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반포 ‘아리팍’ 인기 뺨쳤다, 1930년대 경성 문화주택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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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문화주택...은행 빚 무리하게 쓰다 집 넘어가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06.
1930년대 대표적 문화주택 중 하나로 알려진 홍난파 가옥.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처 종로구 홍파동에 있다.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작곡가 겸 바이올린주자 홍난파가 1935년부터 죽기 전까지 6년간 살았다./이경아 '경성의 주택지'</figcaption>
‘요사히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 데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가뜬하게 짓고서 ‘스윗홈’을 삼게된다.’(조선일보 1930년4월14일자 ‘文化住宅? 蚊禍住宅’ 파란 글씨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만화를 곁들인 시사평론으로 이름을 날린 석영(夕影) 안석주(1901~1950)는 1920년대 이후 유행하던 ‘문화주택’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재래식 한옥대신 서양 주택을 개조한 문화주택은 당시 조선의 부호와 인텔리는 물론 월급 봉투 두둑한 은행원과 공무원 같은 샐러리맨이 꿈꾸던 스위트홈이었다. 요즘 서울 한강변의 반포 ‘아리팍’(아크로리버파크) ‘아리뷰’(아크로리버뷰)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안석주가 1930년 11월28일자에 실은 만문만화. 높은 언덕에 짓던 문화주택을 빗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지었다. 나무 위에 줄 사다리가 걸려있다. 집을 빼앗긴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다</figcaption>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전·서울대 전신)를 나온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당시 유럽 유학에서 돌아온 친구가 서울 근교에 지은 문화주택을 탐방한 스케치 기사가 있다. ‘구조는 벽이 연와조(煉瓦造), 지붕은 인조 슬렛트, 기타 부분은 목조이고, 외모는 대체로 ‘쩌맨 쎄셋슌’에 가까운 듯하나 아무 통일 없는 ‘스타일’이다. 먼저 현관을 지나 중앙이 홀이 되고 그 홀안에 윗층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 홀에서 바른편 방이 응접실이고, 왼편방이 가족실, 이 방으로 연속하여 식당 주방 변소가 있다. 윗층은 침실이 두개 있고, 서재와 욕실이 있다. (조선일보 1930년9월19일자 ‘유행성의 소위 문화주택’1)
박길룡은 친구가 1만원이나 들여 지었다는 ‘문화주택’을 혹평했다. ‘각 방 난방은 모두 ‘스토부’(난로)를 피게 되고 가구 등속도 전부 양식(洋式)이니 대체로 조선미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집이다.’ 이 문화주택을 지은 친구 근황을 이렇게 소개한다. ‘귀국하는 길로 생활을 개선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양옥을 지었는데, 지은 당시에 양풍가구를 사들인다, 문화설비 생활혁신에 분주하더니 어찌한 셈인지 새로 지은 양옥이 불편하다고 그 옆에다가 순 조선식으로 집 한 채를 지어놓고 지금 그집 가족들이 조선식집에 거처하고 양관(洋館)은 별로 쓰지 않고 혹 손님이나 있으면 응접실로나 쓴다고 한다.’
1937년 지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이준구 주택. 가회동이 있는 북촌엔 한옥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서양식 문화주택이 섞여있다/이경아 '경성의 주택지'</figcaption>
하지만 지저분한 부엌과 화장실을 개량하고 주부실, 노인실, 응접실, 서재 등을 갖춘 문화주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32년 종로2가에 증축한 화신백화점은 20평짜리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내건 마케팅 전술로 근처의 경쟁자 동아백화점을 문닫게 만들 정도였다. 금화산 아래 ‘금화장’이나 ‘연희장’처럼 문화주택이 몰린 지역을 부르는 이름도 생겼다. ‘장’, ‘원’같은 이름이 붙은 곳이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있고 채광이 좋은 언덕위 이층집이 많았다.
경성엔 이런 문화주택이 몰려있는 문화주택촌이 크게 세 지역에 있었다. 동부의 신당리·왕십리 일대, 남부의 남산과 용산 일대, 금화장, 연희장 등이 있던 서부 지역이다. 남산이나 용산은 일본인 거주지였고, 다른 지역도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몰려살았다. 샐러리맨들이 몰려사는 문화촌은 동소문 근방 정도였다. (최병택·예지숙,’경성리포트' 72~73)
문화주택을 보는 세간의 눈은 곱지 않았다. 안석영은 ‘문화주택은 돈 많이 처들이고 서양 외양간같이 지어도 이층집이면 좋아하는 축이 있다. 높은 집만 문화주택으로 안다면 높다란 나무 위에 원시 주택을 지어놓은 후에 ‘스위트홈’을 베푸시고 새똥을 곱다랗게 쌀는지도 모르지'(1930년11월28일자)라고 비꼬았다. ‘무리하게 은행 빚얻어 장만한 문화주택은 모래 위 성일 뿐이다. ‘몇 달 못되여 은행에 문 돈은 문 돈대로 날러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야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 꼴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이 문화(蚊禍)주택이다.’(1930년 4월14일자 ‘文化住宅? 蚊禍住宅’)
석영 안석주가 그린 조선일보 1930년 4월14일자 만문만화. 은행 돈을 빌려 문화주택을 지었으나 하루살이 모기처럼 몇달만에 집이 넘어간다고 꼬집었다.</figcaption>
안석영은 그물에 걸린 모기를 잡아먹는 거미에 은행을 빗댔다.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문화주택을 지은 신혼 부부는 은행이 쳐놓은 거미 줄에 걸려있고, 거미줄에는 대부(貸付)라는 글자가 적혔다. 분수 넘는 집을 산 조선의 젊은이들을 하루살이 같은 모기에 비유한 것이다. 안석영 만문만화를 분석한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를 쓴 신명직은 ‘식민지 근대의 환상은 하루살이 같은 욕망일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