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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태산(泰山)ㆍ곡부(曲阜) 기행
때로는 한번쯤 일탈(逸脫)을 꿈꾼다. 청소년기에나 있을법한 일탈욕구가 왜 어른이 되어서까지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다고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일탈을 감행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나도 냉혹하다.
그래서 요즘의 어른들은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른 형태의 일탈(日脫,, 日常脫出의 준말)을 감행하곤 한다.
일상의 탈출, 그것은 일탈(逸脫)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선 설레임과 즐거움, 그리고 감동과 환희를 느낄 수 있다.
2006년 시도되었던 일탈이 올 해 다시 시도 되었다.
중국 산동성의 장보고 유적지, 태산, 곡부로의 일탈이다.
지난 해 실시되었던 백두산, 고구려유적 답사때 보다는 수월하지 않은 시작이었다.
우선 인원 모집단계부터 매우 유동적이었고 본 답사의 대장격인 유진경 선생님의 출발전일 불상사는 단체비자를 받은 우리 일행의 출발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위기수습 능력 100%를 발휘한 거북여행사 유태원 사장의 역할은 괄목할만하다. 그래서 출발은 그런대로 순조로왔다.
출발부터 시작된 미스테리
3월 31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평택항으로 가기위한 버스가 금촌시내를 회차하면서 함께 할 분들을 태웠다. 마지막으로 고양시 대화동 종합운동장 앞에서 서울에서 내려 온 김주영선생과 승복을 입은 스님 두 분을 태우니 출발예정인원 19명 전원 탑승이다.
이번 여정은 5박6일의 일정.
3월 31일 출발해 4월 5일 되돌아 오는 여정이다.
평택항에 도착하기전 버스안에서 거북이 사장의 인사와 이번 여행의 주의사항, 그리고 룸메이트 선정 등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5박6일의 일정을 함께할 인원은 모두 19명.
일행중에는 당연히 승복을 입은 두 분의 스님이 눈에 띠었다. 승복에 다른 짐없이 달랑 바랑하나씩을 등에 진 스님 두 분.
왠지 출발부터 이 번 여행의 미스테리를 예고하는 듯 했다.
미스테리의 포성은 바로 시작되었다. 갑자기 젊어보이는 스님 한 분(나중에 알았지만 혜명 스님이다)이 일행들에게 일일이 껌(알갱이 껌)을 돌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생소한 광경이었다. 아마 해외여행에 스님과 함께 한 것은 모두에게 처음있는 일일 것이다. 스님들과의 동반일탈이라? 그것도 유교의 발상지가 있는 곡부를 찾아간다니.... 잠시 복잡한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버스는 평택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평택항 도착 3시 10분경)
대룡훼리 승선, “버스에서 껌돌린 혜명입니다.”
평택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마치고 대룡훼리에 올랐다. 지난 해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단동항으로 들어갔지만 올 해는 평택항에서 출발, 중국의 영성시 용안항으로 들어가게 된다. 배에 오르니 지난해에 승선했던 동방명주훼리호보다 시설이 훨씬 깨끗한 느낌이다. 또 작년에는 일행이 함께 다다미방(큰 방 한실)에 묶었는데 올 해는 2인 1실의 침실방을 배정 받아 한층 업그레이 된 기분이다. 대룡훼리호의 출항은 5시예정이었는데 7시가 되어서야 뱃고동을 울리며 평택항을 출항하였다.
<대룡호 선실내>
각 룸별로 짐을 정리한 후 배안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작년에도 경험했지만 배안 식사는 우리나라 가정식 백반 수준이라 입에 잘 맞았다.
저녁 식사 후 배안 세미나실에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유사장의 유창한 말솜씨로 이번 여정의 일정소개와 함께 참가자들에 대한 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여행의 참가자 면면을 보면 우선 성대용 이사(문화원 이사) 부부와 이근홍 선생(성대용 이사 추천, 같은 동네분)부부 등 두 쌍의 부부. 그리고 유진경 선생님이 소개한 마원일 사장(전 승우당, 골드뱅크 대표), 최기화 선생(전직 교장) 등의 어르신들과 황정희 선생(해설사), 신정균 선생(해설사), 성희모 선생(향토문화연구소 간사), 선종엽 씨(강근숙 선생 신우), 서석남 지부장(서가협회)과 박영임 씨(서석남 지부장 추천,꽃가게), 이상완 여사(문인협회), 신영순 국장(서가협회), 김주영 선생(서울,유치원) 등과 ‘집도 절도 없다’는 소속이 불분명한 정암스님과 혜명스님 두 분의 스님(두 스님은 소엽 신정균 선생이 추천한 분 들임), 그리고 필자 등 모두 18명. 여기에 전 여행 일정을 책임져 줄 유태원 거북 여행사 사장까지 총 19명이다. 대부분 파주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활동력과 리더쉽을 발휘 하시는 분들이다.
개인소개 시간의 혜명스님 인사말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 인사말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료해 기억력에 자신이없는 나의 뇌리에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버스에서 껌 돌린 혜명입니다~~~”
아~~정말 심상치 않다. 갈수록 태산이다.
동행인들 중 성대용 이사 부부와 황정희 선생, 신정균 선생, 신영순 국장 등은 작년 답사에도 함께한 분들로 배 여행이 한층 자유로워 보였다.
오리엔테이션 후 휴게실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휴게실에는 30여명의 배안 승객들(대부분 보따리상)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데 모두 정면에 있는 TV시청에 열중하고 있다. 마치 생전 TV구경 못한 사람들처럼....
언뜻 화면을 보니 SBS대하사극<연개소문>이었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를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드라마 시청에 방해가 되는지 한사람이 점쟎게 다가와 TV시청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해 달란다. 그래서 흥이 깨지고 말았다.
배안에서 보내는 첫 밤. 일찍 잠을 청하는 분(부부 어르신),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나누는 분들(오늘만은 솔로들), 그리고 혜명 스님은 몇분의 손을 부여잡아(?) 가며 손금과 인생상담을 하는 신선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혜명의 어록이 등장하는데 손을 잡자마자 “첫 경험이 중요해~~~어허”. 손목을 잡힌 사람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작업(?)은 쉽게 끝나지 않는 듯 했다.
배안 침실은 고요하기만 하다.
미끄러지듯 파도위를 질주하는 훼리호가 중국 영해에 도착한 것은 중국 현지시간으로 4월 1일 오전 8시경 이었다.
용안항 도착, 최악의 황사가 반겨
<용안항도착 버스탑승>
중국 산동성 영성시 용안항.
배에서 내리기전 항구쪽을 바라보니 온통 흑색빛깔이다.
출발할 때 황사에 대한 걱정을 하긴 했지만 첫 도착지에서 우리를 반기는 건 온통 희뿌연 황사였다. 배에서 아침을 먹고 용안항에 내려 입국절차를 마치고 나오니 오전 9시가 넘어서고 있다. 용안항 대합실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젊은 청년을 만났는데 우리 일정을 안내할 현지 가이드 한 휘다.
가이드를 따라 대합실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 한 휘가 인사와 함께 일정 소개를 했다.
버스 차창밖으로는 앞이 잘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황사가 최악의 상태였다. 버스안의 공기도 황사 때문에 썩 좋질 않다. 이런 상태라면 답사여정이 매우 힘들 것 같은데 가이드 말이 좀 더 벗어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해 안심이 되었다.
가이드 한 휘는 첫 인상부터가 매우 씩씩한 청년으로 보인다. 체구도 단단한게 건강미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27살의 나이에 반해 상당히 노숙해 보였다. 글쎄 수많은 나이층의 관광객들을 상대했을터이니 그 많큼 노련함이 몸에 배었으리라.
장보고 유적지 적산법화원, 왠 물쑈?
중국 일정의 첫 답사지인 장보고 유적지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경. 해상왕 장보고로 잘 알려진 장보고 유적지가 위치한 곳은 ‘석도(石島,돌섬)’라는 곳이다. 해안을 끼고 위치한 석도는 주변이 온통 돌산으로 이루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 신라시대 韓ㆍ中ㆍ日 삼국의 해상로를 오가며 활동한 거상(巨商) 장보고의 사당(적산법화원)과 관련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시원한 물쑈>
이 곳에서 제일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물쑈와 불쑈다. 처음엔 가이드가 물쑈를 한다고 해 무슨 말인가 싶었더니 거대한 불상의 몸을 씻는 이른바 물쑈 이벤트다.
장중한 불교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물쑈는 우리나라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음악분수와 같은 원리이다. 그런데 이 곳은 특이하게도 거대 불상을 천천히 돌려가며 분수를 뿜어대고 간혹 물길속에서 불꽃이 나와 쑈의 진수를 더해준다. 이른바 물불쑈.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행사라 여겨지면서도 유적지에서 이런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중국인들의 물불 안가리는 쑈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적산의 산신상>
물쑈를 감상하고 적산법화원(장보고 사당)을 둘러본 후 건너편 산정에 거대하게 조각해 놓은 적산 산신상을 둘러 보았다. 정말이지 중국은 거대국가이다. 산정상에 어떻게 저렇게도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나 거대문화 중국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이 일시적인 감탄을 할지는 모르나 진한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거대 중국문화에 빗대어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한것은 아닐까?
첫 답사지를 나와 인근 석도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7시간 버스이동, 치박 제도호텔 도착
점심식사 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번 여정의 가장 힘든 장거리 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일정인 태산등정을 위해 치박시로 이동하는 데 무려 7시간이 예상된다. 버스를 타고 7시간을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경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드넓은 중국대륙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한 휘 가이드가 입담을 늘어 놓는다. 나이에 답지않게 많은 야설(야한 이야기)을 늘어놓았는데 간혹 들어본 이야기도 있었다.
그 중 기억이 남는 애기가 있어 한 구절만 소개한다.
“부인만 있는 남자는 <한심한 남자>, 부인도 있고 애인도 있는 남자는 <양심있는 남자>, 부인에다가 애인이 둘이나 있는 남자는 <세심한 남자>, 부인외에 애인에 셋이나 되는 남자는 <사심있는 남자>”란다.
장거리 이동이다 보니 가이드가 선수를 친 야설의 말꼬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에 질세라 본격적으로 혜명 스님이 나섰다. 가이드와 혜명 스님이 주고 받는 야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버스안은 웃음바다가 되곤 하였다.
참 세상은 요지경이다. 웃자고 만든 애기들인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두 번을 쉬었다. 장거리 이동은 저녁 8시경이나 되어서 치박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호텔앞 치박시내 모습>
우리가 묵을 숙소는 치박시 특급호텔인 제도호텔이다. 이 호텔에서 이틀을 묶게 된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일행중 2명은 다음날 태산등정 워밍업을 위해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샤워를 한 후 거북이 사장을 비롯한 몇 명이 모여 간단한(?) 음주 후에 잠을 청했다.
잠들기전 머릿속으로 양사언의 시를 뇌까리다 이내 잠이들었다.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리 없건만은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뫼만 높다 하더라.
-저자 : 양사언(陽士彦)-
태산극정(泰山極頂)에 오르다
태산답사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5시30분 전원 모닝콜을 해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7시경에 태산이 있는 태안으로 출발했다. 약2시간을 달려 태산입구에 도착했는데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도록 되어 있어 케이블카 승강장 입구 주차장까지 버스로 올라갔다.
버스를 타고 오르는 길 차창밖으로는 태산에 핀 노오란 개나리 꽃들이 우리 일행을 반기고 있다.
사실은 개인적으로 케이블카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다가 또 다녀온 사람들 애기가 매우 위험스럽다고 말해 약간은 두려운 마음에 케이블카를 탔다. 그런데 생각보다 매우 안전해 보였고 고소공포 현상도 느끼지 않았다. 케이블카 등정은 태산의 8부 능선까지 케이블카로 오르고 걸어서 약 30분정도 오르는 일이니 가장 편하게 태산에 오르는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래 태산에 오르는 일반적인 코스(도보)는 중천문까지 버스로 오르고 중천문부터 6,666개의 계단을 올라 남천문을 통과한 후 정상을 등정하는 코스인데 우리는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지의 코스를 케이블카로 대신한 것이니 어찌보면 태산을 거져 오른 것이 된다.
<케이블카로 태산 오르는 길>
태산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해발 1,545m의 고산으로 화산, 황산에 이어 중국에서 3번째 높은 산이며 중국 역사속에 언제나 등장하는 천하제일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산맥과 이어진 것이 아니라 평지에 산이 우뚝 서 있는 형세이니 신기하기 이를데 없다.
중국에서는 고대에는 태산이 동방 세계를 상징하고 천신(天神)의 거처라고 간주했으며 사회 안정, 나라 번창, 민족 단결의 심볼이었다. 따라서 역대 황제, 신하, 명인을 비롯해 모든 백성들에게 태산은 크고 높음, 튼튼함, 존엄, 진취, 불굴정신의 상징물이었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태산 등정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이겨내고 자아(自我)를 초월하는 뜻으로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해 왔다고 한다.
중국 고대의 황제들은 태산을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산으로 하늘의 자손으로서의 황제가 당연히 태산에 올라가서 하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봉(封)"이란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태산 밑의 양부(梁父)라는 곳에서는 지신(地神)에게 "선(禪)"이란 제사를 지냈다. 이를 합쳐 "봉선(封禪)"이라 하는데 역대 황제들은 모두 길일을 택해 태산에 와서 봉선행사를 하였다 한다. 진시황은 중국 첫 번째의 황제로서 처음으로 태산에 와서 봉선제사를 했던 황제이며 그 후 71명의 황제가 그 뒤를 따랐다 한다.
그리고 수많은 문인들이 태산에 올라가서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지는 시문을 남겼다 한다. 옛날 공자가 태산에 올라가서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보이구나"라고 감탄했다 하며
태산을 한번씩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한다.
태산은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속에서도 많이 인용되어 왔는데 예를들면,
티끌 모아 태산.
갈수록 태산.
걱정도 태산.
태산같은 은혜.
입이 태산 같이 무겁다.
태산을 알아보지 못한다. 등 등..
케이블카에서 내려 정상까지는 얼마 멀지 않다. 이곳 정상부근에는 가게가 줄지어 있고 호텔까지 있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줄지어 있는 토산품점을 거쳐 천가(天街,하늘 가는길)를 지나 정상을 향해 올랐다.
<태산 하늘길, 天街>
앙지(仰止), 우러름에 그침이 없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을 지나 서신문을 통과하여 완만한 계단을 오르니당 현종을 비롯한 유명인들이 태산에 올라 직접 쓴 수많은 붉은 암각 명문(銘文)들이 나타난다.이 명문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정상을 향하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두 글자가 보였다. 바로 ‘앙지(仰止)’라는 두 글자인데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마치 태산에서 보물을 찾아낸 듯 기쁘기 그지없었다.
앙지(仰止), 우리 파주의 황희선생유적지에 있는 반구정 좌측에 있는 정자 이름이 앙지대(仰止臺)가 아닌가? 즉 ‘우러름이 끝이없다.’라는 뜻인데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앙지대는 황희선생의 유업을 우러름이 끝이없도록 하자는 후손들의 의지가 담긴것인데 그 유래가 된 중국의 현지에서 앙지 두 글자를 보게되니 괜시리 친근함이 느껴졌다. 이 곳에는 앙지 두글자 옆으로 절정(絶頂)이란 두 글자가 함께 있었는데 아마도 태산의 ‘우러름의 절정’을 표시한 것이 아니가 싶다.
<태산 정상부의 앙지 절정>
태산극정, 1,545 米(m)
드디어 태산 정상내에 있는 옥황정에 도착했다.
옥황정이라고 쓴 건물 안쪽에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다.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米 (미터)」
<태산극정 내>
태산이 하늘 아래 뫼임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표지석 주변에는 수천개나 될 법한 자물통과 붉은 띠가 걸려 있고, 또 앞에서는 사람들이 기다란 향불을 꽂아 놓고 기도하는데 열을 올린다.
붉은 띠는 온 가족에 복을 가져다주고 수효를 알 수 없으리만치 많은 자물통들은 집안의 복이 나가지 않도록 잡아둔다고도 하고 연인의 헤어짐을 막는다고도 한다나!!
표지석의 사면에는 사당이 마련되어있는데, 중앙에 위치한 사당의 안쪽을 들여다보니 옥황대제가 모셔져 있다.
사진 촬영들을 하고 정상의 옥황정을 나와 하산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세차지더니 태산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뭔가 불길한 징조인가!
<태산정상의 건축물들>
내려오는길 또한 역시 별로 힘들지 않다.
내려가는 길도 역시 케이블카를 이용할 것이니 하산에 대한 부담도 없다.
케이블카 타는곳까지 내려오니 거북이 유사장이 기다리고 있다. 유사장은 태산을 올라가 본 적이 있어 이번에는 오르지 않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가장 늦게 내려온 나에게 유사장은 뒤에 사람이 더 없냐고 물어본다. 그렇지않아도 흐려지는 날씨탓에 맨 뒤에서 일행들을 재촉하며 내려온 터라 뒤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신영순씨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쩐지 올라갈때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처음 온 태산 정상을 올라가지 않을 사람도 아닌데 분명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보이지 않았었다.
위기상황 발생, 케이블카 운행 중단 위기
여기서 거북이 유사장의 기지가 발휘됐다. 우선 다른 일행들을 모두 케이블카로 내려 보냈다.(왜냐하면 날씨탓에 곧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사장과 나, 그리고 한 휘 가이드 세 사람이 남아 찾아 보기로 했다.
난 올라갔던 길을 다시 뛰어 올라가고 한 휘 가이드는 다른쪽의 하산길(사실은 이 길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면 영영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음)쪽으로 내달렸다.
상황은 급박한데 한참을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거북이 유사장은 자꾸 절벽아래를 쳐다본다. 그 모습을 보니 더 불안했다.(왜냐하면 유사장은 혹시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지않았나 살펴본 것일테니까..).
어느정도 올라갔으나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 보았으나 흰바지(신영순씨가 하얀바지를 입고 올라갔음)를 입은 사람이 내려오는지 눈을 까뒤집고 보았지만 흰바지는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는 흰 눈발이 점점 거세게 날리기 시작했다.
왜 그런 경험들 있지않은가? 어떤 악조건의 상황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리고 비나 눈이내리는 상황. 꼭 그 상황이다.
약30여분을 기다리다 다시 세 사람은 상가가 있는곳에 모였다.
이쯤이면 위기상황이다. 하산하는 사람들도 이젠 거의 끊어지고 케이블카는 정지될 상황이다.
그때 눈발을 맞으며 흰바지에 빨간 윗도리를 입은 사람이 뛰어왔는데 신영순씨였다.
그리곤 차분한 어조로 정상까지 갔다 왔단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몸이 불편한 두 어르신을 모시고 올라가다가 두 분이 다시 내려간다기에 다시 모셔다 드리고 혼자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정상에 오르는 길은 거의 외길인데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정상 부근의 갈림길에서 순간 엇갈린게 아닌가 싶다.
상황해제, 태산에 눈 내리다.
우리 세사람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놀랜 가슴을 쓸어내리고 부리나케 케이블카 탑승장으로가 간신히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케이블카로 내려오는 길,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지만 잠깐이나마 애간장이 탔을 네 사람들이었다.
내려오는 길 케이블카 창밖으로 눈발이 태산높이 이상의 사선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버스로 오니 다른 일행 모두가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이 늦어져 서둘렀다. 태산아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공자의 고향 곡부로 향했다.
곡부에서 공자를 만나다
버스로 약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곡부시.
공자의 고향답게 공자유적으로 가는 시내에는 고목들이 즐비하고 상가들이 모두 고건축물들 그대로이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일먼저 도착한 곳은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묘는 북경의 고궁, 대만의 대묘(垈廟)와 더불어 중국 3대건축이라 불리며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건설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의하던 행단에 대성전(大成殿)을 세운것으로 시작해 그 후 역대의 황제가 기부나 희사를 계속하여 현재의 규모는 명ㆍ청대에 완성된 것이다.
중국 각지에는 크고 작은 여러개의 공묘가 있지만 이곳 곡부의 공묘는 공자의 고향에 지어진 것으로 규모가 제일 크며 전체의 길이가 약 1㎞ 남짓하다.
면적은 약 22만㎡로서 전체 건물 방의 개수가 466개에 이른다.
<곡부 공묘>
공묘 본전인 대성전은 높이가 24.8m 인데. 사방 1km 이내에는 이 높이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한다 한다. 이 곳에는 공자를 기리는 역대 황제들의 비석이 10여 개가 있는데 대부분 문화 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훼손이 되었으나 주원장의 비석만큼은 그 출신이 서민이라 훼손 당하지 않았다 한다.
분서갱유시 상당량의 공자 관련 서적을 숨겨 화를 면했다는 로벽(爐壁)도 이곳에 있었다.
<분서갱유때 서적을 보관한 노벽>
공묘를 나와 다음 둘러 볼 곳은 공부(孔府)이다.
공묘의 오른편에 위치한 공부는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牆垣)으로 1,038년에 세워졌다.
공부는 또 연성공부(衍聖孔府)라고도 불리며, 현재의 모습은 명,청 양대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이곳은 다소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며 서로(西路)에는 객실, 동로(東路)에는 공씨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中路)에는 전반부의 관공서와 후반부의 주택과 화원으로 나뉘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면적은 16만㎡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될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으로 당시 공씨 가문의 권력과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78대 손까지 최근 이곳에 살았다 한다.
<공부에 대한 가이드 설명>
공림을 못본채 되돌아서
공부를 돌아나오는데 한 휘 가이드와 유사장이 서두른다.
공림 답사가 남았는데 입장 시간이 5시까지라 공림 입장이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일단 버스에 올라 공림 입장은 못하지만 정문앞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일부에서 아쉬움의 소리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림의 정문앞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고 버스에 올랐다.
<공림 입구 지성림 앞에서>
-이하는 자료에 의한 글-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 자손들이 묻힌 묘소다.
이 곳에는 묘가 약 2만기, 담장둘레만 7.25km로 세계최대의 씨족묘지라 할 수 있다.
공림에 들어가는 정문에 '지성림(至聖林)'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여기서부터 공림이 시작되며, 공림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묘비의 비석이 숲(林)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림의 정문인 지성림방(至聖林坊)이 있고 여기서부터 이림문(二林門)까지 떡갈나무 숲이 길게 이어진다.
공자의 분묘는 향전 뒷쪽에 있는데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씌어져 있다.
명성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는 않고, 돌보지 않은 듯 풀이 우거져 있으며 무덤 가운데 거목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공자의 묘를 돌보지 않는 이유는 중국의 대 사상가인 공자의 무덤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신념때문이다.
또 공자의 묘 옆에는 공자의 아들 묘(鯉)의 무덤이 있으며, 그 앞쪽에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손자 자사(子思)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공림에 대한 글은 자료글을 이용해 마치 다녀온 듯 작성해 보았음)
태산, 곡부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조금은 아쉽지만 무사히 태산과 곡부의 답사 일정을 마쳤다.
오늘 일정이 어찌보면 이번 여정의 피크라 할 수 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치박시의 제도호텔에 이른 저녁에 도착했다.
어제 묵은 호텔이다.
호텔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호텔내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중국에서 회집, 그리고 음주가무
저녁 식사후에는 거북이 유사장이 회를 사겠다고 해 호텔에서 멀지않은 회집으로 갔다.
아마도 유사장 생각에는 저녁도 먹었으니 술한잔 할 사람들 몇사람과 함께 하자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누구인가? 몸이 불편한 두 사람(소엽, 모모)을 뺀 16명이 회집을 차지했으니 심히 부담도 있었을 법.
중국에 와서 회집이라~.
대충 주류와 비주류(사실은 어르신과 덜어르신으로)두 테이블로 나뉘어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중국 소주(36도) 한 순배씩이 돌아가자 목청들이 올라가고 회집은 이내 우리 일행들의 재잘거림(사실은 비명?)으로 가득했다.
특히 주류측의 몇몇(혜명, 노당, 소담, 영임, 주영 등)은 얼쭈 취했고(중국 소주 3병을 비웠음) 비주류측의 마원일 사장님도 덩달아 취하셨다. 나는 얼렁뚱땅 무소속 행세(이리갔다 저리갔다)를 하다가 흠뻑 취해 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최고였다. 아무사고 없이 태산과 곡부답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이 취기를 한층 업(UP)시켜 주었다.
이대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분위기.
2차로 호텔 바로 옆의 노래방을 갔다. (중국에서는 노래방을 가청(歌廳)이라고 함)
노래방 간 사람(노당, 소담, 주영, 영임/ 도움이-적심재, 혜명)은 6명.
역시 젊음은 ‘무조건’이다. 노래방에서 마신 맥주 탓에 속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법 한데 누구하나 일탈(逸脫)없이 숙소로 돌아왔다.(사실은 노래방 도움이들의 행동을 자세히 기록해야하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그렇게 하루가 갔다.
세월을 낚은 강태공,
4일째.
오늘의 여정은 좀 여유가 있는 듯하다.
아침 출발도 9시가 다되어서 출발했다.
먼저 강태공 사당에 들렀다.
강태공하면 우리는 바로 낚시꾼을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낚시꾼들을 흔히 강태공이라 한다.
바로 이 곳이 세월을 낚다가 제왕의 권력을 쥐게 된 강태공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 곳이다.
강태공은 중국 은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당시 은나라는 포악한 황제 때문에 백성들이 비탄에 빠졌고 호족들은 불만이 가득했다.그 호족들 중 가장 강력했던 문왕은 충분히 은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도 때를 기다리며 은나라에 겉으로 충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문왕이 죽고 무왕(둘째)이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무왕은 왕위를 물려받자마자 은나라를 치려고 힘을 모으던 중 강태공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다.
어느날 무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강가에서 바늘도 없이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였다. 무왕은 하도 궁금해 “노인! 무엇을 하고 있는것이오?” 하고 물어보니, 강태공이 말하기를 "난 고기를 낚는게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는 것이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훌륭한 낚시꾼의 표상이 강태공이 된 것이다.
강태공에 반한 무왕은 그를 나라로 데려와서 재상으로 쓰고, 얼마 안되어 은나라의 마지막 황제 탕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인 주나라를 세운다.
무왕은 가장 공이 큰 강태공에게 당시의 중국대륙의 노른자 땅인 산둥반도(지금의 항주, 소주 지역, 중국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 쪽으로 튀어나온 부분) 지방을 떼어 주게 된다.
강태공은 이 땅에 소국인 제나라를 세우고 제왕이 된다.
강태공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하나 더 있어 소개한다.
어느날 강태공이 제나라의 왕이되어 가는 도중 한 할머니가 강태공에게 뛰어와 수고했다며, 이제 같이 살자고 한다.
그 할머니는 바로 강태공의 부인이었는데 부인은 평생을 할일없이 막대기 하나만으로 낚시질만 하는 강태공이 꼴보기 싫어 가출했던 부인이었다.
그때 강태공은 부하를 시켜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오라고 한 후 그걸 땅에다 쏟아 버리고 부인에게 다시 그릇에 담아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말인 "한번 엎지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라는 말을 남겼다.
어찌보면 우리네 일상에서 소중하게 삼아왔던 교훈들을 중국 현지에 와서 새삼 다시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강태공 사당과 무덤을 둘러보니 수많은 세월을 낚았던 강태공의 인생여정이 어찌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 최고의 권력까지 낚았으니...
<강태공 사당>
고차박물관, 위로는 고속도로가 지나고
강태공 유적을 나와 연태로 가는 길에 고속도로변에 있는 중국 고차박물관을 들렀다.
고차박물관은 바퀴를 이용한 차(車)의 기원과 역사를 변천사별로 모형전시한 박물관인데 고속도로변 벌판에 박물관이 들어서게 된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고속도로 조성 당시 이 곳 땅속에서 엄청난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바로 수레와 수레를 끌던 십수마리의 말(馬)의 유골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채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그 유구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이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박물관을 건립하고 발굴된 자리에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고속도로는 우회했을법 한데 알고보니 유구들 위로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문화유적을 보존하는 의식이 우리나라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고차박물관의 마차와 말 유구>
유방시 연박물관, 중국은 풍쟁(風箏)박물관으로 호칭.
연태로 가기전 예정에 없던 유방시의 연박물관을 들렀다.
버스안에서 가이드가 애기도중 연박물관 이야기를 하자 모두 둘러보자고 했기 때문에 예정에 없던 방문이 이루어졌다.
파주에서도 정초 대보름을 기해 매년 임진강 연날리기 축제를 하고 있으니 의미있는 방문이 될 듯도 했다.
그런데 막상 연박물관(여기에서는 풍쟁(風箏)박물관이라고 함)에 들어가보니 정말 다양한 연들과 연의 역사등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내용물도 좋았지만 우리나라와는 다른 박물관 건축물과 전시형태, 그리고 내부의 깔끔함이 부럽기만 했다.
<유방시 연 박물관 전경>
<연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연들>
연태 포도주박물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연태시에 있는 포도주 박물관에 들렀는데 박물관이면서 직접 포도주를 가공하는 공장 시설이 함께 있는 듯 하다. 전시장을 둘러 본 후에 지하고에 들어가니 수많은 술통이 진열되어 있는데 가이드의 말이 빈통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술통에는 붉은 천들을 둘러놓았는데 중국인들에게 붉은 천은 악귀를 물리치고 신성함을 표시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이 곳에서 몸에 좋다는 약주를 작은 양주잔에 한잔 마셨는데 금방 몸에 열이 오르고 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포도주박물관을 나와 마지막 일정의 숙소가 있는 위해시로 이동하였다.
위해시는 중국의 많은 도시중에서도 깨끗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시내 곳곳이 잘 정리된듯한 느낌이고 도로변 가로수들도 정지작업이 잘되어 대체로 깨끗한 모습들이다.
저녁 무렵 위해시에 있는 소피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객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방으로 전화가 온다. 전화를 받으니 신영순씨가 호텔내 편의점에서 맥주를 주문했는데 시원하지 않은 맥주를 가져왔단다. 그러니 찬맥주로 바꾸어 달라고 하고 싶은데 종업원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알아서 해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말이 안통하자 객실에 있는 조그만 냉온수기를 가르키며 빨간수구(뜨거운물 나오는곳)를 만졌다가 파란수구(찬물나오는 곳)를 가르켰는데(즉 맥주가 뜨듯하니 찬맥주로 바꾸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종업원이 다시 올라왔는데 글쎄 다른 냉온수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종업원은 냉온수기를 자꾸 만지는 것을 보고 냉온수기가 잘안되니 바꿔달라는 줄 안 모양이다)
언어가 안통하니 참 우스운 일도 많이 생긴다.
맥주 10여병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중국 밤의 술문화.....
그래도 좋다.
<연태시 포도주 박물관>
중국의 성산일출봉, 성산두(城山頭)
5일째, 중국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일행은 바다가 보이는 성산두로 향했다.
성산두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란다.
버스로 성산두 입구에 도착해 내리니 동해바다(우리쪽에서 보면 서해바다지만)가 한눈에 들어오고 기괴한 암석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날씨도 상쾌하고 시원한 바닷바람도 일행들을 한층 즐겁게 해준다.
잠시 성산두 도보 관람에 앞서 이 곳 바다의 신(잘 기억 안남)을 모신 사당같은 곳을 먼저 둘러 보고 나왔다.
사당 밖 우측에는 야외에 굉장한 규모의 불상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쪽으로 발길을 돌리던 일행들 눈에 가사장삼을 두른 두 스님의 불공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정암과 혜명 두 스님인데 5일간의 여정 동안 우리 일행들에게 보여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정암, 혜명스님의 불공>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는 좀 어려운 것이지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는 감동과도 같았다.
사실은 그간의 일정에서 스님들에 대한(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스님에 대한 선입견 때문) 다소 그릇된 평가(?)가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수행의 길을 우리와 함께하며 때론 자신의 신분을 떠나서 속세와 함께했던 그 분들의 고행을 동감했다고나 할까?
순간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스님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발견한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두 스님의 모습을 뒤로하고 일행들은 바다 암석들을 끼고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성산두로 향했다. 곳곳이 절경이고 기괴한 암석들이 천연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이 곳도 봄이 찿아왔는지 돌틈사이로 노오란 민들레꽃이 피어있다. 한 30여분을 걸어 도착한 곳이 말그대로 성산두이다.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듯한 암석덩어리에 서니 그 앞으로 우뚝 솟은 돌기둥이 솟아 있다. 그곳에는 ‘천무진두(天無盡頭)’란 붉은 글씨가 써 있고 하단에는 붉은 낙관이 아로 새겨있다.
중국 전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이 남긴 휘호로 ‘하늘이 다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 뒤로는 세 명의 인물상이 손으로 바다쪽을 가리키며 세워져 있는데 옛 날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고씨, 양씨, 부씨를 비롯 3,000명을 탐라(우리의 제주도)로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자 이곳에 와 왜 아니오는가하고 바다건너를 바라보는 모습이라 한다.
<성산두의 天無盡頭>
어찌보면 제주에 많은 성씨인 고, 양, 부씨들이 이때 불로초를 가지러 왔던 중국인들의 후손일지도 모를 일이다.
<성산두의 괴암>
성산두를 끝으로 모든 답사일정은 끝이났다. 원래는 성산두 이전에 야생동물원을 보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행들이 재래시장을 가보자고 해 생략했다.
야생동물원 바로 앞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계속된 술로 식욕이 현저히 떨어졌다 억지로 컵라면을 하나 먹고 버스로 오니 미리 주문했던 참깨며, 콩, 대추 등을 가지고 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에 갖다오면 가장 많이 사오는 농산물이 참깨인데 이번에는 검은콩과 실한 대추 등이 좋아 보였다. 대부분의 일행들이 참깨와 대추 등을 사서 짐칸에 실었다.
가지고 갈 짐이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해외여행에서 돌아가는 양손이 무거워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인가 보다.
일행들의 요구에 용안항에 가기전 위해시 변두리의 재래시장을 들렀는데 제대로 장이 서있질않아 영 볼거리가 없었다. 아마도 저녁시간이나 되어야 성시를 이룰 모양인데 점심이 지난 시간이니 장바닥이 텅비어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버스에서 가이드 한휘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한다.
우리도 박수로 수고했음을 표시했다. 기사에게도(아 참! 기사이름은 조따거(趙大兄)이다.-발음조심) 고마움의 박수를 보냈다.
용안항을 떠나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대룡훼리에 올랐다.
짐보따리들이 많아진 탓에 탑승에 매우 힘겨운 모습들이다.
각자 룸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많이 남았다.
배가 출항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녁식사를 하고나니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배가 용안항을 출발하였다.
심신들이 지쳤는지 아니면 여행의 아쉬움 때문인지 돌아오는 배안은 조용했다.
일행들 중 몇몇끼리 모여 아쉬움의 대화를 하기도 하고 또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는데도 배는 여전히 움직인다.
아직 우리나라 영해에 들어오지 못한 모양이다.
출발이 늦어져 도착도 늦어지는 듯 하다.
오전8시경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올라갔다.
배안의 사고
몇일간의 술로인해 입맛이 없다. 억지로 한숟깔을 뜨고 방으로 내려오는데 우리 일행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럽다.
아뿔사 이게 왠일인가?
사고가 일어났다.
모두가 식사를 하러 식당에 올라간 사이 아침을 먹지않겠다고 남아있던 박영임씨가 룸안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미끄러지며 넘어졌는데 꼬리뼈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유사장이 급하게 선내에 알렸고 응급조치가 이루어 졌다.
그런데도 통증이 가라않지 않는 듯 심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결국 배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119응급구조대를 불러 환자를 이송하기로 했다.
11시가 다 되어서 평택항에 도착했다. 119에서 환자를 평택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했다.
일행들 모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무 탈 없기만을 기원했다.
평택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로 오는 중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엑스레이 촬영결과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다행스런 일이다.
평택병원에서 금촌으로 환자를 이송한다는 전화를 받고 일행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제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헤어짐의 아쉬움들을 서로 나누었다.
마원일 사장님께서 해단식 겸 뒤풀이턱을 내시겠다고 한다.
그래서 4월 13일 저녁에 일산에 있는 소엽선생의 자유핵교에서 모이기로 약속을 정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마음이 편해졌다.
돌아오는 길 고양시 대화역에서 정암과 혜명 두 스님과 헤어졌다.
우리를 즐겁게 해 준 두 스님의 정열과 은혜에 감사함을 느낀다.
교하에서 성대용 이사님 일행들을 내려드리고 나머지 분들은 처음 우리가 출발했던 파주시 공설운동장에서 내렸다.
일상으로의 회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함께한 일행들에게 감사한다.
비록 작은 불상사가 있었지만 큰 사고없이 일상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여행은 늘 모든 것을 비워낼 수 있고 또 새로운 것을 채워 올 수 있어 좋다.
이번 여행에서도 눈으로 본 많은 것들 이상으로 마음속에 많은 것을 담아 올 수 있는 의미있는 여행이 된 것에 감사한다.
특히 몸이 다소 불편하셨던 황정희 선생님, 그리고 최기화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준 두 스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병원에 누워 우리 일행의 무사함을 빌어 주신 유진경 선생님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일행의 편안한 여정을 책임져 준 유태원 거북여행사 사장께 감사를 드린다.
이외의 모든 일행들에게도....
아무쪼록 이번 여행이 모든 분들의 일상에 활력이 되시기를 기원해 본다.
2007년 4월 20일
迹尋齋 이윤희 씀
첫댓글 설렘- 만남- 동행 -감탄- 죄송 -고맙- 헤어짐- 섭섭 -재회- 기약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