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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터키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대 유적지인 에페스(성경의 에베소서)를 향하였다.
사도 바울은 지금의 터키 다르소에서 태어났고 터키 안탈리아에서 세번의 전도 여행을 떠났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동안 아나톨리아(터키 아시아지역 ) 지역을 포함하여 그리스까지 2만 km의 거리를 여행했다.
사도 바울은 당나귀나 노새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하루에 20~ 30km 정도를 걸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스에 와서 27개월 가까이 활약했다.
바울이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셀주크 시의 바로 지척에 있는 에페스는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울이 전도 여행 중 사목을 한 교회 중 하나가 예페스 교회였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개의 교회 중 하나가 바로 에페스 교회이기도 해서,
그리스도교 성지순례에서도 애페스는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지금 보는 아르카디안 거리는 예전 에페스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 도시였을 때 항구에서 상인들과 선원들이 처음 도착한 거리다.
고대 항구에서 대극장까지 길이 530m, 폭 11m의 거리 양쪽으로 열주가 뻗어있었다.
그리고 거리 양쪽에 상점과 갤러리 같은 것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도로는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되었지만 아르카디우스 황제 재위 기간 동안 복원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이름을 따서 아르카디안 거리라고 부른다.
110 8년에 세워진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코린트식 기둥과 조각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정면 아치 위에 여신 니케가 조각되어 있다.
신전 내부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리고 벽에는 에페스의 기원 전설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에페스 유적들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 받는 것이 바로 셀수스 도서관이다.
셀수스 도서관은 최근에 재건되기도 해서 그 화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2세기 중반 135년에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다.
이 도서관의 앞 문은 코린트식 기둥으로 화려하게 지어져 있고, 정면 맞은 편에 왼쪽부터 네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각각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하고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도서관 중앙 아래 지하에 위치해 있다.
이 도서관은 약 1만 2천권의 장서를 보관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에서 죽 내려가면 왼쪽에 병원이라고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앞에 뱀 형상과 막대기가 그려져 있는 돌 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사람들이 특히 고관 대작들이 이용하던 의료 시설이 있던 병원으로 여겨진다.
아르카디안 거리 끝에는 거대한 원형 극장이 있다.
1~ 2세기에 피온 산의 경사면에 지어진 것으로 2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극장이다.
원래 이곳은 연극과 문화 예술을 위한 극장이었지만, 로마시대의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던 곳이랜다.
관객석 위에서 바라보면 고대의 항만 유적들이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하며,
현재도 에페스 문화예술 축제기간 중에는 공연장으로 사용되어 일년에 한번 정도는 특별 공연이 개최된다.
또한 자연환경을 통해 마이크 없이 저 위에까지 목소리가 잘 들리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현재의 음향 시설을 능가한다.
실제로 우리가 발성을 해 보니 소리가 매우 크게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극장부터 셀수스도서관까지 이어지는 대리석 거리다.
이 곳 역시 길가에 가로등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도서관 가까이 길바닥에 여인의 모습과 왼발이 새겨진 돌이 있다.
바로 매춘소를 광고 하는 것이랜다.
이 발 보다 크기가 작은 남자는 출입을 금지하는 뜻이라고 하는데, 당시 어른 남자들의 발 크기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차낙칼레 남서쪽 30km에 위치한 대규모의 고대 유적 트로이로 향하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트로이 목마, 또한
트로이 전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트로이 목마는,
19세기까지 역사적 실제가 아닌 전설 속의 도시로만 알려졌는데,
독일의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1871년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이어,
1873년 지금의 트로이 유적 자리에서 황금 목걸이와 항아리, 잔 같은 것을 발굴해 트로이가 전설이 아닌 실제 도시였음을 만 천하에 입증하였고,
100년이 넘는 발굴 작업 결과 트로이 유적은 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부터 여러 시대의 유적이 중복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트로이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이 부근에는 이보다 훨씬 유서 깊은 유적이 많아서 가이드 오스카는 그리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터키 제 1의 도시 이스탄불로 떠났다.
교통 체증이 서울보다 훨씬 큰 듯 인구가 1700 만명이라니 그럴만도 하다.
터키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 국가다
1924년 제정된 최초의 공화국 헌법에서 이슬람이 국교로 지정되었으나,
1928년 삽입된 헌법 수정한 회의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터키 국민의 98% 이상이 이슬람을 믿고 있으며 나머지 2% 정도는 그리스 정교도, 유대교도, 가톨릭교도로 구성되어 있다.
터키에서 이슬람 사원을 지미 (cami )라고 부른다.
이 뜻은 '꿇어 엎드려 경배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외곽으로 빙 돌아가니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이 보인다.
비잔틴 로마시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이 곳 이스탄불로 옮긴 후,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며 비잔틴의 수도 역할을 했다.
저 성벽은 7~8세기 페르시아와 아랍군, 9세기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공격에서 도시를 보호했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될 때도 골든혼 부근 일부만 제외하고 육지쪽 성벽은 건재 했으며,
이스탄불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도 이 성벽만은 돌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단단한 3중 성벽은 413 년 비잔틴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지었으며,
이것은 구시가지를 에워싸듯이 둘러 서 있으며,
천년동안 외적으로부터 이스탄불을 지켜온 철옹성이다.
총 길이 6.5km에 이르는 성벽은 삼중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 성벽이 높이는 10m, 두께 5m의 이중 구조로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11개의 성문과 195개의 감시탑이 있었다.
이스탄불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도 이 문을 통한 것이 아니고,
열린 문을 통해 이스탄불로 입성했다고 하니 성벽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이스탄불의 튤립 축제 야경을 구경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예전에는 아야소피아 성당이었던 자리로 왔다.
성당 건너편에 있는 레스토랑 건물 화단에 예쁜 하얀 튤립이 피어있다.
왠지 모르게 하얀 튤립은 향기가 있었는데 다른 색갈있는 튤립은 향기가 없었다.
아야소피아 성당 한 마당에 이슬람 상징 문형을 튤립 꽃으로 만들어 튤립 축제 작품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튤립꽃이 모여 앙탄자를 깐 듯 화려하게 깔려 있었으나,
우리의 마음이 이 자연의 축제에 함께 동화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슬람교에서는 메카를 향해서 하루 5번 기도를 올려야 한다.
기도 시간이 되면 지미의 스피커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이것을 '에잔'이라고 하며 에잔을 읊는 사람을 '호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유럽 대륙부터 아시아 대륙까지 이어지는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라마라해 그리고 골든혼이라고 부르는 할 리츠가 흐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저기 보이는 저 바다가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인데 저 멀리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아야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사원 앞에 있는 광장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다.
저기 보이는 블루 모스크에는 첨탑인 미나래가 6개 있다.
내부에는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실내를 비추고 있고,
이즈니크에서 생산된 21000장의 푸른색 타일이 창에서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서 블루 모스크라고 한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신시가지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향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라 불리며 화려한 서양식으로 지은 대표적인 건물이다.
이 궁전은 오스만제국 말기의 술탄(왕)이 거처했던 궁전으로 19세기 중반 술탄 압둘 메지드 1세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전형적인 유럽식으로 지었는데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이 모델이 되었다.
돌마바흐체라는 말은 '가득찬 정원' 이라는 뜻으로 바다를 메운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 당시는 원래 톱카프 궁전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너무 비좁고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새로 세운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내부의 사진은 찍지 못하게 되었다. 가이드 투어는 터키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가 있으나 한국어는 우리의 가이드 설명으로 대신했다.
궁전의 입구에 있는 시계탑은 1890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세운 것으로 높이가 27 m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프랑스 폴가르너의 시계와 오스만 제국 왕실의 문장이 있다.
궁전 입구에 들어가면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을 만나게 되며,
웅장한 정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궁전은 중앙 연회장을 중심으로,
남쪽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남자들의 공간인 셀람륵이 있고,
북쪽은 여성들의 공간인 하렘이 있다.
전부 6명의 오스만 술탄(왕)이 저기 보이는 이 건물을 궁으로 사용했으며,
공화제로 바뀐 후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관저로 사용했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집무 도중 이곳에서 사망했는데,
고인을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간은 사망 시간인 오전 9시 5분에 멈춰 있다.
궁전 관람 도중 마지막에 보게 되는 저 홀인 그랜드 홀은 화려한 궁전의 결정판이다.
홀의 크기도 대단하지만 36m의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했다고 하는데 무게가 무려 4.5 t 이나 나간다고 한다.
(맨 앞장 팜플랫 사진 참조)
내부 사진 촬영 금지 !
바다를 메워 만든 돌마바흐체 궁전 옆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이 유럽 쪽 해안을 따라 길다랗게 뻗어 있다.
최고의 위치임에 틀림없다.
저 fence 옆에서 궁전을 향하여 '철썩 철썩~ '하며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어깨를 철썩 철썩 두드리는 소리 같다.
말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이 무엔고?
이 돌마바흐체 궁전은 총 길이 600m, 홀 43개, 방 285개. 발코니 여섯 개와 목욕탕 여섯 개를 갖추고 있는데,
인테리어에 사용된 대리석과 가구는 유럽 각지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벽은 600 점이 넘는 유럽의 명화로 장식했고,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헤레케산 최고급 수제품이라 한다.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이 도시를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유람선을 탔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나누는 경계의 해협으로 양쪽으로 보이는 이스탄불의 전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해협 양쪽으로는 비잔틴 시대와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모스크나 그 귀족들의 별장 같은 유적을 볼 수 있었다.
동 서양을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람선에서 차 한잔씩을 마시며 여유를 부린다.
나는 갑자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떠오른다. 이렇게 멋진 대륙을 정복하고 33세의 나이에 이질에 걸려 죽다니...
거봐라 인생은 허무한거여 ~ ~
보스포러스는 그리스어로 '암소가 건너다' 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강의 신 이나코스에게 이오라는 예쁜 딸이 있는데 제우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댄다.
어느날 부인 헤라 여신이 나타나 이 사실을 알게되자 다급해진 제우스가 사랑하는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켜,
나중에는 탈출을 시도해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도망가게 했다 라는 말이 있다.
불륜 사랑에 관한 신화이지만 감동이었다.
'소' 로 만들어서라도 도망치게 한 제우스의 사랑은 그렇게도 절실했을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도시 이스탄불,
로마 비잔틴시대,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거치며 수도 역할을 했던 이스탄불,
아직도 수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동 서양의 양면성이 있는 도시 이스탄불, 그리고 그것을 공존하게 하는 이 바다의 자리에 서 있는 나 !!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해협 한 가운데 보이는 저 탑은 크즈 쿨레시 (처녀의 탑)로 불린다.
아시아 지역의 중심지 위스퀴다르에 가까운 앞 바다에 작은 인공섬이 있고 그 안에 작은 탑이 보인다.
12세기 비잔틴제국 때 해양 감시 초소였는데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사용하고 있다.
크즈는 처녀, 클래시는 탑이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 위스퀴다르 일대를 다스리던 왕에게 딸이 있었는데 16세가 되기 전에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딸을 구하고자 왕은 바다 위에 탑을 지어 그녀를 보내고 음식물을 날라다 주었다.
세월이 흘러 딸이 16세가 되었을 때 왕은 생일 축하의 과일 바구니를 딸에게 보냈는데,
바구니에 숨어 있던 뱀이 나와 결국 예언대로 독사에게 물려 죽는다는 얘기다.
식당 어딜가나 케밥인 경우 테이블에 빵과 샐러드 그리고 야채가 나왔는데 빵을 적당히 찢어서 그 위에 이것저것 넣고 소스를 찍어 먹었다.
직화로 구운 밀가루 빵이 쫀득쫀득한게 맛이 괜찮다.
그런데 벌건 주황색 스프 만큼은 No thanks 다.
구시가지로 돌아와서 점심식사 후 히포드롬 광장으로 왔다.
술탄 아흐메트 1 세 사원 정문 앞에 기다란 광장으로 비잔틴 시대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경기장이다.
가장 남쪽에 있는 저 기둥은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원전 16세기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을 세운 것 중 하나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가져왔고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 자리에 세웠다.
원래 30m 높이 였으나 지금은 19.8 m 만 남아있다.
이스탄불 최대규모의 지하저수지 예레바탄 사라이 지하궁전은 오래된 각기 다른 신전에서 운반해온 기둥으로 만든 건축물로 유명하다.
532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후에 유스티나누스 황제가 증축했다.
당시 시민들의 중요한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 톤의 물을 저장 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입구에 들어서 계단을 내려가면 코린트식 기둥 336 개가 늘어서있는 지하 공간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두워서 사진 잘 못찍음.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전경이다.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이슬람의 다양한 종교가 섞여 있어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알려진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성당이었다가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경되어 사용하고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이 아야소피아 박물관과 블루 모스크가 지척에 마주 보고있다.
'신성한 지혜' 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아야소피아는,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서원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기도 하다.
대 폭동으로 완전히 불에 타 버린 성당을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축가 안데미우스 와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성당으로 재건축하게 했고 537년 12월 완공되었다.
760 년까지는 성당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만 그 후 서로마 제국과 가톨릭이 분리되면서,
명칭도 하기아소피아로 불리면서 그리스 정교회 총본산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이곳이 점령 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1847년 스위스의 건축과 풋사티가 아야소피아 수리를 맡아 하던 중 회칠 속에 가려진 모자이크를 발견하게 되었고,
아타튀르크가 1930년 이곳을 박물관으로 지정하게 되면서 회칠이 벗겨져 가려져있던 모자이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돌아보면서 벽부분의 회칠이 군데 군데 벗겨진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중앙 돔은 지름이 31m 높이가 55m로 엄청나게 규모가 큰데,
네 개의 거대한 다리가 돔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돔 천장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 구절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후 19세기 경에 쓰여진 것이다.
본당에 있는 중앙 문은 황제 전용문으로, 문 위에 예수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
그리고 비잔틴의 황제인 레오 6세가 등장하는 모자이크화가 있다.
1453년 이곳에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을 때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이슬람 종교적 특성인 생명의 모사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율법에 따라, 성당 내에 있었던 모자이크들 위에 회칠로 덧발랐다.
그리고 성당 밖에 네 개의 미나래가 세워지면서 이슬람 사원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미나래의 기능은 첫째는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소리치는 것.
둘째는 외부인에게 자미의 위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지하궁전에서 도보로 3분 가면 블루 모스크라 불리는 술탄 아흐메트 1세 사원이 나온다.
터키에는 이슬람교 신자가 인구의 90%가 넘으며 가장 중요한 이슬람 사원은 블루 모스크다.
특히 내부가 푸른색 타일로 장식 되어 있어서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2~4개의 미나래 (첨탑)가 일반적이었던 자미(사원) 건축 전통을 뒤엎고 무려 6개나 만들었다.
이슬람의 총본산인 메카의 미나래도 6개인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자신은 황금으로 지어 달라고 한 것을 건축가인 마호메트 아아가 숫자 6으로 잘못 알아듣고 지었다는 후일담이 생겨났다.
내부는 보지 못했다.ㅠㅠ
아야소피아 박물관에서 도보로 2분 정도 가면 톱카프 궁전이 있는데 오스만 제국 때 술탄(왕)들이 거주하던 궁전이다.
은순이와 몇몇 친구들은 지쳐서 톱카프 궁전 바깥에 정원으로 조성된 사진의 궐하네 공원에서 기다리고,
우리는 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갔다.
세계 최강 대국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톱카프 궁전이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세 대륙을 다스리던 궁전이었던만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골든혼 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의 노른자위 땅에 지었다.
1453년 꿈에도 그리던 이스탄불을 장악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현재 위치에 궁전을 건립했고,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500년간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 톱카프에 살았던 슐탄은 열여덟 명이었다.
톱카프는 대포 문이라는 뜻으로,
원래 유목민이었던 터키의 전통을 반영하여,
유목민들의 큰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텐트를 치는 것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지었다.
약 7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궁전은 명실상부한 제국의 핵심이 었고,
전성기는 5,000명이 넘는 사람이 거주했다고 한다. 궁전에는 4개의 정원이 있으며 지금 보이는 저 건물은 제 3정원이다.
이 건물은 술탄 알현실로 외교사절을 접견하고 중요한 협상을 하던 일종의 회담 장소였다.
각 방마다 주제가 있었고 어떤 방에는 모세의 지팡이가 있었다. 다른 방에는 궁전에서 쓰던 부엌기구들도 전열되어 있었다.
이 정원은 톱카프 궁전의 제4 정원 바로 옆에 있는 귈하네 공원으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진입로를 따라 300m 가량 걸으면 공원의 끝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는 골든혼, 보스포러스 해협, 마르마라 해 세 바다를 한꺼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도심가 탁심광장에서 이스티클랄 거리로 들어갔다.
신시가지의 중심이며 상업과 쇼핑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광장으로 과거에는 정치적인 모임과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잔치 분위기로 흥청거리며 지나갔다.
광장 남쪽으로 이어져있는 이스티클랄 거리는 탁심광장과 함께 현대 터키를 대변하는 곳으로 서울의 명동에 해당한댄다.
명품 가게, 부띠끄, 레스토랑, 은행과 각국 영사관이 밀집해 있으며 분위기 좋은 클럽과 바(술집)가 성업 중이다.
상점마다 쇼 윈도우에 비추이는 음식이 정말 군침돌게 먹음직스럽다.
궁금한게 많은 두 여인네가 유혹을 못 이기고 케밥을 사서 조금씩 나눠 맛보기로 했다.
So good!!!!
또한 오스카 가이드로부터 터키는 마도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고 해서,
우리는 빼놓지 않고 마도 아이스크림 집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배스킨 라빈스 만큼 유명하다고 한다.
very delicious !!!!
이제 7박 9일의 여정을 끝내고 복잡한 터키 도시 혼잡을 뚫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터키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가 본 것 외에도
지중해 쪽에 페티예, 칼칸, 안타키아 ~
흑해 부근의 샤프란볼루,시놉, 트라브존 ~
중부 아나톨리아의 이마시아, 앙카라 콘야, 말라티아
동부 아나톨리아의 카르스, 아니, 타트반 ~
남동 아나톨리아의 하란, 하산케이프, 마르틴 ~ 두루두루 볼 거리가 너무 너무 많으나
짧은 일정이라 속속들이는 볼 수 없었다.
볼거리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터키 !!!
우리가 자기네 형제의 나라라고 주저없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나라 터키 !!!
이제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마법의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흩날리는 물보라에 손을 내밀며 다정했던 터키에게 작별을 고하자 !!
우리를 여행하도록 도와준 가족들에게 감사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동행해 주시는 주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2018, 4, 25. 金 汀
네명 친구들의 칠순을 축하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