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오년 전 쯤 일이겠다. 그 때 나와 동학들은, "창백한 책상물림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선생의 권면에 따라, 한창 '달리기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달리기면 달리기지, 어찌하여 '수련'이 붙는지 의아할 터이나, 내막을 알고 보면 수련이라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먼저 약 200미터를 편도와 왕복으로 달리며 평균 속도를 잰다/매일 혹은 일주일에 정해진 횟수만큼 달려서 몸에 붙인다/속도를 조금씩 높이도록 목표를 잡고 또한 기록하며 수행한다'는 지침에 따랐던 바, 그 목적이 다만 '운동'만이 아니라, 자기 역량 강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N선생이 내게 이렇게 말을 한다. "오늘 P가 달리기 하면서 H랑 마주쳤는데, 난감해서 혼이 났단다. 브래지어라고 하나? 그...여자들 가슴 속옷, H가 그걸 안 입고 달리고 있었단다. 나도 오늘 달리다가 봤는데....말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두 사람의 뉘앙스는 여름날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뭇 남성(!)들을 자극한 H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대체로 옳고 그름에 대한 직관이 빠른 나는, 그 순간, 선생과 남성동학이 뭔가 잘못된 근거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한 채, 저 장면은 내내 풀지 못한 문제로 내게 기억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훨씬 지난 뒤, 공부모임에 누군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와도 일절 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 k선생이 의아하여 뒷자리에서 물었더니 다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개인의 취향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수 없어요. 여경씨! 여러 명이 나한테 그 얘기를 했지만, 나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충분히 고려해서 옷을 선택합니다."
해묵은 문제가 풀리는 대화였다. 십 오년 전 씨알서원은, 생리 중인 여성동학을 이런 저런 지적/육체적 노동에서 배제하는 '배려의 날'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음식과 설거지 등 거의 모든 돌봄노동에 성차를 지우려고 애를 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젠더감수성'에서 퍽 진보적인 공부 모임이었고, '개인의 취향'에 대해서는 다소 계급적 편향(-반부르주아적!) 있긴 하였어도, 계급적 위계가 뚜렷하지 않은 영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보적이고, 젠더감수성을 의식했던 모임에서도, 스스로의 '성적자극'과 부딪칠 때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는 것.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그 날의 '노브라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정돈할 수 있게 되었다.
한 현직 검사의 용기있는 고발로 시작된 한국사회의 '미투운동'은, 급기야 여기 저기서 문화권력으로 행세해 온 이들을 단죄하고 고발하느라 바쁘다. 어째, 만만한게 딴따라인지, 공직사회로 갔던 포커스가 슬며시 이동하는 듯한 불길한 느낌마저 있지만, 어쨌거나 한 번은 크게 통과해야 할 일이라 여긴다. 권력과 위계에 의한 성범죄는 엄연한 '범죄'이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언급할 영역은 아니다.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취향'이라 해도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일상을 들여다보면 저 경계를 짓는 것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해당 커뮤니티 마다 새로운 공부와 합의가 필요한 영역일 수도 있다. 그간 암묵적으로 용인해오던 일들을 '범죄'로 규정하고 합의하는 데에는 시간과 과도기의 혼란, 고통이 당연히 따르지만, 이미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니 어쨌거나 각자의 젠더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속깊게 훈련하고 인식해야할 과제가 있을 뿐이다.
저러한 사회학적 과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 내가 정작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대목이다. 오랫동안 공부모임 속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나는 '지적/정서적/성적 성숙'이란 세 가지 잣대를 나름으로 세우게 되었다. 일상적인 수다나 일방적인 수강이 아닌, 쉼없이 자신의 의견을 세우고 밝혀야 하는 대화적 형식의 공부모임에서는, 각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지평을 숨기거나 과장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적어도 3년쯤 어울려 공부하다 보면 서로의 깜냥과 실력에 대해 대강의 실루엣이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어느 공부모임의 선생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지만, 나는,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특히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 애쓰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성적 미성숙'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니체나 벤야민처럼, 억압된 성적리비도를 지적으로 운행했다고 볼 만한 사람도 없지는 않겠으나, 이 얘기는 또 많은 맥락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에서 '지식인'이 갖는 특수성과 서양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갖는 차이 정도만 짚어두자)
몸을 홀대하고 인식만 벼리는 공부가 대체로 절름발이 공부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마땅히 그러하다. 가장 흔한 일차적 공부형식이 '지적 성숙'을 꾀하는 것이고,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 공부가 '불천노'(-'화를 옮기지 않는다')처럼 정서적/영적 성숙을 더불어 지향하는 공부일 것이다. 또한 한 개인이 '속깊이' 성숙하고 깜냥이 커지는 데에는 '성적 성숙'이란 관문도 마땅히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데 거창한 이론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수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진짜 일급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한 번 혼인했다가 출가한 사람들한테서 나온다"는 속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외국인 남성들이, 한국 유학생들을 두고 한다는, "우리가 십대 때 하던 성적 일탈을 여기 와서 하려 한다"는 놀람과 비웃음 섞인 말들이 또 무엇을 뜻하겠는가.
'성적성숙'이 과연 어떤 경지일지 일매지게 말하기 애매하나,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어쩔 줄 몰라 쩔쩔매거나, 상대를 무안하게 하거나, 제 욕심만 성급히 차리는 것들이 '미성숙'한 태도라는 것은 분명하고, 특히 타인의 쾌락에 대해 너무도 재빠르게 질투와 선망이 실린 비난을 쏟아붓는 태도는 공부하는 독신자들 사이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장면들이었다.
은폐된 영역이고 어떤 면에선 은폐되어야 하는 영역이기도 한 만큼 쉽게 말할 수도, 비평할 수도 없는, 그저 조용히 눈치만 챌 뿐이지만, 반복적으로 너무 어린아이 같거나, 너무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면, 일단은 차분하게 스스로를 살펴야 할 일이겠다. 그런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자신의 미성숙함을 거칠게 현시함으로써, 자신과 상관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사실을 왜곡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최악의 경우, 소속된 커뮤니티를 와해시키고 만다. 개인의 평등권에 기반한 젠더감수성과 강력한 처벌만으로는, 사방에서 일어나는 성적 루머와 사건들에 대한 근본 대책이 아니라 여기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