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의 경외, 겸허한 삶의 의지
- 김제현의 시조세계 -
박기수(문학평론가·한양대 강사)
1. 풀림과 맺힘의 호흡, 역설의 탄력
김제현의 시는 잘 정리된 기보(棋譜)다. 정제된 포석과 완(緩)과 급(急)을 골라 달릴 줄 아는 그의 언어 기풍(棋風). 그 속에서 풍경은 시간을 멈추고 다가서거나 물러서며, 그때마다 빠른 속도로 내닫던 일상의 사물들은 짝을 이루고 어울리며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 낯선 연출의 카메라 뒤에 시인이 있다. 다음 돌을 예측하기 어려운 주문과 조합 그리고 소거를 통해 시인은 힘겹던 유년의 시간과 엄혹한 오늘의 시간을 겹쳐놓고, 서로 비추어보며 생의 경외와 삶의 의지를 일구어낸다.
그때마다 담배의 마른 연기는 수직으로 타오른다. 수직으로 오르는 연기의 끝마다 덧없이 스러지는 시간이 쓸쓸히 미소하고, 미소를 따라 다시 수직으로 내려오면 시인의 절제된 시어들이 견고하다. 절제와 정련의 호흡 속에서 일탈과 거친 욕망을 담아 세차게 때론 부드럽게, 급하게 혹은 느리게, 고수의 북처럼 흐르다보면 언어는 제빛을 놓고 투명해지고, 사물들은 석화를 멈추고 어느 새 소란스러워진다.
김제현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시조를 세련되게 만들었다거나 시조의 모던화만으로 그의 가치를 한정하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이거나 시조에 대한 편벽된 독법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김제현 시의 시적 미적 성취와 정신적 이력과 경계를 가늠해볼 것이다.
떠돌고 머물고자 하는 욕망을 함께 안거나 풀어주는 일이 존재가 희구하는 ‘자유’라고 할 때, 그의 시는 자유에 대한 희원과 모색 그리고 부단한 탐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조라는 장르적 특성, 언어적 특성 등을 중심으로 한 형식적 특성과 정신적 경계의 두 측면에서 전개가 된다. 정신적인 경계는 다음 절에서 상론할 것이므로 이곳에서는 형식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시조의 짧은 형식으로 표현이 부족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호흡을 늘리어 담아냄으로써 형식적 제약을 넘어서며 동시에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리듬의 늘어짐이나 호흡의 이완을 막기 위해서 이미지의 응축과 이미지 단위별로 명사로써 서술어를 대체하고, 리듬의 완(緩)과 급(急)을 배려함으로써 형식의 정체를 지켜가는 긴장의 줄타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섣부른 비평이나 실천을 기약할 수 없는 당위적 지향을 거절하는 그의 언어는 투명한 절제를 보여준다. 이따금 햇빛에 빛나는 눈부심의 정체와 그것이 무관하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때를 묻히면서 / 세상을 알게 되고 //
눈이 흐려지면서 / 밝아오는 이치의 //
적당히 흐린 눈으로 / 밖을 보는 우일
-- 〈雨日〉 부분
〈雨日〉은 “산에 드니 산이 없다(山日)”와 같이 그의 시에서 자주 사용되는 역설적 인식의 소산이다. 역설은 모순을 전제로 한다. 모순은 인지의 경계에서 빚어지는 상반이다. 인지의 경계를 벗어나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의 여러 성질 중의 몇몇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가 역설적 인식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존재의 비의를 살피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며, 다소 형태적인 제약이 따르는 시조에 있어서 그 같은 전략은 매우 유효한 것이다.
콘크리트 틈새에서 혹은, 마른 땅에서
한 포기 일년초 억새풀이 자란다.
베일수록 무성한 손, 깊은 뿌리에는
피곤한 벌레들이 찾아와 하루를 잠재운다.
- 〈잡초〉 전문
그저 그런 생태 지향의 위기와 당위를 널뛰는 시와는 다른 세계가 보이는 시다. 엄혹한 현실과 대응해야 하는 일년생 풀의 고단하고 힘겨운 시간들이 ‘베일수록 무성한 손, 깊은 뿌리’라는 삶의 의지로 발현되며, 그것은 피곤한 벌레들을 품어주는 배려를 낳는다. 시인은 고단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들끼리의 눈물겨운 배려에서 사물들 그 각각의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정신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의 담백하지만 명징한 언어에서 찾을 수 있다.
1행의 ‘혹은’은 엄혹한 현실 그 어디서라도 라는 의미를 응축하고 있으며, 2행의 ‘한 포기’와 ‘일년초’는 덧없고 보잘것없는 생을 수렴하고, 그것을 3행의 ‘베일수록 무성한 손, 깊은 뿌리’의 역설적 인식을 통해 삶의 의지로 체화(體化)해내고 있다. 그것이 4연의 ‘잠재운다’로 갈무리함으로써 살아 보잘것없는 것들끼리의 연민과 상보를 통해 처절한 생존의 공간을 따뜻한 상생(相生)으로 살 만해진 공간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콘크리트나 마른 땅은 불모가 아닌 생명의 공간이 되고 억새풀과 피곤한 벌레들의 상생이 보장되는 것이며, 동시에 억새풀의 일년이라는 수명은 또 다른 개체를 통해 이어나갈 것임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있는 것이다. 불모에서 생명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경쟁에서 상생으로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세계에 대한 역설적 인식과 생명의 경외(畏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삶의 의지들이다.
목월의 달이 떴다. / 「높이 청과일 같은 달」 //
세상에는 뜻이 없어 / 달빛만 밟고 가던 //
고무신 벗어 놓은 자리 / 꽃대궁 맑은 향기
- 〈木月韻〉 부분
그의 시적 뿌리는 목월과 닿아 있다. 이미지의 정련과 호흡이 그렇고 삶을 향한 쓸쓸한 관조와 그것을 그대로 끌어안고 안으로 삭이어 내는 따뜻함이 또한 그렇다. 다만 목월의 미적 성취가 세계와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김제현의 그것은 세계에 바투 다가앉아 그 힘겨운 생의 모습들을 애달픈 표정으로 읽고 있다는 차이가 날 뿐이다. 그래서 김제현의 시는 공허한 관념의 당위가 아니라 힘겹던 시대를 가쁜 속도로 달려온 사내의 뼈아픈 성찰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만큼 구체적이고 절실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가 아름다움의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질박한 듯하지만 정제되고 무심한 듯하지만 내밀한 호흡의 언어들이 촘촘하고 탄력적인 그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엄혹하고 때로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와 반성은 정제되고 탄력적인 언어를 통해 형상화됨으로써 그 진실을 잃지 않으면서 미적 성취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어매 처녜적의 / 얼굴을 하고 보름 달 //
想思 心臟을 치는 / 앙가슴은 한결인걸 //
후미진 뒤안 사랑에는 / 머슴아들 건주정이……. //
달빛 따라 / 메아리는 푸른 海溢. //
靑?초롱 꽃불 켜고 / 南岸의 큰 애기들. //
목 뽑아 강강수울레 / 부끄럼도 잊었는가. //
년년 千질 보리 고개 / 넘다 잘룩진 저 허리. //
돌아라 모두 잊고 / 流域의 푸른 달밤.//
목 뽑아 강강수울레 / 세편 산에 송편 달.
- 〈月光曲〉 전문
김제현 시의 언어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이다. 그것은 청신한 단어의 맺고 풀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은 남도소리의 흐름과 매우 유사하다. 수다한 장면들을 절제된 호흡으로 이미지화하고, 그 이미지와 이미지를 호흡의 완(緩)과 급(急)으로 맺고 푸는 솜씨는 소리꾼보다는 고수를 닮았다. 소리가 맺히지 않고 흐르게 하면서도 그것의 긴장을 잃게 하지 않는 완급의 조절은 그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기다. 역동적 심상의 맺고 풀기로 눈앞에서 강강술래를 보는 것처럼, 그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살려내는 것은 그의 절제된 언어와 생득적으로 가진 그만의 리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제 결 고운 언어 구사와 절묘한 완급의 조절, 그리고 세계에 대한 역설적 인식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그의 형식적 특장이 일구어내는 정신적 경계를 따라가 보자.
2. 떠남과 머묾의 욕망, 그 긴장의 진자
김제현의 시는 떠나고 싶은 욕망과 머물고 싶은 욕망의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의 첫 시집 《凍土》(1966)에서부터 《도라지꽃》(2000)에 이르기까지 떠남과 머묾의 이율배반적인 욕망의 진동은 부단히도 계속되고 있다.
강상희는 〈떠남과 머무름의 순환, 그 균형과 절제의 미학〉이라는 글에서 떠남과 머묾의 대비를 지적하면서, 바람을 “세사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 상태를 지향하면서도”와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내면을 안쓰럽게 어루만지고 그 내면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존재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강상희의 읽기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지만, 다소 아쉬운 것은 그것이 ① 떠남과 머묾의 욕망에 대한 규명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대체물인 바람과 돌에 관한 것이라는 점, ② 왜 그가 이 두 욕망의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지 간과하고 있으며, ③ 그러한 양상이 시인의 시력(詩歷)에서 어떠한 변화 양상을 드러내는지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았다는 점이다. ①은 자칫 바람에 대한 형상화가 떠남의 의미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람은 떠남의 속성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일부분일 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바람과 돌 외에 떠남과 머묾의 욕망을 형상화한 다양한 시어들을 그의 시에서 찾아낼 때, 비로소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②는 두 욕망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이며, ③은 이 두 욕망에 대한 인식과 형상화가 김제현의 시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②와 ③이 충분히 살펴질 때, 김제현 시의 중심 모티브인 떠남과 머묾의 의미와 양상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 위도 없는 해도 위 //
다만 깊다 하고 / 아득타 할 뿐인 //
바다여, 나의 항해는 / 흐름인가 떠돌음인가
- 〈외항에서〉 부분
떠남과 머묾의 욕망은 떠도는 자의 처연하고 고단한 삶의 피로와 머물러 사는 이들의 마모되거나 각질화되?가는 일상의 서글픈 평온에 대한 성찰과 이해의 결과이다. 혹은 그것이 부유하는 자의 어지럽고 불안하고 어설픈 자유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버릴 수 없기에 지고 가야할 불안한 권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일상의 닻은 우릴 웬만해선 휩쓸리거나 떠내려가지 않게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일상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덫이 된다.
그래서 김제현 시에 드러난 떠남과 머묾의 욕망은 ‘바람’과 ‘돌’의 그것뿐만 아니라 ‘바람’과 ‘풍경(風磬)’의 긴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람과 풍경. 흔들고 흔들리고, 흔들고 떠나고, 흔들리며 머물고, 둘 사이를 오가는 시인의 욕망은 생의 조건이며, 충족이나 포기를 모르는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할 뿐인 불치(不治)의 그것이다.
여기서 좀더 섬세하게 이 두 욕망을 읽다보면, 그것이 탈향(脫鄕)과 귀향(歸鄕)의 변주된 욕망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작가사적인 입장에서 시인의 신산했던 청년기의 삶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의 시 곳곳에서 사유와 감성의 자궁으로 고향이 그려지고 있다. 그에게 고향은 단지 감상적인 귀환의 공간이라기보다는 떠나고 싶던 그러나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애증의 양가적 감정이 길항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가는 길의
하늘을 쳐다보는 暗愁.
ⓐ시장기와 惡寒을 親子처럼 데불고
지친 채 밀려가는 虛忘한 過去.
外向性 눈망울에는
이따금
驛夫의 등불이 흔들린다.
- 〈下行막차〉 전문 (원문자 인용자, 이하 동일)
木蓮 이 산에 이울고 / 먼 산 뻐꾸기 운다.//
ⓑ 靜淑의 對岸을 向해 / 푸드득 나는 새들 //
흰 -- 깃 흩어져 내리고, / ⓒ 살아 허구한 / 歸鄕이여
- 〈歸鄕 - 木蓮賦〉 부분
고향을 떠나려는 욕망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둘이 잇닿아 존재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이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거부할 수 없다는 인식(ⓐ)이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날갯짓을 부단히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처연한 인식(ⓑ)이다. 여기서 삶의 시간에 대한 처연한 인식이 “살아 허구한 / 歸鄕이여”라는 진술을 통해 탈향과 귀향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는 결국 ‘살아 있는 한 끝없이 반복해야 할 탈향과 귀향이여’라는 진술의 압축적인 표현이다.
〈歸鄕〉에서 드러난 바처럼, 목련이 산에 이우는 순간에도 먼 곳의 뻐꾸기는 울고, 이곳의 새들은 저 언덕을 향해 푸득이며 날아가는 쉼 없는 삶의 시간들은 목련과 뻐꾸기 그리고 나는 새까지 모두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며, 그들이 어우러져 상의(相依)의 시간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향과 귀향의 욕망은 존재 각각의 것이며, 동시에 모든 존재의 관계성 속에서 반복되는 욕망의 연접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그가 머무느냐 떠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닌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 하는 점이다.
뒤뚱 발이 기울면 / 따라 기우는 세상 //
맥이 다 풀린 발은 / 무릎을 꿇는 비굴이 된다 //
이윽고 / 발이 확인한 지상엔 / 딛고 설 / 하루가 없다.
- 〈보행〉 부분
발이 기울면 세상도 기우는 까닭에 맥이 풀려 무릎 꿇는 비굴이 되지 않으려는 자존(自尊)의 노력, 하지만 딛고 설 하루가 없다는 인식. 바로 여기에서 떠남과 머묾의 동인(動因)을 발견할 수 있으며, 두 욕망의 공통분모로서의 주체가 있고, 주체의 세계에 대한 모색과 성찰이 있음을 알게 된다.
〈소재1-10〉에서 떠남과 머묾의 욕망은 긴장을 이루며 진자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의 여타 작품들과 다르지 않다. 이 작품들이 특이한 것은 부제로 사용하는 종이배, 종이비행기, 바람개비, 연, 겉장, 도배 등에 관한 것들이다. 종이배, 종이비행기, 바람개비, 연이 떠돎의 이미지라면, 겉장이나 도배는 머묾과 정착되어 닳고 삭아가는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소재들이다. 전자가 자유와 가능성 그리고 기대의 유년의 것들이라면 후자는 안정과 유지 그리고 돌아보는 성년의 그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제재를 통해 유년과 성년을 넘나들며 떠남과 머묾의 욕망이 변주되는 것은 점점 더 멀리 날아갔다 더 빠른 속도로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더 멀리 떠나게 하고 더 무겁게 머물게 하는 것은 엄혹한 현실뿐만 아니라 개개의 존재 모두가 “서로의 窓이 닫혀”있다는 단절 의식과 대응해야 할 세계는 “洞穴보다 깊고 춥”기 때문이다.
김제현의 초기시에 드러난 떠남은 머무르고 싶지만 머물 수 없었던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귀향의식으로 귀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 그의 인식은 그것이 욕망의 주체인 자신에 대한 견제와 부정을 통한 성찰에 이르고, 그것은 다시 떠남과 머묾의 경계가 사라져 버리고 그러한 욕망의 원인이 되었던 세계와 타자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있는 그대로의 수납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인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사물을 살아나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생의 외경(畏敬)을 발견함으로써 겸허한 삶의 의지를 일구어낸 결과이다.
3. 아(我)의 공간에서 물(物)의 시간으로
김제현의 행보를 섬세하게 읽어온 독자라면 알 것이다. 그의 시가 자아의 공간에서 세계에 대한 탐색과 부정을 거쳐 자기 성찰에 이르고 그 결과 다시 타자들에게로 열리어 사물들의 시간을 이해·인정하고 마침내는 그것이 자신의 시간까지도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A) 나와서 아직은 더한 어둠 속 / 點火할 나는 없고. //
바람 한 모금, / 忽然한 나의 體重.
- 〈휘날레를 위한 序章〉 부분
(B) 질펀한 노을 앞에 / 허무히 주저앉아 //
흉흉한 일상의 / 燈皮를 닦는 산번지 //
산넘어 온 시간 속에서 / 마른 바람이 인다.//
바위산 기슭에 올라 / 아무리 외쳐보아도 //
메아리도 지지 않는 / 삭막한 산번지 //
어느 덧 산도 다 저물고 /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 〈산번지〉 전문
비교적 초기 시에 속하는 두 시에는 명료하게 자아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텍스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A)에서 ‘점화할 나’는 없다고 했지만 이 진술은 ‘점화해야 하는 나’를 상정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한 모금의 바람에 홀연 자신의 체중을 느낀다는 진술에서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B)에서는 허무히 주저앉거나, 흉흉한 일상의 등피를 닦거나, 마른 바람과 바람소리를 듣는 자아가 있다. 자아가 드러나지 않지만 자아가 살아내고 있는 거기는 가파르고 메마른 곳이며, ‘메아리조차 지지 않는 / 삭막한’ 실존의 공간이다. 그러한 강퍅한 현실 속에서 자아는 몸을 한껏 낮추고 흉흉한 일상의 등피를 닦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리 외쳐보아도’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상처받은 자아, 강한 자아가 잔뜩 도사린 채 독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하여 바람소리 가득한 저문 산의 이미지는 문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 깊은 울음을 울고 있는 자와 어울려 그 삭막하고 처연한 산번지를 이루고 있다.
(B)에서 마치 항아리 속 같은 텅 빈 적막과 속으로 깊이 울어대는 되울림을 읽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울게 하고 처절히 듣고 서 있는 자아의 시간과 속도를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속울음을 울며 타자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황망한 자의 세계인식은 파아랗게 날이 선 채 잔뜩 세계를 겨누고 있는 대결의 의식이다. 대결은 타자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하며 포괄이 아닌 배제의 논리에 기반한다. 타자의 부정을 전제로 해서는 자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고,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자아는 다시 미혹(迷惑)과 미망(迷妄)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로 / 灰銀 빛 / 반짝이는 悠久한 江. //
포롱포롱 날던 새의 / 너무나 짧은 時間을. //
中心을 잡는 허둥 걸음 / 삐걱이는 世代의 木橋. //
여기 그의 아버지의 / 그리운 生涯를 따라 //
바람 몰아 往來하며 / 쩔렁이는 銅錢의 音響을. //
들으며, 물결을 차고 나는 / 한 마리 새를 본다.
- 〈木橋에서〉 전문
이 시는 유구한 강과 삐걱이는 목교, 아버지의 생애와 새의 그것, 유구한 강과 아버지의 생애, 유구한 강의 시간과 너무도 짧은 새의 시간이 결 좋게 교직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가 새의 아버지이고 보면, 이 교직은 강과 새의 대비로 단순히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대비가 새로 대유되는 찰나적 삶의 초라함이나 무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으로 생의 시간을 차오르는 생명과 그 지속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저류에는 찰나적 삶의 동류의식과 살아 있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측은함 그리고 연민의 정이 짠한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또한 그것은 타자에 대한 열린 인식을 기반으로 자아가 스스로를 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열림은 타자를 자신의 내부로 잔뜩 끌고와 자기식의 재단을 가하는 일방성이나 난폭함이 아니라 타자를 있는 그대로 그곳에 두고 스스로를 열어서 보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물들이 깨어나 수런거리며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들끼리 소리 없는 소란으로 세계의 관계성과 상의(相依)의 연기성(緣起性)을 문득문득 드러내고 있다. “風景을 입으며 / 지우며 가는 개울(개울)”이라는 구절을 보면 잘 드러나 있다. 풍경과 개울은 서로 다른 존재이며, 그것의 다름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어울릴 수 있는 것이고, 그 어울림을 개울의 흐름에 따라 ‘입고 지울 수 있는’ 자연스럽고 강요나 구속 없는 그러한 어우러짐의 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어울림의 유쾌한 소란 속에서 자아의 시선은 다시 텅 비워낸 자기 내부로 향하며, 그가 조절해야 할 자신의 속도를 좀더 거리를 두고 살필 수 있게 된다.
(C) 알 수 없는 수심을 / 자맥질해 온 어부의 //
젖은 생애가 / 가을볕에 타고 있다 //
자갈밭 널린 그물에 / 흰 구름이 걸린다 //
- 〈그물〉 부분
(D) 발목 삔 길 위로 / 밤눈이 내린다. //
팔 잘린 나무들의 / 저 무뚝뚝한 표정들 //
노오란 자가용 불빛이 / 언뜻언뜻 스쳐간다 //
浮屠위로 하얗게 / 눈내리던 고향은 멀고 //
시대를 질주하는 / 영악한 지성들의 //
안 방엔 스치로플의 / 눈발이 내린다//
- 〈눈이 내린다〉 전문
자기 내부로 돌아와 거리를 둔 채 관찰한 자아의 세계는 (C)처럼 무상한 풍경이거나 (D)와 같이 섬뜩한 곳이기도 하다. 발목 삔, 팔 잘린 것들의 정지와 자가용, 영악한 지성들의 질주가 밤과 눈의 대조처럼 선명한 (D)에서 정지된 것들은 불구의 일상을 의미하는데, 그것의 불구성이 강화될수록 고향의 눈을 그리게 되고, 그러한 열망만큼 현실의 스치로플 눈은 기괴하고 섬뜩하다.
자아의 변모는 (C)에서 보다 명료하다. 얼핏 고단하고 덧없는 생의 시간들만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좀더 세밀히 읽어보면 그러한 고단함과 무상함을 안으로 수납하고 그 상태로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아와 타자의 화해의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수심의 알 수 없음을 외경스런 자세로 바라보자, 어부의 젖은 생애와 가을볕이 어우러져 ‘탄다’라는 표현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나고 있고, 자갈밭에 널린 그물에 걸린 구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고 있는 그물이 아니라 볕에 말리고 있는 지상의 그물에 하늘의 구름이 걸린 것은 구속이 아니라 조화이며, 지상과 하늘의 거리만큼 서로 다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함이며, 동시에 고기를 잡지 않는 그물과 정처 없이 떠도는 불안한 평온의 구름이라는 존재의 상호 모순을 그대로 이해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존재의 불완전함이나 상호 모순에 대한 인정은 곧 자기 모순성에 대한 성찰이며 동시에 세계에 이해가 깊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제현이 그의 시에서 호명하는 시간들은 타자의 시간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시간과 내력이다. 그것은 범칭하여 사물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물들이 자신의 존재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각기 소란스럽게 살아가는 그러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자아는 작은 사물에 불과하고 타자들은 그러한 또 다른 자아이다. 따라서 그의 사물의 시간에 대한 주목은 곧 타자의 시간을 둘러보고 이해하고 화해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자신을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이제 문제는 앞에서 살펴본 이곳에 머무느냐 떠나느냐에 모여지는 것이 아니다. 김제현은 자신의 시에서 그러한 흘러감을 긍정하고 자신의 속도를 가늠하면서 스스로 감내해야 할 시간들을 수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진솔해졌고, 사물들의 시간을 주목하고 그 유쾌한 소란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한층 깊고 융숭한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쓸쓸하고 고즈넉한 부재의 환영’을 읽어내거나 부정과 대립이 아닌 긍정과 화해의 맥락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여 그는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채 죽음으로 위협하는 고혈압을 “질탕한 세상일 비켜서는 / 이 무료한 평안(고혈압)”이라 인정하며, 세월의 오만을 거부한 채 “천명을 어찌 알랴만 / 안들 또 어찌하랴(知命의 아침에)”고 겸허해지고, “인생은 가지었지만 / 살아보지 못했네(중년의 구름)”라는 인식을 통해 삶의 의지를 돋우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최근 시에서는 세계에 대한 연민과 화해를 바탕으로 하여 그가 솜씨 좋게 포착해낸 사물들의 역동적인 적막의 찰나를 경이의 눈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4. 생의 경외, 겸허한 삶의 의지
구불한 山길 / 前程을 / 돌아보는 사슴의 눈에 / 새들 울어 / 그늘이 내린다.//
한밤엔 소롯이 옷 벗고 / 다스려 보는 바위의 體溫. / 한겹 더 푸른 이끼를 입는데 //
옛적 비바람과 번갯불에 패인 계곡/잎 다시 피지 않는 古木의 빈산에/홀로 어질어 터지는 웃음.//
구불한 산길 / 半平生을 / 돌아보는 사슴의 눈에 / 그늘 내리고 /새들이 운다.
- 〈無題〉 전문
이 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존재들의 경이로운 연기성(緣起性)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그러한 가운데 서로를 보듬고 서로의 의지가 되어주는 눈부신 생의 경외가 그것이다. 새가 울어서 그늘이 내리고, 밤이 오니 바위는 빛을 벗고 이끼를 입고, 사슴 눈에 내린 그늘은 새들의 울음이 되는 외경스런 연기(緣起). 그래서 그곳에선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며 공(空)이라고 하던가.
또 다른 〈무제〉에서는 이와 같은 경관을 “이것을 무엇이랴 하랴”라는 달뜬 경외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음을 깨닫는, 존재의 심연을 알아보겠다는 시도들이 얼마나 작위적이고 덧없으며 오만한 것이었는가를 사물 그 자체의 음성과 모습을 그대로 옮겨줌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산의 우뚝함과 물의 흐름을 두 축으로 절로 난 길과 피어나는 꽃, 우는 뻐꾸기가 모두 제몫의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할 때,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는 오만한 인지의 영역이었을 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 “그리움 맘에 감긴 채 / 저리도록 지친 발돋음(山)”하는 산이 보이고, “겨우내 공복의 눈을 껌벅이며 / 우둑히 서있는 / 산양 한 마리(겨울 산양)”가 눈에 들어오며, “눈 속의 매화 한송이 / 바람 먹고 벙근다 // 조금은 안됐다는 듯 / 꽃잎 하나 떨구고(바람)”가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 뎅그렁 바람 따라 / 풍경이 웁니다. //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
ⓔ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
ⓕ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
ⓖ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봅니다.
- 〈風磬〉 전문
그의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초기시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고 그 대표작이 〈風磬〉이다. ⓓ의 풍경소리로 그려내는 적막과 ⓔ의 만등이 꺼진 산사의 이미지를 가로지르는 풍경소리는 정밀감을 통해 내면의 울림을 고이게 하고, 그것이 ⓕ의 비어서 넘친다는 역설적 인식을 통해 무상의 별빛에 색과 소리를 모아가는 솜씨는 절묘하다. 그러한 미적 성취가 ⓖ의 발견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생의 경외감을 바탕으로 한 상의(相依)하는 존재들의 연기(緣起)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E) 재우지 못한 밤의 / 뿌리에 매달린 갈증 //
바람 자는 갈대밭의 / 적막한 풍속이여 //
먼 하늘 귀에 다만 적시며 / 나무는 서서 잔다
- 〈목마름〉 부분
(F) 넘어가는 저녁 햇살에 / 맨살을 문지르며 //
산허리에 흩어져 간 / 가을꽃의 소진이여 //
이승에 한 몫의 눈물을 / 뿌리며 가는가
- 〈冬天에서〉 부분
그러한 인식은 살아 있는 것들의 소멸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연민은 존재의 불완전성, 유한성에 대한 근원적인 감정인 것인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유한한 그대로의 그를 이해할 때 비롯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E)의 존재의 갈증과 적막 그리고 서서 평생을 잠들어야 하는 존재의 고단한 삶에 대한 측은함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F)에서 넘어가는 저녁햇살이나 소진되는 가을꽃을 대상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연기(緣起)된 또 다른 자아로 파악하는 것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꽃들은 상처를 입는다는 시인의 인식은 가파른 삶의 피로가 생의 근원적인 갈증을 불러오고, 그것이 다시 줄곧 서서 자야 하는 존재의 고단함을 야기한다. 그것은 “쪼아도 쪼아도 팍팍한 땅의 밑바닥(참새·1)”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의 속도와 무관하게 부단히 흘러가는 시간을 무던히 살아내야하는 쓸쓸함이며, 그 끝을 알면서도 부지런히 달려야 하는 욕망의 덧없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음으로 하여 “하늘 먼 / 이승 길 / 어둠 속 눈물(寒空)”을 뿌리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존재의 미망을 보는 것이다. 그 순간순간 “진하게 타다 무안한 / 눈 뜨는 나의 成熟(어제표)”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車 뒷자리에 / 혼자서 흔들리는 서글픈 平安(春雪亂紛紛)”에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그 대부분의 것들이 허무나 자기 방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정련으로 이어지고 있음에서 김제현의 건강함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영원도 한나절도 / 그 길이는 같은 것 // 사람들 칫수에 따라 / 다만 서운할 뿐(하루살이 꽃)”이기에 그러한 찰나적 삶 속에 자신의 자세를 생각한다. 자신의 구차스런 삶이 “눈밭의 어린 새 한 마리 / 한종일 허공을 쪼다 /저물녘 마른 댓잎 하나 물고 /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 다리 위를 날(참새·2)”으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삶은 구차한 만큼 절실하고 절실한 만큼 솔직하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자기성찰은 “트는 살 살 속 깊이 / 파고드는 푸른 날빛 // 얼마를 더 살이어야 / 다 떴다 이를 건가(메주)”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자기 성찰을 통한 정련은 삶의 의지로 육화되어 나타난다.
千萬量 중압의 / 얼음이 풀리는 江//
江口에 안개 끼어 / 젖은 생애의 작은 새는//
水平의 거리를 향해 / 날아오고 있다.
- 〈그리움〉 부분
천만량의 중압을 견디고 풀리는 강과 안개가 끼어 젖은 작은 새의 생애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는 강이 중압을 이기고 스스로를 풀어가듯 작은 새도 젖은 생애를 털듯 날아오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이 엄혹할수록 더욱 강건해지는 것이기에 가히 의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삶의 의지가 당위적으로 주어지거나 관념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단련을 통해 체득된 것이라고 할 때 그 진실성은 더욱 깊은 울림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생의 경외를 발견하고 자신을 추스리고 성찰하고 부단히 정련함으로써 그 삶의 의지를 기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 시인의 30년이 넘는 시력을 짧고 거친 글로 읽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가 따르는 시도였다. 다만 거칠지만 읽어낸 결과로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김제현의 그 동안의 작업을 단지 시조의 모던화니 세련화니 하는 식의 특이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평가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평가라는 점이다. 그러한 까닭에 평자도 이 글에서 시조라는 용어 대신 줄곧 시라고 일컬어왔다. 그것은 시조에 대한 평가절하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제현의 시조를 현대시학의 측면에서 읽어도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또한 그의 시가 노정하고 있는 성취들이 삶의 구체적 현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조의 관념성 운운하는 혐의에서 한껏 자유로운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의 30여 년 시작의 성취는 그의 투명하고 절제된 언어들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환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떠남과 머묾의 서로 다르지 않은 욕망의 긴장 속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사물의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이 다시 존재들을 향한 연민과 이해에 이르고, 그것을 통해 삶의 경외와 삶의 의지를 일구어내는 그의 작업들은 그가 어느 시에선가 말했던 “눈물 크렁한 完遂”가 아닐까.■
::::::::::::: 김제현 연보 ::::::::::::::
1939년 전남 장흥 출생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1년 《시조문학》 천료
1963년 《현대문학》 천료
1965년 경희대학 졸업
1966년 시조집 《凍土》 출간
1979년 장안대학 교수. 시조집 《山番地》 출간
1980년 제2회 정운시조문학상 수상
1985년 《사설시조전집》 출간, 한국펜클럽 본부 이사
..............한국시조학회(겨레시 운동본부)창립 회장
1986년 가람시조문학상 수상,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피선
1988년 《시조가사론》 출간
1990년 경기대학교 교수,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문학박사)
............중앙일보 제정 중앙시조대상 수상 ,시조집 《무상의 별빛》 출간
1992년 《시조문학론》 출간
1995년 《시조시학》 창간 발행인. 《이병기》 출간
1997년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피선
............《현대시조평설》 출간,《사설시조사전》 출간,
............《사설 시조 문학론》출간, 월하 시조 문학상 (학술) 수상,
............ 조연현 문학상 (평론) 수상 ,.1999년 《현대시조작법》 출간,
............ 2000년 시조선집《도라지꽃》(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출간
:::::::::::::: 주요 연구서지 :::::::::::::::
..이지엽, 〈절제의 지순한 길〉, 《열린시조》, 1997
..김동근, 〈열린 언술체계와 사랑의 뮤즈〉, 《열린시조》, 1997
..박기수, 〈청동의 속 깊은 울림〉, 《문학과 창작》, 1999
..강상희,〈떠남과 머무름의 순환, 그균형과 절제의 미학〉1999
..김동근, 〈‘사이’의 詩學, 그 변용과 실존의 텍스트〉,《시조시학》, 2001