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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7) 2024. 11. 3
은혜 나눔 공동체
사도행전 4:32-37
자기의 가진 것을 다 알지 못하는 어느 골동품 수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 황실의 물잔 사진을 보고 매료되어, 그 물잔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니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그 물잔의 소장자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가진 것에는 집중하지 않고, 가져야 할 것에만 집중한 결과입니다.
이 예화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후, 모시다 드리는 차 안에서, 원로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예배드릴 수 있고, 예배당에 나올 힘(건강)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할 수 있고, 죽으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깝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만 은혜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안에서 누리고 있는 은혜에 먼저 집중하기고, 누리면서 감사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
베드로와 요한의 석방 후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박해의 위협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거나 근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졌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성령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일어나는 현상 – 불가능한 가능성>
오늘 본문은 성령이 충만할 때(다스림을 받을 때), 일어난 현상을 보도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식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이 현상은 이미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입니다.
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해지자 그때와 아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공통적인 것 세 가지만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현상은 믿는 사람이 다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 마음 한 뜻을 품게” 된 것입니다.
속담에 ‘한 어미 자식도 오롱이 조롱이’라고 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서로 다릅니다. 하물며, 다른 부모,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을 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해지자 “한 마음 한 뜻을 품게” 되었답니다.
이 말씀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무슨 일에든지 무조건 “한 마음 한 뜻을 품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초대교회 지도자인 바울과 바나바는 훗날 왜 다투었던 것일까요?(중간에 도망친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를 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음 한 뜻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 무조건 하나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거룩한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일에도 “한 마음 한 뜻을 품을” 수 있습니다(범죄 조직 – 악의 지향성).
‘거룩한 지향성’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도 바울의 교훈 – 고전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삶의 목적(‘거룩한 지향성’)이 변화게 되고, 모든 성도가 이 마음을 품게 됨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의 과정에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생각이 들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피차 양보하고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끝까지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고 드는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성령 충만하셔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현상은 담대하게 말씀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앞서 오순절 성령 강림 때도 숨어 지내던 제자 공동체가 방언의 은사를 받고 밖으로 나가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각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알아듣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증언합니다.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금지했지만,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2:43)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협박과 박해의 위협에도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각오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증언은 더욱 힘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자세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딤후4: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도자는 고난을 각오하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성령 충만’의 열매입니다.
세 번째 현상은 물질관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4~35절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성령이 임하실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변화될 뿐 아니라 물질관도 바뀝니다.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돈처럼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많으면) 더 큰 집에 살 수 있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고, 더 좋은 차를 탈 수 있고, 각종 보석으로 치장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위세를 떨 수도 있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고...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가요? 그래서 모두들 돈을 좋아합니다. 저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갖은 수모를 견뎌가며, 잠도 줄여가며,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간신히 모은 돈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그래서 한번 움켜쥐면 절대 놓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 10장에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한 부자 관원에게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막 10:21). 그러나 부자 관원은 재물에 대한 탐심 때문에 재물을 드리지 못하고 그냥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마 19:22).
그만큼 돈이 가진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돈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돈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급기야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딤전6:10),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라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성경이 반복적으로 경고할 만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저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성령 충만한 것에 더해,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습니다.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결과’(성령 충만)로써 나눔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해석하면, 물질을 나눈 것이 아니라 ‘은혜를 나눈 것’입니다(물질 나눔 공동체가 아니라 은혜 나눔 공동체). 그리하여 ‘무리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두 가지 특징>
이렇게 은혜를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한 관심’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이웃을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형제자매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을 갖다 보면 그들의 필요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밭과 집을 내어놓게도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자발성’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고 내놓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진 재물이 많으면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헌신을 강제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그런 식으로 헌금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축복과 헌금을 맞바꾸라고 교인들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닙니다.
헌금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자발성’이 보장되지 않는 헌금은 진정한 의미의 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밭과 집을 팔아서 헌금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과 교환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했을 뿐인데, 그 메시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그렇게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축복 받는 비결> 그런데 예수님의 우리가 축복받는 비결 하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를 좋아하고, 나눔을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 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축복받는 비결’임을 알려주십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나눔의 삶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 같아서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시겠습니까? 탐욕스러운지를 보면 됩니다. 예,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단 교주들의 특징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탐욕스럽습니다. 자신을 위해 불의한 재물을 모아둡니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도 욕심부리는 교회와 교인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또 주목해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34~35절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자기가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 말은 사도들에게 위탁했다는 말입니다.
즉, 교회에 맡겨서 교회로 하여금 선교 사역을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도록 하는 방법이 사도행전적 헌금 방법입니다.
<대표적인 인물 – 바나바>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36~37절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교회에서 ‘바나바’로 잘 알려진 이 사람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구브로(요즘의 사이프러스, Cyprus)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바나바는 사도 바울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나바’는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는데,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평소 그의 성품을 봐 온 성도들이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바로 이 ‘바나바’에서 오늘날 우리 감리교회의 평신도 직분 중에 ‘권면하며 가르치는 사람’인 ‘권사’라는 직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난 후,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고, 또한 지도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마도 자신의 재산을 자원하여 헌금으로 바친 최초의 인물이 바나바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선구자가 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구자를 기억하게 됩니다. 바나바가 바로 그런 경우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나바의 헌신이 다른 사람들의 헌신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누가는 특별히 바나바를 기억하여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맺는 말씀 - 은혜 나눔 공동체가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사도 교회도 초기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그런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한마음으로 연합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진정한 나눔이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한 물질 나눔이 아니라 ‘은혜를 나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소유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