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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16) 2026. 6. 17
나병에 걸린 나아만
왕하5:1~7
오늘 본문은 교회를 조금만 다닌 사람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엘리사의 기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기적입니다. 바로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나아만 소개>
본문은 나아만 장군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
1) 우선 그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있는 왕국입니다. 수리아라고도 불리고 수도는 다메섹입니다(오늘날의 ‘시리아’).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역에 능하여 아람어는 ‘무역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훗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병합된 후로는 아람어가 생활언어가 되었습니다(예수님도 아람어를 쓰셨을 것).
당시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적대국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바로 그 나라 왕의 ‘군대 장관’이었던 것입니다. ‘군대 장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쿠데타의 염려가 있기에 왕의 최측근이라야 맡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2) 그래서 본문은 그를 ‘그의 주인 앞에서 큰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 왕정국가이니 당연히 ‘아람 왕’입니다(아합과 전쟁을 한 벤하닷2세). 그러니까 왕의 신하들 중에서 ‘가장 큰 자’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은 아람에서 왕 다음으로 제일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3) 더구나 그를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권력만 센 것이 아닙니다. 왕에게는 물론, 백성들에게서도 높이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높은 권력을 차지했어도, 백성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사람이어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4) 나아만은 ‘큰 용사’였습니다.
그는 왕의 눈에 들어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람이 아닙니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 싸워 승리를 쟁취한 용사였습니다. 그 결과로 ‘군대장관’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을 고쳐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열방의 하나님>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는 아주 특이한 구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아람은 이스라엘의 적국인데,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통해, 아람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아람이 누구와 싸워서 이겼다는 뜻일까요? 본문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과 싸워서 승리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와 불순종의 길로 나아갈 때 종종 다른 민족을 사용하여 징계하셨습니다.
사사 시대에 하나님은 블레셋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삿 13:1).
하나님은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사 10:5)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었지만, 특권이 곧 면죄부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돌이키시기 위한 사랑의 훈련이었습니다.
아람도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타락을 징계하시기 위해 사용된 민족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할 것은, 이방 민족들을 단순히 심판의 도구로만 쓰고 버리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고, 그들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세상의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맡기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요, 이 세상 나라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역사도 똑같이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 사가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이방 나라(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을 치유하는 내용을 길게 기록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역사가 단순히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나병에 걸린 나아만>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당신의 역사를 알리십니다.
1절b “...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
그는 ‘나병 환자’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이 오늘날의 ‘한센병’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나병의 병세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납니다. 1) 피부에 흰 반점이나 붉은 반점이 생깁니다. 2) 손, 발, 피부의 감각이 점차 사라집니다. 뜨거운 것이나 상처를 입어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축복, 3) 병이 진행되면 말초신경이 손상되어 손발의 근육이 약해집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변형되거나 기능을 잃을 수 있습니다. 4) 상처가 반복되면서 심한 변형이 나타납니다(얼굴, 코, 귀 등). 무서운 것은, 치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을 (전염성이 있어서)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의 문장만 읽으면 나아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군대 장관, 그의 주인 앞에서 큰 자, 존귀한 자, 그리고 큰 용사). 그런데 문제는 ‘그러나’입니다.
나아만이 언제부터 나병을 앓게 되었을까요? 짐작해 보면, 아마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였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린 상태에서 나가서 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나아만이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 후에, 덜컥 나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왔던 그 모든 명성과 업적과 지위와 권력과 재물은 ‘그러나’라는 이 한 마디에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조만간 사회에서 추방당해 격리되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할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땀 흘리고 노력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한 부자의 비유) - 눅12:16~21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린 소녀의 권면>
아마도 나아만은 온 나라의 명의들을 다 동원해서 고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칠 수 있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2~3절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그의 집에 ‘어린 소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 온 소녀였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를 때에 노예로 잡아 온 포로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이 아이는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는 몸종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녀의 나이가 몇 살인지, 또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녀의 말에서 몇 가지를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소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는 바로 ‘엘리사’를 말합니다. 소녀는 ‘그분이라면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믿음의 말입니다. 소녀의 말한 것은 ‘엘리사’가 고칠 수 있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지 못할 병이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에 가서 엘리사를 만나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면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어린 소녀’는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혀 온 처지입니다. 당연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복수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 있는 동안 그의 마음은 누그러졌습니다. 아마도 단순히 노예처럼 부리지 않고 가족의 일부처럼 대해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어 그들의 편을 드는 현상) -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 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한 사건에서 인질들이 풀려난 후에 인질범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현상에서 유래하였다(서로 이름을 교환하고, 추울 때 옷도 벗어줌 - 인격적인 교감이 일어남).
앞서 나아만을 ‘존귀한 자’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가족도 좋은 인격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이 소녀는 진심으로 그가 치료되기를 바라면서, 그의 아내에게 엘리사를 소개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이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에게 신뢰를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아만의 아내는 이 소녀의 말을 남편에게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물론 부인을 통해 전해 들었지만, 나아만은 그 어린 소녀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물론, 병을 고치기 위해 귀담아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복적으로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확신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친서와 예물을 준비해 출발>
나아만은 소녀의 말대로 엘리사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4~5절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어린 소녀’의 말을 신뢰한 나아만은 그 즉시 왕에게 나아가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다릅니다. 소녀는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가면 나병을 고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은 나아만에게 누구에게 가라고 합니까? 먼저 이스라엘 왕에게 가보라고 합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써줄 테니까, 그걸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나아만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해주고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웃 나라의 군대 장관이 아무 연락도 없이(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접근 방법은 아람 왕의 상식에서는 나아만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출발하기에 앞서 엄청난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은 십 달란트’를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340kg이고, ‘금 육천 세겔’은 약 69kg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최고급 의복 열 벌까지 준비해서 출발했습니다. 나아만의 절박함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많은 돈을 누구에게 주려고 했을까요? 아마도 일부는 이스라엘 왕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는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사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아만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만큼의 예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 왕의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6절“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의 반응>
그런데, 아람 왕의 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여호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7절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여호람)은 아람 왕이 보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흔히 ‘호들갑 떤다’는 말을 쓰는데, 지금 이스라엘 왕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 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고 말합니다. 아람 왕의 편지에서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라고 요구했는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편지해서 자신의 신하를 고쳐달라고 한다면, 그것이 왕 보고 직접 고치라는 요구한 것일까요? 그 나라에 고칠만한 분이 있어서, 방문하니 선대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고치냐’고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나아만에게 오게 된 목적을 자세히 물으면, ‘엘리사’를 찾아왔음을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별 것 아닌 문제인데도, 호들갑을 떨고 두려워합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며 쓸데없는 상상을 합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 앞에서 – 출14:11~13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왕은 “치료를 빌미로, 이스라엘을 침공할 어떤 빌미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확고히 서 있지 않기에 작은 일에도 놀라 두려움에 떨며 엉뚱한 상상까지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어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 만의 문제일까요?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 했다고 하더라도, 만일 우리 앞에 시험과 시련이 닥쳐와서, 믿음을 보여야 할 때 정작 믿음을 보이지 못한다면, 우리들도 이스라엘 왕과 똑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시험과 시련이 닥쳐올 때, 우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수간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사 43:2)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혔지만, 성경은 반복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창 39: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시련 가운데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시련 가운데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올 때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라”(약 5:13)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시련을 즉시 없애 주는 도구만이 아니라, 시련을 견딜 힘과 지혜를 공급받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시련 뒤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당장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때로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맺는 말씀>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열방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요, 이 세상 나라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역사도 똑같이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인생의 교만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동안만 내가 사용하는 것입니다(청지기 정신). 단 한순간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나아만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소녀가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생이별을 당하고 갑자기 이방 나라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소녀는 자신의 기막힌 운명을 슬퍼하며 하나님을 크게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방 나라에서 여호와의 작은 불빛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뢰를 받을만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지위와 학식이 높다고 말에 어떤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과 행함에 일치하는 진실함과 그리고 믿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신감이 오히려 더욱 큰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아만 한 사람의 병만 고친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넷째, 어린 소녀의 믿음의 고백을 지나치지 않고 응답한 나아만도 본받을만한 대상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오는 시련 가운데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담대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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