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베트남 통해 본 특권의 세습
안준현 기자
입력 2026.09.18. 23:45업데이트 2026.09.19.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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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만난 33세 남성은 호찌민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대학 졸업장을 받았지만 지금은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며 산다. 변호사를 꿈꿨으나 집안에 공산당원이 없어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했다. 20대 여성도 의대를 마친 오빠가 의사 대신 병원 원무과 직원으로 일하는 이유가 아버지가 당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력보다 집안 배경과 연줄이 앞서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당연한 일처럼 담담하게 말했다는 점이다. 분노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지금 베트남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다. 1990년만 하더라도 1인당 GDP가 121달러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5340달러에 달할 것으로 IMF는 내다본다. 36년 만에 소득 수준이 40배 이상이 된 셈이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외국 기업이 공장을 세운 덕분에 수출이 성장을 끌어왔다. 나라가 이만큼 커졌다면 기회도 넓어졌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경제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기회를 나누는 방식까지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당원 여부와 집안 배경이 취업과 승진에 영향을 미친다는 불만은 여전하다. 현지에서는 권력자나 고위 관료의 자녀·손주를 ‘꼰 옹 짜우 짜(관리의 자식과 손자)’라고 부른다. 베트남 정부도 친인척과 측근 등용을 공직 사회의 병폐로 지적해 왔다. 평등의 원칙은 남아 있지만 예외는 권력과 가까운 곳에서 생겨나는 셈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떠올랐다. 인간을 몰아낸 동물들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권력을 쥔 돼지들은 나중에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고 덧붙인다. 특권을 없애겠다던 혁명이 또 다른 특권을 만드는 이야기다. 반세기 전 기존 특권층을 몰아냈다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꼰 옹 짜우 짜’라는 말이 통용되는 모습을 보니 동물농장의 우화가 낯설지 않았다.
일부가 특권을 누리는 구조가 베트남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은 베트남보다 훨씬 먼저 잘사는 나라지만 부모의 자산과 인맥, 정보가 교육과 취업, 주거의 출발선을 가르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에 권력을 잡은 뒤 자신과 자기편에만 다른 잣대를 댄다는 논란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됐다. 최근 장관 인사에서도 청탁 의혹이나 겸직 문제가 불거지며 결국 ‘남에게 요구했던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느냐’가 쟁점이 됐다.
정부는 올해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인사에서 먼저 실천해야 한다. 자기 진영에는 느슨한 잣대를 대고, 권력 가까운 사람의 예외를 눈감는다면 구호는 공허하다. 베트남 청년들이 부조리를 “원래 그런 것”이라 받아들이던 모습이 오래 남은 것도 그래서다. 한국은 이미 잘사는 나라가 됐지만 특권의 세습까지 끝낸 것은 아니다. 지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예외부터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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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현 기자국제부
조선일보 베트남·동남아 특파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국제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2022년 입사해 사회부 시청·기동취재팀을 거쳐 국제부에서 세계 곳곳의 이슈를 쫓고 있습니다. 한때 논문으로 세상을 바꾸는 학자를 꿈꿨지만 이제는 기사로 세상을 바꾸는 기자로 살아갑니다. 사초(史草)를 쓰는 심정으로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고 국경과 장르를 넘나들며 세상만사에 질문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