속에 잠겨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모양으로 물길이 나있어 대왕암안으론 바닷물이 늘 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동쪽과 서쪽은 바닷물이 들고 빠지는 수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듯 범상치않은 모습을 갖춘 대왕암 이곳은 진짜 문무왕의 릉일까?
삼국사기엔 문무왕의 릉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월1일 문무왕이 죽자... 동해에있는 거대한 바위위에 장사를 지냈다.." 분명 동해에 떠있는 바위에서 장례를 치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해바다 어디쯤에 있는 바위일까? 삼국유사에 보다 정확한 위치가 기록되어있다. 감은사 동쪽바다에 릉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왕암 서쪽에 감은사가 있다는 이야긴데..실제 대왕암에서 1.5키로미터쯤 가면 아담한 절터가 보인다.
79년 발굴당시 감은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와 감은사터로 밝혀진 곳이다. 절터 풀 현재 절터엔 두기의 3층석탑과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감은사는 문무왕과도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에 보면 "감은사는 처음 문무왕이 창건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완공한 절 그래서 절의 이름도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다. 문무왕을 기리기위해 지어진 감은사 그 동쪽에 대왕암이 있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곳엔 대왕암이 문무왕의 릉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유적이 있다.
해변가에 세워져있는 이견대라는 정자가 그것이다. 현재 모습은 1967년 발굴팀에 의해 복원된 것인데 삼국유사엔 이견대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문무왕의 유언을 간직한곳이 대왕암이고 절은 감은사며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견대가 있었다" 대왕암가까이에 감은사와 함께 이견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왕암가까이에 이견대를 세운데엔 이유가 있다.
삼국사기엔 왕들이 이견대를 찾아와 바다를 바라봤다는 기록이 있다. 이견대에 올라서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대왕암 현재 남아있는 대왕암주변의 유적과 기록들은 이곳이 문무왕의 릉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왕암의 모습을 살펴보면 도저히 사람을 묻을만한 장소라곤 생각이 되질 않습니다. 우선 육지에서 200미터나 떨어져있는데다가 주변의 암초가 워낙 울퉁불퉁해서 걸어 다니는 건 물론이고 이렇게 가만히 서있기도 불편합니다. 그리고 암초안쪽엔 마치 웅덩이처럼 바닷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사람을 묻었다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주목을 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저 중앙에 있는 거대한 돌입니다.
사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큰 돌입니다. 사람이 누울 정도는 충분히 되는 크긴데... 그러니까 모양새만으로 본다면 마치 고인돌의 덮개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껏 대왕암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작업은 한번도 이뤄지지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돌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과연 저 돌아래 문무왕이 묻혀있는 것일까요? 역사스페셜팀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 의문을 풀아보았습니다.
대왕암바위아래에 문무왕이 묻혔을까?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기 전 취재팀은 경주문화재연구소팀과 함께 제를 올렸다.
대왕암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처음 있는 일이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우선 취재팀은 지질학자들과 함께 대왕암의 겉모습을 살펴보기로 했다.
만일 대왕암 중앙에 위치한 돌아래에 문무왕을 묻었다면 어딘가에 인공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쪽 부근에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진건 제거를 했기 때문에 침식으로 제거가 됐든지..안 그러면 인위적으로 들어냈다든지. 여기에 홈이 만들어진 건 조금 자연적인거하고는 조금 다른게 조금 더 가미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같은 생각이 든다.
김진섭교수와 백인성교수는 대왕암안쪽의 움푹 파인 웅덩이를 주목했다. 인위적으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왕암 안쪽 어딘가에 깍아낸 흔적이 있지않을까..? 대왕암안쪽의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면은 이것이 형성된 그 이후에 이것이 뜯겨져 나가면서 새로이 형성된 위치거든요." 그랬을 때 이것이 자연적인 침식에 의해 뜯겨나간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 의해 그리된 것인지 여하튼 분명한 건 이런 면이 있었고 그 후에 뜯겨져나갔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 덮여있던 돌이 이렇게 떨어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현상을 지질학적으로는 절리라고한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풍화의 현상일까
나침반을 이용해 주절리방향 즉 돌이 떨어져나간 방향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쪽 대왕암에 나타나는 주절리방향이 크게 두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NS방향이나 N10도에서 N20도방향..그게 주절리방향이다. 대왕암안쪽으로 50여곳을 조사해본 결과 대부분 북동방향으로 돌이 떨어져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경상도지역 돌들의 주절리방향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주변에 짧은 시간에 둘러봤는데 어떤 인위적인 사람에 의한 깍은 흔적이라든지 그런 건 발견할 수 없었고 대부분 자연적인 침식풍화가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바깥에선 인위적으로 깍아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물 속은 어떨까? 벽면이 안쪽으로 오목하게 모아져있어 내부공간은 밖에서보는 것보다 훨씬 좁았다. 벽면에선 갈라지고 쪼개진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자연적인 풍화인지 인위적으로 깍아낸 것인지..확인할 수 없었다.
이번엔 중앙에 놓여있는 돌을 살펴보았다.
중앙의 돌은 전체적으로 길쭉하면서도 둥그스름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돌의 한쪽면이 약간 들려있었다.
바닥은 뻘이었다. 중앙의 돌아래 손을 넣어보려했지만 뻘이 들춰져 물만 흐려질뿐 아무런 단서도 찾지못했다.
취재팀은 이제 물을 뺀 상태에서 정밀한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모래 주머니 나르는 경주문화재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대왕암의 물을 퍼내보기로 한 것이다.
우선 대왕암으로 들어오는 물을 막기위해 모래주머니를 동쪽 수로에 쌓기 시작했다. 파도가 너무 세 방벽이 자꾸 무너져내렸다. 2시간여의 작업 끝에 겨우 수로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양수기를 이용해 대왕암안의 밖으로 바닷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조사단이 대왕암조사를 시도했지만 잠수부를 동원해 돌아래를 살펴보는 정도에 그쳤다. 이렇게 대왕암안에 차있던 물을 퍼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긴장속에 작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1300여년간 물속에 가려져있던 내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 건 1시간만이었다. 내부공간은 상당히 좁았으며 네개의 암초덩어리로 보였던 주변 암초는 실상 하나로 연결되어있었다. 중앙에 놓여있는 돌은 한쪽부분이 약간 떠있긴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정되게 바닥에 붙어있었다. 옆에서 보면 완만하게 파인 웅덩이에 돌이 놓여있는데 돌이 있는 곳의 수심은 1.5미터다. 중앙에 놓여있는 돌은 마치 거북이등처럼 생겼다. 돌의 무게를 측정해본 결과,대략 20톤정도- 이 거대한 돌이 정확히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있었다.
대왕암내부는 마치 잘 다듬어놓은 듯 안정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물이 빠진 내부를 살펴보던 취재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여기서도 보면 많은 풍화가 진행되었지만 어떤 인위적인 치석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튀어나온 건 정으로 깍은 흔적이 있고 이 밑에는 연장을 대지않았다. 인위적으로 깍아낸 흔적과 자연의 상태는 육안으로도 구분이 가능했다.
여기부터 인위적인 치석흔적 있고 선명하게 나타나고 주로 튀어나온 부분 다스린 것같고 이 아랜 정의 부분 없다.
대왕암안쪽면 곳곳엔 인위적으로 깍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이곳은 윗부분만 인공적으로 깍아냈다. 대왕암안쪽을 동그랗게 다듬기위해 튀어나온 부분만 깍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에 놓인 거대한 돌 아래에 문무왕이 묻혔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문화재를 들어볼 수는 없기 때문에 레이다탐사기계를 이용해 돌아래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했다. 한가지 검사를 더 해보기로 했다. 전자탐사를 통해 돌아래 부장품이 있는지 확인해보는 기계다.
*인터뷰 이 결과는 전자탐사결과로서 만약에 부장품이 존재한다면 불규칙한 파형을 보인다 개석이 위치한 곳의 파형이나 그외의 지역의 파형이 수평이기 때문에 어떤 차이도 없기 때문에 부장품이 없다고 생각되고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대왕암중앙의 거대한 돌 밑은 단단한 암석으로 형성돼있었으며 아무런 인공적인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레이다 검사결과는 어떨까?
역시 지하엔 단단한 암석이 존재하는 것으로 검사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돌의 구조도 정확히 알 수 있었는데 지하암반은 수직으로 심하게 갈라져있었다.
*인터뷰 레이다 투시결과 지하암반에는 지표면에서 보이는 전리가 많이 발달되어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리의 존재로 볼 때 그 속에 유골을 장골하게될 경우 풍화가 엄청 진행돼 그 상황에서 유골을 설치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생각된다. 대왕암 중앙에 놓여있는 거대한 바위밑엔 아무것도 묻혀있지않을 뿐만아니라 일반적으로 릉이라고 하면 시신이나 유골을 지하에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거대한 봉분으로 만들거나 더 고대로 올라가면 거대한 돌을 이용해 덮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저 거대한 돌아래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대왕암은 릉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같습니다.
("君臣以遺言葬東海口中 大石上" , "陵在感恩寺東海中) 이 기록은 앞서 살펴보았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입니다. 이 두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삼국사기엔 동해중에 있는 거대한 돌위에서 장례를 치뤘다고 했고.. 삼국유사엔 감은사 동해중에 릉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분명 감은사 동해중에 있는 거대한 바위 즉 지금의 대왕암에서 문무왕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기록을 통해서보면 이곳은 분명 문무왕의 릉인데 현장 조사결과로 보면 문무왕의 흔적이 전혀 없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화장한 문무왕의 유골을 갈아 대왕암에 뿌렸다.
경주 중심부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 이곳은 신라시대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지던 낭산이다. 그런데 이곳에 대왕암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 1975년 황수영박사를 비롯한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된 이 유적의 이름은 능지탑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탑과는 그 모양새가 다르다. 뿐만아니라 흔히 탑은 절터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엔 탑외엔 아무런 흔적도 없다. 과연 이 탑은 어떤 탑일까?
*황수영인터뷰 일제말기에 여길 해체했다. 결론이 안 나왔고 다만 여기가 화장하고 관계있지않느냐..우리가 해방이후에 다시 살펴봤다. 그랬더니 이 안에서 불상도 나오고 밑에 꺼멓게 불에 탄 흔적도 있고 1970년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정도로 심하게 무너져있던 탑을 발굴했다. 그때 파손된 불상과 함께 화장터의 흔적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 화장터인가? 발굴팀이 주목한 건 능지탑이란 탑의 이름이었다.
*황수영인터뷰 릉은 왕하고 관계있는 거고 지자는 모르고 능의 탑 .능탑이지 능탑을 만들려면 사리가 있어야지.. 화장을 해야된다 그건 문무왕하고 관계있으니까
실제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자신이 죽고 열흘 뒤에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때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했던 곳이 고문외정 그대로 풀이하면 고문의 바깥뜰이다.
그런데 이 "고문외정"이 지금의 능지탑임을 밝혀주는 단서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바로 지난 1960년 경주시내의 한 가정집정원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가 그것이다. 이 문무왕릉비가 세워져있던 곳이 능지탑과 관련이 깊다.
신라의 금석문만을 모아놓은 해동금석원엔 문무왕릉비가 있던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선덕왕릉아래에 문무왕릉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덕왕릉아래엔 무엇이 있을까? 거의 흔적이 남아있지않지만 이곳은 문무왕이 건립했던 사천왕사터다.
현재 절터엔 두기의 귀부만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귀부라면 거북모양으로 생긴 비석의 받침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문무왕의 비석이 꽂혀있었던 것일까?
*박방룡인터뷰 1961년도에 비석이 발견되고나서 당시 박물관장으로 계시던 홍사준관장이 계셨다 그럼 비석이 사천왕사지 어느 귀부에 맞는것인가 그래서 당신이 직접 가서 지금 남아있는 비석의 크기하고 여기 귀부의 받침 비석놓였던 이 자리를 조사해보니까 동쪽 것은 아닌 것같고 아마 서쪽귀부가 아닌가 결론을 내렸다.
서쪽 귀부의 비석이 꽂혀있던 구멍은 독특하게도 이단으로 되어있다.
*박방룡인터뷰 지금 경주박물관에 있는 문무왕릉의 비는 위가 넓어지다가 갑자기 좁아져서 촉이 되어있다. 촉이 여기 딱 걸리게 되어있다. 이렇게 사천왕사 서쪽 귀부에 문무왕의 비석이 꽂혀있던 것이다. 그런데 사천왕사터에 있는 귀부의 방향은 지금과 달랐다고 한다. 1922년 일본인이 쓴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귀부의 머리는 원래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기차선로공사를 하며 남쪽으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사천왕사터의 서쪽귀부는 이렇게 지금과는 정반대방향을 바라보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서쪽귀부가 바라보는 곳에 바로 능지탑이 있다. 문무왕의 비석이 능지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던 낭산... 그 한자락에 위치해있던 능지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했다. 그렇다면 화장을 한 문무왕의 유골은 어떻게 했을까. 문무왕릉비엔 분골경진이란 글귀가 새겨져있다. 분골은 뼈를 가루로 만들었다는 의미며 경진은 고래가 사는 바다라는 의미다.
*최광식인터뷰 "문무왕릉비에 보면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장을 하고 그 뼛가루를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 즉 동해바다에 뼈를 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가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앞서 역사스페셜팀이 경주문화재연구소의 도움으로 대왕암의 물을 양수기로 퍼냈을 때 대왕암 안쪽벽면엔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인공의 흔적입니다. 인위적으로 깍아낸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흔적으로 본다면 대왕암의 내부를 이렇게 움푹 파인 웅덩이 모양으로 만들기위해서 인위적으로 다듬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가하면 이 중앙에 놓여있는 돌도 자연적이라고 보기엔 왠지 석연치가 않습니다. 주변의 암초와 전혀 연결이 되어있지않은채 이 거대한 돌 하나만이 따로 정중앙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도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돌도 인공적인 힘을 가해 조성한 것일까요? 우선 대왕암중앙에 있는 거대한 돌의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만일 주변의 암석과 다른 종류의 돌이라면 외부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장인터뷰 색깔이라든지 밝은 색을 띄면서 구성성분이 석영등을 가진 전형적인 화강암질인 것같다. 주변의 암석과 똑같은 화강암이었다. 그러나 같은 화강암이라도 지역에 따라 구성성분이 다르다.. 좀 더 정확히 돌을 분석해보기위해 중앙의 거대한 돌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져나온 돌조각을 하나 건져냈다.
그리고 주변암석에서도 돌조각을 채취했다. 이제 두 개의 돌조각의 구성성분을 분석해볼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돌조각을 떼어내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구성성분에 따라 다른 색과 모양을 나타낸다.
대왕암 중앙에 있는 돌과 주변의 돌은 흑운모와 장석 그리고 석영으로 구성되어있는 같은 종류의 화강암이었다.
*인터뷰 암석의 구성광물이나 또 암상으로 봤을때는 동일한 암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경주시내 또다른 지역의 화강암은어떨까..?만일 같은 종류의 화강암이라면 그곳에서 운반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경주엔 대왕암뿐만아니라 남산과 토함산 일대에도 화강암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그 구성성분은 대왕암의 화강암과 전혀 다르다.
문무왕릉에서 중앙개석으로 대왕암 중앙에 있는 거대한 돌은 분명 이곳의 돌인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레이다탐사결과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인터뷰 지하암반에서의 전리는 수직으로 발달되어잇고 위에있는 개석의 전리는 수평을 꼽을 수가 있다 이건 개석이 주변에서 떨어져나와서 누워있기 때문에 이렇다. 대개 한 지역의 돌은 같은 방향으로 갈라진다. 그런데 중앙의 돌은 수평으로 지하암반은 수직으로 갈라져있다. 따라서 처음엔 이렇게 세워져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위치에 어떻게 놓여져있었을까.? 전문가들과 함께 대왕암을 둘러봤다.
그런데 한참을 둘러보던 취재팀의 눈길을 끄는 돌이 하나 있었다.
*인터뷰 형태도 비슷하고 단지 규모가 좀 더 크고 크기가 크다는 정도고 외관상으로 보기에 동그스름한 형태라든가 주위의 것보다 전리 발달된 게 떨어져있는 형태라든지 이런게 유사하다 생각된다. 아래의 돌과 모양은 다르지만 울퉁불퉁한 암초사이에 제법 고르고 둥근 모양의 돌이 있었다.
*인터뷰 과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선 저희들이 추정컨데 이 부분에서 슬라이딩한 미끄러짐에서 지금 현재 모습으로 놓이지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암초덩어리에 세워져있던 돌이 (하지만 옆으로 비스듬히..)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면 이렇게 비스듬하게 암초끝에 걸치게된다.
*인터뷰' 떨어져서 형성되었다면 아마 이렇게 정중앙에 남북방향으로 놓이긴 힘들었을거다 그럼 한가지 가정해보건데 이 부분에 미끄러져서 비스듬한 자세로 놓여있었을건데 그걸 인위적으로 요렇게 판석으로 자세를 바꾸지않았나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돌을 정 중앙으로 밀고 시신을 매장할 때 북쪽으로 머리를 두듯 남북방향으로 길게 돌을 배치했을 것이다. 대왕암 안쪽 벽면에 보이던 인공의 흔적은 돌을 웅덩이 중앙에 제대로 놓기 위해 울퉁불퉁했던 면을 평평하게 깍아낸 흔적일 것이다. 이렇게 대왕암의 안쪽벽면이 깍이고 거대한 돌이 그 중앙에 놓이게된 것이다. 그런데 대왕암 조성작업은 이렇게 끝나지않았다. 대왕암내부를 실측한 결과 흥미로운 부분이 발견되었다. 현재 대왕암엔 동쪽과 서쪽에 물길이 나 있어 늘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서쪽부분이 물이 들어오는 동쪽부분보다 정확히 15센티미터 낮았다.
*인터뷰 이 출수구의 바위를 잘라내거나 깍아내서 수면을 고르게한 것이 자연적인 건 아니고 인공적으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된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이 부분에 있지않나 생각된다.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고여있지않게하기위해 물이 나가는 부분을 조금 더 낮게 깍았던 것이다.
이렇게 1300여년전 사람들은 대왕암의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살려 문무왕의 릉을 조성했다.
안쪽 웅덩이를 고르게 다듬고 주변에 있던 거대한 돌을 중앙에 배치했으며 마지막으로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수로를 다듬었던 것이다.
*조유전 인터뷰 "문무대왕이 소위 화장을 하고와서 뼈가루를 지금 말하는 대왕암에 뿌리고 그리고 나서 그곳을 신성시하기위해선 뭔가 손을 봐야된다 이거죠 그러면은 손을 보고나서 제사를 지내야된다 이겁니다. 단순히 소위 뼈가루를 뿌린거로서만 제사ᅥ가 될 수는 없는거니까 그런 차원에서 손질을 해가지고 일종의 무덤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런 흔적이 될 소지가 많다는 거죠."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해서 대왕암에 뿌리고 수중릉을 조성하기까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인데요.. 아마 1400여년전 당시로서도 파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화장의 과정부터가 그렇습니다. 지금이야 화장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우리의 일반적인 장례문화지만 당시로선 왕의 시신을 화장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실제 문무왕이전엔 왕의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린 예가 전혀 없습니다.오히려 문무왕이후엔 화장을 하는 경우가 눈에 띕니다. (.以遺命 燒柩於<法流寺>南 散骨東海) 이 기록은 34대 효성왕의 장례에 대한 기록인데.. 왕의 유언에 따라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불에 태우고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고 했습니다. (.死後 依佛制燒火 散骨東海) 또 37대 선덕왕은 죽은 후에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문무왕이후에 신라왕가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유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아니라 수중릉을 조성한 것도 신라시대를 통틀어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무왕은 왜 동해바다를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 생각한 것일까요?
비교적 문무왕의 장례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에도 그 이유는 나와 있지않습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유사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눈길을 끄는 기록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기록은 문무왕이 창건했다는 감은사의 창립배경인데..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마치지못하고 돌아가자 신문왕이 역사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무왕이 죽기직전에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왜를 진압하기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즈음에 생을 마친 문무왕이 감은사 가까이에 있는 대왕암에 묻히길 원했다면...그것 역시 왜를 의식했기 때문일까요? 문무왕이 동해바다에 묻힌 이유는?
당시 바다건너에 있던 왜는 어느 정도의 국력과 군사력을 가진 존재였을까? 삼국사기에서 왜가 신라를 침입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왜가 신라를 침입한 기록은 모두 33회...모두 소지왕이전인 신라초기였으며그 시기도 3,4,5월로 집중되어있었다.
*신형식인터뷰 "4,5,6월이니까 주로 우리 춘궁기에 그러니깐 아마 그건 멀리서 왔다고 볼 수도 없구요 아마 식량을 구걸하러 왔다든가 또는 인제 편서풍을 이용해서 한국 해변을 노략하는 약탈자로서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무왕때는 어떤가.. 문무왕때도 왜가 신라를 단독으로 침입한 기록은 없다. 다만 663년 왜의 출병기록이 보이는데 "왜의 수군 천척이 백제를 도우러 백강에 왔다.."
당시는 백제멸망직후로 백제부흥군들이 백강에서 신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왜가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왜는 신라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진다. 일본서기는 네 번 싸움 끝에 배 400척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는 바닷물이 붉은 빛을 띠었다고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라에 대한 왜의 두려움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일본에 남아있다.
일본 후쿠오카시에 위치한 오오노성. 왜는 멸망이후 망명한 백제인들의 도움을 받아이렇게 백제식산성을 쌓았다.
이외에도 당시 왜는 신라에 침입로가 될만한 길목마다 산성을 쌓았는데 모두 10개에 달했다. 그만큼 왜는 신라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종학인터뷰 "663년 백강구전쟁에서 왜의 세력은 완전히 북구주 대마도에다가 백제의 유민을 동원해서 산성을 쌓고 또 수도를 더 산중안으로 옮기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깐 배를 만들어서 해군력을 만들어서 양성한다는 것이 10년 20년에 될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에 있어서는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권은 신라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더욱이 왜는 신라에게 우호적인 손길을 내민다. 왜는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는데 백강구전쟁이 끝나고 5년 뒤 신라에게 배를 비롯한 각종 공물을 바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669년엔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신라에게 전해온다.
문무왕 집권시기 신라와 맞서기에 왜의 존재는 미약했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인터뷰 왜 특히 일본만을 놓고 보면 일본은 큰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넓게 그 당시 동아시아 전체를 국제적인 상황속에서 봐야한다 지금 중국의 거대한 당제국이 건재하고 이다 당제국은 시라의 적국이다 당은 저쪽 티벳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 후방에 있는 일본과 신라는 외교관계를 돈독히 해야될뿐만아니라 그게 잘못되었을 때 후방을 튼튼히 하지않으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어 신라에서는 왜에 대한 관심이 컸다. 당시 동아시아대륙엔 당과..신라 그리고 왜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당을 견제하기위해 왜와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이 왜를 의식해 동해바다에 묻힐정도로 왜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문무왕 집권 당시 왜는 신라에게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문무왕이 동해바다에 묻히길 원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대왕암엔 문무왕에 얽힌 이야기가 한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깁니다 만파식적하면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져있듯이 신비의 피리지요...
삼국유사에 보면 (.吹比笛則兵退病.......號萬波息笛稱爲國寶)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때는 비가오는데 그것이 바로 만파식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파식적의 유래에 대왕암과 문무왕이 등장합니다. ("王吹比竹 竹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문무왕이 죽고 바로 그 다음해 대왕암에선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나타나 당시 왕이었던 신문왕에게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만든 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라는 것입니다.
문무왕이 룡이 되어 나타나 나라를 지켜주는 신비의 피리인 만파식적을 아들인 신문왕에게 주었다..? 설화니만큼 이것이 실제의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설화가 등장하게된 배경속엔 문무왕이 동해바다에 묻히길 원했던 그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대왕암은 강력한 왕권의 상징물로서.. 통일국가가 유지되길 원하는 문무왕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만파식적설화에서 룡이 된 문무왕이 나타났다는 대왕암.. 문무왕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이곳 대왕암을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유사엔 평소 문무왕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왕은 지의법사에게 죽은 뒤엔 나라를 지키는 룡이 되고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김상현인터뷰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겠다고 염원했다 용은 물속에 산다. 더구나 큰바다속에 산다. 문무왕의 평소의 염원을 실현하기위해 바다쪽으로 가야 자기 염원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용이 되길 원했던 문무왕의 생각은 감은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감은사의 중심건물이었던 금당은 독특한 형태로 건축이 되어있는데.. 주춧돌아래 이렇게 일정하게 틈이 있다.
*조유전교수 인터뷰 "이 위에 이제 우리가 이런 길쭉한 돌들이 다 깔려서 덮는다 이거죠 그러면은 덮으므로 인해서 이 내부는 완전히 공간화된다 이겁니다. 그럼 이 위에다가 다시 기둥 초석을 얹어가지고 기둥을 얹어서 이제 건물이 들어서는데 그렇게 해놓고 보면은 소위 마루바닥밑에 앉으나 이 돌바닥밑에 하나의공간이 마련되서 훵 뚫린 공간이 마련되는거죠...그러면 사실은 건물에 이런 공간이 필요없다 이겁니다. 지금까지 이런 공간을 마련한 예도 없고.."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까?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금당의 섬돌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유전인터뷰 "그 기록에 금당최하동항개이혈했는데 구멍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이겁니다..여기 막혀있지만 처음 몰랏죠.. 그러니까 이 구멍을 통해 들어온 용이 금당아래에 있는 틈을 따라 사찰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믿었던 것이다.
*조유전인터뷰 "동쪽으로 구멍을 내서 용이 된 대왕이 와서 서리도록 하게했다. 그런 기록을 가지고 이 건물을 찬찬히 뜯어보니까 부합이 된다 이겁니다. 그 말은 그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 공간이 있어야된다는 거죠 그러나 용이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거고 그래서 소위 호국사찰이면서도 그 공간에 이런 특수한 공간을 마련하므로서 해룡이 된 문무대왕이 서릴 수 있도록한 상징적인 그러한 우리 당시 선인들의 지혜죠..그런 걸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다에 사는 상상의 동물인 용이 어떻게 육지에있는 감은사까지 올 수 있었을까? 감은사앞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흔적이 있다.
물이 왔기 때문에 이게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구실을 했다. 감은사가 지어질 당시엔 바로 이 감은사앞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국대 지리교육과의 김주환교수는 감은사 주변의 지형과 화석을 연구해 1300여년전의 바닷물의 위치를 확인했다.
*김주환인터뷰 지금보다 1미터 10센티 정도 양쪽다 갈수기에 수위가 더 높았엇다. 물이 그만큼 더 높았었다 생각할 수 있고 강폭도 지금보다는 수십미터 더 넓었을거다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하천의 제방이 나중에 축조된거라 생각할 수 있고 수심이 1미터 10센티 높았다면 작은 배들이 충분히 뜰 수 있다. 실제 삼국유사 기록을 통해서도 감은사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1300여년전 감은사주변의 모습이다. 죽은 뒤 용이되길 원했던 문무왕... 그래서 그가 죽은 뒤 바닷속 수중릉이 조성되었고 감은사방향으로 물 빠져나가 10" 바닷물을 따라 용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감은사가 완공되었다.
문무왕은 왜 이토록 용이 되길 원했던 것일까?
경주 남산동에 있는 통일전엔 문무왕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다시 8년간 이 땅에서 당을 몰아내기위해 전쟁을 치른 문무왕.. 그는 왕위에 오른 뒤 16년만에 통일의 과업을이룬다.
당시 문무왕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경주 동대봉산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무장사터가 그것이다.
경주시내에 있는 화려한 절터와는 달리 그리 크지않은 절터엔 사람의 손길이 닿지않은 부숴진 귀부와 탑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곳엔 문무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현장 인터뷰 "기록에 보면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투구를 묻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정도의 유례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 삼국유사엔 전쟁을 마친 문무왕이 이곳에 투구를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이제 안정속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길 염원했던 것이다.
*신형식인터뷰 "문무왕이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전쟁에서 통일의 위업을 했고 전쟁이후에는 이 복잡한 문제를 다 수습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가 부닥쳤을겁니다. 제일 먼저 주변제국의 여러 두려움..그 다음에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귀족의 반발..그 담에 백제 고구려유민의 하나의 반란.. 이런거를 목전에 둔 문무왕으로 볼 때 어떻게 수습해야되겠는가 하는게 사람의 걱정일겁니다." 그러나 당과의 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만인 681년 문무왕은 병을 얻게된다. 당시 나라를 걱정했던 문무왕의 심정은 그가 남긴 유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장례도 치르기전에 왕위를 계승하라는 것이다.
*황수영인터뷰 "문무왕이 통일의 임금이니깐 통일을 이룩한 사업을 계승을 해야되겠구 또 국가의 안태를 걱정을 했겠죠..그래서 그 양반이 용이 되고 본인이 국가일선에 나라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니깐"
문무왕은 평생의 과업이었던 통일국가를 지키기위해 죽어서 용이 되길 원했고..감은사 이후 그의 아들 신문왕은 용이 머물 수 있도록 감은사를 지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만파식적설화가 등장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룡이 되어 나타난 문무왕이 감은사에 머물러있던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이라는 신비의 피리를 전해줬다는 것이다. 이는 신문왕의 통치기반이 된다.
*정영호인터뷰 왕권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정비하고 그게 바로 신문왕땝니다. 그 기초를 바로 문무왕이 다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러한 기초를 만들어주지않았던들 신문왕이 마음놓고 뜻대로 정치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후 만파식적은 신라시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쓰인다.
신라시대 대표적인 종인 성덕대왕신종위엔 용이 하나 새겨져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용이 원통을 짊어지고 있다. 다른 시대의 종에는 보이지않는 형태다.
상원사종에도 비슷한 모양의 원통이 새겨져있다. 이것은 만파식적을 상징한 것으로 문무왕이 용이 되었다는 믿음이 후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신형식인터뷰 그거는 인제 가장 어려웠던 삼국통일을 완성했잖습니까..이 완성한 3국통일은 아마도 그 후세한테 거대한 이 역사적 위업에 대한 훈계 계승의 차원에서 상당히 후손들에게 통일의 위업에 대한 성격을 부각시키는데 애를 쓴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용이 되어 통일국가를 지키길 원했던 문무왕.. 그는 자신의 바램대로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살아났다...
신라시대 대왕암은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물렀던 용의 처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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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공부 합시다...^^ 경주 앞바다로 나오는데 어디가 맞나여?..
경주 앞 바다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수중능이고, 울산 방어진의 대왕암은 문무대왕 왕비의 혼이 서렸다는 장소 입니다. 울산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공부 + 멋진경치 정말 잘 봤습니다.
경주 앞 바다 맞습니다. 도은님 감사합니다.
정월이면,대왕암앞 방생 엄청많이 하지요.. 해맞이도요...^^
저도 방생을 몇 번 가 보았는데요...갈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절에서 방생 가면서 드는 비용을 고아원이나 양로원 또는 불우이웃 돕기로 쓴다면...그래도 방생의 효과가 나지 않을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