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대하여
나는 43여 년 동안 서울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서울은 어떤 도시보다 편안하고 애정이 가는 곳이다. 서울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로 600여 년 동안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많은 문화재와 전통 건축물이 있고 각종 편의시설, 공공기관, 대형 시장 등이 밀집되어 있는 중심지이다. 서울은 1,000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메트로폴리탄이다.
1) 미관, 인구, 교통과 환경
도시의 미관은 해치는 가장 큰 것이 간판, 전봇대, 교통 표지판이다. 좁은 인도에 전봇대와 입간판까지 있어 보행자들의 보행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빌딩들마다 어지럽게 달려있는 큼지막한 간판과 인도에 설치된 교통 표지판들로 인해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의 거리는 시각적인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근래에 전 서울시장이 디자인 도시를 표방하며 지역 안내판과 간판을 정비하게 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으나 현재는 답보 상태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전기 공급 시설을 지하로 매설해야 하고 간판의 크기와 색상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요구된다. 1960년대 경제 성장의 발달은 많은 지방의 사람들을 서울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서울은 많은 지역 사람들과 최근에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다국적 다문화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의 인구는 서서히 줄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분당, 일산, 송도 신도시 등의 건설, 세종시 건설로 인한 정부 기관,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 서울을 빠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격한 고령화 인구의 증가와 서울 주택 가격의 상승은 많은 서울의 도시 빈민과 서민들을 주변 도시로 이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버스 노선의 개선과 순환 도로의 확충, 고속철의 발달로 서울은 더 이상 서울 시민들만이 누리는 공간이라기보다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 사람들의 공간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의 환경 문제 중에서 대기 오염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고 많은 사람들은 두통, 기관지염과 천식, 아이들은 아토피 피부염 등으로 시달리고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자전거 도로망을 확충하고 지하철 노선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기 자동차를 빨리 상용화하여 공기 질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중랑천과 안양천의 오염은 많은 인구들이 배출하는 생활 용수 때문인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최근에는 청계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지류(우이천, 당현천)등이 복구되어 시민들의 친환경적인 레저 시설로 거듭나고 있다.
많은 숲들이 생겨나서 서울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와 레저의 욕구들을 채워주고 있다. 잘 정돈되고 관리되는 국립공원 내 산(수락산, 도봉산), 강남 시민들의 보금자리 양재 시민의 숲은 이미 오래 전에 조성되었다. 큰 산이 없는 서울 동부와 성북권 시민들을 위한 서울 숲(2005년 성수동 뚝섬 개발), 북서울꿈의 숲(2009년)이 조성되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산이 없어 녹지 공간이 부족한 서서울 지역에 난지도 쓰레기장을 없애고 하늘 공원(월드컵 공원)을 조성하여 숲을 조성하였다. 월드컵 경기장을 지으면서 동시에 개발한 것이다. 1992년 미군 용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여 용산 가족공원이 조성되었고 전쟁기념관이 들어섰으며 2000년대에는 경복궁 내에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여 명실공히 용산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여의도에 있던 5.16 광장은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주로 경축 행사와 국민 동원 행사지로 남아 있다가 자전거 타는 곳으로 바뀌었다가 1999년에 여의도 공원으로 바뀌어 직장인들과 주변 거주인들의 휴식과 운동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의 환경은 무분별한 택지 개발과 오염에서 녹지 확보와 친환경 복지 공간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2) 사회와 문화
서울은 2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도시이다. 종로1가에서부터 3가까지, 명륜동 대학로, 명동과 신촌 지역은 항상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곳에 자리잡은 대형 서점들(영풍문고, 교보문고, 반디 앤 루이스, 아마존 헌책방)은 서울 시민들의 교양과 문화 수준을 높이는 장소이다.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었던 70~80년대 서울 시민과 젊은이들의 약속과 추억의 장소였던 종각역 종로서적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쉽다.
서울의 주요 대학들은 대부분 강북에 위치하고 있어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모이게 되어 이곳이 발전하게 되었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가 모여 있는 신촌 중심으로 서쪽 문화가 형성되고 고려대, 성균관대, 경희대, 국민대, 동덕여대, 서울여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한성대가 혜화동 대학로와 돈암동을 중심으로 동쪽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70년대 곳곳에 서울대 단과대들을 관악산 기슭의 신림동으로 모두 모아서 종합대학을 만들면서 형성된 신림동 고시촌은 독특한 고시촌 문화를 만들었고, 신림동 순대촌을 명소로 만들었다. 노량진 학원가를 중심으로 돈 없는 재수생들과 회사원들도 컵밥이라는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왕십리 시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당동 떡볶이촌, 장충동을 중심으로 한 족발집, 회사들이 밀집되어 있어 생겨난 무교동 낙지집, 이북 사람들이 와서 퍼지게 된 냉면과 만두집 등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대학생 문화는 크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 운동권 중심의 문화와 이러한 문화에 다소 관심이 적고 대학 생활의 낭만과 젊은 시절의 치열한 방황을 하는 자아찾기 문화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들은 따로 분리되어 생각하기 보다는 MT라는 문화체험행사를 통해 서로서로를 이해하는 장이 마련되어 통합되고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성리, 강촌, 춘천, 새터로 가는 경춘선 기차에서 나름대로 통기타 문화와 사랑이 싹텄다. 1980년대부터는 신촌역에서 출발하여 의정부와 일산 등을 순회하는 순환선 기차역(경기도 장흥, 일영, 백마역(일산))등을 중심으로에 만들어진 통기타 카페와 레스토랑과 민박촌으로 MT를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영 토탈 미술관 내에 있었던 초가지붕으로 만든 찻집은 군고구마와 머그컵을 공짜로 주어 많은 학생들의 인기를 끄는 장소가 되었다.
주말이 되면 각종 문화 행사, 축제, 볼거리가 서울 시내를 가득 채우고 계절에 따른 다양한 페스티벌을 서울시가 개최하여 시민들의 발길을 모은다. 종로3가에서 시청까지 이르는 곳곳에 위치한 조선의 궁궐들, 남산 한옥마을, 북촌 한옥마을, 삼청동, 인사동에는 수많은 외국인들과 젊은이들이 한국 문화와 전통을 알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현대문화와 패션의 흐름을 알기 위해 즐겨 찾는 명소이다. 최근에 초등교사 연수 강좌에서 북촌 체험 강좌는 금방 마감이 되는 진풍경은 이러한 문화적 욕구의 분출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후반에 시작된 강남 개발은 강북의 부유층과 고위층들의 이주를 가속화하였고 이들만의 문화를 형성시켜 급기야는 PSY의 ‘강남스타일’의 노래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압구정동, 강남역, 청담동을 중심으로 강남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를 형성시켜왔고 성인들은 예전에 영동이라 불리던 논현동 일대에서 나름대로의 유흥 문화를 즐겼다.
너나 가져라 라는 이름이 붙여진 모래섬 여의도가 1970년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방송국들이 여의도에 자리잡으면서 대중문화를 이끄는 주체로 등장하였다. 1980년대 3S(영화, 섹스, 스포츠) 정책에 따라 수많은 청소년들이 방송국에 몰려가 오빠 부대를 형성하며 새로운 문화 트랜드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잠실 야구장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울분과 답답함을 해소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클래식 문화는 주로 종로 세종문화회관, 장충동 국립극장강남 서초동의 예술의 전당(1990년)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강북권 문화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노원문화예술회관이 지어졌고 하계역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건설 막바지에 이르렀다. 청량리 민자 역사는 롯데가 시공하여 백화점과 마트가 들어서서 현대적인 면모의 역사로 탈바꿈하였고 창동역도 철도차량기지가 포천으로 이동하게 되어 민자 역사 건설이 계획되어 도봉면허시험장까지 이주시켜 창동역에서 노원역에 이르는 곳이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서 서울의 각 구는 구민회관이나 구민예술회관을 많이 건설하여 구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문화 강좌와 문화센터 등이 활성화되어서 선진화된 평생교육시스템이 만들어졌다.
3) 산업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서울이다. 시청, 종로와 을지로에 밀집해 있는 회사와 언론사,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빌딩 내 수많은 it 관련 회사들이 있으며 점심시간이 되면 수많은 넥타이 부대들이 나와 줄서서 근처 전통을 가진 유명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대형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금융기관과 증권거래소와 방송국이 집중되어 있는 여의도, 의류업체가 몰려있는 동대문 쇼핑 상가, 인쇄업과 영화 산업의 메카인 충무로, 각종 공구와 설비 가게가 밀집되어 있어 우수개 소리로 탱크까지 만들 수 있다던 종로 4가의 세운상가는 이제 그 자리에 귀금속 가공 업체와 판매업체가 자리잡고 있다. 종로 세운상가의 명성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컴퓨터와 핸드폰 시장의 메카가 된 용산 전자 상가 수많은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인다. 또한 197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영등포와 구로구의 공단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구로 디지털 단지와 가산 디지털 단지로 바뀌었다.
서울의 각 지역은 상업과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3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000년대 후반에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외국계 커피숍과 북카페는 1990년대부터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진선 북 카페’는 이러한 고급 음료 문화의 시작이었고 신촌과 대학로에 자리를 잡으며 새로운 카페 문화를 선도한 ‘민들레 영토’는 음료와 함께 간식거리(라면, 과자)와 함께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우리나라 식음료 문화를 선도하였다. 다방이 커피숍으로, 마담이 바리스타로 변화하면서 세련된 실내 인테리어와 외부 인테리어로 단장하면서 2만달러에 걸맞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최근에는 연극과 뮤지컬이 대한민국 서울의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TV 속에 나오는 노래 못하는 인형같은 가수들과 발연기를 하는 연기자들에 식상한 관객들은 멋진 외모, 풍부한 성량과 우수한 연기력을 가진 뮤지컬 배우들에게 열광하며 비싼 돈을 내면서도 즐기고 있다.
4) 노원구와 도봉구
노원구와 도봉구는 도봉산, 수락산과 불암산을 중심으로 강북의 강남이라 불리며 교육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발전해 왔다. 서민들을 위한 주거 형태로 자리잡은 상계동 아파트 단지의 개발과 지하철 4호선의 개통은 노원구의 발전을 이끌었다. 노원역에 있던 노원문고와 미도파 백화점(후데 롯데백화점과 롯데 시네마)는 그나마 노원구 개발 초기부터 교양과 문화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고, 후에 개발된 중계동은 은행 사거리를 중심으로 학원가가 밀집하고 유해 환경이 없어 주거지로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하계역은 건영 옴니 백화점 내 가구 매장들, 건영 옴니 시네마에서 영화를 상영하면서 문화를 선도하였다.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요람인 육군사관학교가 공릉동에 자리잡고 있고 그 앞에는 대한민국 체육 선수들의 꿈의 장소인 태릉 선수촌이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근처에는 서울여대와 삼육대 그리고 옛 서울공대 자리인 공릉동 자리엔 서울과학기술대(옛 서울산업대)가 대학가로서의 풍미를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노원구 인접해 있는 동대문구 제기동 청량리에 있는 홍릉 선농단에서 임금이 제사를 지낸 후에 근처에서 설렁탕을 끓여서 먹고 그래서 갈비집에서 70~80년대에 성황을 이루다가 지금은 1개의 갈비집만 남았다. 그 명맥을 태릉의 먹골(묵동)과 배밭골이 이어받아 태릉갈비집이 성행이 이루다가 현재는 수락산 갈비집으로 도농 삼거리와 남양주 미개발 지역에 큰 갈비집으로 발전하였다.
도봉구는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중랑천을 중심으로 중대형 아파트들이 건설되고 도봉구청이 도봉동 근처인 방학역으로 이전하면서 발전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창동역 민자역사 사업과 더불어 그 주변에 형성된 중대형 고급 아파트 건설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공릉동에 있던 북부지방법원이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있던 도봉동으로 새 청사를 지어 이주하면서 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성대 야구장이 있던 곳은 삼성 레미안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북구 수유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 상권과 유흥가, 2000년대에 들어선 미아 삼거리 역 근처의 대형 백화점, 삼양동 아파트 단지 개발 등은 강북 지역의 활기가 넘치게 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5) 서울 관련 노래들
첫댓글 동서울터미널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옛날 동대문(???)고속터미널과 마장동시외버스 터미널, 강변과 강남고속터미널 강북에서 강남을 이어서 이천과 충청도로 갈라면 지나가는 과정과 코스등을 생각해보시면---
왜 서울에서 노원구와 도봉부만 했을까? 그리고 서울 관련 노래 추가요. 혜은이의 제3한강교,
노원구 발전의 이면엔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달동네가 현존하는대...
오늘 하계역에서 이충숙공원을 끼고 눈속을 헤치면서 달동네를 다녀왔는대 요즘도 언론<방송메체>이 뉴스에
"연탄배달"하는 장면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곳입니다.
<500원에 공급되는 350만장 연탄은행>이라는 프랑카드도 있더군요.
눈이 많이 와서 골목골목에 연탄재가 많이 있었지만 예전처럼 연탄재를 길에 마구 깨서 미끄럼을 방지하진 않았지만
그옛날 내가 살던 왕십리 산동네를 생각나게 하는곳 이더군요.
<현재도"현대식공중화장실""미로 같은좁은골목길""비탈길의 부분시멘트계단".......아..~~~옛날이여>
새해 복많이 받고,건강..감사합니다.
연타재로 빙판을 막아주면서 왜그리 손은 시렵고 연탄이 제대로 산화되지않은 경우는 잘 깨지지도 않아요--- 그때가 그립네요 ======
답글 감사합니다. 그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가 바로 88년도에 저희 식구가 1년동안 살던 곳이라 잘 압니다. 공중화장실을 공동으로 이용하던 기억이 납니다.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지금에 감사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