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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9)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
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
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我若向畜生 自得大智慧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나무천수보살마하살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南無千手菩薩摩訶薩 南無如意輪菩薩摩訶薩
나무대륜보살마하살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南無大輪菩薩摩訶薩 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나무정취보살마하살 나무만월보살마하살
南無正趣菩薩摩訶薩 南無滿月菩薩摩訶薩
나무수월보살마하살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
南無水月菩薩摩訶薩 南無軍茶利菩薩摩訶薩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 나무제대보살마하살
南無十一面菩薩摩訶薩 南無諸大菩薩摩訶薩
안녕하십니까. <천수경> 공부 시간입니다.
어제는 지옥에 대한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지옥이 있게 되는가, 또 지옥은 우리가 현실적인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 현실적인 삶 속에서의 지옥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살펴보았고 그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사람들이 짓는 業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고 그 業은 왜 짓게 되는가, 그것은 지혜의 빛이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미혹해서 지혜를 갖추지 못한 관계로 業을 짓게 되는 것이고 業을 지은 관계로 지옥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 지옥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고통 받는 그것이 곧 지옥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살펴 봤듯이 지혜라고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내가 만약 지옥에 갔을 때 그 지옥 다 말라지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말라질 수 있는 것, 또 칼산이 다 꺾어질 수 있는 것, 또 화탕이 다 소멸될 수 있을려면은 요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가 있다면 아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고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설사 그런 불행이, 그런 아픔이 닥친다 하더라도 지옥과 같은 아픔이 닥친다 하더라도 한 순간 지나가는 것일 뿐 아주 슬기롭게 잘 그것을 소화하고 대처해서 그 아픔이 지속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잠깐 일어나는 일은 어쩔 수 없겠으나 그것을 금방 우리가 바로 소멸해버리는 그런 어떤 슬기를 우리는 갖추어야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불교 공부를 해서 지혜가 밝아졌다면은 그런 어떤 지옥의 요소, 아픔의 요소, 불행의 요소는 아예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고 또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말 잘 소화하고 잘 이해를 해서 슬기롭게 대처하는 그런 능력, 그런 힘이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 그래야 불교 공부하는 재미가 있는 거죠.
그 다음 구절도 역시 같습니다.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하고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하고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 한다. 여기 이제 앞에는 지옥이고 이쪽은 귀신과 축생, 이렇게 나눌 수가 있죠.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아귀(餓鬼), 내가 만약 아귀가 있는 곳을 간다면은 아귀들은 저절로 포만(飽滿)해지이다, 배가 가득 불러지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귀(餓鬼)는 뭡니까, 그대로 주린 귀신입니다. 늘 배가 고파서 참 허덕이는 그런 귀신을 아귀다 라고 합니다. 어떤 사전적인 그런 설명으로는 아귀는 그 몸뚱이는 저 남산만 하고 목구멍은 바늘 구멍만 하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고 싶어도 목구멍이 작기 때문에 제대로 넘길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남산만한 그런 몸뚱이에 허기가 얼마나 지겠습니까. 늘 허기져서 괴로와하는 그런 귀신을 아귀다 라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바로 우리의 그 허기진 마음들입니다. 지나친 허영심, 분에 넘는 어떤 바램, 분에 넘는 욕망, 이런 것들이 바로 아귀의 허덕이는 모습이죠.
그야말로 자기 분에는 맞지 않는데 이를테면 어떤 무엇이 되고자 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헐떡거리고 껄떡거리는 그런 모습들. 예를 들어서 어떤 자리다 라고 하면은 그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주린 아귀와 같은 그런 모습으로 아귀 다툼하는, 어떤 한 자리를 놓고 아귀 다툼하는 그런 모습들, 그것이 바로 아귀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 그 표현이 너무나도 적절하죠. 그야말로 아귀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 자기 자신에게는 분에 넘치는 어떤 허영심, 그래서 뭔가를 자꾸 채우려고 채우려고 하는, 그런 물질적인 것, 명예, 이런 것으로서 채우려고 하는, 그러나 채워지지는 않고 그럴수록 더욱 더 채우려고 하는 그런 욕망은 더 불타 오르고, 그것이 바로 아귀의 모습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또한 지혜로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죠. 지혜로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귀라고 하는 그런 귀신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알 턱도 없는 것이고 물론 사전에 보면은 그림도 나와 있습니다. 뭐 설명된 대로 그려본 것이죠. 또 없다고 아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설사 있다 한들 우리하고 그렇게 큰 상관이 있는 것이 사실은 아니고 우리가 천수경을 이렇게 중요한 경전으로 읽을 때는 그야말로 실존하는 어떤 아귀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 아귀와 같은 모습들, 이것에 대한 해결, 그로 인해서 어떤 자유와 평화, 참으로 어떤 욕망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런 욕망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워졌을 때 그것이 포만(飽滿)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경지, 그런 효과, 이것은 바로 지혜에서 또는 불교 공부를 우리가 바로 함으로 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그런 아귀와 같은 모습들, 이것이 다 소멸되고 또 아귀의 배가 불러진다.
불러진다고 하는 것은 물건을 채워서 불러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주림, 그 자체를 해결하는 거죠. 주림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버림으로서 아귀의 어떤 그 요소가 우리들로부터 다 사라져버린다 하는 그런 뜻으로 우리가 해석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수라(修羅)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아수라, 아수라, 그러죠. 이것은 이제 투쟁 심리, 싸우기 좋아하는 심리, 경쟁하기 좋아하는 심리, 기어이 이겨야겠다고 하는 그런 심리. 또 그저 요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놓고, 그야말로 마음으로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계심을 가지고 그야말로 싸움닭, 싸움하는 닭들이 서로 만났을 때 당장에 벼슬을 곤두세우고 그 깃털을 곤두세워서 아주 그 심한 경계의 눈초리로서 서로 이렇게 대하고 있는 듯한 그와 같은 그런 상황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어떤,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어떤 보이지 않는 모습들인데, 그런 것들이 바로 아수라다, 아수라의 어떤 현상들이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서로 맞지 아니할 때는 정말 그 참 처참한 그런, 피비린내 나는 그런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인간과 인간 간에 또는 기업과 기업 사이에 또는 어떤 그 정당과 정당 사이에서, 이 단체와 저 단체 사이에서, 이 상점과 저 상점의 그 사이에서, 뭐 아주 그런 그 모습들은 다양합니다.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기업과 기업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뭐 한 단체 속에서도 또 이 편과 저 편의 그 관계에서 그야말로 아수라와 같은 그런 현상들, 얼마든지 우리가 보고 또 겪는 그런 일들입니다.
그런 마음들, 그런 투쟁심리,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마음들, 이런 마음들이 다 조복받아지이다. 악한 마음, 나쁜 마음이죠, 나쁜 마음이 저절로 조복받아지이다. 무엇을 통해서, 천수경을 통해서입니다. 불교를 통해서죠. 불교의 지혜를 통해서, 정말 진정한 마음의 지혜를 통해서 그러한 우리의 삶의 현상들, 아귀와 같은 현상들, 아수라와 같은 현상들, 그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되어지이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있어지이다 하는 그런 바램도 되고 또 우리의 그 불교의 수양을 통해서 불교 공부를 통해서 내 삶에 그와 같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진다, 이미 해결되어졌다, 나에게는 다시는 그런 현상들, 그런 문제들은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신념도 되겠습니다.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
그 다음 구절의 축생도 마찬가지죠.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만약 축생을 향했을 때 그 축생이 저절로 큰 지혜를 얻어지이다. 뭐 글자대로 해석하면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소나 개나 돼지 이런 것들은 우리가 축생이라고 합니다. 뭐 다른 축생도 많죠. 그런 축생들이 지혜를 얻는다면 그것도 큰 지혜를 얻는다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개가 지혜가 있다, 소가 아주 그 지혜가 낫다, 돼지가 지혜가 낫다. 그렇다면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참 이 표현이 어쩔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뭐 무게가 더 나갑니까 아니면 값을 더 비싸게 받습니까. 그런 축생들이 지혜를 얻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지혜를 얻었다 한들 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 바가 없고 또 얻었다 한들 또 우리하고 어떤 관계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불경을 이해하는 하나의 그 요령 또 어떤 안목 이런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얻을 수가 있다고 보는데요, 바로 우리 마음에, 축생보다도 더 미련한, 더 어리석은 그런 어떤 마음에 지혜가 얻어지이다, 지혜가 밝아지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 놈, 축생보다도 더 미련한 놈, 뭐 또 개 돼지 같은 놈, 이런 표현을 가끔 쓰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실은 그 표현이 그 때 사실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축생다웠기 때문에 우리가 개니 돼지니 또는 축생이니 이런 말들을 사람에게다 거침없이 붙히는데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떨 때 지극히 어리석고 못났을 때 그 행동, 그 마음 씀씀이는 뭐 어떤 의미에서 축생보다도 더 못날 수도 있는 거죠, 사실은. 그러므로 여기 <천수경>에서는 이 축생이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저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소나 개나 돼지, 물론 그들에게도 자비가 내려져야 되고 그들에게도 지혜가 생기고 그들도 다 제도를 받아 마땅할 그런 제도의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러한 축생의 문제가 사실은 여기선 아닙니다. 축생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 이것이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죠.
그래서 그와 같은, 축생과 같은 미련스러운 마음에 큰 지혜를 밝혀지이다. 또 밝혀진다.
원(願)으로 보면은 밝혀지이다 라고 하는 그런 입장으로 해석을 하고 또 내가 가는 곳에, 여기의 해석대로는 내가 가는 곳에, 불교인이 가는 곳에, 불교적 소양이 충분한 사람, 불교 공부로 무장된 사람이 가는 곳에는 그런 축생같은 어리석음은 없다, 모든 지혜가 밝아져서 축생같은 어리석음은 없다, 하는 그런 신념에 우리는 넘쳐야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 六向, 여섯 가지 향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칼산을 내가 갔을 때 그 칼산은 저절로 꺾어지이다(我若向刀山 刀山自摧折). 이건 뭡니까.
불교로 무장된 우리의 마음, 불교로 무장된 우리의 지혜의 마음 속에 그런 칼로 가슴을 도리는 듯한 그런 불행과 아픔은 이제 없다, 영원히 떠났다.
또 내가 만약 화탕을 향했을 때 화탕은 저절로 소멸된다(我若向火湯 火湯自消滅).
끓는 물이죠, 끓는 물. 그와 같은 뜨거움과 그야말로 어떤 분노,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그러한 아픔과 그러한 분노는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소멸되고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지옥, 역시 기타 많은 지옥들, 지옥의 아픔들, 지옥의 고통들,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천수경을 수지 독송하는 사람에게 그런 지옥의 아픔, 지옥의 고통은 이제 이미 다 사라졌다(我若向地獄 地獄自枯渴). 오늘 이 시간 이후 나는 올바른 불교 신행을 통해서 그와 같은 아픔과 불행은 다 끝났다, 그렇게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또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내 그동안 허덕이던 마음, 갈구하는 마음, 허영에 들뜬 그런 마음들, 배고파 하는, 온갖 것에, 사람에게 또는 어떤 물질에, 명예에 배고파 허덕이던 그런 모습들, 나에게 이미 다 이제는 사라졌다.
그 다음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내가 만약 수라, 아수라를 향했을 때 투쟁하는 심리, 인아(人我)를 다투는, 너니 나니 하는 그런 다툼 심리, 또 어떤 그 기어이 지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심리작용들, 그런 모든 마음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축생처럼 미련한 그런 내 마음에 지혜가 밝아졌다, 지혜의 빛이 밝아졌다 하는 그런 어떤 신념에 넘친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我若向畜生 自得大智慧).
이것은 열 가지 원을 통한, 앞에서 우리 공부한 열 가지 원을 통한 그 효과, 그 원은 바로 우리 불교적 수행의 성취를 원하는 것이고 불교적 수행이 성취 됐을 때 이와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라고 하는 것이고 또 이미 우리의 신념 속에는 이와 같은 효과를 이미 나의 것으로 믿고 나아간다, 불교를 공부한다 하는 그러한 입장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될 줄 믿습니다.
여기까지 여섯 가지 向을 대강 정리를 하고 다음은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이라고 하는 대목인데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열 가지 다른 이름이라고 이렇게 풀이합니다. 열 가지 다른 이름과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근본 스승인 아미타 부처님을 소개하는 그런 대목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름이 아주 여러 가지입니다. 아주 많습니다. 많은데 여기 <천수경>에서는 열 가지 다른 이름을 우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우리가 잘 아는 보살이죠. 그 다음에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본사 아미타 부처님의 좌, 우 보처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수경>에서는 대세지보살 또한 관세음보살의 異名으로 다른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천수보살마하살(千手菩薩摩訶薩), 천 개의 손을 가진 보살마하살, 이건 ‘천수천안’ 이라고 경 제목을 우리가 공부할 때 소개했던 그런 보살이죠.
그 다음 여의륜보살마하살(如意輪菩薩摩訶薩),
그 다음에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나무정취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訶薩),
만월보살마하살(滿月菩薩摩訶薩),
수월보살마하살(水月菩薩摩訶薩),
그 다음에 군다리보살마하살(軍茶利菩薩摩訶薩),
십일면보살마하살(十一面菩薩摩訶薩) 여기까지가 열 가지 다른 이름이다,
관세음보살의 열 가지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다 이름 따라서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여러 가지 능력 또는 어떤 활동, 이런 것에 따라서 열 가지 이름, 또는 다른 이름도 많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수경>에 소개된 열 가지 다른 이름 뿐만 아니고 아주 여러 가지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경전에 알려진 바로는 서른 세 가지의 관세음보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이 <천수경>에서 소개된 그런 천수보살, 여의륜보살 등을 다 포함해서 소개된 이름들을 한 번 열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왕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우리가 이해하는 그런 입장이니까요.
왜 이런 이름이 여러 가지냐, 왜 이렇게 많으냐 하는 것, 이것은 또 별개의 문제로 달리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 우선 이름부터 소개하면은 열 가지 다른 이름과 아울러서 그야말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 또 성(聖)관자재보살, 그 다음에 마두(馬頭)관세음보살. 성관세음보살은 성인 聖 자 구요, 마두관세음보살은 말 馬 자, 머리 頭 자입니다.
또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 이것은 역시 <천수경>에 나온 소리죠. 또 준제(准提)관세음보살, 역시 ‘준제보살’ 하는 准提 지면에 대해서 설명드릴 때 나오겠습니다마는 준제보살도 역시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여의륜(如意輪)보살, 또 불공견색(不空絹索)관세음보살, 그 다음 양유(楊柳)관음, 양유관음이라고 하는 것은 버들 楊 자, 버들 柳 자 입니다. 버드나무가 있는 데 서 있는 관세음보살이죠.
그 다음에 용두(龍頭)관음이라고 해서 용 龍 자, 머리 頭 자, 용머리 위에 있는 관세음입니다. 용머리를 타고 있는 관세음보살.
그 다음 지경(持經)관세음, 가질 持 자, 경이라는 經 자 입니다. 경을 가진 관세음.
또 원광(圓光)관세음, 둥글 圓 자, 빛 光 자.
또 유희(遊戱)관세음, 또 백의(白衣)관음, 백의관음이라고 해서 백의관음은 많이 알려져 있죠. 흰 옷 입으신 관세음이란 말입니다.
또 그 다음에 연화(蓮華)관세음, 연꽃 蓮 자 입니다, 연꽃 관세음이라는 거죠.
그 다음에 용현(龍峴)관세음, 시약(施藥)관세음, 여기서 시약관세음이라고 하는 것은 베풀 施 자, 약 藥 자입니다. 약을 베푸는 관세음이라고 하는 그런 뜻이죠.
또 어람(魚籃)관세음, 이건 고기 魚 자, 집 籃 자 인데요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 다음 덕왕(德王)관세음, 큰 德 자, 왕 王, 덕이 크다, 덕이 많다, 덕에서는 왕이다 하는 그런 뜻이죠.
그 다음에 <천수경>에도 있는 수월(水月)관세음, 물에 비친 달과 같은 관세음.
그 다음 일엽(一葉)관세음, 한 一 자 잎 葉 자죠.
그 다음 청경(靑頸)관음, 목이 푸른 관음. 이 청정관음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해석하다보면 이제 나오게 되죠.
그 다음 위덕이 있다고 해서 위덕(威德)관세음.
또 목숨을 연장시킨다고 해서 연명(延命)관세음.
온갖 보배를 다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중보(衆寶)관세음.
그 다음 암호(崙戶)관세음, 바위 집 속에 있다고 해서 암호관세음.
그 다음에 능정, 능히 청정하게 한다는 뜻으로 능정(能淨)관세음.
아뇩(阿耨)관세음, 아마제(河摩提)관세음, 또 엽의(葉衣)관세음, 유리(琉璃)관세음, 다라존(多羅尊)관세음, 합이(蛤蜊)관세음 뭐 육시(六時)관세음, 보자(普慈)관세음, 마랑부(馬郞婦)관세음, 합장(合掌)관세음, 일여(一如)관세음, 불이(不二)관세음, 지연(持蓮)관세음, 쇄수(灑水)관세음 등 이런 등등 서른 세 가지의 또 다른 이름도 역시 있습니다.
그러나 <천수경>에서는 열 가지 다른 이름의 관세음만 들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참 이야기가 많죠. 저 앞에서 관세음보살에 대한 말씀을 약간 언급했습니다마는 우리나라의 불교는 법화경의 영향, 또 능엄경의 영향, 이런 대승경전의 영향으로 인해서 관음신앙이 아주 성합니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아주 지극하지요. 물론 저 티베트까지도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은 아주 지극합니다.
다른 나라는 그렇다손치고 우선 우리 나라의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을 우리가 살펴보면은 일반 신도님들이 불교를 믿고 의지하는데 있어서 어떤 부처님이나 아니면 어떤 특정 보살이나 아니면 어떤 宗師, 또는 宗主 그런 이들을 우리가 두루 살펴보았을 때 관세음보살을 믿고 의지하는 그런 불교도가 아마 제일 많지 않은가 저는 그렇게 여겨집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요즘 뭐 입시기도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죠. 어느 절 없이 관세음보살에 대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이 있을 때 기도를 할 때 보면은 대개 관음기도를 제일 많이 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에 전래된 법화경 또는 능엄경의 영향력이다 이렇게 이제 보아지는데 아주 그 관세음보살에 대한 그런 참 신앙이 열렬하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아는 신도님들이 많습니다. 또 ‘관세음보살~’ 이렇게 부르기는 쉽죠. ‘서가모니불~’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관세음보살~’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그런 실정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관음신앙에 대한 깊이와 폭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두 가지 수승한 것, 그리고 서른 두 가지의 응신, 해서 삼십 이 응신 또는 십사 무애력, 열 네 가지의 두려움 없는 힘, 또 네 가지 부사의한 그런 일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 십사무애력(十四無碍力), 사부사의(四不思議),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능력과 자비의 어떤 표현들을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알려진 바로는 관세음보살님은 부르는 데 다 나타나게 돼 있고 또 어디든지 안 계시는 곳이 없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부르는 곳마다 다 나타나게 돼 있죠. 세상의 소리를 자유롭게 觀하고 그 부르는 소리에 따라서 다 應해주고 중생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관세음보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이름도 많고 흔한,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는 그런 흔한 관세음이 과연 우리가 상상했던 대로 그렇게 도처에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었던가 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또 거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죠. 그렇다면 이 관세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이해인가. 이것도 우리가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도처에 있다고 했는데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은 우리들 마음 속에 계신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탐욕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다 해도 때로는 어떻습니까. 남에게 동정하는 마음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조그마한 선심이라도 쓰게 되죠. 그 때 어떻습니까. 바로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고 거기에 관세음보살은 이미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이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10)
모두가 번뇌나 망상 때문에 관세음보살인 자기 자신을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거죠. 내 마음 속에서 계시는 것이, 마음 속에 계시는 이가 관세음보살이다. 근데 왜 나타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번뇌 망상 때문에 자신이 관세음보살, 마음 속에 있다면은 마음인 자기는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인 자신을 망각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고 또 여기서 우리는 관세음보살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남이 아니라 본래 나 자신이다 또 불성이다, 부처의 종자다 라고 하는, 불성 그 자체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어떤 절대적인 당위, 그것을 우리가 관세음보살이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이 모든 고난에서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라, 모든 고난에 있는 중생들을 건지면서 자비를 베풀면서 그렇게 살라고 하는 어떤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그런 요청이 이 관세음보살 사상 속에 사실은 내포되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어떤 그 삶의 모습을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를 하고 관음신앙을 통해서 이해를 하면서 나아가서는 그 관세음보살의 삶과 같은 그러한 삶을 우리들 자신이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어떤 종교적인 요구가 거기에 사실은 나타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인생을 우리가 배우고 믿고 따르는 것은 내가 바로 관세음보살의 삶으로 살겠다, 내 인생이 관세음보살 인생으로 승화해야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관음신앙의 목적이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죠.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관세음보살이 도처에서 활약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타락했느니 아주 뭐 부정부패의 도가니니 뭐 이런 등등 어쩌니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우리가 합니다. 또 신문 사회면을 보면은 뭐 도저히 참 구제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인 것처럼 비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가정에서나 또는 학교에서나 또는 병원에서나 어떤 또 직장에서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지금도 활발히 관음의 인생을, 관세음보살의 삶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참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이라든지 어떤 간호원의 따뜻한 손길이라든지 선생님들의 그 아주 인자하고 참 사랑스러운 그런 보는 눈길이라든지 그런 좋은 의도들, 그런 마음들이 도처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사회를 사실은 지탱해 주고 있죠. 이를테면 동생을 구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그런 관세음보살님도 계시고 철도 감시원으로서의 그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행인을 구해주고서 자기는 그야말로 순직하는 그런 관세음보살, 이런 등등의 그 관세음보살님들은 사실은 오늘 이 순간 그 어디에서든지 도처에서 사실은 많이 활약하고 계신다 하는 그러한 입장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한번쯤은 관세음보살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평소에 관세음보살 같은 이라 하더라도 한번쯤은 또 아귀나 축생과 같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듯이 악한 사람도 한번쯤은 그렇게 관세음보살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더 반복이 되고 그게 좀더 넓혀지고 채워진다면은 우리의 삶은 관세음보살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죠. 그래서 우리 도처에 지금도 끊임없이 관세음보살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신통력을 발휘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눈뜨지 못하고 또 우리가 그러한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이라고 할까요, 어리석음이라고 할까요, 뭐 그런 것들을 막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보면은 <천수경>에서는 역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마는 다른 어떤 경전, 또 우리가 기왕 믿고 있는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신앙의 태도가 그렇지 않습니까. 一心으로 관세음보살을 일컬어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외워라.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고 하는 단서가 붙어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관세음보살의 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 하는 그런 전제죠. 그 부르는 것, 일컬으는 것, 그것은 정말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부르는 거죠. 그래서 기도를 할 때 꼭 관세음보살을 소리 높혀 부르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발하는 그런 광명이 아무리 무량무변하다 해도 우리가 그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고는 그 광명을 접할 수가 없습니다. 몸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그 자비를, 관세음보살 자비를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는 일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또 그것은 자신을 관세음보살로 키워가는 어떤 걸음마를 내딛는 그런 일이기도 합니다. 그게 참 중요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에 의해서 관음기도를 통해서 구제받는 일이 곧 관세음보살로 우리가 성장해 가는 일이 된다, 관세음보살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입문이 된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여기에 포함돼 있습니다.
뭐 이렇다면은 관세음보살이 정말 있는가 또 어디에 있는가 하는 따위의 의문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구해주실까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살아야 할, 살아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죠.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모든 불교도가 아니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그 삶의 모습이고 삶의 방향이고 그 모델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삶이다 하는 그러한 입장으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이해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납니다. 삶의 모습이 어디 한 가지겠습니까. 또 중생들을 제도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한 가지 모습으로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三十 二 應身, 서른 두 가지의 모습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또 열 네 가지의 두려움 없는 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또 네 가지의 불가사의한 그런 능력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다보니 또 서른 세 가지 이름, 또 여기서 <천수경>에서 말하는 열 가지의 다른 이름들, 기타 또 경전에 소개되지 않는 그런 많고 많은 이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팔만 사천 가지의 이름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삶이고 관세음보살의 마음이고 관세음보살의 자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관세음보살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고 그 어디에도 있는 관세음보살 또 그것은 우리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나아가야 할 어떤 삶의 길이고 목표다. 그것을 관세음이라고 하는 그런 이름으로 이렇게 우리가 그려본 것이고 또 그 모습은 우리가 바로 우리들 자신을 그렇게 이끌어 가자고 하는 그런 어떤 목적 의식이 그 속에 사실은 담겨 있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 삶의 길, 이것을 우리가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해의 한 모습으로 이해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천수경>의 심장부에 해당 되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천수경>의 중요한 구절인 다라니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그 다라니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어떤 내력 또 자비,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고 또 그러한 관세음보살의 신비한 그런 능력, 이 모든 것들이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하는 이, 대비주라고 하죠, 이 주문 또는 다라니에 담겨 있다, 이렇게 이제 보는 것입니다. 그럴려면은 무엇보담도 관세음보살의 근본 사상인 자비에 대한 것, 그것을 우리가 가슴 깊이 제대로 느끼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사실은 <천수경> 을 이해하는 지름길이고 또 <천수경>을 통해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실천하고 또는 그 자비의 실천 이전에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을 돈독케 하는 지름길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종교는 사실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해야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더욱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은 더욱 더 그렇죠.
뭐 두말할 것 없이 관세음보살님은 자비의 화신이고 불교는 자비의 종교다 라고 이렇게 흔히 쉽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자비라고 하는 것, 불교 안에서의 그 어마어마한 자비는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한 성자를 통해서 백 퍼센트 표현이 되어져야 합니다. 또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 표현을 통해서, 관세음보살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의 자비를 내 것으로 하고 내가 몸소 그 자비를 실천하려고 하는 그런 방향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불교를 그렇게 우리가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좀더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문품(普門品)>이라고 하지요. <법화경>, 관세음보살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품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 이렇게 하는데 흔히 <관음경>, 別立해서 <관음경> 이라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보면은 무진의보살이라고 하는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관세음보살은 왜 관세음보살이라고 그렇게 세상에서 부릅니까, 그렇게 부처님께 묻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무진의보살 그리고 다른 대중들을 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남자야, 만약 무량백천만억 중생이 있어서 온갖 고뇌를 받는다 해도 이 관세음보살 있음을 듣고 한 마음으로 그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이 관세음보살은 곧 그 음성을 알아 들어가지고 다 중생들이 받는 그 고뇌에서 풀려나게 하나니라. 이를테면 만약 이 관세음보살 이름,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그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설사 큰 불 속에 들어간다 해도 불이 능히 그 사람을 태우지 못한다. 이 보살의 원력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의 원력 때문이다.
또 만약 큰 물에 표류한다 해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은 곧 얕은 데 닿게 된다.
또 만약 백천만억 중생이 있어서 금과 은과 유리 자거 마노 산호 호박 진주 따위 보배를 구하려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설사 태풍이 그 배에 불어닥쳐 가지고 나찰귀들이 있는 나라에 닿는다 해도 그 중에 다만 한 명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은 이 사람들은 다 나찰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관세음이라고 한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해를 입으려 할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은 처형하는 자가 잡은 그 무기가 갑자기 토막토막 부숴져서 그 고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야차나 나찰이 우글거려 가지고 그들이 몰려와서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그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되면 이 악귀는 모두 악한 뜻을 품은 그런 눈초리로 보지도 못하려니와 하물며 다시 해칠 수 있을까보냐.
또 설령 사람이 죄가 있거나 없거나간에 수갑이나 어떤 칼에 또 그리고 쇠줄에 그 몸이 묶여 있다 할 경우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른다면은 그 모두가 끊기고 부셔져서 곧 그러한 고통과 얽매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등등의 능력이 있음으로해서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능력을 표현한 대목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관세음보살은 그런 능력보다도 어떤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라도 당신의 그 자비로서 그 고난을 해소해 주고자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것은 불교의 마음입니다. 불교의 그 진실한 마음은 바로 사람들의 고난에서, 사람들이 받는 그 고통에서 고통을 소멸해 주고자 하는 그것이 이제 불교의 자비의 마음이죠.
소동파(蘇東坡)라고 하는 송나라 때 아주 대문장가가 있는 걸 아시죠. 그 소동파의 여동생이라고 하는 소소매(蘇小妹)라고 하는 보살님이 있었죠. 여신도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관음에 대한 신앙이 돈독했습니다.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돈독해서 관세음보살께 올리는 예문을 하나 지었죠. 그것이 이제 관음예문(觀音禮文)이라고 해서 한 때 사찰에서 정초에 그 관음예문에 의해서 그 참회의 예를 많이 올린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뭐 그 관음예문에 의해서 예를 올리는 그런 사찰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떤 스님이 참 그 관음예문, 한문으로 된 관음예문을 아주 아름답게 번역을 했습니다.
또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마음을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천수경>을 바로 또 빨리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된다고 믿어지는 까닭에 이 시를 우리가 한번 조금 살펴봄으로써 관세음보살을 그야말로 가슴으로, 또 불교의 그 넓고 깊은 자비를 가슴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고 또 그 이해가 바로 나의 자비가 돼서 내 마음에서 그런 자비가 흘러 나가기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보탬이 되도록 하는 그런 마음에서 이 시를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관음예문은 꽤 긴 염불이죠. 그 중에 몇 대목을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지심정례공양
재앙의 세월이 온다 하여도
내게는 두려움 이미 없도다
님의 눈 어느 때고 나를 보시니
내게는 두려움도 이미 없도다
멸망의 세상이 된다 하여도
내게는 근심 걱정 이미 없도다
님의 귀 어딜 가나 나를 들으시니
내게는 근심 걱정 이미 없도다
내 음성 다 들어 주시고
내 모습 낱낱이 살펴 주시는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하 맑아라 저 눈빛이여
연꽃 같은 저 눈망울이여
초승달로 떠 있는가
감청색 빛나는 눈썹이시여
머리 뒤 둥근 광명은
금빛으로 눈부시고
그 빛 속 수놓은 듯
찬란한 구슬 광명이여
지심정례공양
중생의 세상
백천억 국토마다
자재하신 몸 달같이 나투시니
짝할 바 없네
무량한 저 자비여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지심정례공양
메아리 응답하듯
부르는 소리 낱낱이 찾아
고통 구해 주시고
천강에 밝은 달 비치듯
소원 발하는 이마다
큰 안락 주시는 이여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얼마나 애달팠으면
천의 손이 되셨을까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천의 눈을 하셨을까
한 중생에 팔만의 병고요
한 중생에 팔만의 번뇌인데
항하사 중생의 고통
모두 씻어 주시는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이와 같은 시가 있습니다. 뭐 이 시를 다 소개할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마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아주 잘 나타낸 그런 관음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여성 불자가 지은 그런 예문이라서 더욱 아주 아름답고 또 관세음보살의 섬세한 자비를 잘 표현했다 이렇게 보아집니다.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얼마나 애달팠으면 천의 손을 하셨을까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천의 눈을 하셨을까
이런 표현들, 천수천안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천수천안은 관세음의 그 자비를 나타내는 그런 이름이죠. 천수관음, 천안관음.
또 한 중생에 팔만의 병고요
한 중생에 팔만의 번뇌인데
항하사 중생의 고통 모두 씻어 주시는
그런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대목에는 그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아쉬울 것 없도다
천의 손이여
당신 잊고 있을 때도 감싸주시니
나 이제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도다
외로울 것 없도다
천의 눈이여
당신 찾기 전에도 돌봐주시니
나 이제 더 이상 외로울 것 없도다
깊고 맑은 삼매의 눈으로
삼계가 본래 청정 아시옵나니
보옵는 그 눈이 청정함이라
고르고 가없는 자비심이여
사생이 다 함께 아들 딸 되니
보살피는 그 마음 평등함이라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이렇게 아주 아름답고 멋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부터 정초에 관세음보살께 禮를 올리고 또 이 예를 통해서 우리들의 업장을 소멸하고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몸소 우리 마음 속에 새기자고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올렸던 전통 예문 중의 하나인데 그것을 우리 글로 번역을 해 놓으니까 그렇게 참 아름답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은 자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소개해 드렸듯이 서른 두 가지의 몸, 또는 열 네 가지의 무애력(無碍力) 이런 것이 있습니다. 조금만 소개를 더 할까 합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어떤 신앙보담도 한국 불교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천수경>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자비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원력을 담고 있는 관계로 <천수경> 공부를 통해서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알 것은 다 아는 것이 바람직한 그런 공부가 되리라고 생각이 들어요.
<능엄경> 에 소개한 그 모습을 보면은 관세음보살은 두 가지 훌륭한 것이 있다. 뭔고 하니 하나는 위로는 시방 모든 부처님의 아주 그 본(本) 묘각심(妙覺心)과, 부처님의 그 깨달음의 마음과 합해 가지고 부처님과 더불어 자비의 힘이 동일하다, 이랬습니다.
또 하나는 아래로는 시방 모든 일체 중생들하고 합해 가지고서 모든 중생들로 더불어 그 우러름이 동일하다. 말하자면 부처님께 우러러 귀의하는 그러한 마음이 같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우선 위로는 부처님과 같고 부처님의 마음과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같고 아래로는 중생들하고 똑같아 가지고서 중생들의 어떤 부처님에 대한 신앙, 이것이 동일하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또 三十二應身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삼십이응신은 온갖 국토에 들어가 가지고서 모든 각양각색의 중생들을 제도하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일 보살들이 삼마지(三摩地)에서 들어가서 무루(無漏)를 닦아서 아주 수승한 이해가 나타나려고 한다면은 제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서 법을 말하여 그 사람들을 해탈케 하겠다, 이게 첫째 몸입니다, 삼십이응신 중에서. 그러니까 부처의 몸을 나타낸다고 하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만일 유학(有學)들이 아주 고요하고 미묘하고 밝아서 아주 수승한 경계가 나타나면 제가 그 앞에서 독각신(獨覺身)을 나타내어서 그 사람을 위해서 법을 말해서 그 사람들을 해탈케 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몸, 여기선 독각신, 독각의 몸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또 만일 유학(有學)들이 십이인연을 끊고 인연이 끊어진 그 수승한 성품에 아주 미묘한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은 제가 그 앞에서 연각(緣覺)의 몸을 나타내서 법을 말하여 해탈케 한다. 또 유학들이 사제(四諦)가 공(空)하여지고 도(道)를 닦아서 멸(滅)에 들어가려고 할 적에 아주 수승한 성품이 원만히 나타나면 제가 그 앞에서 성문신(聲聞身)을 나타내서 법을 말하여서 해탈케 한다.
범왕신(梵王身)을 나타내서 해탈케 하고 또 제석(帝釋)의 몸을 필요로 하는 중생에게는 제석의 몸을 나타내서 해탈케 하고 자재천신(自在天身)의 모습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그 사람 앞에 자재천신의 몸을 나타내서 그 사람 위해서 설법해서 그 사람을 제도한다. 대자재천신(大自在天身), 천대장군신(天大將軍信), 사천왕신(四天王身) 또는 인왕신(仁王身), 사람의 왕이죠, 인왕신 또는 장자(長子)의 몸, 거사(居士)의 몸, 재관(宰官)의 몸, 바라문의 몸, 남자의 몸, 여자의 몸, 비구의 몸, 비구니의 몸, 온갖 모습들을 자유자재로 나타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제도한다 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앞서 전시간에 말씀드린 관세음보살은 과연 어떤 모습이 진실한 모습인가 과연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두 말할 것 없이 우리들 마음 속에 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한번쯤 善心을 쓰는 그 마음, 그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현현(顯現)인 것이다. 그것이 온종일 그런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쓴다면 온종일 그 사람은 관세음보살의 모습이다 하는 그러한 원론적인 설명으로서 그런 모든 삼십이응신도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집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