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양의 기원과 전통 문양
조상들이 유물로 남긴 살림살이들을 가만 가만 들여다 보면 모여 사는 것이, 어우러져 제 모양을 온전히 빛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전해 오는 살림살이들은 그 어떠한 것을 들추든 저 혼자서, 제 생김을 뽐내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밥을 떠 먹는 숟가락에도, 흙으로 만든 옹기에도, 바느질을 할 때 손에 끼는 골무에도 무언가 덧씌움이 있다. 제 모양을 더욱 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장식, 문양이 숨은 듯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들이 자연 속에서 늘 접하던 날짐승과 길짐승, 꽃과 식물을 반닫이에, 빗첩에, 항아리에, 심지어는 절편에까지 새겨 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모자라 만(卍)자니 태극이니 하는 기하문과 일상에서 수없이 많이 대하는 문자까지 더해서 무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자연의 일부라는 겸허하고 소박한 철학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온 조상들은 이들 무늬를 단순히 모양을 내는 덧씌움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장이나 문갑, 서안, 베갯모, 수저집, 골무, 등잔걸이, 촛대 등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던 이러한 무늬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이어가려는 조상들의 삶의 발로였다. 이런 자연물들을 생활 속에 뜰어들여 무늬라는 생명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조상들은 이런 무늬가 자신들으 생활을 늘 복되고 길하게, 상서롭게 이끌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조상들의 살림에 붙이고 새겨 넣었던 수많은 무늬들은 이를테면 하나의 신앙이요, 자연과 어울려 사는 겸허한 인생 철학인 셈이다. 우리 조상들은 생활 기물 속에 자연물을, 상상의 세계를 담아 놓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살림살이의 기품을 높이는 동시에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과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지침서가 된다. 전통문양은 솔직히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다. 전통문양에 관심을 갖고 이를 되살려 내는 일에 온힘을 기울여 온 사람들이 있기에 이나마도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옛 것에서 오늘을 발견하며 옛 정신에서 오늘의 정신을 엿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의 전통 문양을 되살리고 발굴하여 오늘의 새로운 문양을 만드는 일 또한 전통을 잇는 바람직한 태도이다.
(1)문양이란? 문양을 보편적 의미로 말하면 무늬라는 개념으로 국한되지만, 그 범위를 확대하여 생각해 보면 시문된 물체의 재료에 따라서 점, 선 등의 질감(Texture)에 따라 공예, 회화, 건축 등의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장식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양은 실제 혹은 공상적 물상의 양식화 된 형태로써 시대적, 사회적 질서 속에 전개된 조형 단위를 의미한다. 문양은 지역과 민족, 시대에 따라 전개되는 차이점이 있으나,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장식설이 있다. 인간은 무엇이든 아름답게 꾸미려는 장식 본능을 가졌고, 인간 본래의 미의식을 가진 결과로써 시대적,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 질서를 지키며 새롭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인간 본연의 의지라는 견해이다. 둘째, 공간 공포설이다. 인간이 발견한 공간을 공간 공푸 심리의 반응으로 어떠한 혀애로든 메꾸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연히, 혹은 의식적으로 발견된 물체의 비실용적 공간을 어떤 형상으로 메꾸어 메꿈의 반복적인 행위에서 안도감과 질서를 얻는다는 견해이다. 셋째로 상징설이 있겠으나 이는 원시적 사회의 생존 여건으로 보아 인간의 생존을 위협해 오는 구체적인 대상에 주술적,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형상을 사실적 또는 추상적으로 표현하므로 인간 생존의 안락과 영복을 기원하는 본래본능이라는 견해이다. 이와같이 세 가지의 설은 매우 타당하다고 보겠으나, 그 전개 과정에서 과학은 원시 사회의 형태를 벗어나면서 희박하여지고 순수 장식으로써의 문양만이 계속 보존·활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문양은 이러한 의식의 반영이며 정신 활동의 소산임과 동시에 창조적 미활동의 결과이다. 이런면에서 문양에 조형 미술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주제의 성격이나 표현 내용으로 볼 때 순수 감상용 미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순수 감상용 미술이 작가 개인의 주관적 사상과 정서를 표현한 것에 비해 문양은 집단적인 가치 감정의 상징물로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양은 예술적 욕심없이 소박한 생활 욕구에 따라 전해 내려오는 틀을 존중하면서 그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양은 문양을 향유하는 집단 사이에서 약속된 부호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문양이 상징하고 있는 사물이 눈앞에 있지 않아도 문양만 보고도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된다. 특정 사물이 다른 세계를 연상시킨다든가 다른 사물과 유사하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거기에 현실적인 욕망을 담아서 그것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이 주술의 사고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문양에도 나타타고 있다. 예를 들면, 귀갑문(龜甲紋)에는 장수, 십장생, 사령, 수호신의 의미가 담겨 있고 국화문에는 귀족적 취향, 고결, 고상이, 나비문에는 길상, 여성적인 유연성이 담겨 있다. 박쥐문에는 장수(백색-500년, 은색-1000년), 복, 다남(多男)의 의미가 있고, 봉황문은 상서로움, 사령, 부부애, 신조(神鳥), 이상적인 서조(瑞鳥)의 의미가 있고, 수복문은 만복을 누리고 귀하게 살며, 다남(多男), 신통력의 의미가 있고, 칠보문은 길상(吉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십장생문은 그 문양마다 다른 의미가 있는데, 日(해)은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며, 山(산)은 불변하며, 雲(구름)은 속세를 벗어나 풍류적이며, 水(물)는 깨끗하며, 松(소나무)은 굳은 절개, 竹(대나무)은 높은 기상, 鶴(학)은 높은 기상, 鹿(사슴)은 선(善)과 평화를 상징, 龜(거북)는 수호와 복을 상징, 不老草(불로초)는 장생불로를 의미한다.
전통문양은 우리 민족의 집단적 가치 감정이 통념에 의해 고정되고 표상된 제2의 자연 또는 상징성에 의해 표현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감상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기원을 담은 주술적 대상으로 또는 그런 정서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는 상징적 조형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문양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아래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으므로 그 문양과 상징성에 대해 새겨보기 바란다.
(2)문양의 역사
문양은 건축, 공예, 조각, 회화 및 기타의 조형 공간에 있어서 장식적 역할을 담당하는 비독립적인 예술 형태이다. 따라서 그 발생 과정은 조형 예술로부터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조형 예술이란 형과 선의 색을 조형적으로 통일하여 인간의 생활 감정을 표현한 예술 형태이다.
원시 시대에는 생활감정이 지극히 단순하였던 까닭에 조형 예술도 제 1단계로 대단히 간단한 형태의 조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발굴되어 있는 많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활 감정은 완전히 형태에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힘에 의한 획득으로 영위되었기 때문이다. 즉 힘의 발휘에서 미를 느낄 때 조형의 한 요소인 형이 발생되고, 나아가서 힘의 조화는 예술의 원리인 조화를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제 2단계로 발생되는 요소는 선으로써의 율동 원리이다. 이것은 인간이 획득 생활로부터 생산 생활로 접어 들면서 종래의 생활 방편이었던 힘의 발휘와 조화로부터 탈피하여 힘의 발전과 이용으로 볼 수 있는 노동으로 그 생활 수단을 삼게 된 까닭이다.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토기들 중에 선각 문양이 많이 발생한 것은 이러한 노동 감정의 표현이다. 다음 제3단계는 색채의 발생으로써 이것은 인간이 노동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단 생활을 영위하면서 사회적인 동물이 된 데 그 원인이 있다. 즉 색의 본질은 상대자(相對者)의 동정을 구하는 사회성을 갖는데 인간의 대 사횢거(對社會的)인 의식 감정은 군집 생활을 통해서 발생했다. 이러한 색채의 발생은 알타미라의 동굴 벽화로부터 이집트, 희랍 및 인도의 아잔타 벽화, 그리고 고구려의 고분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원색들 중 특히 많이 쓰이는 것은 적색이다. 이 시대 인간들이 특히 적색을 좋아한 것은 그것이 광명, 불 및 사람의 선혈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직결된 색이었기 때문에 종교에 가까우리 만큼 신비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색을 신성시하게 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집단 의식과 사회 생활은 장식 의욕을 불러 일으켜 계급 의식과 종교 의식을 싹트게 하였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활 감정이 차츰 복잡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금석사용시대(金石使用時代)로 접어 들면서 인간의 미적 감정은 그 내용이 풍부하여지고 이에 따라 건축, 회화, 조각 등의 조형 예술이 본격적인 발전을 보기 시작하였다. 즉 금은보석의 장식은 대 사회적인 의식과 빈부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계급의식의 예술 의욕이고, 분묘의 건축과 사자(死者)의 조각은 종교의식에서 유도된 예술 형태이다. 참다운 예술의 발단이라는 것은 이처럼 다극적(多極的)인 사회 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에 있어서 장식 문양은 인간의 생활 감정을 상미화(象微化)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기하학적 요소의 반복이나 자연 대상의 모사에 머물러 잇는 상태이다.
흄은 예술을 기하학적 예술과 생명적 예술 두 가지 개념으로 구별한다. 기하학적인 예술은 추상주의, 생명적 예술은 사실주의를 의미한ㄷ. 자연을 두려워하고 또는 멸싷는 태도가 예술에 있어서는 생명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배제하기 위하여 모든 물체를 기하학적 형태로 추상화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추상 예술이 탄생한다. 또 사실주의 예술은 자연에 대해 친밀성을 느끼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가 가능한 배경이 삶의 터전인 민족에게 가능하다.
고대 도이방이나 인도, 이집트의 예술은 경직된 선과 무생명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피라미드나 모자이크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자연에 일종의 공포감을 가졌고, 자연에 대한 친밀감보다는 오히려 바깥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추상적인 경향은 고대 동방의 원시 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문화를 가진 민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잇는데 이는 정신력의 무능으로 인한 원시족의 그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들의 추상성은 인식의 뛰어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주의와 추상주의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표방하는 문양에 그대로 표현되어진다. 현대에 와서 리드는 문양을 장식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1) 기하학적인 장식 점, 선, 면 등으로 구성되는 장식으로써 회화적인 요소는 완전히 배제된 것.
(2)양식화된 장식 자연적인 대상의 정확한 재현과는 구별되면서 자연 대상의 선적인 리듬이나 혹은 단순화를 강조한 것.
(3)유기적 혹은 자연주의적 장식 의도적인 장식으로써 인간상과 풍속주제, 동물주제, 식물주제 및 풍경으로 분류된 것.
(4)조형적 장식 대상의 응용이라기 보다는 대상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대상의 실용적인 기능과 구분되는 장식 기능을 가진 형으로 이루어진 것.
(5)연속적 장식(Pattern) 하나의 대상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기하학적 혹은 유기적인 양식화를 통하여 하나의 기본 단위를 형성하명, 장식되는 부분과 동일한 범위 내에서 연쇄적으로 반복한 것 등으로 구분한다.
(3)한국 문양의 특징 문양는 의식의 반영이며 정신 활동의 소산임과 동시에 창조적 미화 활동의 결과이다. 우리의 조형 예술에 나타난 문양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
첫째, 우리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발생 문화가 아니라 수용 문화였다. 그러나 지난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외래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전이 변용시켜서 독자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화랑을 낳아 삼국을 통일하였고, 조선의 숭유 정책은 주자학의 환성을 본 것이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 우리 문화는 창조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조형 예술에 있어서 그 장식 요소인 문양도 외래적인 경향도 있었지만 그 표현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조화와 통일을 꾀하여 우리의 생활 감정을 담은 문양으로 발전시켰다.
둘째, 과거 우리 문화의 사상적인 지주였던 불교와 유교 및 선가신앙(仙家信仰)은 한국인의 인생관을 보다 순수하고 심오하게 만들었고 지리, 풍토적인 자연조건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순박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우러나오는 생활 감정 또한 순진하여 그 문양의 표현에 있어서 기교를 모르고 수다스럽지 않으며 단순한 조형미를 추구하되 그 속에는 해학미(諧謔美)가 들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셋째로 정치적인 지배와 문화적인 지배는 항상 저항 의식을 기르게 되니다. 따라서 우리 역사상 많은 외침과 외래 문화의 영향은 어떠한 역경에서라도 견디어낼 수 있는 강한 의지력을 길러냈으니 이것이 곧 자주 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문양에는 조형 미술의 일반원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불 수 잇지만 주제의 성격이나 표현의 내용으로 볼 때에는 수수 감상용 미술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곧 순수 감상용 미술로써의 문양은 항상 집단적인 가치 감정의 상징형으로 일반화 되어있다. 문양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같은 문양을 되풀이 그리는 상투성이 있다는 점이다. 문양을 그리는 제작자들은 통속적 집단 가치 감정이 상징화 되어있는 틀에 박힌 도상을 그리는 데 만족했다. 따라서 무양은 순수 감상용 그림의 경우처럼 잘 그리고자 하는 생각보다는 그러한 예술적 욕심없이 소박한 생활 욕구에 따라 그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연속성을 갖는 무늬 중 두드러지게 많이 이용된 무늬는 [아자문(亞字文)] 또는 [뇌문(雷文)]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이 영원히 이어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복이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있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옛 사람들은 기억력을 활용하여 사물의 이미지를 기억해 냄으로써 실제 사물들이 눈 앞에 없는데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앞에 있는 듯이 다루는 표상 방법을 사용하였다. 태어나서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코끼리 문양을 그리고, 한 겨울에도 벌과 나비가 꽃 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문양으로 그려 내었다. 귀형 무늬는 도깨비의 형상을 상상하여 의인화한 문양이다. 문양은 표현 기술이 얼마나 세련되어 있는가 또는 얼마나 실제와 흡사한가가 문제가 아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무냥은 그것을 향유하는 집단 사이에서 약속된 부호와 같은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양이 묘사하고 있는 사물이 눈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문양만 보고도 적절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특정 사물이 다른 세계를 연상시킨다든다 다른 사물과 흡사하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거기에 현실적인 욕망을 시렁 그것이 성취되기를 비는 것이 주술적 사고원리이다. 활짝 핀 모란꽃을 그린 문양은 부귀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며 여성들의 생활 공간에 석류나 포도 문양을 장식하는 것에는 석류나 포도의 씨앗처럼 많은 아들을 얻고자 하는 주술적인 심리가 깔려 있다. 새들이 쌍쌍이 나는 모습을 그린 화조(花鳥) 문양은 부부의 사랑이나 이성 화합의 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윤리 문자도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문자를 쓰고 그와 관련된 동식물을 곁들여 그 의미를 새기는 것은 그런 덕목을 현실에 실천함으로써 이상적인 세계에서 살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도깨비뿐만 아니라 천신, 지신, 산신, 제석, 시왕, 칠석, 성주 등과 같은 민간 신앙 대상의 제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귀형 무늬는 신이 갖는 무한한 힘을 빌어 수재, 화재, 풍재 등 천재지변과 병환, 병역, 기근 등의 각종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토속 신앙에 기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적의 글씨처럼 '만(卍)'자나 '희(喜)'자와 같은 추상적인 문양은 단순한 장식 효과를 뛰어 넘는 연면(連綿)과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추상 문양은 직선이나 곡선으로 이루어진다. 동·식물 문양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동·식물 무늬가 생물의 자연 생태를 묘사한 데 비해, 추상 문양은 자연 현상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원시 시대부터 오늘 날까지 인류 생활속에 줄곧 쓰여 오면서 각각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 문양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현실적 기원을 의탁하는 일종의 주술적 대상으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통 문양은 우리 민족의 집단 주거인 가치 감정이 통념에 의해 고정되고 표상된 제 2의 자연 또는 상징적 기회에 의해 표현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감상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기원을 담은 주술적 대상으로 또는 그런 정서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는 상징적 조형물이라고 볼 수 있다.
2. 문양의 종류
색지공예에 있어서 색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문양이다. 특히 문양이 지닌 장식성과 더불어 상징성은 단순한 공예 작품을 넘어 하나의 삶, 하나의 종교적 차원의 세계로까지 이끌고 있다 문양은 소재에 따라 짐승, 조류, 어패류, 곤충, 양서류, 식물, 광물, 기물, 기하문양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고 그 의미에 따라 자연현상, 길상 벽사, 다산기자, 수복 장수, 공명출세,부귀 유여, 부부화합 가내 평안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또는 문양이 특별한 상징성을 부여받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을 인간적으로 해석한 것, 고사나 전설과 관련된 것 또는 고전이나 성현들의 언행에서 연유된 것으로 분류해 불 수 있고 그 외에도 대상물의 명칭과 관련되어 상징성을 부여받은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양들을 동물 문양, 식물 문양, 추상 문양, 문자 문양으로 나누어 그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서 단청은 그 범위가 광범위하므로 따로 떼어내어 설명하고자 한다.
(1) 단청 단청이란 청·황·백·흑을 기본색으로 그리는 건축 공예이다. 벽, 기둥, 천장 등에 상징적인 그림이나 무늬를 여러가지 빛깔로 그려 놓은 것을 말한다. 단청은 인류가 일찍부터 추구해 온 종교적 신앙이나 주술적 상징,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한 세계에 대한 암시적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단청은 여러가지 상징적인 요소를 문양화 해서 그 구성과 조화를 통해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내세의 세계와 불멸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청에 새겨진 무늬와 그림들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관습, 신앙,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1)단청의 역사 단청의 역사는 인류가 자연의 신비로운 힘에 경외심을 가질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맹수나 독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에 색칠을 하거나 문신을 그려 넣은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도 설득력을 가진다. 단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다만 고대 무덤의 벽화나 장신구들을 통해 보여지는 문양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단청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단청은 절에서 보여지므로 지금의 단청 형태가 나타난 시기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삼국사기와><삼국유사> 등의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단청의 색채 사용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오색 즉 청·적·황·백·흑을 썼고, 자연과 조화될 수 있도록 중간 혼합색도 사용하였다. 돌기둥이나 창에 그려지거나 칠해진 적갈색은 석간주를 기본으로 하는 단청 양상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고려시대의 단청 양식은 고려 중기 송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정착한 양식으로 봉정사 극락전의 단청 양식이 과도기적 형태이고,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착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고려 말기에 원(元)의 영향을 받은 다포 양식은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성행하던 건축 양식을 몽고가 중원에 진출하면서 정착시킨 양식이다. 그리고 이 양식은 다시 고려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때 중국의 사원적(寺院的) 양식이 우리 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채색과 문양을 주로 녹색과 청색, 그리고 묵선을 사용하여 아라베스크 계 당초 무늬를 단조로우면서도 우아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시대의 목조 건축은 고려 시대의 주심포 양식과 다포 양식의 특징이 서로 혼용되어 권위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중기 이후부터는 다포 양식이 성행하여 무늬와 색채가 다양하고 화려해져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이후 재건된 것이므로 고결한 맛은 떨어지나 문양의 구성과 장식의 복잡성, 다채로운 색조 대비로 인하여 화려하며 원색의 사용으로 분위기가 경쾌하다.
2)단청의 분류 단청은 크게 궁정 계통의 단청과 사찰 계통의 단청으로 나눌 수 있다. 궁정 단청은 경공장이 속해 있는 선공감에서 맡아 수행하였다. 선공감에는 도채공이라는 단청 화공이 있어 궁전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의 단청을 도맡아 색칠하였다. 단청 화공은 주로 세습적이었지만 재능이 잇는 어린이를 견습공으로 뽑아 양성하기도 했다. 궁궐과 관아의 건물은 사찰 건축에 비해 정적이고 웅건한 맛을 느끼게 한다. 권위의 상징과 무늬와 색채에서 호화로움과 기품이 풍겨 나온다. 각기 사찰은 전속 단청 화공들을 가지고 있었고, 큰 절에서 단청 화공이 한 명씩 있었는데 금어(金魚) 스님이라 불렀다. 사찰 단청공은 단청뿐만 아니라 불상이나 불화, 조각 등의 제작도 겸하였고 재능있는 어린이를 뽑아 체계적인 교육까지 도맡아 했다. 이처럼 궁전 단청과 사찰 단청의 화공은 구분되어 있었지만 단청을 시공하는 기술적인 면이나 무늬의 체계, 색조는 서로 통하였다. 또한 사찰은 국가에 일정한 부세 의무를 지고 지방의 일부 공청, 관아 등을 담당하였으므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유교 건물의 단청도 있는데, 이는 종묘를 비롯하여 각 문중의 선열묘당, 가묘, 유교적 이념을 교육하기 위한 문묘, 서원 향교에서 볼 수 있다. 유교 건물의 단청에는 검소하고고상한 기품과 겸양의 미덕이 표현되어 있다.
3)단청의 종류 단청의 일반적 의장 양상은 구성 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첫째, 맨 윗부분인 천상을 나타내는 부위에는 천계의 신격이 표현된 천장 문양을 그려 넣는다. 둘재, 그 아래 처낭 주위의 여러 상징적인 세계를 표현해 천장을 받치고 있는 부재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 무지개, 연꽃 장식을 그려넣는다. 섹째, 천상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오색 구름이나 옷이 너울대는 등의 성스러운 문양을 그려 넣는다. 마지막으로 기둥 아래에 붉은 색, 푸른 색으로 현세 인물의 권위와 존엄성을 단조롭게 표현한다. 이러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것으로 자연에 순웅하여 일체가 되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5세기 경부터 불교의 유입 등으로 다양한 문양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던 문양은 인동 당초문, 구름문, 초화 당초문 등이다. 인동 당초문은 훗날 보상화 혹은 보상 당초문으로 정착되었다. 고대 단청 문양의 종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머리초 보, 도리, 서까래 따위의 부재 끝에만 넣는 가장 주가 되는 단청 무늬로 모양에 따라 앞머리초, 은머리초, 병머리초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휘 물건을 두르거나 감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가운데 주문양과 바탕 사이를 오색의 띠가 겹겹이 두르면서 잇는다고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 생김새에 따라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또 색대의 수에 따라 단휘, 이휘, 삼휘, 호위 등으로 불렸고 색은 적·녹·황·청·석간주 등이 주로 쓰였다. 금 문 금단청에서 비단을 두른 듯 다채롭고 화려한 색채와 무늬를 써서 장식한 무늬를 말하며 비단 무늬라고도 한다. 역시 모양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붙여진다. 화 문 꽃무늬 문양을 말하는데 주로 연꽃 문양이 쓰인다. 운기문 구름을 형상화한 단청으로그 형태에 따라 점운, 유운, 용운, 풍운, 완자운, 비운, 사운, 기운, 보운으로 나뉜다.
이밖에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상상의 동물을 산신이나 사령으로 형상화한 신수문, 서수문이 있다. 고대 오행설에서 비롯된 상상의 동물을 표현한 사신도(四神圖)외에 기린, 봉황, 용을 표현한 사령문(四靈紋)도 잘 알려져 있다. 또 직선, 원, 타원을 응용한 기하학적 모양의 문양들이 있는데 태극 무늬를 형상화한 태극문, 마름꽃 모양의 능화문과 약과문, 완자문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2)동물문양 호랑이 호랑이는 재앙을 몰고 오는 포악한 맹수로 경게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의 편에 서서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이 되는가 하면, 박지원의 [호질(虎叱)]에서 보듯이 선악의 심판관으로 군림하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호랑이가 용맹하고 위엄이 있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우며 반대로 병을 막아 주고 복의 기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또 꿈에 호랑이를 보면 관운이 트일 징조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민가에서 호랑이 그림을 그려 용그림과 함께 대문이나 중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경우 호랑이는 벽사의 주재자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희애적 심리가 발전하여 산령을 숭배하는 민간 신앙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도교에서 호랑이는 시공간을 초얼하는 신령한 동물로 취급되고 있다. 백수의 왕을 상징하여 옛날 무관의 흉배에 수 놓았으며 까치나 산신도 등 다른 소재와 함께 많이 사용되었다. 잡귀를 막아 준다는 뜻에서 민화나 모든 공예품에 호랑이 문양을 많이 썼으며 한지 공예도 연, 부채, 상자 등 여러 작푸들에 즐겨 썼다.
사슴 사슴은 아름다운 외형과 순한 성격을 ㄱ진 동물로써 예로부터 선령지수(仙靈之獸)로 알려져 있다. 사슴은 무리를 지어 사는데 위치를 옮길 때ㅏ다 낙오자가 없는지 머리를 들어 살피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이것을 보고 우애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장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는데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에서 "사슴은 천 년을 살며 500세가 되면 색이 백색으로 변한다."고 하였고, 십장생도에도 등장하고 있다. 장수의 상징으로 등장할 때에는 소나무, 단풍, 바위, 불로초 등이 배경이 될 때가 많아. 또 사슴의 녹(鹿)이 녹(祿)과 발음이 같아 복록(福祿)의 상징으로 보았다.
학 학은 정통 회화나 민화 등 가릴 것 없이 널리 그려졌다. 문양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나무와 학이 서로 짝을 짓게 된 것은 '학수천년(鶴壽千年) 송수만년(松壽萬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길상 관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학경기(相鶴經記)]에서 학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학은 양(陽)의 새이다. 금기에 인하여 화정(火精)에 의지하니 화(火)는 7이요 금(金)은 9이다. 16년에 소변(小變)하고 60년에 대변(大變)한다. 1100년에 모양이 넓어지고 흰색으로 된다. 2년에 잔털이 떨어져 검은 점으로 변하고 3년에 머리가 붉게 변한다. 7년에 은하수를 날며 7년에 춤을 배우고, 다시 7년에 절도를 터득한다. 밤과 낮으로 12번 울며 60년에 큰 털이 빠리고 다시 털이 무성해진ㄷ. 깃털은 눈 같이 희며 더럽혀지지 않는다. 160년에 암수가 눈을 마주쳐 주시하면 저절로 태한다. 1600년 동안 물만 마시고 먹이는 먹지 않는다." 십장생의 하나로 창공의 서운(瑞雲) 사이를 난다는 학은 문관의 흉배나 수예, 서화, 공예에 널리 쓰였다.
나비 나비는 즈거움의 상징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관련이 있는데 장자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되어 달콤한 꿀만 빨아 먹으며 나비의 행복을 만끽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또 부부 금술이 좋음을 상징하는데 나비를 좇던 한 젊은이가 어느 집 마당에 뛰어 들었는데 미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명이 움트는 따사로운 봄날 날아 다니는 나비는 젊은 청춘 남녀를 떠올리게 하고 그래서 나비는 자유 연애, 행복의 상징이 되었다. 나비는 장수와 자손 번창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고양이와 함께 등장할 때 장수를 의미하고, 참외나 호박, 땅콩과 같은 덩굴 식물과 함께 그려질 때에는 자손 번창을 의미한다. 이불깃이나 가구 장식 문양, 혼례 의상, 보자기 등 다양하게 쓰였으며 나비의 화려한 형태로 인해 여성용품에 많이 그려졌다.
용 용은 상상 속의 동물로써 상서로움을 상징한다. 용은 모든 동물의 우두머리로써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과 힘을 지닌 동물이라 인식되고 있다. [본초강목(本草鋼目)에 의하면 용의 머리는 뱀, 뿔은 사슴, 눈은 귀신,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닐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한다. 문양에서 용은 구름 속에 반쯤 감추어진 운룡(雲龍)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용의 신비하고 영험한 능력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용의 신비한 능력에 그들의 소원을 빌어 왔다. 무속에서는 용을 수신(水神)으로 섬겼고, 궁중에서는 용을 임금의 권위에 비유하여 장식 문양으로 활용하였다. 민가에서는 용 그림을 대문에 붙이면 잡귀신이 물러간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용은 만물 조화의 능력을 갖춘 영물, 권위의 상징, 벽사와 수호의 능력을 가진 영험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색지 공예에서는 주로 함, 장롱 등에 쓰였다.
봉황 수컷을 봉(鳳)이라 하고 암컷을 홍(凰)이라 하여 용과 마찬가지로 상상 속의 동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봉황은 용이구름 속에서 학과 연애하여 낳았다고 한다. 뱀의 목과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를 가지고 있으면 길운의 징조라 여겨지는 조양(朝陽)의 골짜기에 있는 단혈산(丹穴山)에 산다고 한다. 봉황은 붉은 색의 봉, 자주색의 악작, 푸른 색의 난, 노란 색의 원추, 흰색의 홍곡 이렇게 다섯 종류로 나눈다. 또 봉황은 다섯 가지 덕을 갖춘다고 하는데 그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으로, 각 특징에 따라 이와 같은 덕을 지녔다. 살아있는 곤충과 풀은 먹지 않고 절도에 맞게 우아하게 노래하고 춤춘다는 봉황은 고상하고 품위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왕비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새로여겨져 궁궐의 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예복이나 장신구, 가구, 공예품 등 다양한 문양으로 쓰였다.
거북 용이 동물의 우두머리이고, 봉황은 새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거북은 개충(介蟲)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실재하고 있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상상속의 동물과 같은 신령스러움이 느껴지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옛 사람들은 거북이 주술적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불에 구운 껍질이 트는 모양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는데 거북의 등이 융기한 것은 하늘의 법을, 아래가 평평하고 네모난 것은 땅의 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거북은 사방신으로 북방을 수호하는 현무(玄武)로 인식되었고, 그 수명이 길어 영년불사(永年不死)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거북 문양은 십장생도를 비롯하여 해구도, 신구도, 쌍구도, 서구도 등으로 나타나며 문방구, 인장, 가구 등에 많이 시문되었다.
박쥐 박쥐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그 이중성에 대한 것이다. 봉황의 생일 잔치에 박쥐를 뺀 모든 조류가 참석하였는데, 박쥐는 참석하지 않았다. 박쥐는 그 이유를 자기는 두 발 달린 새가 아니라 네 발 달린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기린의 생일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새의 날개를 달고 있기 때문에 짐승이 아니라고하였다. 박쥐는 강한 번식성으로 인하여 다남(多男)과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또 잡귀를 쫓는다는 의미도 있다. 두 마리의 박쥐가 그려진 문양은 쌍복(雙福)을 의미하고, 다섯 마리의 박쥐 문양은 오복(五福)을 상징한다. 박쥐 문양은 상자, 반짇고리 등 여성용품에 많이 쓰였다.
(3)식물 문양
연꽃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이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 년 이상 땅에 묻혀 있던 연꽃 씨앗을 근래에 발아시킨 예가 있다. 불교에서는 연꽃이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오니(汚泥)에 물들지 않은 속성을 지녔다고 하여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다. 이러한 연꽃의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달, 보리, 정화 등으로 간주하였다. 또 유교에서는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에 비유하였다. 연꽃은 원앙과 함께 등장하여 남녀, 길상, 행복, 부부 화목을 상징하기도 하고, 물고기와 함께 그려져 물심(物心)이 항상 풍족하기를 바라는 '연년유여(延年有餘)'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연밥의 씨앗을 쪼는 새를 표현한 문양은 득남을 기원한 것이고, 동자와 연꽃이 함께 등장하면 '연생귀자(連生貴者)'를 의미한다. 연화 문양은 행복을 가져온다고 하여 함, 상자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당초(唐草) 당초란 당나라 풍의 덩굴이라는 의미이다. 당초 문양은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하여 그리스에서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에 당초 문양이 전래된 경로를 보면 기원전 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동방에 전래되었다. 페르시아의 사산(Sasan) 왕조에 와서 보상 당초문으로써 성립을 보게 되었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어 불교 문화의 융성과 함께 완성된 장식 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되어 고분 벽화나 불교 미술 등에 다채로운 양상을 나타내었다.
모란 모란꽃은 번영의 꽃으로 아름다움과 행복의 상징으로 널리 애호되었다. 모란꽃 문양은 연꽃보다 약 천 년 뒤에 나타나쓴데 상고 시절에는 모란을 작약이라 불렀고 당 이후 목작약을 모란이라 불렀다. 송 나라 때 모라은 부귀화 또는 '꽃 가운데 왕[花中之王]]'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사랑을 받았다. 이때부터 모란은 부귀 길상의 상질물로 받아들여졌다. 모란꽃 문양은 자수, 공예품, 회화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애용되었는데 수석이나 복숭아와 함께 그려 장명부귀(長命富貴), 장미꽃과 더불어 부귀장춘(富貴長春), 수선화와 같이 신선부귀(神仙富貴)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석류 석류는 붉은 주머니 속에 씨앗이 빈틈 없이 들어 있어 다남(多男)을 연상하게 되고 맛은 시어 임산부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아들 생산이라는 의미와 결합되기에 충분하다. <북사(北史)> [위수전(魏收傳)]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제(齊) 나라 안덕왕 연종(延宗)이 이조수(李組收)의 딸을 맞아 들여 왕비로 삼았는데 와비의 어머니인 송 씨가 두 개의 석류를 황제에게 바쳤다. 이조수가 석류를 바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석류를 황제에게 바쳤다. 이조수가 석류를 바친 이류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석류는 껍질 속에서 씨앗이 많은 과일입니다. 따라서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친 것입니다.' 석류를 불로초와 함께 그리면 백자장생(百子長生)의 의미를 가지게 되며 황조(黃鳥)와 같이 그리면 금의백자(金衣百子)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석류는 판화 같은 데서 흔희 응용되었으며 건물 단창에까지 그려졌다.
사군자 매화 이른 봄에 꽃이 핀다 하여 보춘화(報春花)라 불려지는 매화는 맑은 향기와 우아한 운취가 았다. 능히 추위를 이겨내기 때문에 변치 않는 절조로 비유되었고 변하지 않는 우정을 뜻한다. 또 겨울이 되어 잎이 지고나면 죽은 것 같으나 다음 해 다시 꽃을 피어 올리기 때문에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매화 매(梅)와 누이 매(妹)의 음이같아 미혼 여자를 소매(小妹)라 부르기도 한다.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그리기도 하는데 이 때 매화는 부처(夫妻)를 상징한다. 여기서 매화는 아내를, 대나무는 남편을 상징하게 된다. 일설에 매화는 쾌락, 행복, 장수, 순리 등의 오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매화는 예로부터 가구, 건축을 비롯하여 각종 기물과 의상 무늬를 다양하게 그려졌다.
난초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착한 사람과 사귀는 것은 마치 난초를 가꾸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나 곧 그것과 동화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교제를 비유하는 것이다. <역경>에서는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그 예리함이 쇠를 자를 수 있고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그 냄새가 난초와 같다."라 하고 잇다. 이것은 의기투합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친구를 난우(蘭友)라 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난초는 변치 않는 마음과 우정, 자손 창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국화 국화는 윤택하고 호걸 같은 외양을 지녔다하여 군자의 기상에 비유되어 왔다. 늦은 서리를 견뎌내며 그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는 길상의 징조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도연명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며 살았다는 일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화를 절개로 생각하게 하였다. 또 송 나라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국화는 은일(隱逸)'이라고 한 뒤부터는 고결한 품격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국화 문양은 필통, 자총, 과반 등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나무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강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사계절 내내 색이 변치 않기 때문에 군자의 품격과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양에서 다루어지는 대나무는 그보다는 세속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담문록(談聞錄)>에 의하면 산중에 귀신이 살았는데 사람이 그 귀신을 만나면 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전이라는 사람이 불 속에 대나무를 던져 넣자 대나무가 타면서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에 놀라 귀신이 도망갔다 하여 축귀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 '竹'과 '祝'이 동음인 것에 착안하여 축수(祝壽)의 의미로 취죽도를 많이 그리기도 하였다.
(4)추상문양 팔괘(八卦)문양 팔괘는 천지 만물의 현상과 형태의 기본이 되는 여덟가지를 나타낸 기하학적 상징부호이다.
그 유래는 중국 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복희(伏羲)라는 임금이 용마의 등에 있는 도형에서 영감을 얻어 위로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 지리(地理)를 살피고 중간에선 만물의 마땅한 바를 관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옆으로 길게 한 것을 양효라 하며 가운데가 끊긴 것을 음효라 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제각각 다른 짝을 지어 64괘를 이룬다.
64괘에는 음양소장(陰陽逍長)의 상태와 길흉화복이 설명되어 있다.
만(卍)자 문양 만(卍)자는 산스크리스트어로 '스리밧사(shribatsa)'라고 하며 원래는 한자가 아니다. 卍자는 원래 고대에 주술에 관한 부적이나 길상의 상징물로 표시되었던 것이다. 卍자는 사방의 끝이 끊이지 않고 종횡으로 계속 늘어나 이어지는 각종 문양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무한장구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 의미는 태양, 번개, 물 불의 운동을 표상한다는 설과 북두칠성의 회전하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있다. 또 원의 중심에 그려 넣으면 태양을 상징한다고 하기도 한다.
완자문양 기하학적 무늬의 하나이기도 한 완자 문양은 매우 정세한 조각기법의 고격한 분위기를 띠는 문양이다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복잡한 구성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실제 무늬로 보여질 때는 조촐하고 담백한 아취를 맛볼 수 있는 문양이다. 완자 문양은 책을 가까이하는 고결한 선비의 취향에 걸맞는 문양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 특히 신분이 높은 귀족들 집의 창살이나 가구 등 여러 곳에 사용되어 왔으며 현대에 와서도 많이 보여지는 문양 중의 하나이다.
부귀기호 문양 卍자 문양과 비슷한 것으로 우뢰를 상징하는 뇌문(雷紋)이 있다. 우뢰는 만물을 길러주는 요소인 데다 그 형상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여 최대의 길상을 나타낸다.
회(回)문양 ''자형 도형을 말한다. 이 도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뜻함과 동시에 양(陽)을 의미한다. 두 개가 좌우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서로 중첩되어 있기도 하는데 전자는 쌍부귀(雙富貴), 후자는 부귀 부단(富貴不斷)과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결실과 영구의 상징으로 10여종이 있다.
수(壽), 복(福)자 문양 한자를 그대로 문양으로 옮긴 것으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자수, 공예 등에 많이 썼는데 수를 놓을 경우에는 해서체나 초서체를 많이 썼고 그릇이나 기물, 기와 등의 공예품에는 전서체나 도안체를 많이 이용했다. 수, 복 자 문양의 전통은 조선 시대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삼각형 연결 문양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 서로 엇갈려 있는 것, 위·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 등 여러가지 표현 방법이 있으며 선의 굵기를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5)자연 상징 문양 십장생 문양 세상에 빛을 주는 해, 변하지 않는 산, 풍류를 떠올리게 하는 구름, 절개의 상징 소나무, 맑고 깨끗한 물, 속세를 떠난 듯 높은 기상을 지닌 학, 곧고 강한 의지를 표상하는 대나무, 온순한 성질로 선(善)을 상징하는 사슴,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거북, 불로장생하다는 불로초를 십장생이라 하며 그림이나 공예 등에 많이 나타난다.
비운(飛雲)문양 바람에 날리는 구름 모양을 형상화시킨 문양이다. 비운은 자유로우며 풍류적 성격을 가진다.
산과 나무, 사신(四神)이라 불리는 사수(四獸)의 주위에 환상적으로 쓰였다.
위에서 살펴본 전통 문양은 오늘날까지 건축물이나 여러 공예품에 살아 숨쉬고 있다. 문양의 전통적 형태를 재현하고 계승하는 것은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문양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 문화를 지키는 동시에 우리 문화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3. 능화판 능화판이란 나무판에 각종 문양을 그린 후 조각도로 파서 새긴 것으로 주로 책의 표지에 문양을 넣어 장식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백면지를 비자물 등으로 곱게 염색하여 화사한 색지를 만들어 능화판 위에 붙인 뒤 밀랍을 칠해 고운 밀돌로 약5~6분간 밀어 주면 목판에 새겨진 요철 문양이 도드라지게 된다. 이외에도 헝겊이나 종이에 무늬를 찍는 날염판, 채화판 등이 있으나 색지 공예의 능화판 사용 방법은 주로 책표지에 스던 것과 비슷하다. 색지 공예를 할 때 문양을 새겨 만들면 그 작품의 품격이 높아짐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확보할 수 있다. 능화문이 새겨진 색지로 작품을 만들면 보일 듯 말 듯 작품 전체에 깔린 문양이 은은하고 고상한 멋을 풍기게 된다. 능화판 위에 물감을 칠한 후 종이나 천 위에 찍어서 문양을 새겨 넣는 방법은 포장지, 보자기, 장롱의 안쪽을 붙일 때 등에 사용되었다.
능화판의 재료와 형태 능화판은 오랫동안 반복 사용해야 하므로 원형이 뒤틀림이나 손상이 적은 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주로 박달나무, 피나무 등을 사용했다. 크기는 용도에 따라 다양하였고 형태로는 직사각형이 많았으며 정사각형의 판도 만들어 썼다. 능화판에 사용한 문양은 매화·난초·국화·대나무의 사구자와 당초 문양 등이 많이 쓰였으며, 나비·박쥐·새 등의 문양과 수복, 강녕, 부귀, 다남 등의 글씨나 만(卍)자, 아(亞)자 등의 연결 문양 등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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