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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에서 용정시를 지나 투도진, 서성진을 거쳐 화룡시에 도달하기 전 약 5km 지점에 용성진 청호촌(일명 청파호)이란 한적한 마을이 있다. 청호촌은 한일 병탄 이듬해인 1911년 대종교 종사 나철이 대종교 지사를 이곳에 설치한 뒤 1914년 총본사를 옮긴 곳으로 단군 신앙의 중심지이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거지였다. 이곳에는 1940년까지 단군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청호촌은 연길-화룡 간 도로 오른쪽에 있다. 그런데 이 마을 맞은 편 왼쪽 언덕 밭뙈기 쪽으로 약 100여 미터쯤 올라가면 콘크리트 기둥을 서로 이은 울타리 안에 묘소 3기가 나란히 안장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대종교 3종사인 나철, 서일, 김교헌 선생의 산소다. 묘소 앞에는 각각의 비석이 있다. 3기의 산소 중간에 있는 나철 선생의 묘소 비석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선생 신해지장(大倧敎 大宗師 弘巖 羅先生 神骸之藏)>이란 글이 있고, 왼쪽 서일 선생의 비석에는 <대종교종사백포철형 서일신해지장(大倧敎 宗師 白圃喆兄 徐一 神骸之藏)>,오른쪽 김교헌 선생의 묘소에는 <대종교종사 김교헌 단해지장(大倧敎 宗師 金敎獻 檀骸之藏)>이란 비문이 쓰여 있다.(사진) 묘역 주변에는 <길림성문물보호단위>란 표지석이 있고, 비석 뒷면엔 세 분 모두 반일의사로 계몽활동과 교육운동, 항일무장투쟁을 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홍암 나철은 대종교의 초대 교주다. 전남 벌교 출신인 그는 29세에 문과에 급제, 훈련원 ‘권지부정자’라는 벼슬을 하다가 을사늑약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5적 암살을 기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國雖亡而道可存)는 신념으로 그는 민족갱생의 도가 단군 신앙에 있음을 깨닫고, 1909년 기존의 단군 신앙을 대종교로 체계화시켰다. 대종교에선 이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킴)이라고 한다. 당시 동학과 증산교가 구국 민족 신앙의 발로로 태생된 것이라고 볼 때 현재 국학운동의 정신적,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나철의 대종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국학운동의 선구자였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였다. 나철은 일제하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종교는 지석영, 주시경을 비롯해 조선어학회 등 국문학계와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계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또 3.1운동을 비롯한 무장 항일독립전쟁의 이념적 근간이 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지도자 29명 가운데 21명이 대종교 신자였다고 한다. 특히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의 무장 항일전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은 백포 서일이다. 서일은 함경도 출신으로 한일 병탄 후 1911년 간도의 왕청현으로 망명해 청일학교, 명동중학교 등을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사업에 투신했다. 그러던 중 1919년 여준, 김좌진, 정신, 김동삼, 유동열 등 39인과 더불어 3.1기미독립선언에 앞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김좌진 등과 함께 흑룡강성에 산재한 대종교인을 규합해 북로군정서를 조직, 총재가 되었다. 그는 김좌진을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임명해 역사에 길이 남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어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일은 일제의 경신년 대학살을 피해 흑룡강성 밀산현 당벽진으로 이동한 뒤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 홍범도군, 광복단, 의군부, 혈성단, 대한군의정사 등 3천5백여 병력을 규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총재로 추대되었다. 대종교 총본사도 이 때 청호촌에서 밀산현으로 옮겼다. 대한독립군단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다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그는 밀산현에 남아 교서 저술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1921년 토비들의 습격으로 독립군과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나라를 잃은 슬픔에 동지들마저 무참히 희생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밀산현 당벽진 뒷산에 정좌한 채 자결하고 말았다. 서일의 유해는 당벽진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6년 뒤 나철과 김교헌이 잠들어 있는 청파호로 옮겨졌다. 1934년 대종교 총본사는 발해의 궁성이 있는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겼다. 지금도 동경성 발해진에는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대종교는 발해궁성인 상경용천부 옆에 천진전을 건립을 추진하는 등 교세확장 운동을 펼쳤으나 일제는 1942년 임오교변(단군 신앙이 독립운동의 뿌리가 됨을 간파한 일제가 문서를 조작해 대종교 지도자 25명을 검거한 사건. 이로 인해 대종교 지도자 10명이 옥사하고 나머지는 7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음)을 일으켜 대종교를 탄압하고 청파호에 있는 3종사 묘소도 파괴시켜 버렸다. 홍암 나철이 구월산에서 자결한 1916년 김교헌은 대종교 2대 교주가 되었다. 그는 조선말기 대사성을 거쳐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했다. 일찍 대종교에 투신한 그는 무오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로 <신단실기>,<신단민사> 등 민족사관에 입각한 국사연구와 포교활동을 왕성하게 펼치다 1923년 대종교인들이 학살당한 분을 못 이긴 가운데 병을 얻어 삶을 마쳤다. 대종교 3종사 묘소는 일명 ‘자전거 사학자’로 알려진 동포 역사가 강룡권 선생에 의해 발견되었다. 흑룡강성(헤이룽장성) 목단강(무단장)출신인 강룡권 선생은 1970년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13년간 안도현의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연변역사연구소 설립 이후 자전거를 타고 동북3성의 항일역사현장을 찾아 기록하는데 평생을 바친 분이다. 류연산이 쓴 <혈연의 강>에 따르면 그가 1989년 서일 선생의 묘비를 찾다가 우연히 땅에 묻혀 있는 나철의 비석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곳 묘역은 1990년 강룡권 선생과 청호촌 주민, 그리고 한국의 대종교 지도자들이 뜻을 모아 조성했다. 연길-화룡 간 도로 양 편은 한국의 어느 산하와 다를 바 없이 익숙한 풍경이라 왼쪽 차창 밖으로 신경을 쓰고 보지 않으면 묘소가 옥수수 밭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지나칠 수 있다. 2006년만 해도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길은 청산리 대첩 전적지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만약 한국인들이 북방지역의 독립운동 전적지 답사를 간다면 이곳에 내려 꼭 참배하기를 권고하고 싶다. 이곳은 2006년 2월 1년간의 연수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다. 한 겨울 새벽 동이 틀 무렵 산소에 여명이 비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한참이나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나는 곳이다. 산소 주변의 풀은 겨울이라 다 말라 죽고 눈도 녹지 않았다. 묘소 상석에 놓인 시들어 버린 꽃은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이곳엔 일 년에 한번 한국의 대종교 종단 지도자들이 참배를 하러 온다고 한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북방의 항일유적지 순례여행 코스에도 이곳이 들어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이국에서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순국열사의 무덤치곤 초라하기 짝이 없다. 봉분 위의 잔디는 거의 다 말라죽고 봉토도 많이 훼손됐다. 묘소 옆에 있는 표지석 글자도 알아보기 어렵다. 김교헌 선생의 비석 귀퉁이는 깨진 채 방치돼 있었다. 홍암 나철 선생의 비석 뒤에 새겨져 있는 서거 일자는 풍상에 씻겨 알아볼 수조차 없다. 더욱이 서일 선생이 돌아가신 연대와 김교헌 종사의 서거 연대도 엉터리다. 비문에 있는 서일 선생의 서거 연대는 개천(단기)4384년이고, 김교헌 종사는 개천(단기) 4158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일 선생이 자결한 해인 1921년은 단기 4254년이다. 2007년이 단기 4340년이고 보면 서일 선생은 오지도 않은 미래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김교헌 종사의 서거연대인 1923년은 단기 4256년인데 4158년으로 되어 있다. 김교헌 종사가 태어난 해는 1868년인데 1825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 한심하다. 두 사람 사이 생몰연대도 226년이나 차이가 난다. 길림성급 문물단위치고 3종사의 묘역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하기야 중국에서 이런 엉터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대종교측도 이 사실을 알까? 선열들의 묘소가 중국에 있다고 이렇게 엉터리로 방치해선 안 된다. 제2의 강룡권 선생같은 분이 동포들 사이에 또 나와야 한다. 연변인들은 주변의 동포들이 다들 떠나갔다고 한 숨만 내쉴 것이 아니라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심정으로 지킬 것은 지키고 버틸때까지 버텨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모든 걸 미뤄서도 안된다. 돈이 부족하고 관이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핑계는 해명이 아니라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연변의 주인은 연변동포다. 홍암 나철은 돌아가시기 전 “내 뼈를 북방(만주)에 묻어 달라”며 유언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하기야 지금도 북방에 뼈를 묻고자 하시는 분들을 더러 만났다. 조선인 동포들이야 중국 땅이 태어나고 자란 고국이니 중국에 묻히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재중 한국교포가 그렇게 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연변과기대 캠퍼스 안에는 몇몇 한국인의 묘소가 있다. 주수길 연변과기대 부총장도 과기대 캠퍼스에 묻히고자 하는 분 중 하나다. 그는 대구출신이다. 경북고(54회)와 서울대 건축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미시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귀국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96년부터 줄곧 연변과기대에서 동포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잘 생긴 외모와 겸손한 말씨. 탁월한 능력으로 연변과기대 차기 총장감으로 꼽히는 인물 중 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한국의 이름난 대학 교수직을 마다하고 만주벌판에서 동북아경제공동체를 위한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무리 명예가 좋다지만 2천위안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교수질(중국 동포들은 그렇게 부른다)을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한번은 "겨울방학 때 따뜻한 한국에 들어갔다가 개학하면 중국으로 들어오시지 왜 추운 연변에서 사서 고생을 하시느냐"고 묻자 “내가 묻힐 땅인데 그렇게 한국에 바삐 오갈 이유가 없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철 선생처럼 그도 북방에 묻히고자 하는 것이다. 박진관/2005 |
첫댓글 영남일보 2007.03.19
요즘 종교와 한국독립운동사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저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인데요..^^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 주수길 부총잠님에 관한 내용은 좀 삭제해 주셨더라면 더 훌륭한 자료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저 글을 읽다 보니 조만간 우리 독립운동의 대표적 중심지였던 만주 일대에 함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솔직히 편한 여행지는 아닌데.. 같은 돈이면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는데.. 그런데 한 원로 학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자신의 모든 재산과 안락함, 그리고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바치러 저 험난한 이국 땅까지 갔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여러분은.. 단지 자기 자신의 일로써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왜 이국 땅에 가는 수고로움 조차 하지 않을려고 하느냐.."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