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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 40년의 미술, 공예 흐름 照明
광복40년 오늘의 문화예술/ 미술·工藝편
-전승적 직공에서 종합과학의 기수로
장윤우 / 공예가·.성신여대 교수
지난 40여년간의 공예·디자인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와 팽창, 그에 따르는 논란과 문제점 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산업발전과 인구팽창, 홍수 같은 외래문화의 유입범람 등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큰 영향을 급속히 미친 것이다. 인간생활과 환경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고 생활에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공예와 디자인 영역을 해방(1945) 당시에서부터 오늘(1985)에 이르기까지 구분하여 개관하고 변화와 발전에 따르는 문제점을 점검하며 현황과 대책, 전망을 요약해 본다.
1949년 국전이 탄생하다
1945년 민족해방과 그 이전 일제하에서의 공예의 개념과 오늘의 개념은 확실히 다르다.
수공예(Handi craft)적이고 민예적, 실용적인 한정적 상황에서 일종의 쟁이(匠人)로 무시당하던 당시에 비해 양산공예, 산업미술로서의 개념확대와 작가예우로서의 수적, 질적 향상 및 세분화, 사회의 기여도 정규교육의 숱한 인재배출들은 미미한 전승공예적 직공 및 장인과 도제식, 공방식, 전수로 명맥을 잇던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을 것이다. 하물며 디자인에서야 말할나위 있으랴. Design이란 어휘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意匠, 圖案, 考案, 下圖, 設計로도 후일 쓰일 정도였다.
근대공예의 시기를 조선조가 일본에게 합병당한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식민지시대와 이후 조국 광복 이후부터 1970년을 전후한 때로 본다면 여명은 왕궁미술관(돈화문)안에 진열된 외국현대공예품의 구입과 합방이전에 태동되었던 李王職미술품제작소의 창설, 여기에서 나오는 粗惡한 모조품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崇文賤技의 폐쇄적 사상이 공예를 천박하게 만들었으며 다만 생활용구로서의 민예품만이 순박하게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 공예 진작을 위해 관립공업전습소와 경성미술품제작소가 창립되어 金工, 陶磁, 漆工, 染織部 등을 두었으며 1917년에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공예학원이 설립되어 木工, 鐵工, 藤工, 飾工, 錫裝, 사진, 인쇄의 6과를 두고 실기와 이론을 교습하였다. 그 이후 日人 유종열이 세운(1921. 5. 22) 조선민족미술관과 1925년 김봉룡이 창설하여 20여년 간 후진을 양성한 나전칠기공예소, 그리고 鮮傳(조선미술전람회 약칭) 11회때(1932)부터 추가된 공예부는 해방전 해(1944) 23회까지 지속되어 오늘의 공예를 형성하는 시대적 배경이 된다.
日人의 차별 속에 출품한 작품들은 전통적인 목칠, 자수, 염직, 도자, 완초, 벼루 등의 석공예, 죽세, 금공 등이었으나 조형적 가치보다는 토산품 인상이 짙고 일인에 영합하려는 직공출신의 전승적 기능인들이었다.
1946년 미군정 밑에서 결성된 조선공예가협회는 지속한 공예의 질적 향상과 저변확대, 雨後竹筍처럼 난립된 공예품 생산업자를 정비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1949년 우리 손으로 다시 탄생된 국전은 1회를 넘기자 마자 6·25전란으로 다시 끊겼다가 1953년에 이르러서야 2회전을 맞이하였다.
임숙재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여(1928) 서울 안국동에서 도안사를 경영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박람회에서 공예도안 업무에 종사했고 이순석은 같은 학과를 졸업한 뒤(1931) 그 해 최초로 도안전을 가져 우리나라 디자인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3회에 이르러서야 국전이 정돈되고 있는 것은 작가들이 작품을 할 수 있는 생활기반 안정이 돼가고 있는 때문이라고 이경성은 설명하였으며 강창원, 김재석, 이순석, 김중현, 장선희, 장기명, 김춘희, 김진갑 등이 심사위원 또는 추천작가로 참여했고 유강열, 백태원, 백태호, 권순형 등이 출품하여 특선되고 있다.
이 무렵 서울대 미대(1946)와 홍대 미술학부(1952) 이대 등에 공예계학과가 설치되어 공예와 디자인의 새로운 교육이 실시되고 인재가 배출되며 국전에도 응모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리가 되던 국전공예부가 7회전부터 눈에 띄게 위축되어 '…안이한 타협과 협상의 시장' '…백화점안의 토산품 판매장' 같은 분위기라고 혹평을 받기도 하면서 1980년에 이르기까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발전과정에서 관전의 독점이라는 비판과 심사위원, 추천·초대작가 선정, 수상작 등의 잡음과 시련을 피하지 못하였다.
결국 30여년의 功過와 우여곡절 끝에 문예진흥원에서 민간주도형식의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변형되었고, 이제 다시 순수한 민간주도라는 입장에서 국전초대작가출신 모임과 한국미술협회 그리고 별도의 기구구성으로 공모전인 미술대전의 이관을 주장하고 있다.
귀추가 어떻든 간에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뚜렷한 행사로 많은 공예미술가를 배출해 왔고 이정표를 세웠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전통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산업구조와 量産(Mass product)에 따르는 생산디자인(Product Design)의 문제가 해외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젊은 작가들에 의해 대두되면서 또한 필연성에 의해 확대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과 인체공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시각디자인(Visual Design) 包裝(Package) 공업디자인(Industrial Design) 환경디자인(Environmental Design) 공예디자인 등으로 전공의 세분화가 비롯되었다.
그 중요한 양상이 1968년에 발족된 상공부 주관의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였다.
국전 공예부가 심미성, 逸品적인 공예미술지향인데 비해 상공미전의 공예와 디자인은 다분히 기능적, 양산적인 제품지향이었다. 양립된 결과는 작가들의 主전공을 분명히 하였고 수적, 질적 발전을 가속시키었다.
명칭도 1979년에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으로 개칭되었으며, 한국디자인 포장센터(1969설립)가 주관하여 수출상품 및 내수제품, 포장, 디자인개선과 전문디자이너 양성에 큰 몫을 담당하고 금년으로 20회를 맞이한다.
이를 성취케 한 준비단계로서 정부시책으로 발족된 상공부 산하의 공예시범소(1958. 3)를 빠뜨릴 수 없고, 민간단체로서의 조선산업미술가협회(1945. 12. 27 설립, 현재까지 37회전을 갖고 있는 가장 수명이 긴 대한산업미술가회의 前身) 또한 민전으로서 현재 21회째의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1970년까지의 근대공예는 2대 관전과 민전, 그룹전, 개인전 및 각 미술대 전공생들의 미전 등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창의적 디자인(Imaginative Design)과 기술적 능력(Technical Proficiency)의 합일이 등한시된 稚氣어린 시대의 고비를 넘기려 하고 있었다.
民展의 활성화와 해외교류 활발
1972년 10월 20일 신세계미술관에서 한국디자이너협의회(약칭 KDC)가 창립전을 가졌다.
박대순, 이신자, 엄광섭, 이우성, 장윤우 등 현직 대학교수, 강사와 관련업체의 디자이너 등이 주축으로 시각디자인, 공예미술, 공업디자인의 3부로 구성되었다.
같은 해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가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등 시각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신세계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가졌으며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인협회(KSID)도 민철홍 회장 부수언 등을 중심으로 9인이 같은 장소에서 출범되었다.
한국공예가회(KSCD)도 74년 9월 신세계미술관에서 9인의 창립멤버로 스타트하였으나, 6회전인 79년에는 강찬균, 김덕겸, 임무근 등 39인으로 늘어나더니 80년도에는 무려 103명이나 된다.
그외에 한국현대도예가회, 한국도작가회, 녹수회, 한국귀금속공예가협회, 공예동우회, 토전, 채염회, 전승공예회 등과 각 대학동문전(중앙공예회, 홍익금속공예회, 화경도예회, 난공예회, 성신금속회, 서울금공예회, 向湖展, 온공예회, 염미회, 동미회, 雲美會, 陶牛會, 가을工藝會, 陶象展, 중앙공업디자이너협회, 홍익섬유조형회 및 지방전(경북공예가회, 부산디자인협의회, 전남산업디자인협회, 부산공예가회, 제주디자인회, 경북시각디자이너협의회) 등 그룹전이 창립되면서 갈수록 확산 비대하고 활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官展의 폐쇄성과 계속 배출되는 예비작가 혹은 중앙과 지방이라는 지역의 편차를 지양한다는 명분의 민전도 이상할 만치 활성화되는 경향이고 해외로 이끌고 나가는 작품전 및 작가의 숫자도 갈수록 불어난다.
20세기의 예술로 일컬어지는 산업디자인(비비스힐리어)과 현대공예의 70년대는 한마디로 뜨거웠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공예와 디자인은 뿌리를 내렸다. 큰 비바람이 몰아쳐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굳굳하게 섰으며 가지를 많이 뻗었다.
그것은 80년대를 향한 아프고 긴 진통의 행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픔이 없이 새로운 생명이 창조 될 수 있을까"
80년을 들어서면서 문예연감 공예·디자인 槪評 머리글에 필자가 얹은 기억이 새롭다.
78년을 정리하면서 作況을.
첫째, 개인전과 공공전이 두드러졌다.
둘째, 시대에 맞춘 산업공예의 방향이 정착되어간다.
셋째, 해외교류가 활발하여진다.
넷째, 도예, 염색 일색에서 汎공예화의 경향이 나타난다.
다섯째, 지방작가들의 활동이 괄목할 만하다.
이렇게 요약했거니와 다음 해엔 학회의 결성과 문제점의 부상을 첨가시켰다.
우선 서울과 지방의 공예, 디자인계열 학과나 연구소가 설치된 교육기관을 일견하면(無順) 서울대미대, 홍대 미대, 이대 미대, 한대, 중앙대, 경희대, 숙대 미대, 건국대, 단국대, 성대, 국민대, 동국대, 성신여대 예대, 세종대, 동덕여대, 경기개방대, 상명여대, 서울여대, 경기대, 인하대, 인천대, 명지대, 영남대, 경원대, 계명대, 효성여대 미대, 부산대, 동아대, 동의대, 부산산업대, 부산여대, 목원대, 배재대, 한남대, 호서대, 원광대, 전북대, 전주대, 군산대, 조선대, 전남대, 충북대, 청주대, 청주사대, 강원대, 관동대, 상지대, 공주사대, 경남대, 경상대, 마산대, 제주대 등과 서울예전, 숭의여전, 서일공전, 신구전, 부천공전, 부산여전, 울산공전, 인덕공전, 대유공전 및 각 대학교 부설전문대 그리고 고교과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망라되고 있다.
해방 이듬해에 서울대 예술학부에 유일하게 설치된 당시를 회고하면 격세지감이 있고 수출 산업 육성 및 관광자원화의 정부시책과 '88올림픽 대회를 계기로 유추하건데 증가될 전망이다.
그러나 70년대는 양적인 팽창으로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작가군(80년대에 들어서서도 없어지진 않았지만)과 작품전, 이합집산하는 그룹으로 골치를 앓기도 했다. 현대공예와 새로운 디자인 Concept의 미명아래 뿌리가 없는 작품(?)이 횡행하고 국적도 불분명했다.
직공이나 도제식 전수로 명맥이 이어진 시대에서 급속한 외래문물에 기인한 외형만의 변화, 알맹이가 없는 교육이 새세대들에게 과연 합당한가.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자성론도 있었다.
전통이 없다. 낡았다고 투덜댈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이론적, 사적 배경을 정립시키기 위한 태동이 있었기에 공예인 스스로 학회를 결성하고 모임을 재정비하는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한다.
한국미술 5,000년전이 일본 교오또오(京都)에서 비롯되어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스미소니안 박물관, 독일 전시와 영국의 대영박물관 전시를 통해 특히 금세공, 도자기 등 공예미술의 진수를 보여주었을 때 오직 경탄밖에 없었던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연이은 학회발족과 세미나 개최
79년 11월 한국디자인학회가 창립되었다. 시각·공예·환경·제품·섬유·장식·포장디자인과 디자인평론, 디자인심리학, 디자인미학, 디자인史의 부문 연구회를 두고 80년 7월 1일 1차 연구발표를 가졌다.(연구책임자 朴大淳)
수출산업을 위한 산업디자인개선 연구'로 문교부 학술조성비를 받았다.
다음해 81년 7월 24일 '디자이너의 고객과 소비자'를 주제로 정기세미나를 가졌다.(한양대 콘서트·홀) 미국 시라큐스大 디자인학 부장이며 ICSID회장인 아더 J·플로스교수가 주제발표를 했다.
현대디자인학회(회장 권순형)도 뒤이어 발족하여 6월 12일(무역회관) 한일디자인세미나를 가졌다. 일본측에서 勝見勝外 우리측에서 정시화교수가 주제발표를 했다. 2개의 디자인학회가 공예·디자이너들에 의해 출범된 것이다.
80년의 스타트는 학회 연구활동으로 번거롭다.
'81국제산업디자인대회(ICSID)가 서울에서 처음 개최되었다.(7월 28일·한국무역협회)
주제는 '미래의 산업디자인'
- 산업디자인에 대한 미래의 도전
- 도구의 생태
- 산업디자인 없는 산업디자인이란?
- 미래의 산업디자인
- 홍콩의 산업디자인 - 현재와 미래
美, 日, 자유중국, 濠洲, 홍콩의 대표가 발표를 했으며 우리측에서 민철홍교수가 '한국산업디자인의 정착과 현황'에 대해 발표한 뒤 토의를 가졌다. 한국은 1973년 10월에 정식 가입되었으며 대회의 유치 효과는 컸다.
81년 3월 31일 민속공예학술회의가 있었다(신라호텔)
주제는 '민속공예의 현대적 의의'와 '민속공예의 현대적 방향' 참석자는 장문호, 이경성, 임동권, 장윤우, 권명광, 맹인재, 정담순 등 5인이었다.
민속공예의 개념은 오늘날 무너지고 말았다…현대공예의 목표가 과거의 귀족공예처럼, 단 한사람의 주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만인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듯이 민속공예의 방향도 세계공예의 일원으로서 민속양식의 확정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의 공예가는 우선 기술자 이전에 사회학자가 되어서 자기가 만든 공예가 인류의 행복을 촉진한다는 생각밑에서 디자인하고 제작하여야 한다고 이경성씨가 말한데 이어 우리에겐 본뜸이라는 게 있다. 이 근거는 탁월한 창의력을 지닌 작가를 가르치는 방편으로서 사용한 표본을 그 추종자가 師匠의 작풍을 따라 공예품의 模作을 만드는데 있다고 하겠으나, 이 본뜸의 수요는 현대의 유행풍조에 따라 급격히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유명품의 본뜸은 그렇다손 치고 방불한 것은 도리어 골동품상을 현혹시키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인간문화재 지정 등의 기록을 따르는 것만이 전통공예의 繼承이 충분히 달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결국 민속공예의 전통은 인간에서 인간에로 전달되는 창조적 예술의식 즉 마음이 이어져야만 그 전통성이 현대 속에 뿌리를 뻗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게 장문호의 견해이다.
무서운 제3세대의 부상
전통의 발전과 무형문화재의 발굴(79년 12월 문예진흥)이 논의되었다.
전통공예기술의 보존, 보급을 위해 당국이 지정한 인간문화재의 공예전이 5회부터(80년 9월) 전승공예전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규모를 확대시켰다.
예컨대 박균석의 <법고>는 대통령상 수상작품답게 장대하였다. 사찰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북인데 북통과 밑받침은 피나무로 만들고 단청으로 시문하였으며, 한국산 황소가죽을 정성스레 다듬어 완성시켰다.
그러나 해를 거듭해도 출품자의 면모나 수상자, 심사위원의 면모가 바뀌는 것 같지 않았다. 옛 사람들도 古學今用이라 했다.
전통의 현대화를 누구나 이야기하고 당국에서도 지원하고 있음에도 여섯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첫째, 무형문화재의 보호냐, 전승공예의 발전이냐, 둘째, 심사위원의 구성, 셋째, 출품자의 같은 면모, 넷째, 출품의 분야별 기복이 質量 모두 극심, 다섯째, 전시의 문제, 여섯째, 분야별 확대.
우리 생활이 史的 변천에서 내외적인 상황과 自生的인 원인으로 많이 바뀐만큼 시대성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1부 전승, 2부 현대, 3부 인간문화재식으로 확대하자는 제의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창작공예 우위를 주장하는 나머지 전승공예를 경시하여 침체를 부채질하고도 있다. 차라리 시대에 부응하는 관광민예품이나 토산품 개발에 역점을 두자고 한다.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더욱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주최하는 전국공예품경진대회가 15회를 마크하고 특히 지난 해(1984년)부터 병행된 올림픽기념품 공모전시가 활기를 띠워감에 업계에서 많은 공예가 디자이너의 참여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입상자의 특전으로 공예산업자금이 우선 지원되고 경영 기술 및 디자인 지도와 제반행정적 사항이 우선 지원되며, 올림픽기념품 생산업체로 우선 지원받는 혜택 등이 뒤따르는 이유도 있다.
여명기의 공예에서 근대공예를 거쳐 세계선진국들과의 현상을 수렴하고 호흡을 같이 하려는 현대공예의 시점에서 1988년도는 커다란 분기점이 될것임에 틀림없다.
푸대접을 받던 공예가 한 술 더 떠서 이젠 한시라도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일상생활과 환경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간 것이다. 공예란 원래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에서 미적, 용적 가치가 있는 일체의 것'이라고 정의하거니와 사람들은 공기가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으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은 커녕 존재마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공예 속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공예의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
만인이 고루 쓸 수 없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W.모리스)
전통과 질서에 충실하고 무명에 자족하며 우리의 선과 형을 순박하게 빚어내는 선대 장인들에 감사를 드린다. 서민의 희노애락이 점철된 질박한 용품들.
그에 비하면 창작발표전인지 상품판매전인지 이해못할 전시를 연례행사로 치루며 지방순회까지 곁들여 賣名과 바겐세일하는 사이비 작가들의 후안무치가 횡행하는 연대가 부끄러워진다. 전시회의 러시도 재고돼야하고 동문끼리 혹은 지역성으로 아류를 형성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중, 삼중으로 가입된 그룹전, 성격도 없이 과중한 부담과 형식에 흐르는 안이한 작품태도를 조장하기도 한다. 치열한 작가정신은 결여된 채 세월만 흐르면 자동적으로 서열이 높아지는 허장성세도 없어져야 한다.
84년 8월 29일 창립전을 가진 금속제3그룹은 공예의 제3세대를 선언한 본보기가 된다. 도예, 염직, 목칠공예에서도 의당 나올 것으로 본다. 어차피 물은 흘러가고 새 샘이 솟는다.
해방 40년, 공예와 디자인무대에서 적지 않은 작가들이 浮沈했다. 무서운 제3세대들이 떠오르고 있다.
어차피 누군가가 떠 올려야 할 일이기에 활동이 빈번한 작가를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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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공예의 현대화와 우리 것의 세계화
이상 공예와 디자인을 연대적으로 조명했다. 기능시대의 공예는 그렇다치고 종합과학으로서의 산업디자인(ID)은 이제부터가 주목된다. CAD(Computer Aid Design)와 인체공학, 시각언어로서의 Communication기능 전자모체 등이 갈수록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동·서양화, 조각, 서예, 사진, 건축뿐 아니라 일체의 예술문화 활동이 공예디자인과 복합되어 장르의 구별이 없는 양상이 전개되어 간다. 한국디자인의 미래에 관해서는 유능한 필자가 앞으로 나와 연구해 주기를 바란다.
총체적으로 보건대 한정된 재료와 기법의 수공예시대에서 기계를 동원한 量産공예와 새로운 재료, 기법의 軀使를 통한 오브제적인 방향이 섰고, 작가와 작품전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치 늘어났다.
국가산업발전과 국민생활향상에도 기여하면서 産學協同체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해외교류 및 견문을 통한 선진국과의 격차해소와 이해를 증진시킨다.
파생되는 문제점은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다. 史的 考察를 통해 脈絡을 찾고 연구활동이 진지하게 전개된다.(학회결성과 대학, 대학원 전공생을 주축으로) 관련서적의 간행도 꾸준하다.
공예디자인을 보는 안목과 애정이 높아졌다. 전공으로 택하는 대학지망생의 숫자도 매년 불어나 좁은 문을 뚫기가 힘들어졌다.(평균 4:1)
1988년은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공예와 디자인산업, 그들이 가져간 제품(관광민예품 등)을 통해 기억될 우리의 참 모습은 큰 의의를 지닌다.
전통공예의 현대화와 우리 것의 세계화-. 이런 명제속에, 자라나는 3세대를 품고 있는 공예 디자인계는 밝다. 어둡고 서러웠던 밤을 지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고 있다.머잖아 중천을 가로 지르는 밝은 한낮을 만나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누릴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