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아름다움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별미를 기준으로 여행 일정을 짠다.
먹는다는 것이 사는 것이고 맛집의 요리를 즐기는 것이 삶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배고픔을 이기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빈들에서 40일을 굶주린 예수도 이 문제로 첫 시험을 치루지 않았던가?
선친께서는 평소 밥상머리에서 한 숟가락 덜 먹는 것을 가르치셨다.
서운하다 싶을 때 숟가락을 놓으라는 말씀이셨다. 무엇을 먹어도 배고플 때 팔 할 정도만 먹는 것은 어린 마음에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며 그동안 이것이 몸에 익혀져서 나름대로 인생의 여러 길목들을 잘 지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다채롭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공림학교 교사임용 순위고사를 보았다.
사회에 첫발을 내 딛는 시험이었기에 부담스러웠고 의미도 컸었다.
틈틈이 공부하였지만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기란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부족한 시간을 절제하고 아껴 사용하여 그 시험에 합격하고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자동차 운전면허시험 붐이 일어났다. 너도나도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데 얼떨결에 운전연습을 하게 되었다.
십여 일 후에 시험장에 나갔는데 코스 시험에서 불합격이 되었다.
기분이 씁쓸하였지만 또 열심히 연습하여 치룬 결과 드디어 합격하였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주어진 코스를 제 규정대로 통과하였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사십 오세에 섬기던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아직 젊은 나이고 별 재주도 없는 사람인데도 수차례의 낙선 끝에 뽑힌 것이다.
교회에서 여러 차례 낙선될 때 많은 시험과 갈등이 밀려 왔었다.
그러나 이것도 참고 저 것도 물리치며 묵묵히 기다려 왔던 결과였다.
6개월 동안 성경, 요리문답, 헌법, 정치 등 여러 과목을 공부하고 노회 고시부의 시험을 보았다. 내 생애의 어렵고 무거운 시험이라고 생각하였다.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리느냐를 고백하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시험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항상 ‘인생’이라는 시험이 나를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 여름 삼복더위에도 이겨내야 할 삶이다. 시간을 아끼고 생각과 행동도 절제하면서 진지하게 인생을 가꾸어 나가야 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노력은 절제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이 모든 시험들을 통해서 인내심, 불굴의 의지, 노력, 침착성들이 절제의 다른 이름으로 나를 가꾸어 주었다.
시련은 ‘무게를 달다’ 는 뜻으로 자신의 성숙을 위한 통과 의례이다.
고난은 자신을 다듬고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거쳐야할 과정이다.
아무리 작은 난관이라도 자신을 가다듬고 절제하지 않으면 결코 통과 할 수 없다.
성공한 사람은 먼저 스스로의 ‘인생’이라는 저울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시험은 무엇일까?
삶의 욕망을 다스리며 자신을 비우고 깨끗하게 성실히 준비한다면 ‘인생’이라는 시험에 합격하지 않을까?
우리 사랑놀이 할까요?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것과는 다르다.
‘움직임’은 생존의 본능적인 동작이지만 ‘살아있음’은 어떤 존재의 목적을 위해 제 발가락이나 눈동자를 까딱거리고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이란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며 그 잠 못 이루는 밤의 의미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이웃에게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찾아 땀을 흘리는 것이다. 다만 어떤 의미를 가진 삶이냐에 따라 그 삶의 격이 다를 뿐이다.
인간은 살면서 무엇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하면서 제 꼴을 갖추어 간다.
그 놀이는 쾌락이나 행복을 느끼게 해 주거나 나름의 의미를 띈 즐거운 일이다.
갓 난 아이 때를 심리학적으로 구순기니 항문기니 성기기니 하고 나누지마는 똥오줌 못 가리는 철부지 그 아이가 쾌감을 얻기 위해 벌이는 놀이현상일 뿐이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봄 햇살 환한 고샅에서 벌이는 소꿉놀이와 같은 것이다.
삶이란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이 쾌락을 좇는 연속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년 시절 한 때, 첫사랑의 소꿉놀이라는 열병을 앓는다.
온 세상이 그 계집아이 때문에 어두워지기도 하고 환해지기도 하지 않은가.
가을 서리가 내리고 밤하늘 별들이 잠 못 든 때는 뜻도 모를 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다 어떻게 낚시라는 새로운 놀이를 발견하고 그것에 빠지게 되었을 때는 새벽이슬에 젖으며 고독과 기다림을 배우며 자신의 존재를 알아간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며 돈 맛을 보고 회사에 매여 일에 중독되다가 수영을 배우고 등산을 즐기며 미쳐버린 어설픈 골프의 타수를 줄이려고 하다 보면 어느덧 한 평생이 덧없이 흘러간 것을 안다.
나는 어느 날 춘천을 감싸고 있는 청평 호반의 산에서 향기로운 더덕을 몇 뿌리 캔 후, 10여 년간 주말이면 새벽마다 그 곳으로 달려가는 놀이에 빠지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그 삼삼한 더덕줄기요 꿈속에서 헤매는 곳이 산속이었다.
자연산 더덕은 맛과 향취에서 뿐만 아니라 초록의 빛나는 네 개의 단아한 잎사귀를 가진, 산삼에 버금가는 우아한 산나물의 명문귀족이다.
이 녀석은 아무데나 그 사랑스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도토리나무와 소나무, 참나무, 가랑잎 등이 오랫동안 쌓여서 10 센티미터 이상의 향긋한 부엽토가 만들어진 곳, 산봉우리를 넘어온 햇살이 잠깐 머물다 지나가는 남쪽의 그늘지고 물기 머금은 골짜기 허벅지살 부근에 수줍은 자태로 숨어 자란다.
이제는 육감으로 더덕이 어느 산자락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30미터 안에 있는 더덕 잎을 구별하는 도사가 되었다.
즐거움의 대상이나 쾌감의 정도가 천차만별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저런 쾌락의 덫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어떤 친구는 올 해에 꼭 담배를 끊고 고스톱도 안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며 영어 회화에 힘쓰겠다고 결심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언제나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자기 합리화에 넘어가지만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기적인 자신에게 이미 고질병이 된 악성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캄보디아에는 요즈음 단기 의료봉사 활동 등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 6년 전부터는 많은 KOICA단원들이 이 나라의 교육, 의료, 컴퓨터, 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땀 흘려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땀과 시간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왜 이들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이나 또 아프가니스탄까지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 주고 인질 되는 지극한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고 사랑하며 걸어갔는가!
우리 하늘 보며 처음 마음먹은 뜻을 실천하면서 살면 좋겠다.
자신이 믿는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이 힘들어도 그와 약속한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떳떳이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제는 그 무엇보다 ‘너’를 위해 작은 사랑 보듬는 가슴 설레는 놀이를 하고 싶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차피 삶이란 꼼지락 거리는 것인데 제 좋은 일 하며 산다면 큰 복일 것이다.
자기 일이기에 아무리 좁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더라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가슴 뛰는 사랑놀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제 목숨을 걸 만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늦서리에도 고아한 자태로 향기를 머금은 국화처럼 우리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의미를 찾는 삽상한 바람의 산책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