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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每緊里 登山記
등반개요
대 상 지 :
등 반 자 :
기 간 :
일 정 :
등 반 기
박찬준
우리 청화산악회가 매킨리(MCKINLEY)에 가서 4명의 대원이 정상에 등정은 했지만 무리한 정상 도전으로 본인을 포함한 4명(안종호, 노승태, 박찬준, 고일순)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희(憙) 소식이 아닌 비(悲)소식으로 지상에 오르내리며 희비가 엇갈린지 벌써 두 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다행히도 부상자들이 그 쓰라린 슬픈 상처를 안고 좌절하지 않고 각자 열심히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럽게 느껴진다.(웬 자화자찬??)
지금 우리 산악회는 내년에 본인이 생각하기에 에베레스트보다 더 어렵다고 느끼고 있는 낭가 파르밧(8,125M)원정을 계획하고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다. 우리가 매킨리에 갈 때보다는 훨씬 조직적이고 열심히들 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참 보기가 좋다.
이런 시점에서 쓰라린 상처 뿐인 매킨리를 다시 떠 올리는 것이 잘되고 있는 밥에 재 뿌리는 격이 아닐지 모르나, 그 당시의 등반상황을 잘 모르는 회원들도 있을 테고 또 더욱 열심히 훈련하여 다시는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식적인 자료는 아니지만 본인이 그 당시 메모한 것을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때 우리는 4명씩이나 정상에 올랐고 이미 다 끝난 이야기지만, 굳이 성패(成敗)여부를 가르자면 이것은 성공이 아닌 분명하고도 엄청난 실패의 본보기다. 각자 너무 쉽게 생각했고 자기의 체력 한계를 무시하고 오직 정상에 오르겠다는 욕심으로 고소증세가 풀리지도 않은 몽롱한 정신을 가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어찌 사고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고산(高山)은 높이가 낮다고 해서 쉬운 산도 아니고, 노인네가 쉬엄쉬엄 올라간다고 해서도 쉬운 산이 아니며, 남들이 대량 등정을 한다고 해서도 쉬운 산이 절대 아니다.
아무리 노인네라 할지라도 그만한 훈련을 쌓았을 것이고 또 그 산에 대한 그만큼의 정보 자료를 수집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며, 자기 체력에 맞는 등반을 하여 자기의 안전을 도모했을 것이다.
본인의 생각에 흰눈으로 덮여있는 고산은 6000M를 가든 8800M를 가든 훈련해야 하는 양은 똑같을 것이고, 위험도 역시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 등반의 성패(成敗)는 그 등반자가 훈련기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하였는가에 따라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한다.
지금 전 대원이 주말산행에 참가해서 열심히 훈련을 하지만, 그 산행은 원정등반에서 필요한 체력을 크게 향상시켜 주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자기가 개인적으로 열심히 훈련하여 향상시킨 체력을 자기 스스로 평가하고 보완하는 산행이라고 생각된다.
훈련을 열심히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정상을 등정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보다 더 앞선 목적은 자기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정상을 등정했다고 치자. 그러나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하여 요단강행 은하철도에 무임승차 한다면 정상 등정의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고 요행히 얻어 탄 무임승차가 뭐가 좋단 말인가....
두서없이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 같다. 여하간 각자 열심히 하여 모두 안전하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1991. 4. 29.
3시 25분 NW20편으로 9명의 장정들(유충구, 안종호, 노승태, 박찬준, 김병태, 고일순, 이원우, 장정예, 이규범)이 가족들과 산악회 선배님들과 동료들의 환송 속에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봉(6,125M)의 웨스트 비트레스와 웨스턴 립, 그리고 캐신릿지.. 이 세 루트의 완등을 목적으로, 그리고 여러 달 동안 각자가 훈련한 결과를 평가(?)받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어여쁜 스튜어디스 아줌마(?)들이 제공하는 2끼의 기내식을 먹어가며 10시간의 비행 끝에 중간 기착지인 시애들로 향했다. 날짜 변경선 관계로 시애틀에 도착하니 4월 29일 오전 12분이었다. 한국시간으론 30일 오전 1시 10분이란다.
입국수속을 하는 도중 다른 대원들은 무사 통과하는데 내 차례에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직원이 한참 동안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빨간색 파일에 내 입국서류를 넣었다. 나는 파일과 함께 한쪽 구석에 있는 특별검사실(?)로 보내져 간단한 신문을 받고 통과할 수 있었다. 이유인 즉 작년에 요세미티에 갔다 왔을 때 출국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시애틀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국내선으로 갈아타기 위한 화물운송 등의 수속을 거의 마칠 무렵, 배낭과 다른 화물은 잘 빠져나가는데 장비와 스키를 담은 백이 한쪽으로 제쳐져 있어 혹시 운송이 안 되는 것인가 하고 걱정을 하며 담당직원에게 손짓발짓을 동원하여 물어보니 큰 짐은 나중에 싣는다고 하여 안심하고 2층 로비로 올라갔다.
우리는 시애틀 공항청사 안에서 아이쇼핑도 하고 카드도 치며 2시 25분에 출발하는 안초라지(ANCHRAGE)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없었다. 궁금해 하며 출발안내 표지판을 보니 짧은 영어지만 DELAY라고 표시되어 ‘연착이구나’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4시10분으로 연착됐다고 한다. (나는 이곳에서 종호형하고 카드를 치며 스트레이트 플러시 ACE,2,3,4,5를 잡았는데 오히려 잃었다.)
4시 10분에 안초라지행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알래스카의 안초라지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6시35분이었다. 이 비행기 안에는 미국사람들이 많았으며 어린 꼬마 애들이 그 어려운 미국말을 주절 주절대며 엄청시리 잘했다.
그 곳에서는 미리 연락된 오갑복(오갑순씨 동생은 아님)씨가 우리가 예정시간에 도착을 하지 않자 많은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갑복 선배가 준비한 차량으로 앵커리지행 비행기에서부터 동행한 대구, 경북대팀과 목포대팀과 함께 7시에 공항을 출발하여 이곳의 여관격인 INLET INN에 도착하니 7시 20분이었다.
대구, 경북대팀은 공항에서 바로 현지로 떠나고, 우리팀과 목포대팀은 이 INN에서 몇 일간 머물며 이곳 현지 구입풀이나 한국에서 준비 못한 등반장비나 식량 등을 준비하였다.
이곳 매킨리 등반을 하려고 하는 팀들은 대부분 오갑복 선배를 통해서 현지의 일들을 처리하는 것 같았으며, 이틀 전에 서울대 등반대팀이 이곳에서 머물다가 현지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오갑복 선배에게서 들었다.
1991. 4. 30.
8시에 기상하여 맥도날드 햄버거 하우스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REI와 AMH 장비점에 들러 구경도 하고 공동 또는 각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바야흐로 점심때. 먹고 죽은 송장은 때깔도 좋다는 명언도 있고 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FALCON CREST RESTAURANT 한식뷔페에서 김치와 불고기로 그동안 야윈 배를 잔뜩 부풀렸다.
점심을 먹고 숙소로 오는 도중에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는 남산상회에 김치와 소고기 등의 등반식량을 구입하여 돌아와 INN 로비에 앉아 잠깐 쉬고 있었다. 우리 바로 앞에는 동양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콧수염을 기른 에스키모인 중년남자가 INN에서 무료로 주는 커피를 자동판매기에서 계속 빼 마시며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종호 형이 장난기가 발동해 통하지도 않는 미국말로 국산 88담배를 권하니 마다하지도 않고 웃으며 받아 피웠다. (그는 나중에 몇 개비 남지 않는 담배를 곽채 주었다.)
조금 있자니 에스키모인 중년여자가 호리에 들어와서는 별 말없이 한번 훑어보더니 종호 형한테 와서는 “당신 방이 어디냐? 당신 방으로 같이 가자”고 한다. 우리 일행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에스키모인들은 정부 보조금과 겨우내 사냥해서 모은 돈을 봄이 되면 이렇게 도시로 나와 돈도 쓰고 몸도(?) 쓴단다. 그래서 그런지 시내에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에스키모인들이 눈에 띄었다.
4시부터 장비를 재포장 하다 보니 서울에서 준비해간 떡국용 떡이 푸른곰팡이를 만들며 상해가고 있어 프론트에 부탁해서 이곳 지하에 설치된 냉장고에 하루 동안 보관할 수 있었다.
9시에 점심식사를 했던 FALCON CREST 한식뷔페에서 저녁을 마치고 10시에 숙소로 돌아와 전체적인 일정 등을 재점검하고 취침에 들어갔다.
1991. 5. 1.
8시 30분에 남산상회에 부탁해서 만들어온 김밥으로 아침을 해치우고 11시에 INN을 출발하여 칼키트나로 향했다.
앵커리지 시내에서는 시내 저 멀리 흰 산이 보였지만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가까운 곳의 화주올 흰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침엽수가 평야와 같은 넓은 대지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약 1시간쯤 차를 타고 달리다가 경치가 알래스카 제일이라는 와실라 호수 근처의 오갑복선배가 경영하는 식당(META ROSE SQUAE) 2층에서 회덮밥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몇몇 대원은 식사를 마치고 1층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우편엽서를 구입하였으며, 또 몇몇은 바로 앞에 엄청나게 큰 CALTS라는 슈퍼마켓에서 고기 등 부식을 마지막으로 구입하였다. 엽서는 등반중에 작성하여 하산하는 외국대원에게 우표값과 함께 내려보내면 탈키트나에서 앵커리지로 연결되어 우송이 된다고 하여 나도 20장을 샀다.(그러나 한 장도 못 보냈다.) 식사도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식당이 전 전두환 대통령인가가 외국순방시 잠시 들려서 한 끼 식사를 하고 간곳이라고 했다.
2시 반에 와실라를 출발하여 딱 한 시간 걸려 탈키트나의 HUDSON AIR SERVICE에 도착했다. 그곳에 짐을 풀고 4시 반에 레인저 사무실에 가서 입산신고를 하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으며, DENALY NATIONAL PARK와 매킨리 등반에 관하여 건립된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우리가 앵커리지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곳 알래스카에는 100년 만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매킨리 곳곳에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오갑복 선배에게 들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 사실을 레인저가 또 얘기했다.
저녁 7시부터 HUDSON AIR SERVICE의 경비행기로 3명씩 짝을 지어 각자의 짐을 싣고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비행기는 푸드덕 거리며 활주로를 떠나 랜딩 포인트로 향했다.
출발 전에 비행기를 보니 약해빠져서 우리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는데, 내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비행기는 침엽수로 꽉 들어찬 넓은 평지를 거쳐 매킨리 초입의 계곡을 이리저리 유유하게 돌아들더니 몇 동의 텐트가 보이는 랜딩 포인트의 눈밭에 사뿐히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1차로 종호형 과 김병태 등반대장과 내가 도착하였고, 2차로 승태형과 일순이와 규범이가 도착하고 3차로 충구 형과 원우, 정예가 무사히 도착하였다.
드디어 우리가 그동안 고대하던 흰 산, 매킨리에 도착했다. 랜딩 포인트 좌측에는 헌트봉이 보이고, 우측에는 포레이커봉이 감싸고 있어 매킨리봉을 좌우에 포진하고 있는 폼이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에 나오는 좌백호 우청룡과 같고, 이곳은 바로 정중앙의 궁(?)과 같은 엄청난 풍수를 타고난 자리였다.
이 시간 서울은 따뜻한 봄바람에 아가씨, 유부녀, 과부 할 것 없이 싱숭새숭 해가지고 병든 닭새끼 쫒아 다니느라 한창 바쁠텐데 나는 왜 이 추운 곳에 와서 벌벌 떨고 있는지..
눈을 좀 파내고 자리를 정리하여 텐트를 치고 있는데 바로 옆 텐트에서 한국인하고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나오며 KOREAN으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계우회 대장이고 쫄따구였다.
계우회는 그 당시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매킨리 정상을 향하여 등반하고 또 한 팀은 매킨리봉을 아우이며 우리나라가 그 당시 미등정한 헌트봉을 등반중이었다.(완등했음)
낮선 이국땅 이 추운 곳에 와서 첫날부터 한국사람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기분도 좋다. 텐트를 다 치고 나니 그곳에 상주하는 계집애 레인저가 오갑복선배한테 미리 연락받은 연료와 스노보드와 썰피를 건네주며, 이곳에서 밑화장 하는 법과 오물처리 방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 화장실은 눈을 3-4m정도 깊고 넓게 파고 나무판자를 걸쳐 놓았다.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함정과도 같은 곳이었다.(주의 표지판 없음)
밤 11시에 저녁을 먹고 12시에 따뜻한 커피를 한잔씩 거나하게 걸치고 12시 반에 9명이 두 동의 텐트에 나누어 우리산악회 던롭 텐트에는 종호형, 승태형, 병태, 정예, 규범이가 동침을 하였고 봉완이형한테 빌려간 4인용 던롭에는 충구형, 나, 일순이, 원우가 또 동침을 하였다.
1991. 5. 2
7시에 기상하여 아침을 끓여 먹고 웨스턴립과 캐신릿지 등반에 사용할 장비와 식량을 데포시켜 놓고는 각자 장비와 식량 등을 나누어 SNOW BOARD에 싣고 10시에 출발하였다.
원우가 행복이 가득한 집 깃발과 스티커를 여러 장 가지고와 등반하고 있는 행복이 가득한 짐의 모습을 사진 찍겠다고 하여 각자 짐 위에 있는 깃발과 오바트라우져에 스티커를 붙였다.
왼쪽으로 5분 정도 가다보니 아래로 약간 경사진 길이 나왔는데, SNOW BOARD에 올라타고 스키폴로 지치며 오른쪽 방향으로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었다. 가다보니 날씨가 따뜻해 상의 오바트라우져와 재킷을 벗어 버리고 내복과 조끼 바람에 등반을 계속하였다.
12시쯤에 크레바스 위로 다리를 형성하고 있는 SNOW BRIDGE를 통과하여 안전한 부분에서 점심으로 떡라면을 해먹었다. 먹다보니 떡에서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다.
오후 1시 반에 출발해 언덕으로 보이는 부분을 향하여 5시까지 운행 예정으로 끝없는 전진을 하였다. 3시경에 예정된 C1의 지점 다른 등반대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 계속 운행을 했다. 그런데 가다 보니 출발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앞쪽이 뿌옇게 흐려져 전방의 상황 확인이 불가능했고, 또 예정보다 빠르게 운행되었으므로 C1과 C2의 l/3지점인 2,600M정도에서(4시20분) 운행을 끝내고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는 도중에 김병태 등반대장이 전방의 상황 파악을 위하여 위쪽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예상했던대로 루트 상황 파악이 불가능하여 잠시 후 내려왔다.
7시에 저녁식사를 하고 8시 반에 취침에 들었지만, 백야 현상으로 인해 날이 여전히 밝았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약5분정도)을 뒤척이다 잠들었다.
1991. 5. 3
아침 7시에 기상하여 밖을 내다보니 10M 전방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일단 밥을 해 먹고 텐트를 걷어 장비를 챙겼다. 등반대장이 길을 알고 있으므로 안내에 따라 출발하기로 했는데, 종호형만 스키를 신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설피를 신고 출발했다.
전방 확인이 전혀 불가능한 곳을 등반대장이 가르쳐주는 대로 내가 앞장서서 스키폴로 좌우를 푹푹 찔러서 길인 듯한 단단한 부분만 골라 우측으로 비스듬하게 전진을 하였다. 나는 계속 앞서 가면서 이곳이 길이 맞는지 안 맞는지 조바심을 내다가도 누가 해 놓았는지 모를 분홍색 표식대를 발견하면 기뻐서 큰소리로 “저기 표식대가 있다”하곤 했다.
날이 좋았다면 50M정도의 거리로 밖에 안 보이는 표식대간 사이가 왜 이리 멀어 보이던지... 이 고소에서 이 불쌍한 중생에게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고민에 빠지게 하는 지 예수와 석가와 마호멧이 원망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세 번씩이나 들었다.
12시경 C2를 조금 지난 곳에서 다른 등반대의 텐트를 지나치고 있는데 우리 팀 후미가 시끌시끌해 뒤돌아보니 정상을 향하여 등반하고 있던 계우회팀 3명이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대원 간에 주고받던 말을 계우회가 듣고서 나왔던 것이다.
간단한 조우예식을 마치고 12시 40분에 두 번째 크레바스 바로 밑에서 떡라면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점심을 좀 편히 먹으려고 눈을 정리하다 보니 가느다랗게 벌어진 곳이 보였다. 호기심에 좀 더 파보았더니 그것은 다름 아닌 크레바스였다. 바로 위의 크레바스와 연결된 것이었다. 눈을 가까이 대고 쳐다보니 시원한 바람이 쳐 올라오고 속은 시퍼런 게 을씨년스럽다.
오후 1시 반에 점심을 마치고 크레바스를 우회하여 40분 정도 올라가니 안초라지 공항에서 헤어졌던 대구, 경북 연합팀(이하“장병호”라한다)을 만났다. 이들 역시 다른 팀처럼 날씨가 나빠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으며, 이 팀의 짐은 우리보다 곱이나 많은 것 같았다. 개인당 카고백으로 하나 가득이었다.(탈키트나에서 보니 목포대도 엄청 많았다)
잠시 쉬면서 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외국인 한명이 텐트에서 나오더니 한쪽 구석진 곳에서 North Face 오바트라우져 엉덩이 부분 쟈크를 좌악 돌리고 앉아 한참을 있더니 한 손에 무엇인가를 비닐봉투에 넣어 손바닥에 쥐고 나왔다. 손이 많이 시려웠나 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규정을 잘 지켜 자연보호에 이바지하는 사람인 것을 보면 선진국 사람인 게 분명했다.
날씨는 더더욱 나빠져 강풍이 불어와 우리의 진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들과 헤어져 5M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곳을 계속 올라가다보니 EH다른 외국인 캠프를 만날 수 있었다.
바람에 날려 와 텐트 주위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한 외국인에게 길을 물어보니 자기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단다. 영어를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미국인인 듯하였다.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해 4시경에 그 미국대를 5분정도 지나쳐 3,200m정도의 지점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캠프지의 눈을 1m정도 파내고 파낸 눈은 강하게 부는 바람을 막으려고 주위에 쌓아 올렸다.
6시경에 텐트치기를 끝내고 저녁준비를 했다. 저녁준비를 하다보니 날씨가 쪼금 개어 오른쪽 능선으로 몇 개의 표식기가 보였다.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몇 몇 대원은 기스배(정예)를 위해서 캠프사이드 한 구석에 화장터를 만들고 준비해간 분홍색 천으로 가려(가리면 뭐해)놓았다.
저녁을 먹고 하루 종일 악천후 속에서 운행했으므로 모두 피곤하여 잠에 골아 떨어졌다.
1991. 5. 4
오늘은 기상이 어제보다도 훨씬 나빴다. 도저히 운행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부는 강한 브리쟈드에 캠프 사이드의 빈 공간으로 눈이 어찌나 많이 날아드는지 텐트가 안쪽으로 밀려들어오면 한 대원이 잽싸게 나가서 깨끗이 걷어치우고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2-3 시간 정도 있으면 또다시 마찬가지다. 우리 쪽 텐트에서는 일순이와 원우가 번갈아가며 눈을 걷어내었다.
원우가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약 3분 정도 밖에 나가 있었는데, 사진은 한 방도 못 찍고 카메라와 렌즈에 눈만 잔뜩 묻히고 들어와 그걸 말리느라 한참을 애먹었다.
나는 이날 출국 전부터 있던 목감기 기운이 있어 전날에도 정예한테 약을 얻어먹고 잤는데 이날은 더 심하여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어제 운행할 때 길을 찾느라 힘쓰고 신경쓰고 한 영향도 있겠지만 고소의 영향도 다분히 있었을 것이다.
충구형이 비상식으로 준비했던 인삼, 호두, 땅콩이 든 여러 가지 혼합식품을 누워있는 내게 먹여주었으며, 일순이와 원우가 해주는 밥을 먹고 저녁 때는 조금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1991. 5. 5
6시 반에 기상하여 밥 먹을 준비를 하고 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어제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출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아직 미열이 있어 내 짐 일부를 다른 대원들이 나누어 운반했다. 우리가 출발하기 약간 전에 장병호 팀이 먼저 간다고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지나쳐갔다. 9시에 출발하여 가다보니 까만 새들이 드믄드믄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뭐 먹을 게 있다고 이 높은 곳까지 날아와 황천객이 되었는지... 불쌍하고 가련한 중생들이여~.
왼쪽으로 비스듬한 언덕을 계속해 올라가니 앞 쪽에 벽이 나왔다. 우리는 그 벽에 바짝 붙어 오른쪽으로 계속해 올라갔다. 그 곳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 어느 정도 크리스트 되었다고 하지만, 설피나 스키를 착용한채 무릎까지 빠져가며 운행하기가 힘들고 더뎠다.
그 고난의 지대를 거의 빠져나갈 무렵 오른쪽 능선에는 장병호 팀이 무거운 짐을 마소처럼 이끌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제대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들이 먼저 c3로 향하고 우리가 뒤이어 아래로 쳐지는 스노보드를 끌며 올라갔다. 이 언덕 부분부터는 날씨가 좋았다. 가면서 밑을 내려다보니 흰 구름에 덮여 아득한 수렁같이 보이고 저 멀리 포레이커봉 만이 구름 위로 머리만 내보이며 우뚝 솟아 있었다.
3시에 우리 팀 후미가 3,600m 지점인 c3 도착했다. 캠프 사이드를 정리해 텐트를 치고, 그동안 텐트 안에서 습기에 축축하게 젖은 침낭을 스키 폴대 위에 널어놓고 휴식을 취했다. 내일 우리가 운행할 루트 쪽을 보니, 다른 팀의 대원들이 설벽 윗부분에 짐을 데포시키려고 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였다.
오후 5시경에 3일 오전에 만났던 계우회팀이 c3로 올라와 우리 캠프사이드 바로 아래 부분에 텐트를 쳤다.
1991. 5. 6
6시에 기상하여 식사를 마치고, 등반대장의 말에 따라 전원이 아이젠을 착용하고 설피와 스키를 데포 시켜놓고는 8시40분에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c3의 바로 앞은 길이 300m에 60도 정도의 설벽이었다. 우리는 이 구간을 별 무리 없이 통과하였는데 중간 정도 올라가다보니 우리보다 일찍 출발한 장병호팀이 그곳에서 무거운 짐을 안전벨트에 매단 채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산에 대하여 경험자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 위 안부에는 1시간 만에 우리가 먼저 도착하여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장병호팀이 올라와 휴식 없이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경사진 윈디코너의 바로 아랫부분의 설벽을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이들 중 한 대원이 실족하여 짐의 무게에 못 이겨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미끄러져 우리 대원이 잡아주어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의 왼쪽은 수천 수만 길이나 되는 끝이 안보이는 계곡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이 일로 이 팀은 이곳에 휙스로프를 깔고 통과하였다.) 우리는 휴식을 끝내고 장병호팀과 같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4명의 대원이 루트의 아랫부분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고 나머지 대원이 그 위쪽으로 통과하여 모두 안전하게 통과하였다.
12시 10분에 윈디코너에 도착하였다. 이 평평한 분지와도 같은 그 악명 높은 윈디코니에는 바람 한 점 없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따뜻하다. 신께서 우리를 도우시나보다....
여기서 점심을 끊여 먹고 쓰레기는 바로 우측의 크레바스에 버리고 1시 반에 매킨리 시티를 향하여 운행을 계속하였다. 가깝게만 보이던 저 앞의 언덕을 2시간 운행 끝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약간 너덜지대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3시) 아랫부분에 크레바스가 험상궂게 입을 벌리고 있고 루트가 경사져 있어 짐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 쳐져 이중으로 힘을 쓰게 만드는 마(魔)의 트레버스 구간을 1시간 걸려 통과하였다.(저 밑이 아마도 요단강일 것이다)
대부분의 외국대는 서로의 안전을 위하여 안자일렌을 꼭 하고 다녔다. 한국대원들은 예외였다. 아마도 신(神)들의 자식인 모양이었다.
모두들 트래버스를 통과(약 4,200m)하느라 애를 쓴 후라, 앉아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였다. 나도 간식을 먹으려고 초콜릿을 입에 물었는데, 무슨 순간 고소증세가 밀어 닥쳐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며 바로 아래 움푹 패인 곳에 엎드려 자세를 취했으나 실행은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4시 반에 쌩쌩한 대원부터 city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순이 병태 정예가 앞서고 나와 원우 승태형이 뒤로 쳐져 운행을 하였다. 조 앞에 크레바스를 우회하여 보이는 조 언덕 너머가 씨티라고 했는데, 왜 이리 멀고 힘든지 모르겠다. 밥숟갈 내동댕이치고 서거하고 싶은 맘이 신발공장 굴뚝보다 더 높다.
내가 옛날에 중원 땅에서 개타고 말장사 할 때는 공력이 넘쳐 흘러 몇 날 며칠을 뛰어다녀도 이렇지 않았는데, I go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초야에 묻힐 때가 되었나 보다.
후미가 크레바스를 우회하고 있을 때, 선두는 벌써 시티에 짐을 내려놓고 뒤쳐진 대원의 짐을 들어주려고 내려왔다. 병태가 내려오면서 쳐진 대원들에게 초콜릿에 눈을 얹어 먹여 주면서 기운을 차리게 했다. 나는 이 초콜릿을 받아먹고는 심한 오토바이를 타 뒤로 나올 물까지 앞으로 쏟고 말았다. 이제는 진짜 더 이상 갈 힘이 없다. 에밀레종이라도 좋고 두부장수 종이라도 좋다. 아무 종이나 치고 싶다.....
빌빌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래에 데포시켜 놓은 짐을 가져오는 새까맣게 탄 쪽바리가 그래도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 이라고 반가운 투로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동료 대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시티에 도착하니 8시20분..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장장 4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기진맥진한 채 텐트를 거의 다 쳤을 무렵 갑자기 옆의 텐트에서 규범이가 폭 쓰러졌다. 우리는 당황하여 규범이 주위에 모여 들었는데, 바로 옆 캠프의 미국인이 이를 보고는 텐트 안에 있던 자기 동료인 노란 오바트라우져를 입은 의사를 불러내었다.
그 의사는 규범이를 텐트 안으로 옮겨 상태를 점검하고는 간단한 응급조치를 해 주었다. 규범이는 기진맥진해 추위에 벌벌 떨고 있다가 그 무시무시한 하이포 써미아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 의사는 규범이를 따뜻하게 해주고 물을 끊여 먹이라고 하고는 그 유명하고도 철학적인 명언 “고소에서는 one day four liter"를 강조하며 외쳤다.
이날 저녁은 우리 모두 너무 지친 상태이기 때문에 배고픈 지도 모르고 굶은 채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1991. 5. 7
아침에 일어나니 기상이 나빴다. 때문에 출발을 포기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오후에는 날씨가 아주 좋아져 캠프사이드 정리도 하고, 포레이커봉과 헌트봉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침낭도 밖에 널고는 옆 캠프의 미국인들과 축구도 하였다. 잠깐 동안의 4,300m 눈밭에서의 축구는 엄청 힘이 들었다.
한번 공을 쫒고 나면 우리나 그들이나 마찬가지로 쭈그리고 앉아 숨 정리를 해야 했다. 내일은 c5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날씨여서 저녁을 먹고는 내일 정상공격을 위하여 전체 회의를 갖고 취침에 들어갔다.
우리 텐트에서는 잠자기 전에 간단하게 카드를 한 바퀴 돌렸다. 나와 일순이는 본전만 했고 충구형이 약간 따고 원우가 쬐끔 잃었다.
1991. 5. 8
아침 날씨는 쾌청한 편은 아니지만 운행하는 데는 대체로 좋아 보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여 전원이 RESCUE GULLY를 향하여 처음으로 안자일렌을 하고 출발하였다.
이 RESCUE GULLY는 7-800M의 설벽으로 중간까지의 경사도는 45-55도 정도의 설벽이지만 휙스로프가 깔린 상단은 65-75도 정도에 청빙의 빙벽이었다.
일순이와 규범이 원우 등이 앞서 나갔고, 나와 충구형, 정예 등이 뒤에 올라갔다. 그런데 안자일렌을 같이 한 충구형이 자꾸만 쳐진다. 성질 급한 내가 앞질러 올라갔다. 그러자 충구형이 버럭 “너 혼자가 이 새끼야”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엄청 미안하고 황당하다. 충구형이 더 이상 못 올라간다며, 누구 나와 함께 내려가자고 했으나 대답이 없다.
누군들 정상에 서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나도 올라가고 싶고, 누구도 올라가고 싶고. 모두 다 올라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충구형한테 미안하기도 하여 내려가겠다고 했고, 뒤이어 종호형이 내려간다고 했다.
우리 셋은 그곳에서 하산하여 오늘 아침의 캠프 사이드로 되돌아 왔다. 캠프 사이드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우리 팀이 지금 어디쯤 올라가고 있을까 하고 뒤돌아 보니 위쪽에는 등반하는 사람들이 없고 아래쪽에 하산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상하다, 우리 팀이 지금쯤 주마링을 하고 있어야 할 텐데, 벌써 다 올라갔나?? 자세히 보니 하산하고 있는 팀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팀이었다.
전부 시티로 하산해서 이유를 들어보니 시간도 늦고, 등반대장인 병태가 옛날에 다친 발목 부분이 시큰거리고 아파서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자, 그럼 내일 등반팀을 다시 편성하여 재도전 하자고 하여 짐은 그곳에 데포시키고 내려왔단다.
다시 텐트를 치고 식사를 하고 전략회의를 열어 내일 누구 누구가 등반할 것인가를 정하기로 했다. 회의 결과 종호형과 승태형, 나 ,일순이, 정예, 그리고 규범이로 정해졌다.
나는 더 높이 등반을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지만, 캠프에 남아 더 높은 곳을 향해 떠나는 동료들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어야 하는 대원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다.
1991. 5. 9
6인조 정상 공격조가 5,200M 지점의 C5를 향해 출발하였다. 출발한지 2시간 반만에 어제 식량을 데포시켜 놓은 지점에 도달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데포시켜 놓은 식량을 나누어 배낭을 꾸리고는 출발을 시작하였다.
출발하며 아래쪽을 보니 한 외국대가 하단에 도착했다. 휙스로프가 깔려있는 곳에 도착하니 11M/M 정도 굵기의 2줄이 휙스되어 있었다. 한쪽은 등반하는 줄이고 또 한쪽은 하강하는 줄이다.
일순이가 앞장서고, 규범이, 정예, 종호형, 승태형, 그리고 맨 꼬래비에 내가 출발했다. 이 300여M의 청빙의 주마링 구간은 등반이 용이했다. 우리나라의 청빙보다는 약간 약해 FRONT POINTING IZEN WORK이 훨씬 잘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마링 속도는 예상 했던 것보다 훨씬 늦어졌다. 우리가 1/3지점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 외국대가 휙스로프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나는 하도 답답하여 승태형한테 빨리 좀 가라고 재촉했지만, 승태형은 위의 종호형한테 밀리고 종호형은 또 그 위쪽에 밀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우리가 2/3지점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 외국대는 벌써 하강로프를 이용하여 우리와 똑같은 위치에서 주마링을 하고 있었다. “하이”하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고생 끝에 주마링을 마치고 안부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2동의 2-3인용 텐트가 쳐저 있었고 그 미국인들은 벌써 휴식을 끝내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안부에서도 아늑한 곳을 찾아 라면으로 점심을 끓여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7-800m를 애써 올랐으니 서로 말들은 없지만, 나를 비롯해 몇 명이 고소증세가 또 왔을 것이다. 잠시 후 출발하여 10m 정도의 휙스로프 구간을 통과하여 말없는 전진이 계속되었다.
이 구간은 나이프릿지는 아닐지언정 양쪽 어느 곳을 봐도 실족하는 경우에는 껍데기없이 황천의 객이 되는 천길 낭떠러지의 지름길이다. (귀국 후에 알았지만 승태형이 하산 중에 이 휙스로프가 끊어져 miss정을 만나지 못할 뻔 하였단다.)
우리는 애써 힘쓰며 올라가고 있는데 45세 정도 되어 보이는 미국인이 정상을 다녀오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오면서 우리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c5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 보니,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슬쩍 언덕지고, 저 아래 넓은 눈밭 c5에 몇 동의 텐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순이는 벌써 c5에 도착했다. 캠프사이드까지 보기에는 가까운데 실제는 30여분씩이나 걸려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하여 털썩 주저앉아 잠시 쉬었다. 벌써 여섯시가 넘었다.
여기에는 장병호팀이 먼저 도착하여 모두들 잠시 쉬고 있는데 승태형이 손이 이상하다고 하여 보니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커다란 물집이 생겨 동상에 이미 걸린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어떻게 치료해볼 방도가 없으므로 무조건 빨리 내려가는 것이 최고라고 결정하여, 오늘은 늦었고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는 서로들 몇 마디 주고받다가 모두 피곤해서 이내 잠들어 버렸다.
1991. 5. 10
어제 무리한 운행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고소가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모두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승태형은 벌써 내려가고 우리 다섯만 남았다.
아침을 늦게 해먹고 3일치의 식량과 연료 등만 챙기고 나머지는 이미 정상으로 출발하여 아무도 없는 장병호팀의 캠프에 남겨놓고는 12시가 넘어서 denali pass를 향하여 출발했다.(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는 대개 고소 적응이 되지 않아 정신이 몽롱한 상태이었으므로 3일치 식량과 연료를 챙겼지만 실제로 먹을 만한 식량은 별로 없었고, 연료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 시간에 정상으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denali pass 부근에서 야영할 요량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제부터 일어날 엄청난 재앙의 시작인 것을 고소증세가 해소되지 않은 이 멍청하고 욕심 많은 인간들이 어찌 알았으랴...
30분 정도의 평지를 지나 400여m에 60도 가량의 설벽을 왼쪽 시선으로 하여 4시간 여에 걸쳐 쉬엄쉬엄 올라갔다. 설벽 저 아래에는 크레바스가 엄청나게 큰 입을 딱 벌리고 누군가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denali pass에 도착하자 윈디코너에서는 불지 않던 바람이 이곳에서 세차게 불어댔다. 좌측은 매킨리 지봉(支塜)이요, 우측으로는 정상을 등반할 방향이며 뒤에는 금방 올라온 벼랑이고 앞쪽은 어디를 둘러봐도 끝없이 평평한 얼음 뿐인 상황. 바람을 피할 곳이라곤 보이질 않는다. 우리가 이곳에 텐트를 친다면 밤사이에 바람에 날려 저 아래 크레바스 아가리 속에 들어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할 수 없다 이곳에 치는 수밖에...
텐트를 겨우 치고 스노우바와 피켈을 얼음 속 깊이 때려박고는 슬링으로 묶어 날아가지 않게 하였다.
이곳은 저 아래처럼 눈을 녹여 물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었다. 눈들은 강한 바람에 모두 날려가 버리고 꽁꽁 얼어붙은 얼음뿐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잔씩하고 잠을 청하려고 할 즈음,(약 9시정도) 밖에 웅성웅성 사람소리가 나 밖을 내다보니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정상을 다녀오고 있는 장병호팀이었다
지친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잔씩 끊여주니 모두들 반갑게 받아 마셨다. 차를 받아 마시고 나서 장병호씨가 대원중 하나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고, 또 다행히도 한국대가 이곳에서 캠프를 하고 있으니, 이 친구 하나만 이곳에서 하룻밤 쉬었다가 내려올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우리는 쾌히 그러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장병호팀에게 2번씩이나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