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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의 허무, 그 극복을 위한 변증법적인 시
―이운룡 시집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와
『그 땅에는 길이 있다』에 관한 일고
정 휘 립 (시인, 전북대교수)
“어둠이 다가올지라도 밤은 장미처럼 꽃을 피우리라.”
“though the darkness close Even the night will blossom as the rose.”
―존 메이스필드John Masefield의 시 <나이듦에 관하여On Growing Old>에서
1. 글의 초입
연극의 일시성一時性과 즉시성卽時性은 실제 일상의 삶과 긴밀한 연계를 지닌다. 허虛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 행위들 자체가 허무虛無한 것이다. ‘지켜보는’ 행위와 ‘남에게 보여지는’ 행위의 교차 지점에서 ‘남’이 곧 ‘자기 자신’이 될 때, 몸소 겪거나 지켜본(또는 관람해 온) 삶의 궤적은 환상적 광휘를 지니며, 과거의 안개 속에 안치된다.
생生을 영위함에 있어서 시인들이 맡은 배역이나 관객의 상관적 위치에서의 관람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자기의 처지에 따라 인생에 대처해 가기 마련이지만, 혹자는 인생이라는 극의 정점을 허무하게 탕진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삶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자아를 반추, 거듭나고자 신생의 힘을 구축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이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이운룡의 최근 시편들은 인생의 극 후반기에 접어든 문사가 ‘나이듦’을 의식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반추를 어떻게 역동적으로 추진시키고 있는가라는 주요 화두를 진솔하게 제기한다. 한 마디로 이운룡은 올해로 고희를 맞이한 삶의 허무를 도전적으로 응시하는 동시에 이를 시작 행위로써 극복하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근작 시집은 시의 노선에 있어서 중요하게 자기 탈바꿈의 변화를 암시해 준다.
1964~1969년 『현대문학』의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나온 이운룡(1938~ )의 작품 세계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대별해볼 수 있다. 제1시집 『가을의 어휘』부터 제5시집 『버버리의 노래』까지의 전반기와, 제6시집 『사랑의 반지름』 이후 2002년에 상재한 두 권 시집의 세계가 그것이다. 시인의 전반기가 사회학적 상상력에 근거를 둔 자본주의의 사회 병리적 현상과 정치적 암울의 경직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해학을 민중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후반기 특히 90년대 이후의 시에서는 민주화의 열망 실현과 더불어 외적 현실에 대한 부담을 덜고 인본주의적 신서정의 예술적 본질 탐색으로 시의 패턴을 전환시킨다. 거시적으로는 국가적 비민주화의 암울함에 대하여, 미시적으로는 부인의 사별에 의한 일대의 불우한 희생을 경험하면서 그의 시세계는 변모를 겪어왔다.
그는 1993년의 시집 『성자, 반눈 뜨고 세상을 보다』 이후, 주로 후학 양성과 시론詩論 집필에만 몰두하다가 10년 만에 홀연히 두 권의 시집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2002)와 『그 땅에는 길이 있다』(2002)를 상재하였다. 소위 ‘쏟아지는 시의 영감’을 표상한 이 시집들을 제쳐놓고 그의 위상과 시에 관한 논의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시집들은 ‘삶의 한계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시 작업을 통한 극복의 의지’를 그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극복을 위한 시적 이념은 소위 본질적 서정시의 ‘생명성’ 지향으로 채색되어 있다.
2. 허무의식과 극복의지: 시집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경우
1) 마음의 가난, 허무의식 확산의 의미소
나이듦과 함께 찾아오는 삶의 무위감은 시적 인생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를 동반한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시인 이운룡도 위의 시집에서 그러한 생의 고비를 절감한 듯이 보인다.
허무가 내 몸을 파먹는다.
파먹고 파먹어 껍질뿐인 빈 자리 차지하고
허무의 흰 뿌리가 제 길을 넓혀 간다.
그 뿌리 뽑아내니 허공이 또 들어앉았다
허공 하나 커지고 커져서
이윽고 하늘로 들어가 한 살이 된다.
내 몸의 허공을 차지한 새 한 마리
남은 살을 콕콕 쪼아 먹으면서
살의 기둥인 뼈까지 통째로 삼킨다.
그 새, 몸이 퉁퉁 불어나자
허공을 다 채우고 나까지 삼켜 버린다.
이제 내 몸은 나에게 없다.
―「허무, 혹은 새에 관한 떨림」 전문 (*이하 인용시의 굵은 글씨 ― 필자)
이 원작은 연聯 가름 없이 한 연으로 묶였으나, 내용상 앞 6행까지와 뒤 6행으로 나누어지는 2연의 내적 구성을 지닌다. 즉 1연에 해당하는 1∼6행은 허무가 내 몸을 파먹어 들어와서 커지자 뽑아내니, 그 자리를 허공이 차지하여 더 커진다는 내용이다. 2연에 해당하는 7∼12행은 ‘허공을 차지한 새 한 마리’가 시적 화자의 살과 뼈를 삼켜버리자 ‘내 몸은 이제 없어져 버렸다’는 것.
이 작품은 자아의 소멸과 더불어 ‘소멸된 자아’ 대신 ‘새’가 그 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섰다가 내 영혼을 안고 하늘로 날아간다는 시적 서사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 ‘새’란 다름 아닌 허무의 다른 이름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통렬해진다. ‘몸’과 ‘허무’ → ‘허공’→ ‘새’의 변증법적 양질 전환은 궁극적으로 허무 의식과 초월의 극대화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변증법적 의미소는 매우 시사적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허무를 극복한 뒤의 초월적 존재인 ‘새’의 비상飛翔 이미지로 상징된 존재이며, ‘나’를 ‘새’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사물화事物化시킴으로써 존재의 재생과 신생의 이미지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무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노력은 ‘허공’이라는 다른 이름의 ‘허무’로 변용되면서, 그 역시 ‘새’라는 물상화物象化, 또는 구상화具象化, reification된 허무 극복의 초월적인 세계로 전화轉化되어 간다. ‘커지고, 넓혀져, 다 삼켜버리는’ 확장 의미소들은 그것의 거듭된 사용으로 하여 허무가 증식된 결과인 것이며, 따라서 시인은 자아의 소멸에 직면하게 되자 결국 남는 건 허무뿐이었지만, 끝내는 그 허무를 통해서 재생 혹은 초월적 신생의 의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시인의 최근 시 세계를 조망하는 데 상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렇게 허무감에서 발원한 시 의식은 “인생은 꽃 잔치가 아니다”(「허무의 뼈」)라는 명제를 재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조 섞인 음조를 띠기도 한다.
나는 네가 개다, 라고 짖어대고
너는 내가 개자식이다, 라고 짖어댄다
너와 나와는 무엇이 같고 다른가.
울부짖는 나, 시를 쓰는 너,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이지 다름이 없다
―「저, 개」에서
‘개’는 동물이고 ‘나’는 인간이므로 그 신분이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짖어대는 행위’를 통해 불이不二, 즉 하나가 됨을 일깨운다. ‘나’와 ‘개’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은 사실 자기 비하이고 지독한 자기 폄하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개의 부르짖음’을 ‘나의 시 쓰기’와 등가적으로 환치시킴으로써 ‘울부짖는 나, 시를 쓰는 너’라는 변증법적 등식 전환을 연출해 내어 자조적인 의식 내면의 세계를 표상해 낸다. 이러한 자조적 허무 의식의 원인은 무엇일까? 삶의 허무에 관한 시 의식은 사라져가는 생에의 허탈한 심정과 연계된 것이겠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구름처럼 우리는
허와 무와 천천히 뒤섞일 뿐
다만 스스로 지워질 뿐
세상은 여전하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구름」에서
이 작품에서 천상의 구름을 지상의 ‘강바닥’으로까지 끌어내려 구름과 강바닥을 동질화시킴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일체화를 자연의 한 이치로 받아들임으로써, 시인은 생의 ‘허와 무’에 대하여 성숙된 수용 태세를 보인다. 이러한 ‘하늘과 땅의 교합’ 또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행사에도 “세상은 여전하다”고 시인은 천연스럽게 자연의 무궁한 영원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름’으로 상징된 인간은 찰나적 허무의 실체일 뿐이므로 자연의 영원성과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존재 의미와 그 차이성을 피력한 시이다. 시인은 이제 환갑을 훌쩍 넘어 고희에 이른 문단의 원로이다. 그런 까닭에 상당히 기울어진 생의 고비에서 나이듦과 현세적 삶의 일시성에 대한 회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아내 환갑잔치에 독사진 한 장씩 찍었다
어둑한 생의 불빛 하나 끄고
걷다 뛰다 주저앉은 길 하나 치우고
밟으면 밟을수록 깊이 빠지는 허공 한 짐도 부리고
바라보니 영겁의 끝자락에 걸린
영정 하나,
한때 살았었다는 이승의 그림자 같은 흔적
낯익혀 두려고
결국은 따로따로인 불빛 하나씩 끄고
길 하나씩 치우고
마지막 허공 한 짐도 부리고
다시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 한 짐.
―「영정」 전문
치열한 삶의 귀결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허탈감으로 추락해 버린다. ‘허무 한 짐’으로 축약되는 공허감은 일회성 인생에 있어서 두렵고도 놀라운 충격으로 자리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허무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회한과 직결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시간의 흔적」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사후에 “돌이켜 시간의 흔적 뒤져보면/ 나의 기록물들 또는 장신구들 하나하나/ 흙이 되어 있을까”라면서 회한 어린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죽음에 대한 자의식은 지난한 인생 회고에서 촉발된 것이다.
솔가지를 잡고 흔드니
별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래도 남은 여남은 개
몸 숨길 곳 돌아보며 허둥거렸다
나는 가파른 길을 열었으나
동녘의 빛은 망설이고만 있는지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어두웠다
아니, 내 마음 속이 더 어두웠다.
―「새벽 산」에서
시인이 ‘새벽 산행’에서 느끼는 것은 어두운 현실로 귀환하는 자의 비감이다. ‘떨어졌다’, ‘몸 숨길’, ‘내려가는’, ‘마음 속’ 등으로 표방되는 추락 내지는 은닉의 의미소들은 시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표상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의식은 다른 작품에서도 표출되어 있거나 또는 여러 이미지들을 통해 반영되기도 한다. “우리 집 매실나무, 그 젊은 패기가/ 중병에 걸려 신음신음 죽어가고 있다/ 까만 물방울 보석의/ 기생충 군단이 온 가지를 감싸고 있다.”(「나무도 시변이다」)를 보면, 시인은 죽어가는 매실나무에다 자신의 상황적 현존을 대입시켜 삶의 현실을 투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시인 자신은 “죽음은 끝에서 숨 쉬고 영원이 시작된다”고 확인하면서 “마침내 저승은 헛발 딛고 가는/ 길 없는 길이다”(「길 없는 길」)라는 명제로 귀착되기도 한다.
이러한 죽음 의식은 시집 제2부와 제3부에 실린 작품들 상당 부분을 관류하고 있다. 「망자 혼사떡」 「망자 혼사굿」 「홀로 사는 노인」 「그런 나이」 「엽전」 「영원, 길에서 뵈옵다」 「침묵의 행렬」 외에 시집의 제3부에 속한 작품들이 대체로 인생 말년과 관련된 죽음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나이듦의 허무 의식과 다가오는 죽음의 기미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상태에 이르러 있다. 그리고 그의 가난한 마음은 예민하게 시적 감수성으로 깊이 이어진다. 이를테면「롯데 호텔의 하룻밤」은 시적 화자인 시인이 제주도의 한 고급 호텔에 투숙하면서 가난한 시인과 이웃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호사가 미안하게 생각되어 끝내 호텔을 나와 버린다는 내용을 시화하였다. 이는 시인의 서민적 양심과 건강한 삶의 감수성을 보여준 것이다. 유년시절의 가난은 어머니에 대한 회고 외에 다른 일부 작품들을 통해서도 간간이 드러난다.
이러한 삶의 허무 의식과 그에 대한 통찰에서 깨달은 시인의 겸허한 마음은 또 하나의 중요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허무가 시의 부재不在, 즉 시다운 시가 나오지 않음과 더불어, 그러나 시와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시인 이운룡에게는, 이를테면 한때 “툭, 건드리면 시가 터져 강을 이루던/ 산이고 들이었다/ 겁 없는 시 밭이고 시 열매뿐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현재 시인은 “산에, 들에 시가 없다/ 시가 된 감이 붉어도 피가 돌지 않는다/ 그 시, 말라붙었거나 씨가 없거나/ 폭격 당했을지도 모른다”(「시가 없다」)는 개탄으로까지 빠져든다. 이처럼 시인이 현재 느끼는 허무 의식이란 곧 시다운 시의 부재에 기인한다. 사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의 부재란 생명 그 자체의 부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2) 재생의 의지
이제 인생 말년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회의와 생의 허무를 이 시인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과제를 염두에 두었을 때에, 독자들은 두 시집이 의미하는 기조基調가 세속적인 생의 허탈감 또는 종생終生에의 두려움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그 기조가 찬란한 신생新生을 구가하는 쪽으로 힘이 뻗쳐 있다는 데 주목된다. 여기서 시인이 새롭게 불러들인 구제의 대상은 바로 허무와 절망의 상징이었던 ‘새’의 이미지이다. 앞서 인용한 「허무, 혹은 새에 관한 떨림」에서, 시인 전체를 장악했던 ‘허공의 새’는 이제 시인의 다른 작품에서 ‘재생’ 혹은 ‘신생’의 불사조로 그 마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 저 새
숨어서 새벽에만 깊이 숨쉬는 새
이 세상 새콤달콤 침 바르는 잡새가
아니라, 오랜 침묵을 뱉어내듯
이제 막 죽음의 골짜기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숨쉬는 목 찢어진 소리
저 극한의 상황 끝에서
말 못하고 떠는,
영혼의 바람소리 섞여 있는
어둠 혹은 죽음을 불러내는 소리
불러내다 숨넘어가는 소리
슬픔을 물고 흔들어
슬픔이 상한 갈댓잎 스치는
저 새, 갈빗대 새는 소리.
― 「죽음에서 돌아온 새 소리」 전문
시인은 ‘죽음에서 돌아온’ 소위 불사조의 이미지를 통해서 ‘소생’을 시도하려고 한다. “어둠 혹은 죽음을 불러내는 소리/ 불러내다 숨넘어가는 소리”라는 역설적 의미의 진행을 통하여 죽음을 극복하려는 힘겨운 ‘극한의 상황’을 신선한 수사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한 시적 의지는 부지런한 새벽 산행과 시적 활력으로 표출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들에서 새벽 산행과 관련된 명상의 편린들이 더욱 번뜩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언어와의 싸움, 시적 투쟁의 일환으로 남은 흔적들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시인이 모색하는 생명(력)의 희구는 다음 작품에서도 걸쭉하게 표상되어 있다.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기다가 차례가 바뀌었다
아직 살아서 삶이 부끄러운 악연이다
죄가 많으면 오래 사는 법,
산은 비료가 없어도 저대로 건강한데
오늘 아침 산에다 실례하고 내려왔다
그래, 계속 죄짓고 나는 오래 살련다.
―「오래 사는 법」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차례’에 대한 의식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질척거리는 엄살이나 한탄의 감상에 함몰되지 않는다. 끝 행의 “그래, 계속 죄 짓고 나는 오래 살련다”에서 독자는 그만 서민적 골계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으리라. 시인은 ‘죽음’이란 것을 가지고 능청스럽게 희롱하고 있다. 삶에 대한 욕구 때문에 죄를 짓고 죽음을 거부하겠다는 것은 골계이고 해학이다. 다시 말하면 죄의 찬미가 아니라 생生에의 건강한 욕구를 시적으로 익살을 부리는 수사적 해학의 기법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신적 여유는 죽음에 대한 회피와는 그 거리가 멀고, 죽음과의 정면 대응의 자세로 되살아난다. 예컨대 “사반세기, 내내 땅 속 어둠과 친하고/ 해와 달과 구름과 별들 함께 살았으니/ 겁먹고 무서울 것 없으매/ 지금쯤 어둠 터졌겠다/ 무덤 속 화안히 밝아졌겠다”(「무덤, 영원을 젖히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어둠으로 표상되는 부정적 미래에 대하여 적극 대응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생명력에 대한 자의식은 종종 불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생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의 불교 정신은 청빈淸貧함과 ‘최소한 단순한’ 삶의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바람 드나드는 갈비뼈/ 어둠 속에 가라앉은 눈빛, 등뼈에 말라붙은 배/ 무엇을 더 덜어낼까 물을 틈도 보이지 않데요”(「삼씨와 대추씨 한 알의 공양」)라고 피골이 상접한 부처의 마른 몸을 꿰뚫고 있는 사유의 깊이에서 확인된다.
동양적 삶의 방식에 근거한 시인의 다짐은 장년長年의 여생에 대한 삶의 자각과 유관하며, 다음과 같은 작품을 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고요한 무욕의 밤이 밝고 참 맑다
이 세상 비워낸 바람 한 점
풍경 속으로 가볍게 몸 밀어 넣자
어깨를 툭 부딪치곤
슬픈 청상의 절개가 흔들리더니
무심을 깨우려는 듯 쨍그렁 쨍그렁
저 눈부신 해탈의 풍경 소리가
산의 뿌리까지 흔들어 씻어낸다
바람을 만나니 산이, 마음이
소리만 남아서 흔들린다.
절정의 손을 풀자
뜨끔, 어둠이 깨지는 수줍은 농월
이 산사
풍경도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전문
‘고요한 무욕의 밤’에 대한 시인의 몰입은 삶의 정신적 높이로 직접 연결된다. ‘풍경 소리’를 ‘이 세상 비워낸 바람 한 점’을 풍경 속에 밀어 넣자 ‘슬픈 청상의 절개’로 빚어내는 소리로 묘사하는 힘은 눈부신 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해탈’은 ‘슬픈 청상’으로 예표豫表된 무수한 인생 질곡의 사연과 담론을 배태하면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의지는 간혹 성적性的 이미지로 치환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가볍게 몸 밀어 넣자’나 ‘절정의 손을 풀자’ 등의 표현이 그렇다. 사실 시인의 에로티시즘은 허무의 극복 의지와 연루된다. 소위 몸과 마음의 ‘회춘’으로 망라되는 시인의 성적 생명력은 “봄의 깊은 질 속에 들어와 꽃의 정충들(이)/ 달리기 경주를 벌였는지”(「봄의 M&A」)의 표현에서도 짚어볼 수 있다. 여기서 또한 “목이 탄다.”, “버들강아지는 털이 빳빳이 선다.” 등의 시 행간에서조차 성적인 암유가 복류伏流처럼 깊이 스며 있다.
그리하여 ‘다시 일어서기’로 표방되는 삶의 허무에 대한 시인의 극복 의지는 그의 최근 시 세계를 검증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3. 관용, 그리고 생의 재발견: 시집 『그 땅에는 길이 있다』의 경우
이 시집에는 앞서 거론한 시집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에서처럼 인생의 말년에 대한 시인의 허무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은행잎 떨어지다」와 같은 작품은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읊으면서 삶의 허무와 조락凋落의 음계를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직전 시집에서 드러난 삶에의 회의와 허탈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기운으로 한결 충만해 있다. 전반적으로 삶의 기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는 곧 관용의 미덕과 생명력 회복의 이미지로 파악된다.
1) 숙성된 덕망의 포옹
시인이 탐색하는 허무와 허무의 극복 의지는 우선 삶과 죽음의 현실에 대한 심리적 초연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데서 그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삶과 죽음 한 발씩 물러나 보면
그 삶, 얼마나 질퍽한 개똥 천지일까
그 죽음, 얼마나 향기론 꽃밭일까
―「산에게 묻다」에서
삶이 ‘개똥 천지’일 수 있으며, 죽음이 오히려 ‘향기론 꽃밭일’ 수 있다고 하는 정正과 반反의 모순 조합을 통해서 합合을 도출해 내는 변증법적 사고는 시인으로 하여금 세속적 삶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 같은 구차스러움을 단번에 극복하게 하는 논리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깨달음의 획득은 바로 새벽녘에 일어나 산과 숲을 산책하면서 가진 선적禪的 명상의 결과에 의한 것일 게다.
조용한 새벽, 길 찾아서
산 하나 짊어지고 명상한다.
(중략)
세상 구경 다 끝낸 나는
산 하나 내려놓고 명상한다.
―「명상하면 산을 안다」에서
명상의 숲 그늘이 짙은 아침
온몸 쥐어짜면 살과 피 다 빠져
허무의 뼈조차 허무 속에 묻힌다.
―「산에게 묻다」에서
산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놓고서도 계속 명상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힘은 세상사와 생사生死에 관한 초월을 추구하는 정신적 높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한 명상은 속물적 속성과 연관되는 인식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색色과 공空의 불교적 깨달음과 그 미덕을 성취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몸과 마음을 지탱해 주었던 ‘허무의 뼈’조차 다시 ‘허무’ 속에 묻어버리는 일종의 정신주의적 무아無我의 경지를 소요하고 있는 것이다.
숲은 서로의 몸을 꼭 껴안고 천년을 살아
바람 맞거나 빗소리에 굶주려도 늘
서로가 서로에게 관대하다
―「녹색 언어」에서
새벽의 산행에서 획득된 관대함tolerance 또는 색色과 공空의 선적禪的 깨달음이란 ‘산은 제 품에 무덤까지 안고 있기 때문’(「높고 가파른 고갯마루」)이라고 시인은 그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한다. 그의 성숙한 관대함은 또 다른 작품「모래톱」이 보여주듯이, 바다의 파도에 늘 시달리면서도 날을 세우지 않는 모래톱의 실체entity에서 시인 자신의 모습을 건져낸 다음, “관용의 아침이 날마다 태어나고/ 나날의 마음들이 한 물로 깊어진다.”는 삶의 자세를 자아의 세계에 대입시킴으로써 더욱 그 지적, 불교적인 선禪의 경지를 심화시키고 있다. 관용의 덕목은 유년시절에 기피했던 ‘뱀딸기’에게조차 미안하다는 마음과 따뜻한 시선을 줌으로써 삶과 관련된 주변 사물들로 확산되어 가는 조짐을 비춰준다.
오늘 참 오랜만에 뱀딸기를 보니
그새 65년이 지나 더욱 붉게 익었네.
죽음이 무서워 미움을 퉤, 퉤 뱉던 어린것
일부러 뱀딸기 피해 뒷걸음치면
더 붉게 따라붙던 아름다운 악마
이제 생각하니, 정말 미안하구나.
―「뱀딸기」에서
여기서 유년시절에 집요하게 따라붙던 ‘아름다운 악마’인 ‘뱀딸기’는 죽음에 이르는 종말론적 표징으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절망적 ‘미움’을 넘어서 ‘미안하다’는 화해와 용서의 관대함을 견지하기에 이른다. 진정한 화해의 첫걸음은 자신에 대한 진정한 성찰로부터라는 시인詩人의 종교적(?) 인생관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미점으로 남는다.
관용의 사리事理 파악에 더하여, ‘젊어서는 청춘에 속아 살다/ 한참 지나서야 청춘을 알게’ 되었다는 시인은 인생의 철리哲理를 깨달아 “죽는 날까지 청춘으로 살다가/ 죽은 다음 날에야 하얗게 늙으리.”(「늙음 ⇨ 죽음」)라는 다짐을 거치면서, 삶과 죽음을 달관한 경지에까지 오르고 있다.
죽음과 낮과 밤 틈새를 비집고
한 발 놓고 한 발 들어
이 세상 바깥으로 새 길을 뚫는다.
가는 쪽을 물어보고 싶어도
전혀 대답 없는 영원 아득히서
나 하나, 보일락 말락 겨울비와 눈과
그나마 없어질 저 허허 무애
―「영원 가는 길」에서
‘허허 무애’로 대표되는 달관과 영원성의 추구 정신은 고단한 여정을 통하여, 즉 ‘죽음과 낮과 밤 틈새를 비집’는 고단한 수행 과정을 거쳐서야 획득할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은 “이 세상 바깥으로 새 길을 뚫는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부각된다.
그러한 추구 정신은 때로 ‘칙칙한 밀림 속’ 저 끝에 있는 ‘앙코르와트 사원’으로 표상된 바의 영원의 세계(「영혼의 강을 건너가면」)로 형상화하는가 하면, 때로는 ‘빈손의 어둠 뿌리치고’ 산 위에 서서 그냥 말없이 먼산바라기에 빠진 ‘장승’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머잖아 영원의 길을 베고/ 깊은 잠에 들 것 같습니다.”(「산 위의 장승」)라고 표상하기도 한다.
2) 생의 재발견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 시인이 포획한 생에의 관용과 선적禪的 발상은 주변 사물에 대한 맑고 깊은 통찰로써 더욱 밝고 힘차게 살아난다.
지상의 별 하나
앉았던 의자가 비어 있습니다.
그 자리,
흔적만 남은 별의 새순이 돋아나고
나는 이내 뜬눈으로 지켜봅니다.
밤늦게 찾아와서는
참았던 긴 말을 줄이고 줄이면서
천천히 차를 마시던 별 하나와 의자는
눈 아프게 마음 뜨거워져
그 날부터
눈빛 초롱한 의자에선
차 향내 짙은 말, 생각, 숨소리
밤낮 떠날 사이 없이
세상 곳곳 가득 차서 넘칩니다.
―「별 하나의 의자」 전문
이 시집에서 가장 영롱한 작품 중의 하나인 위의 시는 ‘별 하나’와 ‘의자’와의 공간적, 동시적 교감으로 하여금 일종의 ‘향내 짙은 말, 생각, 숨소리’로 이어져서 온 세상에 넘쳐난다는 변증법적 변용을 보여준다. 그와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시인의 희망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상에서 사라진 별의 빈 자리는 그 흔적만 남았지만, 다시 ‘별의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눈빛 초롱한’ 의사소통을 길어내는 시심으로 해맑게 그려져 있다. 그러한 시심은 ‘참았던 긴 말을 줄이고 줄이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향내 짙은 말, 생각, 숨소리’를 세상 도처에 가득 채움으로써, 무량한 시정신의 통일과 선적禪的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긍정성은 시인의 또 다른 면에서 자연이나 인간 존재의 본래적, 근원적인 힘의 역동성으로 표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술한 바의 성적 에너지로 그 활로를 찾고 있다. 이를테면,
들에, 산에 가면 봄 햇살이
푸릇푸릇 암내를 풍기고 다닌다.
너에게서 나까지 벌겋게 물이 올라서
밤꽃 비린내 얄궂어라
아래에서 위로 솟는 물은 문제가 있다
온갖 잡새들 아랫도리 까발리고
그 황홀한 신음을
봄 강물에 흥건히 풀어 놓는다
―「봄, 흘레붙다」에서
나는, 너에게 미운 수컷이고 싶다
암내난 봄을 타고 올라
깜박 스러지고 싶은
숨찬 햇살이고 싶다
피 흘리는 꽃잎 살 틈에
소갈머리 없이 사정하고 싶은
(중략)
내 생전
그런 발기는 처음 경험이다.
―「봄날」에서
아랫도리 속곳이 촉촉이 젖어들자
밤꽃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는지
오늘 하루 천년을 눈감았듯이
천년이 오늘 하루 눈감았듯이
―「변강쇠 봄 타령」에서
오월의 첫 주말
아침 8시,
숲의 잎잎 사이 성근 햇살과
꽃향기 온통 뒤범벅되어
미치겠다, 죽어도 좋다
순간 절정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죽어도 좋다」에서
이상의 시편들에 토를 달 것도 없이, 진솔하게 구사된 성적 활력(정력, 스태미나)은 시인의 허무 의식을 일시에 능멸하고 신선한 생명력으로 용틀임을 한다. 만물이 신생의 길로 접어든 봄철, 생기를 얻은 숲의 풍광을 통해서 봄을 성의 축제로 환치시키는 투시 안목은 곧 시인 자신의 활기이고 생명력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외설의 낌새를 넘어서 싱싱한 생의 탄력이 독자의 심현心絃을 튕겨준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그러나 단순한 쾌락적 환락에 머물거나 미혹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이고 생산적이며, 풍요로운 결과의 산출에 잇닿는다. 그 점은 다음 시편들에서도 볼 수 있다.
봄에는 그냥 숨 벌떡거리고만 있을란다
눈과 귀, 사방천지에서 부화해
보이고 들리는 것 더럽게 아름답다
―「허탕친 봄날」에서
어제는 심히 가물 타더니
오늘, 남녘에서 봄비 소식 오다
몸 하나 언덕에 부리자
바람이 받아 출렁, 땅에 내려놓는다.
―「빗낱 들다」에서
‘부화’와 ‘출산’으로 상징되는 생산적 회춘은 건강한 생명의 역동성으로 솟구친다. 이렇게 회춘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시인의 회복된 기력은 삶의 연만함에 의한 허탈감 내지는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주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적, 육적인 에네르기의 방출이 아닌 정신적, 원초적인 자아 회복, 또는 존재 내면의 중심을 관류하는 바의 정교한 언어와 그 창조성을 재구성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사회 병리현상에 대한 시선
시인은 삶의 허무와 그 극복 의지의 발현에 있어서 자신의 허무감을 부추기는 외적 요소들에 대하여 감수성이라는 더듬이를 유기遺棄하지 않는다. 그의 문학 인생 시초부터 단련되어 온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특히 시집 『그 땅에는 길이 있다』에서 여전히 예리한 날을 번뜩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냄새만 싣고 닭 운송 트럭이 서 있다
마을에는 새벽 닭 울음이 텅 비었으리라
어디로 실려 가서 모두들
목 찔려서 아무 소리가 없을까
누가 어디로 끌려가서, 갇혀서 한 순간
가스만 마시고 던져졌다는 사실
―「닭 운송 트럭」에서
이 현실 비판의 작품을 통해서 거시적으로는 폭압적이고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을 비판하면서, 미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경제 침탈로 난자당한 피지배계층에 대한 처절한 말로를, 또는 서구문화의 가차 없는 수탈로 잠식된 우리 문화의 피폐성을 상징해 내면서 현대 사회의 병리적 문제와 참담한 현상을 고발하고 있다. ‘닭 운송 트럭’에 갇혀 실려 가는 무력한 닭들의 처지는 바로 이 땅 민초들을 포함한 우리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가공할 외적 가해加害 현상은 다음 작품에서 더욱 절실하게 표상되어 있다.
내 가슴 속 하늘에
높이 띄운 풍선 한 잎
작지만 둥둥 눈 시리게 푸르더니
세상 한 귀퉁이에서 쏘아 올린 뉘
살촉이 박혀 떨기도 전에
펑, 터졌다
그 바람에 풍선과 내 가슴
산산이 찢어져
피 묻은
돌조각이 되었다.
―「소용돌이」 전문
전작前作보다 한결 시적 의미를 상징화한 이 작품은 좌절된 꿈과 이상 실현의 비현실성을 다루고 있다. ‘풍선’과 ‘살촉’의 대비는 오히려 살촉의 폭력성과 파괴성을 극대화시킨다. 풍선의 잔해 속에는 찢어져 피 묻은 ‘내 가슴’의 돌조각만 남아 있는데, 이 참담한 좌절과 절망의 배후에는 폭압의 상징인 화살의 ‘살촉’이 도사리고 있다. ‘산산이 찢어져/ 피 묻은/ 돌조각’으로 남은 현장에 대한 상황 인식은 시인의 이와 같은 실재를 초래한 외적 요인의 필살기必殺技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으로 부상浮上된다. 이런 식으로 시인은 실재의 생명에 사뭇 위협적인 상징의 ‘살촉’과, 그 때문에 무력한 희생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폐허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무력한 피해 의식을 이렇게도 대변한다.
아침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덫에 걸려
일평생 몇 번이나 버둥거렸는지, 넘어졌는지
모든 음모는 어둠을 타고 온다.
은밀하게
덫이 되어 입맛을 다신다.
―「거미줄」에서
거미줄은 온전히 나를 묶지 못한다.
―「거미줄은 결국 끊어진다」에서
위 작품들에서 보여주듯이, ‘덫’과 ‘거미줄’로 암유되는 외부 세력의 침해는 항상 은밀한 음모로 ‘나’를 심판하지만, 거미줄은 끝내 시인을 구속하지 못할 것이며 마침내 끊어질 것이라는 자유의 희망으로 시인은 거듭나고자 한다.
이러한 가해 세력의 정체는 무엇이겠는가. 다음 작품에서는 그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재개발지구-재테크 증자와 자본주의의 극대화,
과연 거대 담론은 속도가 빨라서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쉽게 단지團地 하나가 철거되다니
― 「주공1단지 재건축장」 전반부에서
날이 밝으면서 말라붙은 코딱지처럼 봄은
손톱으로 긁어도 퍼석퍼석 부서져 내렸다
주검의 껍질도 그렇게 퍼석거릴까.
― 「주공1단지 재건축장」 후반부에서
‘봄’이 ‘말라붙은 코딱지처럼’ 부서져 내린다는 묘사의 희화성戱畵性은 독자의 흥미를 붙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역대 정권들은 개발 제일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하고 나서 인권 침탈과 자연 파괴를 일삼으며 독재의 폭정을 미화시켜 왔던 바, 거대 자본주의의 발호가 그 이면에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터이다. 무차별 벌목과 남획으로 얼룩진 개발 명목의 침탈에 대하여 비판한 위의 작품은 외적 가해 세력의 정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최근의 경제구조가 부와 빈의 양극화를 끌어들임으로써 시인으로 하여금 “소유라는 폭력의 만 가지 사람들이 무서워졌다”(「벌목, 어떤 울먹임」)는 공포감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는 데서 확실해진다.
그러한 형편에서 그는 인생관에 대한 소회를 적절하게 피력한다.
그런 말 같지 않은 말들이
세상엔 너무 넘쳐서 말을 말자하고
산은 말소리를 감추고
말이 없다
물도 속내를 보여줄 뿐
말이 없다.
―「말 같지 않은 말들」에서
크게는 국가적 정치 경제관에서, 작게는 지방의 일부 집단에서도 괜한 말들이 넘치곤 한다. 세속적 ‘말’이란 통제하고 막으면 어디론가는 옆으로 새어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넘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이 시사하듯이, 시詩가 드문(또는 부재한) 현 세상에서 진정한 ‘언어’는 ‘산’과 ‘물’의 침묵 속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이비 서생書生의 천박성과 무식이 감투에 대한 집착과 독선으로 좌충우돌하는 작태 속에서, 그리고 지성을 갖춘 시인들이 고개를 돌리는 풍토에서, 이 작품은 독자의 예민한 가슴 한 쪽을 콕콕 찌른다. 말들이 넘치지만 아무 실속이 없는 풍토와 관련하여, 시인은 ‘산’과 ‘물’이라는 자연 사물을 환유하여 표현함으로써, 올바른 처신의 이치를 점잖게 훈계하기도 한다. 시인은 삶과 문학의 정상에서 후진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5. 글을 맺으며
시인 이운룡의 시 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한 생애의 부침浮沈과 고뇌의 그늘은 이 땅이 처한 민족사적 애환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시들은 결코 탈시대적脫時代的이지 않다. 그의 전반기 시 세계가 사회학적 상상력에 근거를 둔 정치적 암울 또는 산업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일구어내고 있다면, 1990년대 이후의 후반기는 민주화 분위기 조성과 더불어 다감한 시선과 통찰로써 주변 사물과 내통, 서정적 자아의 본질을 탐색하는 데 집중한다. 1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한꺼번에 낸 두 권의 시집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그 땅에는 길이 있다』를 계기로 시인의 세계는 또 다른 시적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시집에서 시인은 한 생의 후반기적 ‘나이듦’의 자의식과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의 도래에 대하여 그 나름의 반응을 담아내고 있다. 삶의 도로徒勞와 덧없음이라는 자의식의 허무감에서 그는 생生에의 접근을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시도했던 것이다. 그는 후반기적 삶의 허무 의식과 조우함과 동시에, 허무의 의지를 시작 행위로써 극복해 보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의 극복 의지가 우려낸 생명의 힘, 곧 시 작품들은 새벽 산행과 산행 중의 명상에 의해 나온 산물들이다. 그리고 그는 대책 없이 허약해진 ‘나이듦’의 생이 아니라, 서산의 하늘을 붉게, 싱싱한 기운으로 내면 깊은 곳까지 채색하고자 한다. 마치 황홀한 아침놀처럼 말이다. 사실 저녁놀에서 느끼는 좌절과 소멸의 의미보다 빛과 신천지의 아침놀로 환치해 내는 힘은 억지 외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상념과 맑게 녹아든 생의 반추를 통해 투사되는 진지하고 웅숭깊은 내적 성찰에 의해 시현된다.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문학적 극복 의지의 진솔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결정체인 시 작품은 그의 부단한 추구 정신과 언어 조탁彫琢, elaboration의 결과물임을 입증해 준다.
우선 각 시편들은 그 자체로서 잘 짜여진 구성미를 가지고 있다. 시의 서두와 말미가 수미상관법首尾相關法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유기적, 구조적 형상의 틀 가운데 미적 감각을 짙게 수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법과 시 형상의 노련함은 필경 그의 체질인 듯이 보인다. 각 시편을 두루 살펴볼 때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시행들은 그러한 프로페셔널한 유연성의 소산일 터이다.
그에 더해 이운룡은 천상 서정시인이다. 시어의 리드리칼한 구사는 그의 노련한 시작 행위를 반영한 것이니까 말이다. 앞에서 인용했던 작품의 중반 이후를 다시 언급하면,
저 극한의 상황 끝에서
말 못하고 떠는
영혼이, 바람소리 섞여 있는
어둠 혹은 죽음을 불러내는 소리
불러내다 숨넘어가는 소리
슬픔을 물고 흔들어
슬픔이 상한 갈댓잎 스치는
저 새, 갈빗대 새는 소리.
―「죽음에서 돌아온 새 소리」에서
‘ㄴ, ㄹ, ㅁ, ㅇ’ 등 유성음의 의도적인 사용과 더불어 ‘소리’, ‘불러내다’, ‘슬픔’, ‘새’ 등의 반복적인 언어 사용 덕분에 시가 매우 리드미칼하게 읽힌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숨도 쉬지 않고 몰아치는 듯한 청각 심상과 쉼 없이 이어지는 호흡으로 시인의 절박해진 심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리듬은 때때로 시조의 정형성을 닮기도 한다.
용머리/ 고개 길가에/ 서 있는/ 날마다의 여인/
배낭을/ 뒤져보면/ 도시락 하나,/ 차양이 긴 모자,/
핏기 없는/ 병색의/ 깡마른 몸,/ 헐렁한 점퍼와/ 낡은 운동화,
그리고/ 오늘의 목록이/ 금방 쏟아져/ 흩어질
―「아침에 만나는 인력」 전반부
필자가 편의상 시의 음보를 행마다 사선(/)으로 갈라보았다. 첫 연 1행(초장)의 4음보와 둘째 연 3행(종장)의 4음보가 현대시조의 정형성에 들어맞는다. 중장은 전형적인 엇시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인 이운룡이 몸소 상기 시조의 리듬을 간혹 사용한다는 것은 곧 우리말 형태와 그 구조가 3음절 내지 4음절로 한 어절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어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 터이며,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시인 이운룡은 21세기를 맞이하여 혁신적인 시의 기법이나 새로운 이미지 창출에 매달리지 않는다. 기발한 시적 쇄신의 힘은 우선 이 노련함에 대한 숙지를 통해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신생에의 변신 또는 정신적 기력 회복과 관련하여 ‘봄’의 이미지를 줄곧 사용한다거나 억압의 굴레를 표상하는 ‘거미줄’ 등이 그 한 예이다. 그는 낯익은 이미지의 활용을 통해 현실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그 나름의 기발한 생명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 생명성은 이번 시집들의 주요 컨셉Concept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나이듦의 숙명을 시의 정신적 높이로 승화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출현하는 것일까. 서두에서 언급한 영국의 시인 존 메이스필드(1878-1967)의 시구대로, 그것은 ‘어둠이 드리울지라도 밤은 장미처럼 화려한 꽃을 피울 것’이라는 희망에 찬 의지와 적극적 삶의 자세에서 발원한다.
무대 위의 연극에 관한 관객의 감정은 관객 자신의 경험이나 문학관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술 본연에 매혹되어 그 모든 차별성을 하나로 끌어 모으게 되는 까닭은 예술의 오묘한 순간을 관객 모두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을 보고난 뒤의 소감은 각각 다르면서도 동일한 보편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더불어 생을 영위해 가는 시인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처지에 따라 각자 다른 방법과 수단으로 생과 대처하겠지만, 삶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고 성숙한 자아로 거듭나고자 신생의 힘을 구축하는 면에서의 이운룡의 시편들에서는 생에 대한 허무 의식과 동시에 이를 시작 행위를 통해 극복하려는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의 근작 시집들은 그의 시세계 연구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명징하게 제공하고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