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도 가리지 않는 무서운 폭력
증 언 자 : 최현철(남)
생년월일 : 1964. 1. 6(당시 나이 16세)
직 업 : 중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1980년 광주 동성중학교 2학년으로 5월 20일 밤 집을 나와 시위대를 따라 전남대앞에서 시위에 참여하다 계엄군에게 구타 후 연행, 전남대로 끌려가 교도소, 상무대를 거쳐 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이후 적십자병원에서 퇴원했다.
평탄치 않은 어린 시절
나는 1964년 함평군 손불면 학산리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이후 아버지는 군기피자로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고 어머니는 서울의 외삼촌댁에서 돈을 벌고 계셨다. 이런고로 우리 가정은 다른 집에 비해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남매는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함평군 손불면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 광주로 올라왔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아버지의 군기피자 생활이 막을 내린 모양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여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광주 양동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몸이 건강했던 나는 국민학교 야구부로 들어가 활동하다가 체육특기생으로 동성중학교에 입학했다. 1980년 5·18 당시에는 동성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대에게 돌을 날라주고
5월 19일 학교에 갔더니 며칠간 휴교를 한다고 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철없던 중학생인 나는 단지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었다.
5월 20일 밖에서 놀다가 오후 6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들어오자 부모님께서는 야단을 쳤다.
"밖이 시끄러운데 어디를 싸돌아다니다 이제 오는 거냐. 앞으로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아라."
내 나이가 사춘기여서 그런지 괜한 반항심이 일어났다. 단순한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에서 부모님 몰래 작은방을 거쳐 부엌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밤 9시경, 양동시장 앞에 나가보니 양동 파출소가 불타고 있었고 그 앞에는 시민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시위대 틈에서 동네 친구를 만나 친구와 함께 시위대를 따라다녔다.
시위대들은 곧바로 무등경기장 앞으로 갔다. 시위차량이 몇 대 있었다. 시위대들 중 많은 사람이 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 친구와 함께 얼른 차에 올라탔다.
시위차량은 어두운 밤길을 따라 전남대학교 정문 앞까지 갔다. 전남대학교 앞에 도착한 우리들 중 일부는 차에서 내리고 일부는 그대로 차에 타고 있었다.
시민들은 캄캄한 밤중인데다 가로등도 켜져 있지 않아서 몇십 미터 앞에 형체만 보이는 계엄군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계엄군들은 곧바로 최루탄을 쏘아댔다. 시민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계엄군들은 계속해서 최루탄을 탕탕 쏘아대며 뒤쫓아왔다.
나는 밤중인데다 그쪽 지리를 알지 못해 발 닿는 대로 도망을 갔다. 어디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전남대 앞 사거리 부근의 벽돌 만드는 공장이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벽돌이 쌓여 있었고 드럼통이 있었다. 나는 얼른 드럼통 속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았다. 꽉 막힌 상태에서 밖의 상황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계엄군이 주위의 여기저기를 수색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수색하던 계엄군이 사라진 것 같아 살며시 드럼통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같이 다녔던 친구를 계엄군에게 쫓기는 사이에 잃어버려 친구를 찾기 위해 다시 전남대 정문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언제 다시 모였는지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부근의 도로에 있는 돌을 날라다 시위대들에게 주었다.
계속해서 시위대에게 돌을 날라주고 있는데 계엄군들이 마이크를 통해 방송을 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시위대들은 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해서 돌을 던졌다.
그러자 계엄군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았는지 공포탄을 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총소리에 놀라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나는 곤색 위아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 돌을 나르느라 웃옷을 벗어 앞치마처럼 허리에 매고 그 옷에 돌을 담고 있었다. 위에는 웃옷을 벗어버려서 하얀 메리야스만 입고 있었다. 마음은 바쁜데 돌이 있어서 제대로 뛰어갈 수가 없었다.
조금을 도망가니 자동차 타이어가 쌓여 있는 곳이 보였다. 얼른 타이어 뒤로 몸을 숨겼다. 막 타이어 뒤에 숨었는데 시민 한 명이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 오고 바로 뒤에는 계엄군 1명이 뒤쫓아왔다. 계엄군은 시민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뒷덜미를 붙잡힌 시민이 갑자기 계엄군에게 달려들었다. 이어 두 명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계엄군은 시민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끝내는 계엄군이 시민의 몸 아래 깔려 허우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계엄군은 도움을 구하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계엄군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 시민은 그들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맞는 것 같았다. 그 시민을 붙잡은 계엄군들은 갑자기 내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타이어 뒤에 숨어 있는 새끼, 빨리 나와. 안 나오면 쏜다!"
아마도 위에 입은 흰 메리야스가 깜깜한 밤중에도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가지 않으면 총에 맞아 죽을 판국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내가 나가자마자 7, 8명의 계엄군이 달려들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두들겨팼다. 군화발로 온몸을 지근지근 밟고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계엄군에게 질질 끌려갔다. 방금 전까지 시위를 했던 전남대 정문 앞에는 이미 계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채 트럭에 실려
나는 곧바로 도로에 세워진 트럭에 태워졌다. 트럭에는 이미 20여 명의 시민들 이끌려와 있었다. 곧바로 트럭은 전남대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건물 앞에 차를 멈추더니 우리를 건물 안으로 끌고 갔다.
잡혀온 우리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기를 강요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군인들에게 여지없이 몽둥이 세례를 당했다. 나는 머리, 팔, 손가락 등을 다쳐서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특히 잡힐 당시 머리를 곤봉으로 맞아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흘렀다. 군인들은 나의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흐르자 수술 아닌 수술을 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뭔가로 나의 머리를 꿰매 버렸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처음에 나를 잡을 때의 기세와는 다르게 내가 어려서인지 다른 어른들처럼 때리지도 않고 조사도 받지 않았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내고 21일 오후에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전경버스에 태워졌다. 잡혀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전경버스에 올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타게 되었는데 좁은 버스에 어찌나 많은 사람들을 태웠는지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버스 출입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보자 계엄군이 소리쳤다.
"얼른 문을 닫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
고 위협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앞사람을 밀어넣고야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 전경버스에는 어디에서 다쳐 끌려왔는지 중상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은 버스 안의 사람들에 깔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버스 안에는 이러한 중상자들과 부상자들로 인해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교도소 앞에서 멈췄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들에게는 군인들은 고개를 푹 숙이라고 했다. 이미 앞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또 얻어맞았는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맞다가는 거의 다 죽을 지경에 이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로선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만화영화를 즐겼던 나는 내가 마징가제트였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계속 신음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살짝 들고 앞을 살펴보려다가 뒤에서 지키고 있던 계엄군들에게 심하게 등을 얻어맞았다. 얼마나 아프던가 그 뒤로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개만 처박고 있었다.
우리들은 오후 늦게야 교도소 내의 창고인 듯한 건물로 옮겨졌다. 창고 안에는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곳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우리들에게 식사라며 건빵 4봉지가 나왔다. 나는 한 봉지만 먹고 나머지는 다음에 먹으려고 남겨두었다.
21일 밤은 그곳에서 잤다. 아침에 깨어나보니 전날 남겨두었던 건빵이 없어져 버렸다. 알고 보니 옆사람이 배가 고파 먹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도 나는 조사를 받지 않았다.
상무대를 거쳐 광주통합병원으로
22일 오전 11시경 창고 앞에 군용 헬기가 내려왔다. 군인들은 헬기에 중환자 1명과 나를 포함한 4-5명을 태웠다. 또 어디로 끌려가는지 불안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상무대였다. 도착해 내리자마자 군인들은 곡괭이 자루를 하나씩 들고는 우리를 때리더니 기어서 가라고 했다. 우리들은 구타가 무서워 시키는 대로 기어서 헌병대 영창 앞까지 왔다. 영창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복도에 꿇어앉아 있었다.
한참이나 지난 후 저녁 무렵 앰뷸런스가 와서 우리들을 태우고 광주 통합병원으로 왔다. 통합병원은 지금까지 생활하던 것에 비하면 천국이나 진배 없었다.
통합병원에서는 신경이 마비된 손가락 부위를 치료하고 그동안 받지 않았던 수사를 받았다. 수사 내용은 별것이 없고 내가 어린 학생이어서 그런지 그들은 아주 간단하게 조서를 작성했다.
7월 1일 통합병원에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적십자병원에서는 특별한 치료는 하지 않고 주사만 몇 대 놓아주는 정도였다. 별 효과도 없는 병원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스스로 퇴원수속을 밟아 퇴원해 버렸다.
퇴원 후 계속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몸이 아파 5·18 이전에 했던 야구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루 내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자면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침을 맞아야 한다고 해 침을 맞아보았으나 그것도 효과가 없었다. 다시 전남 방사선과(전남대 의대 앞)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디스크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 후 물리치료도 하고 침을 계속 맞자 몸이 조금씩 나아졌다.
동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동일실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공부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러다 고 2때 친구들과 패싸움을 하여 3개월 정도 징역생활를 하고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학교도 다닐 수 없게 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1985년 서울에서 간판계통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몸이 아픈 데다 고된 일을 하다 보니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1988년 8월경에 광주로 내려왔다.
서울에 있으면서 부상자회의 이지현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부상자회에도 가끔씩 참석했다. 그러나 광주에 와서 부상자회가 두 개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부상자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싸워도 부족할 판에 두 개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껴 이제는 부상자회도 아예 나가지 않고 있다. (조사.정리 신봉화, 김정기)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