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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200×75매
거미줄이 있는 풍경
安 輝
형이야? 나 승우. 오랜만이네. 그간 별 일 없었죠? 오피스텔로 들를 게. 아직 술기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소파에 드러누워 잠시 뜨겁게 짓누르는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3년도 더 넘게 연락을 끊고서 어디서 뭘 하는지 조차 모르게 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만난 지 이틀이나 사흘 밖에 되지 않은 것처럼, 녀석의 전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불쑥 연락을 한 녀석의 의도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면서, 슬며시 경계심이 뒤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언제나 그렇게 나타났다가 홀연 떠났고, 그가 왔다 간 자리에는 늘 뒤처리를 해야 할 찌꺼기가 남아 있곤 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간밤에 있었던 이상한 일과 죽어라 마셔댄 술 때문만도 아니게 생각이 통 정리가 안 되어 어지럽던 터에, 동생까지 불쑥 전화를 걸어와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간밤 최 여사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저녁에 전화를 건 것은 나였다. 며칠을 끙끙거리던 수필 한 편을 비로소 완성했으므로 기분이 좋다, 그래서 전화를 한 거다, 그랬는데, 그녀는 그럼 한 잔 해야겠네요 하고 내 말을 반겼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 모였고, 술판이 시작됐던 거였다. 맨 먼저 항아리수제비집에서 오징어두루치기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신데다가, 카페에서, 포장마차에서, 그리고 기억도 아슴아슴한 꼬치구이 집에서 마신 맥주까지 그렇게 고삐 풀어놓고 마신 엄청난 양의 술이 결국은 문제였다.
속이 메스꺼웠다. 사무실 소형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병째 벌컥벌컥 마셔보았다. 폭음. 술 마시고 놀 때의 즐거움이란 언제나 다음 날 혹독한 고통으로 갚아야 할 어리석은 가불(假拂)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소파에 누웠다. 글을 쓰려고 만들어 놓은 오피스텔은 실 평수로 다섯 평 남짓. 나는 내 사무실을 '캡슐'이라고 부른다. 술기운이 다시 치솟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
동생을 일러, 우리 가족들은 '역마살(驛馬煞) 낀 놈'이라고 부른다. 도깨비처럼 살아가는 녀석에게 방황의 역사는 길다. 고등학교 적에 우리가 살던 그 소도시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학생 축구선수이기도 했던 녀석은 졸업반이던 그 해 여름부터 가출을 반복했다. 며칠 만에 돌아온 그는 항상 술에 절어 있었다. 처음엔 아버지와 큰 형에게 무던히도 많은 매를 맞기도 했는데, 워낙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그는 입 한 번 뻥긋하지 않고 그 매를 견뎠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방에 드러누워 드렁드렁 코를 골며 한바탕 실컷 잠을 잔 다음, 며칠 용케도 학교를 잘 다니는가 싶으면 또다시 종적을 감추곤 했다. 결국 수업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하느니 못하느니 할 적에 내가 지난 날 은사였던 동생의 담임을 찾아가 빌고, 그 은사께서 발 벗고 나서 준 덕분으로 겨우 졸업장만 받아 올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승우가 보여준 지독한 방랑벽의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다. 다만 세월에 묻히고 묻혀서 모두들 그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포기하여 접어두기에 이르렀을 따름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 그의 방랑벽을 끝까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심장병은 동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의 합의였다. 어머니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느라, 밤마다 잠을 못 이룬 채 현관을 들락거리면서 그렇게 살았다.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그런 어머니의 일상은 언제나 눈물 투성이였다. 승우와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만 보아도 가슴을 졸였고, 비슷한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을 훔쳤다.
그러던 어머니는 몇 번을 망설이던 끝에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갔다. 그 때도 승우는 헤아릴 길이 없는 방랑벽으로 또 한 번의 무단가출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맨 처음 찾아간 점술가로부터 어머니는 '그 아들은 크게 될 인물이니 너무 조바심하지 말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 날 어머니는 정말 모처럼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바로 그 다음날 새벽, 승우는 어디서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술 범벅 매 범벅이 된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검은 색 승용차를 함께 타고 온 험악한 사내들에게 이끌려 현관문을 열고 서 있었다. 잠이 덜 깬 온 식구들의 경악도 그렇거니와, 돈도 없이 무턱대고 고급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끌려온 그를 풀어내기 위해 어머니는 새벽부터 열 군데가 넘는 동네 이웃집 대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급전을 빌려대는 난리를 쳐야 했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사뭇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고, 잠결에 들려오는 바람소리에도 심장을 떨어야 했다. 졸업식을 저만치 앞두고도 승우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드디어 무당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완고한 천주교 집안인 시댁이 그나마 멀리 있고, 어머니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 못하고 묵인하기로 하신 아버지가 출근해있는 시간을 틈타서 굿판을 벌이기로 한 용단이었다. 다섯 며느리를 몽땅 천주교인으로 만들어내신 억척 할머니가 끝내 모르기 망정이었다. 마침 겨울방학 중이라 집에 내려와 있었던 덕분으로 대학생이던 나도 보게 된 그 날 굿판에서의 어머니 얼굴은 애절함 그대로였다. 막내아들의 엇나가는 인생을 어떻게든 잡아보려는 절박한 정성이 어머니를 한없이 울게 했던 굿이었다. 징징 징지징 징소리가 울리는 동안 무당이 하라는 대로, 긴 시간을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빌고 또 비는 어머니의 두 눈은 내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어허어... 이 집에 들어앉아 막내아들 홀려서 내보내고 죄 없는 어미 애간장 다 녹이는 잡귀들아, 물러가라아 물러가..... 나중에 귀신을 몸에 받는 시늉을 하기 시작한 무당은 어머니와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청승을 떨며 잘도 울었다.
할머니가 알면 기절초풍을 하게 될 지도 모를 심각한 위험까지 무릅쓰고 벌인 굿판이었건만, 효험이라곤 어머니가 며칠 마음의 위안을 산 것이 고작이었다. 승우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그로부터도 한참 만에 돌아온 녀석은 며칠을 못 넘기고 또다시 행방불명이 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그나마 어찌어찌 군복무를 마치고 온 다음에는 아예 집을 나가면 종무소식으로 몇 달을 지내다가 사건을 꼬리에 달고 돌아왔다. 경찰서로부터 이런 저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돼 있다는 연락부터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어머니가 철석같이 믿기 시작한 것이 하나 있었다. 댁의 막내아들은 나이 서른이 되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크게 성공할 것이니 너무 걱정을 마시라. 진짜 용하다는 점술인 하나가 어머니에게 들려줬다는 그 얘기는 어머니에게 그나마 희망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소중한 메시지였다.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좀 먼 훗날의 얘기라 하더라도 서른 살이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역술가의 말을 의지하면서 겨우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끝없이 유전(流轉)하는 승우의 방랑을 지켜보면서, 우리 가족은 거지반 포기한 상태에서 기적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의 서른 살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용하다는 점술가의 서른 살 약속 또한 결국 허망한 꿈이었다. 동생은 도무지 주체할 길 없는 방황과 무질서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여전히 인생의 그림을 엉망진창으로 그려가며 살았다. 온갖 잡다한 일들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났고, 그것들은 영락없이 우리 가족들의 부끄러운 기억으로 저장되곤 했다.
***
최 여사. 접니다. 괜찮으십니까? 문득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수화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낮아져 있었다. 저기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요. 끝나는 대로 제가 전화를 드릴 게요. .... 뭘까. 중요한 일이라니? 아무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긴, 그러면서도 귀여운 데가 있는 그녀가 술을 제법 잘 마신다는 것은 술친구로 자주 어울리는 H대학 김 교수와 W연구소 이 박사 등의 소개로 우연히 인사를 하게 된 바로 그 날이었다. 그랬어도 그녀와 술판에 길게 어울리는 일은 없었다. 어제 저녁 별 용건도 없이 그저 막연한 궁금증에 전화를 했다가 술판을 만든 것은 순전히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김 교수, 이 박사, 이 박사의 여자친구 박 여사, 최 여사의 친구 김 여사까지 불러 모아졌고, 우리는 차수를 더해가며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그러다가 이 사람 저 사람 술자리를 뜨고 최 여사와 단 둘이 남게 된 곳은 세 번 째 포장마차에서였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다 핸드백을 집어든 친구 김 여사를 배웅하고 온 최 여사가 갑자기 취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월찮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포장마차 안 공간에서 그녀는 갑자기 입술을 던져왔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으나, 나도 술기운에 몸이 축축해진 뒤여서 그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입술을 던져오는 그녀의 행동은 대단히 유쾌한 충격이었다.
포장마차를 비틀거리며 나온 우리가 옮겨간 술자리는 최 여사의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공한지 주차장 옆 그리 크지 않은 꼬치구이 집이었다. 그 집에서 몇 병의 맥주를 더 시켜 마시던 우리는 웬만한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진한 키스신을 연출하면서 가게 주인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도를 넘은 술 때문이었겠지만, 그 때부터 내겐 최소한의 당혹스러움도 없었고, 흥분도 깊어졌다. 술기운이 덮쳐와 의식의 스위치를 깜박깜박 껐다 켰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를 몰고 왔던가, 택시를 타고 왔던가. 지독한 갈증이 목구멍을 할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L호텔 간판이 떠올랐다. 프론트 데스크에서 신용카드를 내밀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눈을 떴다. 아뿔싸. 침대 옆자리에 누군가 사람이 있었다. 최 여사였다. 둘 다 벌거벗은 몸.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최 여사는 나보다 먼저 잠이 깼던 모양이었다. 눈시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나는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감추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많이 부끄러웠던지, 최 여사는 발갛게 달구어진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된 거죠? 모기소리 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어왔다. 글쎄 어떻게 된 거지? 민망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하고 소리를 내며 그녀가 깊은 한숨을 토했다. 술이란 참 잔인한 음식이군요. 내가 왜 갑자기 그 말을 했을까. 그 말끝에 나는 내 말을 조금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속내의를 챙겨들고 욕실로 갔다. 그 제서야, 새벽녘 호텔 방에서의 일이 뿌옇게 떠올랐다. 만취상태에서 방에 들어온 우리는 옷을 아무렇게나 훌훌 벗어 던졌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자그마한 그녀의 몸을 침대에 눕히고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에서는 뜻밖으로 군살이 제법 잡혔다. 그녀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키스는 강렬했다. 그녀는 특히 젖가슴 부위의 애무를 못 견뎌 했다. 이윽고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있었다. 과도한 음주 끝에는 말을 들어주지 않는 내 몸의 문제를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거나. 별 짓을 다해 보아도 술에 흠뻑 젖은 몸은 도무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고백했다. 미안해요. 술을 많이 먹은 날은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내 머리를 감싸 꼭 안으며 '괜찮아요'라고 두 번 말했다. 뱀처럼 온몸을 휘감고 있는 술기운이 자꾸만 의식을 가물거리게 하고 있는 동안, 반쯤 혼수상태에 빠진 상황 속에서 얼마가 지난 뒤 나는 또다시 똑같은 시도와, 똑같은 처참한 결과를 맛보았고, 풀죽은 목소리로 용서를 비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녀는 엄마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그런 나를 용서했다. 그래, 그랬었다. 그런 기억의 더듬거림 뒤를 따라, 사거리 신호등이 생각났다. 신호등을 보면서 '안전'을 의식했던 기억이 비틀거리며 솟아올랐다. 차를 몰고 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한사코 운전대를 잡으려는 그녀를 밀치고 내가 운전대를 빼앗아 앉았던 일이 되살아났다. 음주운전은 아무래도 내가 낫습니다. 맞다. 그러면서 내가 운전을 해서 호텔로 왔던 게 틀림없었다. 미쳤어, 미쳤어.... 가슴이 저렸다.
나 빨리 집에 가봐야겠어요. 욕실에서 나온 최 여사는 서둘러 옷을 찾아 입었다. 함께 나가시죠. 어쩐지 그녀를 먼저 내보내고 호텔 방에 덩그마니 남는 것이 싫었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함께 호텔을 빠져나오는 동안 그녀는 간밤 포장마차 이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제의 제 행동을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저를 이상한 여자로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앞으로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네요. 침대 위에서의 거듭된 망신을 생각하면 사실 그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숙취에서 덜 깨어난 눈빛으로, 쓰린 속을 달래면서 허둥지둥 우리는 그렇게 이상한 아침 공기 속을 헤엄쳐 나오고 있었다.
***
띵 또옹... . 뻑뻑한 뇌리를 어지러워하면서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승우였다. 그런데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한 것은 찾아온 그들의 행색이었다. 오피스텔 문을 열다가 하마터면 어 하고 소리를 칠 뻔했다. 덩치 큰 남자는 분명 승우였다. 그러나 한 발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여자였다. 누구지?.... . 두 사람은 마치 유니폼을 맞춰 입은 것처럼, 승복을 개조한 듯한 똑같은 모양의 밝은 밤색 상의에 검은 색 바지차림의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이 구리 빛으로 탄 승우 녀석은 치렁치렁 길게 기른 머리를 뒤로 묶어, 같이 온 여자의 생머리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이냐? 문을 닫으면서 내가 말을 꺼냈다. 3년은 아직 안 됐을 걸? 녀석의 능청스러운 태도는 여전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가 그 때 잡지사에 있을 때 만났으니까 3년 넘었지. 잡지사 그만 둔 지 이제 만 3년이야. 능글거리는 웃음을 입에 무는 녀석의 얼굴에 주름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인사시켜 드릴께. 이 분은 우리 작은 형님, 그리고 이쪽은 제 처(妻)얘요. 여자는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면서 목례를 했다. 눈동자가 검고, 눈빛이 날카로운 여자였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두 사람은 내가 권한 맞은 편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어디서 어떻게 지냈니?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목에는 가느다란 염주가 걸려 있었다. 응, 사실은 산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있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동생의 말이 좀은 우스꽝스럽게 들려왔다. 평생 공부와는 담쌓고 살아온 녀석 아니던가. 공부? 무슨 공부를 하는데? 절에서 불경공부 하니? 그렇게 물으면서도 나는 그들의 행색으로 보아 정식으로 스님공부를 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짐작을 했다. 엷게 웃으면서 둘은 서로 한 번 눈길을 나누어 마주 바라보았다. 아냐. 역학(易學) 공부를 하고 있어. 역학이라면 점술가 되는 공부를 말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두 사람의 행색이 그랬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동생은 다음 설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공부하다가 만났는데, 나보다 공부가 훨씬 높으셔. 이미 접신(接神)의 경지에 있어요. 여자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역력히 보였다. 간밤의 술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현기증이 났다.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일인가. 비뚤 비뚤 살기로야 동생만한 인물도 없겠으나, 몇 년 만에 머리 묶어 매고 신 들렸다는 여자와 나타나 역학이 어쩌고저쩌고 한단 말인가. 나는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졌다. 엄마한테는 연락했니? 어머니 얘긴 녀석에게 아픈 송곳이었다.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살얼음판 걷듯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의 죄책감은 적지 않은 고통일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착을 포기한 채로 어디론가 떠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곤 해왔던 것이다. 엄마한테는 안 갈 생각이야. 형도 얘기 말아 줘. 내 모습 보면 아마도 기절하실 걸? 그러면서 또다시 녀석은 히죽이 웃었다. 그래, 안가는 게 차라리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공부라는 것은 언제까지 할 거니? 그리고 그 다음은 뭘 할 건데? 두 사람은 또다시 싱긋 마주 보며 웃었다. 공부가 끝이 있나? 산에서도 공부하고, 내려와서도 공부하는 거야. 지금 형을 만나는 것도 공부 중의 하나야. 문득 짜증이 났다. 녀석이 의도적으로 얘기의 초점을 흐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얘기는 그게 아니고....... . 그 때 동생은 얼굴을 굳히면서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알아요. 형 말이 무엇인지 나도 안다구. 하지만, 이 길은 평생 공부의 길이야. 공부를 놓으면 신이 노여워 하신다구. 신의 노여움을 사면 큰일이 나거든. 녀석의 얘기는 다소 사이비 종교 신자의 맹신론 비슷한 느낌을 던졌다. 나는 더 이상의 논쟁을 원치 않았다. 숙취가 깊어 육신의 상태가 엉망인 데다가 오랜만에 만나 머리가 복잡해지는 얘기를 계속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부모님의 근황과 우리 형제들의 사는 얘기를 차례대로 들려주었다. 동생은 같이 온 여자를 산에서 만난 얘기며, 자기들의 만남이 운명에 의해 비롯된 필연이라는 여자의 해석을 들어 거역할 수 없는 인연임을 설명했다. 그럴 듯 했지만, 딱히 귀에 걸려 남는 얘기는 아니었다. 점쟁이 무당을 무던히도 찾아다니던 어머니의 무위한 발길을 그렇듯 많이 보아왔던 탓일까, 나는 역학이 말하는 이런 저런 주장들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형 지갑 좀 줘 봐요. 더 있다가 밥이라도 한 끼 함께 하고 가라는 내 말을 완강히 거절하고 일어서던 동생은 갑자기 지갑을 달라고 했다. 지갑은 왜?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뜨악하니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돈 빼앗아 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 마슈. 나는 엉거주춤 지갑을 꺼내어 건넸다. 동생은 저고리 왼 쪽 큼지막하게 생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빨간 색깔의, 금박문양이 새겨진 아주 작은 헝겊주머니였다. 그는 내 지갑 안 쪽 잘 쓰지 않는 칸에다가 그것을 넣으면서 말했다. 이건 특별히 이 사람이 형을 위해 만든 부적이유. 이유는 묻지 말고 넣고 다녀요. 부적을 함부로 꺼내어 보면 부정 타니까, 절대로 다시 꺼내보지 말고....... . 어이가 없었다. 어떤 얘기를 해볼 겨를도 없이 녀석은 부적을 넣은 지갑을 내게 돌려주었다. 뜻 없다 생각하지 마시고 부디 잘 간직하십시오. 여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을 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복채라도 줘야 되는 것 아니니? 뒤늦게 내가 말했지만, 동생은 단호하게 손을 내 젓고는, 서둘러 가야 할 데가 있다며 황황히 떠나갔다.
문을 닫고 나서도 나는 우두커니, 얼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녀석이 다음 기약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해서 최 여사는 연구소 이 박사의 여자친구 박 여사의 친구였다. 어쩌다 어울리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먼발치에서 알고는 있었지만,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시작한 것은 사람 좋은 박 여사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우선 박 여사가 나를 잘 보았던지 최 여사에게 좋은 말을 건넸고, 내게도 최 여사를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은 색소폰 연주자의 솜씨가 일품인 5인조 밴드가 있는 라이브 카페 '탱고'에서 어느 날 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갈 적에, 최 여사의 승용차를 타고 그녀 집 근처까지만 가기로 하고 편승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째 그냥 헤어지기가 좀 섭섭합니다. 제 생각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으시면 차 한 잔 하시고 들어가시지요. 그 날 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는 차가 그녀의 집 께에 이르렀을 때 정말 그냥 가기가 섭섭해서 그런 제의를 했다. 비교적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그녀는 내 말에 동의했다. 카페에 들어가 앉았을 때 나는 맥주를 주문했고, 그녀는 음료수를 시켰다.
최 여사께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저런 잡사(雜事)들을 놓고 얘기하다가 내가 다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제법 큰 독서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네, 괜찮아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어느 새 우리 사이는 약간 풀어져 있었다. 거의 매일 박 여사를 만나셔서 밤늦게까지 다니시는 일이 많으신 데,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을 내가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제가 좀 이상해 보이시죠?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집에 식구가 없어요. 다른 지방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집에 안 오고, 아들은 중국 유학 중이거든요. 늘 혼자 있으니까, 일찍 들어가게 되지 않는군요. 최 여사의 얼굴에서 그늘을 본 것은 비단 그때뿐이 아니었다. 외람되지만, 뭐든 좋지 않은 일이 있으신 가요? 얼굴이 슬퍼 보일 때가 있거든요. 그녀에게서 긴장의 빛이 사라진 건 바로 그 즈음이었다. 진지하긴 했으나, 그런 대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사실은 남편이 바람을 피워요. 그런 사실을 안지가 3년이 됐는데, 견디기가 쉽지 않네요. 전에는 어디를 가도 예쁘다고 나를 데리고 다니더니, 이젠 한 달에 한두 번 형식적으로 집에 왔다 가는 게 고작이에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남편에 대한 강렬한 미련이 보였다. 평생 진짜 사랑은 단 한 번뿐이라는 말이 있습디다. 사랑이란 것은 참으로 묘하죠. 배신의 칼날 앞에서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게 사랑의 속성이라던가요? 최 여사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군요. 이제라도 돌아오면 받아줄 용의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촉촉한 눈빛으로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3년 전에는 그걸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나는 일반적인 관심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빙긋한 웃음을 보였다. 친구랑 우연히 점을 보러 갔었거든요. 그땐 남편에 대해서 특별한 의심도 없었는데, 점보는 분이 하는 말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상대가 남편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처녀에다 머리가 긴 미인이고, 벌써 4년이나 됐다고 또박또박 구체적으로 얘기하더라구요. 그쯤에서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역술원 보살님의 말은 모두 정확했어요. 난리가 났었죠. 별 짓을 다해서 가까스로 수습이 된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신랑의 마음은 이미 나를 떠나 있더라구요. 또다시 그녀의 동공에 쓸쓸함이 고였다. 남편의 일은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하고 내가 물었다. 녹음장치를 했죠. 집에 들어오면 틀어박혀 있는 남편 방 전화에 녹음장치를 했는데, 불과 두 달도 안 되어서 모두 다 드러나더라구요. 나는 그녀의 얘기 중에서 점술가의 말 부분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도 못한 일을 그렇게 정확하게 맞춘다는 것은 여전히 내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었고, 지난 날 어머니의 경우를 보아도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셨나요? 중국유학을 갔다고 그러셨던 것 같은데. 나는 또 한 번 관심의 축을 바꿔보려고 시도했다. 예. 지난 봄 제가 중국에 데려다 놓고 왔어요. 지금은 어학 코스 밟고 있는 중이에요. 복잡한 집안사정을 피하게 하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떻게 중국에 보낼 생각을 하셨나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역술원 보살님 말씀이 그랬거든요. 아들을 외국에 보내야 한다고. 그래야 아들에게 닥칠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 . 나는 조금 짓궂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보살님이 중국이라고 나라 이름까지 찍으셨나요? 그녀가 약간은 열 적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뇨. 너무 멀리 보내지 말라고만 했죠. 중국을 선택한 것은 어떤 아는 교수님으로부터 조언을 받았구요. 그녀의 말에는 역술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신망(信望)이 강하게 묻어 있었다. 나는 언젠가 잡지에서 읽은 얘기를 꺼냈다. 옛날, 임신 중인 아이의 성별을 기가 막히게 맞춘다는 한 점술가가 있었죠.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사술(詐術)에 불과했어요. 찾아온 사람에게는 무조건 태중의 아이를 아들이라 해놓고, 카드에는 '딸'이라고 적어놓는 겁니다. 나중에 딸을 낳은 사람이 찾아와 항의를 하면 사실은 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서운해 할까봐서 아들이라고 한 거다, 그러면서 '딸'이라고 써놓은 카드를 보여줬다는 거예요. 아들 낳은 사람은 다시 찾아올 까닭이 없고, 딸 낳은 사람에겐 카드를 보여주면 그만이니까, 언제나 이기는 게임이었죠. 물론 요즘 같은 초음파검사기가 없던 옛날 얘기입니다만...... .
그런 얘기 끝에 우리는 자리를 일어섰던 것 같다. 그 날 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족집게처럼 잘 맞춘다는 최 여사의 그 점술가를 한 번 만나볼까 어쩔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부질없는 일로 밀쳐버리고 말았다.
***
저 맥주 두 병만 마실게요. 최 여사는 아까부터 하고 있던 심상치 않은 얼굴을 풀지 않으며 말했다. 늦은 저녁 여덟 시가 다 된 시각에 만나, 전에 지나치다가 몇 번 본 적이 있는 교외의 한 전통찻집으로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왔었다. 차(車)가 있으므로, 술이 아닌 솔잎차나 매실차 같은 것 한 잔 하자는 나의 말을 그녀는 그렇게 맥주 두 병을 마시겠다고 바꿔 받았다. 그녀가 뭔가 무거운 이야기를 하리라는 것에 대해서 사실 나는 나름대로 짐작을 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 역시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때부터 그녀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심각했던 것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차분하게 문제를 받아들일 참이었다.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침착하고 유연하게 대하리라 생각해 두었다. 술기운이 됐건 어쨌건 여자가 남자와 한 방에서 잤다면, 그것도 벌거벗고 몸을 댔다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솔잎차 한 잔과 맥주 두 병, 그리고 손바닥만한 소쿠리에 담긴 팝콘이 나왔다. 내가 솔잎차를 반잔도 채 못 마셨을 때, 그녀는 이미 맥주 한 병을 다 비웠다. 그리고는 남은 한 병도 따르고 있었다. 용기가 안 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술 좀 마시고 말씀드리려고요. 두 번 째 병을 빼앗아 들어 그녀의 빈 잔에 마지막 술을 내가 따랐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나쁜 해석을 하지 마세요. 아직 최 여사의 생각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에게 어떻게든지 따뜻한 말을 하고 싶었다. 나쁜 일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그런 차원이 아니고요.... . 거기에서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세상에는 순서를 바꿔서 하는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어제의 일도 그렇게 생각합시다. 어쩌다 순서가 좀 바뀐 일이다, 그렇게 여겼으면 해요. 그리고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하자, 이렇게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녀의 모습이 좀은 정겹게 느껴지는 것도 간밤 인연의 영향일까. 나는 나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지고 있었다. 알아요. 무슨 말씀인지도 알고, 진심인지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에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해요.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무엇인가 시작이 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저 우연한 하나의 사고였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왠지 싫군요. 이번에는 그녀가 나의 말을 끊었다. 사고였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사실 기억이 전혀 없어요. 포장마차에서 친구를 데리고 나와 택시를 태워준 이후부터는 아무 기억이 없어요. 눈을 떠보니 호텔이었고, 놀라울 뿐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제 잘못이니까, 사과드릴 게요. 그러고 나서는 그녀가 마지막 잔을 마셨다. 나는 굳은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지금 최 여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모욕인지 아십니까? 저에게 너는 여자에게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하고는 호텔 방으로 끌고 들어가기나 하는 잡놈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구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난감해 했다. 그게 아니구요. 사실은 오늘 제가 역술원에 가봤거든요. 그녀가 엉겁결에 털어놓은 역술원이라는 말에 나는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점쟁이한테 갔었다구요? 그렇게 말해놓고, 나는 잠시 내가 '점쟁이'라고 표현한데 대해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네. 가서 알아봤는데요. 더 이상 만나서는 안 된다고 그러더군요. 나는 조금 씩 화가 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요? 그녀의 표정에 두려움이 흘러들었다. 생일을 여쭤볼 수는 없고 그래서 생월까지만 넣었는데 보살께서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요. 나는 어렴풋이 무슨 얘기 끝이었던가 생월을 알려주었던 기억이 났다. 왜 그렇다는 거죠? 나는 급하게 다그쳐 물었다. 제게 관재수(官災數)가 끼었대요. 지금 막 관재수가 시작되기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간다는 거예요. 제 남편이 저를 풀어놓은 채로 기회를 노리고 있대요. 조금만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뒤를 붙이고, 낚아챈다는 얘기예요. 저는 너무 무서워요. 저도 그렇지만, 제가 선생님께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는데도 나는 잘 참고 있었다. 최 여사는 그렇다 치고,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한낱 역술인 한 사람의 말에 따라 왜 내 인생문제가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거죠?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한낱 역술인이 아니에요. 정말 영험하신 보살님이시라구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그 분 말은 무조건 들어야 돼요...... . 그녀는 거미줄에 단단히 잡혀있는 한 마리 곤충처럼 보였다. 역술이라는 거미줄에 갇혀서 발버둥 치다가 지쳐 넋을 놓은 사람. 운명을 오직 두려움의 눈으로만 바라보며 역술인의 점괘에 목숨조차 맡긴 딱한 사람.... .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어떤 현실이 그녀를 그렇게 몰고 왔는지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애달픈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가슴속에 한 가닥 연민의 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운명의 거미줄에 갇혀 사는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동생 승우였다. 승우에게 자신을 칭칭 휘어 감고 있는 운명의 질긴 거미줄을 보여준 사람은 누구일까? 낮에 오피스텔로 같이 왔던 그 여자일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 동생이 넣어준 빨간 헝겊주머니를 잡았다. 부적을 꺼내어 그녀 앞에서 호기롭게 찢어 보일 참이었다. 절대로 다시 꺼내지 마슈. 웬 일일까? 그 때, 거의 협박에 가깝던 동생의 경고가 떠올랐다. 뜻 없다 생각하지 마시고 부디 잘 간직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단 한 마디 던진, 함께 왔던 여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빠졌다. 맥이 턱 놓이는 허탈감이 뼛속으로 녹아들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뜩해져왔다. 나의 이상한 행동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찻집 한 쪽 구석에 있는 벽난로 입구에 세로로 붙여놓은, 붉은 부적무늬가 배경으로 깔려 있는 길쭉한 화선지가 보였다. 立春大吉萬事如意亨通(입춘대길만사여의형통).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