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자주 들어보셨을 이 문장은 여러 사람이 이야기한 것이지만,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바치셨던 기도의 일부이기도 하다.
성녀의 대표 작품 중 영혼의 성이 있는데, 선녀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과 결합되기까지의 과정을 적은 책입니다.
성녀는 하느님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가, 때로는 하느님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하느님을 느낄 수 없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는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금 하느님을 체험하고, 결국엔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체험을 이 책에서 묘사합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 그리고 이 과정이 행복한 체험인 동시에 엄청난 고독과 절망의 체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성녀는 자신의 실제 삼을 통해 증언합니다.
하느님을 알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분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매우 벅차고 황홀한 경험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알기도 쉽지 않고, 하느님께 다가가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기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데레사 성녀 역시 이를 잘 알았기에 자신의 신비체험을 비유와 상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성에 비유하여, 그 성이 바깥쪽으로부터 크게 7개 구역으로 나뉜다고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아 처음 들어가는 지역을 1궁방이라 하고, 이후 봉사와 사랑을 통해 2궁방으로, 진지한 신앙을 통해 3궁방으로 가는데, 여기까지는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4궁방부터 7궁방까지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과 주도로 다다를 수 있는데,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죽어야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결국 7궁방에서는 하느님과 완전한 이체, 즉 영적 결혼의 상태, 성인이 되는 상태, 성스러워지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을 알게 되었을까?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를 통해서 당신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후 하느님은 노아를 통해 세상 구원 의지를 드러내셨고, 이후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내리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해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 준수를 통한 계약의 실행이 구원의 조건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해설하여 전달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대로는 이 말씀을 잘 들었고, 때로는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편리함이 더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 당근과 채찍도 주셨지만,
완고한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당신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시어(육화, 강생) 인간이 겪어야 하는 삶의 모든 과정을 직접 겪으시며, 인간에게 삶의 길과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외로움과 고통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예수님은 참된 삶의 길과 진리에 대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셨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가난이란 물질적 궁핍뿐만 아니라 사회적 궁핍을 포함합니다. 현실이 곤궁한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역설을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현실은 불행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행복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느님과 함께하느냐 아니냐 여부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하느님은 인간의 기대나 욕망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원래 하느님이 내 뜻을 이루어주시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의 공통점은 역사를 통해서 체험하고 알게 된 하느님, 우리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당신을 인격적 혹은 인간적으로 직접 알려주신 하느님입니다.
역사적 체험과 인격적 체험, 이 두가지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하느님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을 성경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고, 따라서 하느님이 원저자이시기에 분명한 진리를 오류 없이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담고 있는 진실이자 진리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인간 저자들은 그 시대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범위 안에서 표현하고 있기에, 표현된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우리에게 보내는 결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과거에 갇힌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창조주, 유일신, 전능하신 분이라고 알려주는데, 이는 신약에서도 유효한 계시입니다.
구약 역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구원과 신앙의 긴 역사가 시작되었고, 하느님에 대한 기도와 예배가 이어져 왔습니다.
구약이 없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 전체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도신 사건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계시는 신약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에 대한 답, 인간에 대한 답, 그리고 죽음과 부활과 구원에 대한 답이며, 믿는 이들의 미래에 대한 답입니다.
구약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이 신약을 통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비추는 빛입니다.
빛이 있기에,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이신 그분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4,16)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 사는 것이고, 나를 위해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후 교회는 이렇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사랑하기는 쉬우면서도 참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데레사 성녀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더 찾을수록 오히려 더 멀어지고, 심지어 어두운 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일평생 기도하고 봉사하며 사셨던 인도 콜카타의 마더 데레서 성녀 역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때로는 칠흑 같은 암흑의 시간, 고통의 체험이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결국 황홀한 시간이고, 참행복의 시간이었다고 많은 분이 고백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수많은 성인과 인물이 하느님을 찾아 헤메다 결국 그분을 만났던 것처럼, 성모님께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며 순례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 저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라.
아무것에도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게 하리라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에게는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고 오로지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