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교구 신부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마음은 위로를 받고 에너지가 넘치는데 몸은 녹초가 되었습니다.
앵커리지를 떠나 버밍햄에서의 시간은 마냥 행복했습니다.
신부들끼리 만나면 신학교시절처럼 웃고 떠들고 마치 초등학생들 노는 것과 같습니다.
신부들 모여 있을 때 잠시 관전자가 되어보면
이 사람들이 신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모습들입니다.
소위 방어기제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듯 싶습니다.
신자들과 있을 때라도 일부러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신자들과의 만남은 그래도 조금은 어른스러워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작용하지만
신부들끼리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가 되어줍니다.
그저 자기가 처한 여러 가지 사목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버밍햄에서의 시간이 짧지 않았지만 어느새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버밍햄에 느닷없는 눈이 내려 비행기가 못 뜰 수도 있다네요???
버밍햄이 따뜻한 지역이라서 공항에 눈이 오면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하답니다.
제설장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네요. ㅠ.ㅠ.
부랴부랴 금요일 새벽부터 움직여 티켓팅을 하니 경유지가 시애틀이 아닌 포틀랜드입니다.
한국에서 올 때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포틀랜드로 간다고 해서
앵커리지 도착하여 확인해 본 적이 있는데 시애틀 옆쪽 아래 해안도시였습니다.
버밍햄 공항을 포기하고 그래도 큰 공항은 비행기가 뜬다니 상황이 상황인지라
영어를 잘하는 신자까지 대동하여 아틀란타 공항을 향해 눈길 3시간을 승용차로 내달았습니다.
공항의 비행스케줄을 담은 스크린에는 거의 모든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뻘건 표시로 가득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탈 비행기는 살아있었습니다.
배웅 나온 버밍햄 신부와 신자와 작별을 하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 까지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하여 일찍 나온 덕에 출발할 게이트 앞에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4시간을 기다리고 출발시간 30분쯤을 남겨두었는데 게이트 앞이 부산해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직원이 데스크에서 마이크를 잡고 무슨 소리를 합니다.
유일하게 들은 소리는 팔라자이스라는 단어뿐이었습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캔슬소리는 안들렸으니 다행이다 싶어 스크린을 응시하는데
출발시간이 30분 늦어진다고 전광판 안내가 표시되었습니다. 휴~~~~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계속해서 30분씩 늦어진다는 방송이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다음부터는 한 시간이 늦어진다는 안내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오후 3시 반 출발 비행기가 밤 9시가 되도록 출발을 못하고 계속 딜레이되니
이제 지루함을 넘어 불안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다시 2시간 늦어진다는 전광판표시가 나타납니다.
드디어 10시반경 거의 12시간을 기다림 끝에 전광판에는
포틀랜드행 비행기의 사망(?)을 알리는 붉은 글씨의 캔슬이 저를 패닉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갑자기 데스크를 향해 줄을 서기에 저도 본능적으로 줄을 섰습니다.
아마도 비행기표를 교환하는 줄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핏들은 단어로 환승자들 먼저오라는 것도 들린 듯 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짧은 줄로 바꾸어 섰습니다.
또 다시 지루한 기다림 끝에 제 차례가 되어 교환한 표는 포틀랜드도 시애틀 경유도 아닌
엉뚱한 미네아폴리스를 경유하는 표였습니다.
앵커리지에서 출발하기 전 미국 전도를 구하여 대략 주의 위치를 보았는데
아마도 비슷한 이름인 걸보면 미네소타 주에 있는 도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쨋든 북쪽이니 다행입니다.
문제는 거의 12시가 가까운 시간, 맘은 조급한데 아는 이도 없고
새삼스레 밖으로 나가 호텔을 가려니 번잡하고 부담스러워 공항 노숙을 결정했습니다.
비행기 시간은 다음 날 정오이니 그 동안 여유는 있습니다.
아틀란타 공항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패닉상태를 벗어나 맥 놓고 있지 않기를 다행입니다.
마침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이동 통로에 짐바브웨의 돌조각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짐을 한쪽 벽면에 세워 놓고 이렇게 저렇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보석 같은 돌을 기가 막히게 조각하여 멋진 작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제가 보아도 감탄스러웠습니다.
하긴 먼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서 이 무거운 돌조각을 운반하여 전시할 정도면
결코 시원찮은 작품은 아니었겠지요. 그러다 뜻밖의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환희의 순간이었습니다.
소위 흡연 장소, 스모킹 에이리어 표시를 본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구원의 순간이란 이런 희열이 넘쳐나는 기분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주님! 구원과 흡연을 비교하는 불충을 용서하소서.)
원 없이 담배를 태우고 다시 오후에 출발 할 게이트 곁의 대기의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 저기 사람들이 흩어져 저마다의 모습으로 한밤을 지낼 자세를 잡고 있습니다.
다행히 공항 대기실은 춥지 않고 따뜻합니다.
사람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흉내 내어
저도 한밤 지낼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전날 밤 헤어지는 아쉬움에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수다를 떤 덕에
자리를 잡고 수 분 만에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깨니 아침 6시 그 불편한 자세로 무려 5시간을 잤습니다. 노숙도 할 만 하네요. ㅎㅎ
화장실로 들어가 고양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나니
전날 오전11시에 피자 두 조각 먹은 뒤로 커피밖에 안 먹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합니다.
둘러보니 쌀 음식을 파는 곳이 있었지만 극도로 긴장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음식이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머핀하나와 바나나 한 개를 커피와 함께 사서 먹는데
작은 머핀도 다 못 먹을 정도로 입맛도 없고 입안이 거칩니다.
다시 지루한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갑니다.
드디어 10시가 넘으니 전광판에 제가 탈 비행기의 안내가 나타납니다.
11시가 되자 또 다시 딜레이 안내가 나오기를 몇 번을 반복합니다. 다시 불안이 엄습합니다.
이제 더 이상 지체되면 주일 설 미사를 펑크내야하는 불상사가 닥치게 됩니다.
어제부터 손에서 거의 놓지 않았던 묵주에 힘이 가며 묵주신공이 아니라
예수마리아요셉을 되 뇌입니다. 2시 반쯤 드디어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오메~~ 하느님 땡큐!!!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이번에는 또 어쩐 일인지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하다가 멈추고 또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밖을 살펴보니 이륙 대기 중인 비행기가 우리 비행기 앞으로 예닐곱대 정도 나래비를 서 있습니다.
활주로에서만 시간 반 정도를 지체했습니다. 마침내 제가 탄 비행기도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미네아폴리스에 닿은 시간이 5시였습니다. 연결될 비행기 시간은 3시 30분비행기였는데....
연결 게이트로 가니 다음 날이나 되어야 연결 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세요. 저 주일미사 펑크내고 싶지 않아요!!!!!
대품피정(신부되기 직전에 받는 피정)이후로 이렇게 열절하게 기도해 본적이 있을까 싶도록 찐하게 찐하게 기도했던 금요일 밤부터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갑니다.
그동안은 델타항공으로 왔지만 미네아폴리스에서 다이렉트로 앵커리지에 연결된다면
여기엔 알래스카항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공항 대기실 약도를 보니 알래스카항공 위치가 그려져 있습니다.
열심히 뛰어가니 알래스카 항공 게이트 데스크가 있습니다.
표를 내밀며 오늘 나는 앵커리지에 가야한다며 이어지지 않는 영어단어를 나열하니
그래도 알아는 들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노! 랍니다.
순간 저는 가지고 있는 표를 구겨 버리는 시늉을 하며 뉴 티겟! 뉴 티켓!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이렉트가 아니라도 좋다.
시애틀을 경유하든 포틀랜드를 경유하든 앵커리지에만 가게 해달라며
손 그림까지 그려댔습니다.
그러자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살피던 직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카드로 새 티켓비용을 지불하고 드디어 시애틀을 거쳐 앵커리지에 도착하니
주일 새벽 00시15분입니다. 하느님 땡큐~~~~~
공항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어 한 모금 들어 마시니 온 몸에 힘이 빠지며 휘~청합니다.
긴장이 완전히 풀어졌나봅니다.
늦은 시간까지 못 주무시고 배웅 나오신
회장님과 총무님께 의지하여 공항을 빠져나와 밥 한 공기 먹고 사제관에 도착했습니다.
정말로 길고 긴 여행이었습니다.
너무도 급박하고 초조했던 이번 여행은 이렇게 맘 졸였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마쳤습니다.
신부들끼리 만나 채워진 에너지는 몸 어디엔가 쌓여 알게 모르게 위력을 발휘하겠지요.
어쨌든 하느님 땡큐!입니다.
연락받고 함께 맘 졸이고 걱정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심려 끼쳐드려 죄송하고
아울러 함께 기도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저는 앵커리지 들어올 때마다 왜 이리 진을 빼남유~~~~~?
첫댓글 신부님 말씀처럼 해피앤딩으로 끝났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한국인 신부 해외에서 첫 노숙자 탄생]이라는 해드라인으로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번 했습니다. 신부님 몸무게는 약 3kg정도 하강 했을거 같습니다.암튼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 여행이었습니다. ㅋㅋㅋ~~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궁하니까 꼭 필요한 말은 알아 듣게 되네요.ㅋㅋ
진짜 미국을 가시긴 가셨네요. 얼마나 마음 졸이셨을까요? 떠나신다 할때, 폭설때문인지.. 제 때에 돌아오실까 걱정은 되더라구요. 이 정도면 아직도 헤롱이실것 같은데 기행문이 의외로 빨리 올라왔네요. 신부님은 소설 꺼리를 찾아 다니시는가봐요. ㅎ. 무사히 도착하심에 감사드리고싶습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다 글감이어서 글 열개는 나올 경험이었지만
징글질글ㅠ.ㅠ. 생각하기도 버거워 길게 하나로 뭉뚱그렸습니다.ㅎㅎ
신부님 기행문 잘 읽고 나갑니다^^^
무지가 낳은 고생이었지요.^^
반쪽되셨겠네요. ㅠㅠ 이것도 무사귀환(?) 으로 쳐야하나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만하시길 감사드립니다. 휴~~^^
무사귀환 맞아요.^^
진짜로 국제미아 될뻔했고 설미사 못드리는 신부될 뻔 했는데
둘 다 면했으니 복두 많은거지요.ㅎㅎ
설레임 만큼이나 편안하구, 즐거운 외출이 되셨으면했는데, 선택도 없는 고생을 하셨네요. 뉴 티켓! 뉴 티켓! 하시면서 얼마나 조바심이 나셨을까..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하네요. 왜(?)냐고 묻지 마소서. 그래도 감사, 감사! 용감하셨기에 무사히 돌아오셨구 저희들 신부님과 구정미사했어요. 신부님이 내신 떡국도 잘 먹어구요~ ^ㅜ^
다음 신부님들 모임까지 받으신 에너지 아껴쓰소서. ^O^*~
내가 그래도 주님사랑을 제법 받아요. 그치요?
그래서 신자들 사랑도 잔뜩 받구요.ㅎㅎ
감사합니다.
웃음 나옵니다.... 우린 웃지만 ㅋㅋㅋ 킥킥킥 컥컥컥........ 웃으면서도 ... 미치겠네... 이게 웃을일이 되버린건... 타자기 앞에 앉은 신부님의 광활하고도 넓은 이상과 철학의 전파로 우리는 웃음으로 눈이 오그라들고 콧바람을 일으키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영공을 장악하신 자랑스런 신부님 이십니다...(근데 결국 그렇게 못돌아 오고 못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겠지요?? 가끔은 국제선 연착되면 그게 궁금하기도 해요.)
미국 항공 아주 드런(?)체계랍니다. 울나라는 좁아서 청주에서 떠서 제주가면 그 비행기 시 곧바로 청주오는데 여긴 하도 넓어서 이 공항거쳐 저공항, 또다시 다른 공항을 거쳐 또다시 다른 공항, 종착지가 없어요. 그러니 공항 한군데 펑크나면 이런 불상사가 생긴답니다. 울나라 좁지만 좋은 나라랍니다.ㅋㅋ
신 부 님 ! 신 부 님 은 이 제 Anchorage 성 김 대 건 안 드 레 아 성 당 에 코 ? 를 끼 셨 읍 니 다 .
이 제 부 터 는 눈 을 생 각 하 시 면 Anchorage 생 각 나 실 테 고 우 리 성 당 생 각 하 시 면 아트 란 타
또 미 네 아 폴 리 스 로 헤 매 시 던 아 름 다 운 ??? 추 억 이 되 살 아 나 실 테 니 어 찌 저 희 들 을 신 부 님 의
기 억 에 서 지 울 수 가 있 겠 읍 니 까?!....
이 고생 없었다고 내 새끼들 잊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명색이 아부진데....ㅎㅎ
제가 설명절 연휴 앞두고 설레여 있을때.. 가슴 졸이시며 엄청난? 고생을 하셨네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앵커리지가 마치 고향땅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을것 같아요.. 큰 경험을 하셨으니 앞으론 미국 어딜 가셔도 미아되실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죠? ㅋㅋ
빙고!!!
앵커리지 도착했을 때 느낌이 바로 그거였어.
따뜻하고 포근한 고향땅 밟은 그 기분!!!ㅎㅎ
한참을 가슴 조이며 읽었습니다...
엥커리지가 신부님의 좁은문(?)..
천국이 바로 신부님 코앞에 있나봐요..ㅎㅎ
제 컴 병원에 다녀오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신부님 휴가 떠나신거 알았어요.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하느님 감사...^^
그러게 정말 앵커리지 들어오는게 만만치가 않네.^^
천당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맘 조일까?
주일미사 궐해서 이쁜 내새끼들 굶길까봐
얼마나 맘 졸였는지...
그렇게 고생하시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덕분에 저희는 굶지 않았어요. 살뜰히 챙겨주는 아버지가 계셔서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르신게 다행이지요. 미리 아셨으면 전 더 미안했을텐데...
울 신부님은 어딜가나 따뜻 겸손하셔요 기쁨의 전도사 이시구요
속은 사람 또 한분 계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